154. 버스 타고 가자
지하로 이어지는 돌계단은 꽤 길었다.
호준 일행이 원형 계단을 20바퀴쯤 돌았을까.
어렴풋한 빛무리가 아래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울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쉿!”
호준은 뒤따라오는 다크니스와 미르에게 신호를 보내고, 발을 천천히 옮겼다.
그렇게 소리 없이 그들은 맨 바닥층까지 다다랐다.
바닥층에는 긴 복도가 있었고 그 복도를 타고 울음소리가 흘러들어왔다.
“흐으으으으!”
서글픈 울음이 복도를 윙윙 울렸다.
대체 왜 이렇게 우는 걸까.
└ 귀신의 집 같음
└ 귀신의 집보다 훨 무서움. 촛불이 너무 없어서 어둡당
└ 이러다가 불 확 꺼지고 뭐 나타나는 거 아냐?
└ 호준 님 겁 완전 없으심, 역시 갓 호준.
└ 원래 겁이 없으신가요?
“전 원래 어둠이 별로 무섭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랐으니까요.”
그 말대로 호준은 시골마을 출신이라 어둠에 익숙했다.
그가 유년 시절을 보낸 마을은, 산골마을인지라 가로등이 듬성듬성 있어서 해가 지면 어두웠고.
밤을 휘황찬란하게 비추는 네온사인 간판이나 빵빵거리며 거리를 누비는 차도 드물었으니.
어둠에 익숙한 건 당연할지도.
터벅 터벅―
그는 울음의 시작점, 복도 끝에 위치한 방으로 향했다.
마침내 문 앞에 서자 호준은 가차 없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우지끈―
경첩이 그의 힘을 못 이기고 부스러지고.
문은 쑥 빠져버렸다.
호준은 문을 바닥에 내던지고 방 안을 살폈다.
‘저 녀석인가.’
딸기족은 몸뚱이가 딸기요 팔다리는 초록색 줄기로 각각 2개 붙었다.
눈코입이 붙어 피부색만 다른 사람 같았다.
음. 저 녀석 왜 저러지.
딸기족이 흰자를 보이며 눈을 뒤집더니 뒤로 고꾸라져 의자에서 떨어졌다.
“으악! 에구구구―”
호준은 데구르르 구르는 딸기족을 한번.
그리고 그가 방금까지 잡고 있던 천장에서 내려오는 고리를 보았다.
‘목매달려는 거였나? 그래서 운 거로군.’
보에 매단 줄은 끝이 동그랗게 고리 형태였으니 누구나 유추 가능했다.
딸기족이 자살을 시도하려 했다는 사실을.
대체 왜 죽으려는 거지?
호준이 의아한 눈으로 딸기족을 보자 딸기족이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는 손 바들바들 떨면서 소리쳤다.
“네놈은 누구냐!”
“음….”
“흠. 복숭아족이 이종족을 포섭해서 딸기족을 말살하려 간계를 부리는구나! 내 기꺼이 상대해주마! 비록 무기는 없지만 왕자님의 복수는 내가 하고야 말겠다!”
흥분한 딸기족이 바닥을 뒹구는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 달려왔다.
다리가 풀렸는지 달리는 속도도 느리고, 겁을 잔뜩 먹은 눈을 하고 있었다.
냐앙!
끼루루!
츄츄!
【다크니스가 가소롭다며 픽 웃고는 발톱을 갑니다】
【미르가 비늘조각을 떼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습니다】
요정들은 얼마든지 전투를 반기는 분위기였으나 전투는 불필요했다.
저 딸기족의 입에서 왕자가 나온 이상, 사냥감에서 고이 다루어야 할 정보원으로 바뀌었으니까.
【츄츄가 저 녀석의 발가락을 씹어먹을 수 있다고 자랑스레 말합니다!】
츄츄는 흥분했는지 앙증맞은 이빨을 탁탁 부딪치며 이를 갈았다.
츄츄 팬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 앙. 귀여워!
└ 이빨 작고 앙증맞다 ㅋㅋㅋㅋ
└ 아몬드 갉아 먹으면 졸귀탱일듯
└ 츄츄 먹방도 한번 가죠! 저 딸기 갉아 먹는 거 어떰?
└ 와 호러다 ㅋㅋㅋ
└ 으으 상상했어!
아마도 저들 중 누구도 츄츄가 발가락을 씹어먹겠다고 말했을 줄은 상상도 못 하리라.
저 말만 아니라면 귀여워 보이는 제스쳐였으니 말이다.
호준은 공격을 멈추라는 의미로 고개를 젓고는, 홀로 딸기족에게 접근했다.
그리고는 나뭇가지를 들고 경계하는 딸기족에게 차분히 말했다.
“나는 딸기족을 구하기 위해 왔다. 마을이 어지럽혀져 있더군.”
“구… 구하러 왔다고? 우리 딸기족을 말인가?”
딸기족은 호준의 말이 당황스러운지 머리 이파리를 슥슥 긁적이고는 잠시 말을 잃었다.
생각을 정리한 그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저, 정말인가?”
“그렇다. 선왕, 딸기왕에게 부탁받았다. 혹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왕자의 신변을 보호해 달라고.”
“오오! 그런 일이!”
“그래. 선왕은 딸기왕자를 보호해 왕위에 앉히라는 부탁도 했다. 왕자는 어디 있지?”
호준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딸기족은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그는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는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반란을 피해서 왕자와 이곳에 은신했는데. 네가 식량을 구하러 간 사이, 왕자가 두더지족에게 잡혀갔다. 이거냐.”
“맞다. 다 내 잘못이다 흐윽― 어린 왕자님을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이제 선왕을 만나 뵐 자격이 없다. 흐으으으―”
딸기족이 딸기즙 눈물을 펑펑 쏟는다.
이러다 계속 울겠지 싶어 호준은 그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깟 두더지족이야 잡아 족치면 되지.”
“족, 족친다고? 그게 가능한가?”
“그럼.”
호준의 대답에 딸기족은 딸기즙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호준을 3초 정도 바라보더니.
호준을 꽉 껴안고 꺼이꺼이 눈물을 흘렸다.
호준은 어깨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며 저 빨간 눈물은 대체 무슨 맛일까 생각했다.
살짝 혀를 대보니 조금 짭짤한 딸기 맛이었다.
“흐으앙! 자네는 하늘이 내린 은인이다! 내가 자네를 위해 죽지 않고 살아있던 모양이다!”
└ 역시 말빨이 좋아야 일이 술술 풀림
└ 이제 두더지족만 찾으러 가면 될 듯! 일사천리네.
└ 쾌속질주!
└ 딸기족 은근 귀엽다 ㅋㅋㅋ
└ 쟤 이름이 뭐래요? 궁금궁금
호준은 진정이 된 딸기족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네 이름이 뭐냐?”
“호구입니다!”
너무도 당당히 말해서 호준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는 다시 한번 되물었다.
“호구?”
“그렇습니다다! 보호할 호, 구할 구. 나라를 보호하고 구하라는 의미로 왕자님이 직접 지어주신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그래. 왕자가….”
└ ㅋㅋㅋㅋㅋㅋㅋ
└ 호구가 좋은 뜻이구나!
└ 호구가 호구했네 ㅋㅋㅋ
└ 왠지 아낌없이 다 줄 것 같은 이름이다. 극호.
└ 귀엽네ㅋㅋㅋ
채팅창의 반응처럼 호준도 살짝 웃음이 났다.
호준은 최대한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칭찬했다.
“……멋진 이름이군.”
“감사합니다! 저 은인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호준이다.”
“호준 호준! 저랑 비슷한 이름이라 뭔가 정이 느껴집니다! 앞으로 절 호구로 불러주십시오. 저도 호준 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래 호구.”
“네 호준 님!”
그렇게 새로 합류한 호구와 함께, 두더지족 추적이 시작됐다.
* * *
유토피아 본사.
상황관리팀 10팀 사무실은 저녁식사를 하러 간 직원들이 쫙 빠져서 내부가 한산했다.
“하암―! 어제 밤을 새질 말 걸 그랬어.”
사무실은 절대 비우지 않는 것이 회사 원칙이기 때문에 텅 빈 사무실을 홀로 지키고 있는 직원 한 명.
그 직원은 갓 신입으로 들어온 김선정이었다.
이번 주 점심시간 지킴이로 선정된 지라 선정만 식사시간이 달랐다.
“심심한데 방송이나 볼까?”
김선정은 네이버 검색어에 오르내리는 호준 라이브를 슬쩍 보고는 마우스를 움직였다.
딸깍딸깍―
곧 화면에 호준의 플레이 화면이 떴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내용을 감상했다.
“흐음! 딸기족 왕자를 왕으로 만드는 거네? 3시간이라. 좀 빡세겠네.”
상황관리팀이 좋은 점은, 바로 플레이어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분석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팀의 업무가 모든 게임 정보를 바탕으로 상황에 오류가 있는지 없는지 살피는 업무.
즉, 게임 정보 접근성이 높아서 다양한 정보로 상황분석이 가능했다.
“어디 보자.”
김선정은 안경을 살짝 들어 올리고 키보드를 조작해 호준이 달려가는 것을 맵으로 살펴보았다.
호준이 달리는 방향은, 복숭아 성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흠. 지하로 가는 건 괜찮은 선택이군.”
그들이 지상이 아니라 지하로 이동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지상은 위험하니까.
복숭아족은 지상에서 서식하는 종족으로, 딸기성을 중심으로 넓게 분포해 있었다.
아마 저 딸기족이 그 사실을 말해준 것이겠지.
“지하 통로도 알아내다니. 역시 감이 좋군.”
아무나 발견하기 힘든 지하통로를 발견하고.
딸기족도 포섭하고.
일사천리에 일을 진행하는 호준은 역시 소문대로 대단했다.
“진짜 정체가 뭐야. 일반 던전인 것처럼 레드 게이트를 돌아다니네.”
레드 게이트는 극한의 페널티를 주는 대신, 극한의 난이도와 보너스를 주는 공간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난이도를 낮춰달라 페널티를 낮춰달라 요청했지만 절대 굽히지 않아서 아무도 하지 않는데.
나날이 레드 게이트 이용자가 줄어들어 사그라드는 불씨를 호준이 되살리고 있었다.
‘재미있는 사람이야.’
김선정은 옆구리에 딸기족을 매달고 지하통로를 질주하는 호준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봤다.
곧 호준이 지나는 길, 벽에 새하얀 뿌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선정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봤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저 굵은 뿌리는 익숙했으니까.
“…저거. 자이언트웜 서식지 같은데!”
그녀는 키보드를 조작해 몬스터 서식지 지도를 덧씌웠다.
화면이 겹쳐져 맵이 합해지자, 그녀가 원하는 정보가 화면에 나타났다.
“역시. 맞았네.”
예상대로였다.
호준은 자이언트웜의 서식지에 진입하고 있었다.
“딸기족도 자이언트웜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를지도. 그러니까 저기로 가겠지.”
딸기족은 반란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양지바른 곳에서 사는 종족이다.
지하가 익숙하지 않으니 자이언트웜에 대해서도 정보가 부족할 터.
고개를 끄덕이며 김선정은 걱정 어린 시선으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자이언트웜은 외부인을 포용하지 않는 폐쇄적이고 포악한 성미를 지녔다. 그리고.
‘상대를 염산으로 녹여버리지.’
침을 꼴깍 삼키며 그녀는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호준은 빠르게 자이언트웜 서식지로 진입하고 있었다.
* * *
“여기가 가장 빠른 길입니다! 지름길이죠.”
“그래. 전속력으로 간다.”
호구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자 호준은 녀석을 꽉 붙들고 달려갔다.
미르가 날개를 펴기에는 공간이 협소해서 일렬로 다 같이 뛰어가는 중이었다.
길이 넓어지고, 벽에 나무뿌리가 나타났지만 거대한 나무 밑을 지나가는 모양이구나 생각할 뿐.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이제 10분만 더 가면 두더지족의 서식지입니다! 거기서 왕자님을 찾으면 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호준 님!”
“인사는 나중에 하지!”
호준은 발에 힘을 주고, 총알처럼 달려나갔다.
타닥 탁!
“흐에엡―! 무, 무섭습니다!”
“참아라.”
옆구리에서 호구가 달랑달랑 다리를 흔들며 비명을 내질렀지만, 호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호구가 마구 위아래로 흔들렸다.
└ ㅋㅋㅋㅋ 흐에엑이래 ㅋㅋㅋ
└ 쟤 눈물 고였다 진짜 무서운 듯
└ ㅋㅋㅋㅋ 더 빨리 달리면 어떨까요?
└ 더더더더 ㅋㅋㅋ
└ 자꾸 보니까 귀엽다. 우리 호구!
호준은 달려가면서도 길의 변화를 확인했다.
어느새 길이 덤프트럭이 지나다녀도 될 만큼 커졌다.
‘왜 길이 변하지?’
호준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발을 내디뎠다.
그때.
쿠쿠쿠쿵―
10m 정도 떨어진 앞쪽.
왼쪽 벽이 허물어지더니 갈색 지렁이가 나타났다.
덤프트럭만 한 지렁이는 눈코입이 달려있었는데 호준을 보자마자 츳츳 소리를 냈다.
“흐이익! 저 녀석은 자이언트웜입니다! 도망가야 합니다. 여기는 위험해요. 저 녀석 구역이라면 더욱….”
쉿!”
호준은 호구에게 조용히 하도록 하고 자이언트웜을 살폈다.
덤프트럭만 한 몸 두께를 자랑하는 갈색 지렁이.
자이언트웜은 초록색 침을 튀기며 사납게 노려봤다.
【킹 자이언트웜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킹 자이언트웜이 구역에 들어온 침입자를 경계합니다】
【킹 자이언트웜이 경고합니다】
호준은 츠츳거리는 킹 자이언트 웜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 자이언트웜족은 중립이다! 딸기족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돌아가라. 가까이 다가오면 죽여버리겠다! 크아악! 이 몸은 강하다!
자이언트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오른쪽 벽이 허물어졌다.
이번에는 또 뭐야 싶어 바라보니 오른쪽에서 또 다른 자이언트웜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머리에 뿔이 달린 자이언트웜이었다.
덩치는 왼쪽 것과 비슷했다.
【퀸 자이언트웜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퀸 자이언트웜이 킹 자이언트웜과 동조합니다!】
부부로구만.
― 당장 꺼져라! 이방인이여! 염산으로 녹고 싶지 않다면! 크아아악! 이 몸은 화나면 무섭다앙!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부창부수다.
호준은 피식 웃으며 딸기족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손가락을 작게 까딱였다.
쉬이잉!
그의 허리춤에 있던 칼이 마치 바람처럼 날아갔다.
칼은 정확히 퀸 자이언트웜의 눈알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움직이면 눈 터뜨린다.”
호준의 말에 퀸 자이언트웜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 흐이익! 뭐, 뭐냐 이 주술은! 여, 여보 도와줘!
퀸 자이언트웜은 조금 전의 위풍당당함을 버리고 초록색 눈물만 줄줄 흘렸다.
― 아내를 해치면 가만두지 않겠다! 아니. 아내만 살려주게! 부탁한다!
“너. 움직이지 마라.”
남편 자이언트웜은 많이 놀랐는지 호준이 말하는 대로 얼음이 되었다.
“지금부터 내 말대로 하면 목숨을 살려주지. 그러나 만약 배신하거나 먼저 공격한다면, 네 아내를 100조각으로 만들어 주마.”
킹 자이언트웜이 보기에 호준의 경고는 결코 거짓으로 보이지 않았다.
서슬 퍼런 호준의 눈빛에 킹 자이언트웜은 고개를 끄덕였다.
냐아앙!
츄츄!
끼루루!
호준의 뒤에서 사납게 울부짖는 저 작은 동물들조차, 킹 자이언트웜의 눈에는 무서워 보였다.
― 뭐든 하겠다.
킹 자이언트웜이 불쌍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두더지족한테 가는 가장 빠른 길로 가. 우리 전부 태우고.”
그렇게 호준과 그 일행은 버스를 탔다.
스스로 최단경로를 만드는 최고의 버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