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를 너무 잘함-148화 (148/200)

148. 폭풍현질

호준이 K필드 홀 안으로 들어가는 길.

수많은 플래시가 눈을 가로막고.

수많은 질문이 귀를 때렸다.

“호준 님, 이번 계약을 위해 람○○○○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소문이 돌던데 사실입니까?”

“호준님이 유토피아 고인물이라는 소문이 세간에 돌고 있습니다. 소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한 말씀만 부탁합니다.”

“유토피아 본사 관계자라는 이야기도 돌고 있는데 사실인지….”

“전투실력을 감추기 위해 레벨이 낮은 아이템을 착용한다는 말도 도는데요. 이에 대해 한 말씀만….”

기자들의 발언이 마치 합창처럼 들려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무대로 못 가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자회견은 계약 이후 진행합니다. 행사 진행을 위해 길을 비켜주시죠!”

“진행을 위해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밴에서부터 길 안내를 담당한 경호원들이 먼저 나서 주었던 것.

과장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전신이 근육질로 만들어진 듯한.

그런 산만 한 덩치의 경호원들이 방벽처럼 주위를 감쌌다.

그 덕에 호준은 든든한 등을 보며 흐뭇한 얼굴을 했다.

경호원들이 불도저처럼 기자들을 밀어버리니 순식간에 무대와 가까워졌다.

“가시죠, 호준 님.”

“고맙습니다.”

호준은 경호원들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차분하게 발을 내디뎠다.

이윽고.

호준이 홀 안쪽에 있는 무대에 오르자 스포트라이트 중심에 있던 한 남자가 먼저 다가왔다.

그는 구면이었다.

“허허. 잘 왔네. 게임이나 현실이나 모습이 비슷하구만. 반갑네.”

“회장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 나야말로 고맙지.”

이세주 회장은 기자들의 취재 열기를 보며 기분이 꽤 좋아진 상태였다.

이세주 회장이 호준과 악수하자 플래시 세례가 둘에게 쏟아졌다.

카메라 빛을 너무 받아 얼굴이 뜨끈뜨끈해질 무렵, 호준은 이세주 회장이 이끄는 대로 테이블 앞에 섰다.

테이블에는 두 뭉치의 서류가 놓여 있었다.

아마도 저 두꺼운 종이뭉치는 계약서겠지.

“계약에 관해 공개할 내용과 비공개할 내용도 이야기하고. 시간을 들여 꼼꼼히 살펴보세.”

“물론입니다.”

이세주 회장과 호준이 테이블에 마주 앉자, 무대 전체에 막이 드리웠다.

“지금부터 계약을 진행하는 동안은 정숙해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날 무렵.

커튼이 무대를 완전히 가렸다.

커튼에는 소음 차단 기능이 있는지 조금 전 웅성거리던 소음 상당 부분이 사그라들고.

오히려 고요한 분위기가 되었다.

서류 검토하기 딱 좋은, 그런 분위기.

“이제 계약에 대해 얘기해 보도록 하지.”

호준은 이세주 회장과 사항별로 이야기를 나누며 계약서를 검토했다.

계약서를 꼼꼼이 검토한 결과.

‘깔끔하군.’

마음에 드는 계약서였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양측은 계약을 해지하지 못하고.

1년간 매달 광고비 40억 원을 지급해야 하는 부분도 사전에 합의한 대로였다.

‘계약금이라.’

계약금 40억 원을 추가로 첫 달에 지급한다는 내용도 마음에 들었다.

본래 받아야 할 광고비 40억에 계약금 40억까지 합하면.

총 80억 원이 첫 달에 지급되는 것이었다.

물론 액수를 많이 받으니 호준으로서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밖에 광고 영상은 이미주 PD가 편집을 맡기로 협의했고.

계약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사각사각―

계약서에 사인이 끝나고.

“고맙네, 호준 군. 잘 해나가 보세.”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계약금 포함 520억짜리 계약을 하는 기분은.

‘끝내주네.’

짜릿했다.

* * *

커튼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기자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때웠다.

“언제 끝나지?”

명란일보 사진기자 한다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게. 검토까지 꽤 오래 걸리네.”

“무슨 콘서트장도 아니고. 사람 진짜 많네.”

한다루는 졸린 눈을 비비며 어깨 스트레칭을 했다.

“휴우. 어깨야.”

이세주 회장과 호준, 두 이슈메이커의 만남 덕분에 취재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사진을 잘 찍으려면 일단 정신력으로 무장해야 했다.

좋은 자리를 지키려면 어깨빵은 기본이요, 눈치싸움, 기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아야 했으니까.

그렇게 버티고 버텨 좋은 명당자리를 확보했지만 그 덕분에 몸이 남아나지를 않았다.

“고생한 값치고, 사진은 괜찮은 거 나왔던데?”

동료의 말에 한다루는 피식 웃으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오오. 잘 나왔네.”

“그렇지? 구도도 그렇고. 수평도 맞게 잘 나왔지. 이 정도면 편집장도 뭐라 안 하겠지.”

다행히 몸싸움을 통해 얻어낸 사진은 군더더기 없이 잘 나왔다는 점에서 한다루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의 관심은 이제 오늘의 주인공, 호준에게로 향했다.

“그나저나 자네는 질문 뭐 준비했나?”

“에이스 길드에 관한 걸세. 무슨 관계인지 한번 물어보려고.”

“예민한 질문이네.”

“뭐. 예민해도 뭐라도 캐내는 게 우리 직업이지 않나. 요새 호준이 몬스터 길드에 가입하고 미국 이민 간다는 뉴스도 많이 나오고 있는 분위기고.”

“만약 진짜로 미국으로 이민 가도 뭐. 요새 유명해지기만 하면 죄다 이민 가지 않나.”

대화 주제는 게이머 이민으로 넘어갔다.

유토피아 게이머에게 우대 이민 정책을 펼치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보펀적 현상이었다.

그런 보편적 현상의 수혜를 입는 것은, 당연히 파격적인 복지정책을 펼치는 선진국이 주를 이루었다.

“선진국이야 인구수도 늘리고, 세금 수입도 늘릴 수 있으니. 파격적으로 지원하는 편이긴 하지.”

유토피아 게이머 중, 고소득자 비율이 높은 것도 분위기에 한몫했다.

각국에서는 세금도 많이 내는 게이머들을 이리 오라 손짓했으니까.

한다루는 껌을 씹으며 며칠 전 봤던 기사를 떠올렸다.

“벨기에, 뉴질랜드, 그 밖에… 음, 또 어디도 괜찮다고 하던데 기억이 안 나는군.”

“독일에서는 자녀가 대학원 다닐 때까지 학비를 지원해준다고 하더군. 집은 당연하고. 대부분의 흔히 말하는 선진국은 이민을 반기는 추세네. 그리고 뭣보다 군대 가야 하는 것 때문에 떠나는 경우가 많지.”

“하긴….”

“계산기 두드려보면 답 나오지. 내가 호준이라면 몬스터 길드를 택할 것 같네. 로버트와 안면도 있는데, 미국으로 이민 가면 얼마나 잘 챙겨주겠나.”

“그렇…군.”

한다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다 외국으로 떠나는건가.’

외국으로 떠나는 게이머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게이머 이민이 보편화되는 분위기가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이렇게 다 너도나도 떠나버리면 남아있는 사람들은 누가 있을까.

한다루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고쳐 쥐는데.

스스스스슥―

무대 위 암막 커튼이 거두어지고 커튼 사이에서 호준과 이세주 회장이 등장했다.

둘은 손을 맞잡은 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대기 중이던 진행자가 마이크를 입에 대고 기자회견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호준님과 K그룹 간의 계약이 원활히 진행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기자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질문을 원하는 분은, 미리 나눠드린 숫자표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타닥타닥―

기자들 전원이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동그란 숫자가 적힌 숫자표들은 그 숫자가 너무 많아 기자들 얼굴을 가릴 지경이었다.

숫자표를 고르는 것은 오로지 호준과 이세주 회장의 몫.

둘은 번갈아가며 질문을 골랐다.

기자들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이세주 회장님. 일각에서는 이번 광고비 투자가 지나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하반기 실적을 고려했을 때 투자보다는 안정을 추구해야 한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허나 질문이 아무리 날카롭다 한들.

바닥부터 정상까지 오른 이세주 회장에게는 무딘 칼날일 뿐이었다.

“시대를 이끌려면, 미래를 보는 눈과 행동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K그룹은 행동을 먼저 하는 쪽이죠. 유토피아는 이미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키는 유례없는 가상현실게임이죠.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절대 아깝지 않은 금액입니다.”

호준은 이세주 회장이 질문에 대처하는 여유 있는 태도를 눈앞에서 익혔다.

“이세주 회장님이 요정의 쉼터에 방문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제 딸아이가 훌륭한 김치전을 먹었다고 말하더군요. 그 녀석이 꽤 입맛이 까탈스러운데, 그 녀석의 입맛에 맞았다면 저도 맞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김치를 아주 좋아해서 혹하기도 했지요. 허허.”

“역시 딸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이군요.”

“기자분도 자식을 낳아보면 알게 될 겁니다. 허허.”

기자회견장은 이세주 회장의 주도 아래, 부드러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세주 회장에게는 주로 기업 경영, 향후 유토피아 투자와 관련한 질문이 이어졌고.

호준에게도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호준 님. 에이스 길드와 몬스터 길드, 둘 중에 어느 곳이 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처럼 참 답하기 애매한 질문이었다.

에이스 길드 쪽을 들어주면 수많은 미국의 몬스터 길드 팬들의 반발을 살 수 있고.

정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니.

그러니 이런 경우에는.

“두 길드 모두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곳을 고른다는 게 쉽지 않군요.”

어느 편도 들지 않는 것이 베스트.

한 언덕을 넘어서니 또다른 언덕이 호준 앞에 나타났다.

“호준 님은 게이머 이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미국과 영국에서 최근 게이머 이민 정책을 새로 내놓았는데, 파격적인 대우를 해준다고 해서 논란이 많습니다. 많은 한국 게이머들이 이 정책을 이유로 이민을 고려 중이라는 말이 들려옵니다. 실제로 이민 신청자 숫자가 90명을 넘어섰다고 하구요. 게이머 이민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게이머 이민.

한국을 떠나는 게이머들로 인해 가뜩이나 분위기가 싱숭생숭하다는 것은, 호준도 잘 알고 있었다.

유토피아 관련 뉴스를 항상 봤으니까.

호준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답했다.

“이민은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민을 가든, 가지 않든 개인의 의지에 달려 있지요.”

“그럼, 호준 님도 향후 이민을 고려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이민이라.

호준은 테이블 위에 놓인 생수로 목을 축이고 맑은 정신으로 대답했다.

“저는 해외영업 일을 하면서 해외를 많이 다녀봤습니다. 유럽, 아시아, 남미, 북미 등 어느 나라를 가도 한국처럼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없더군요. 저는 집 앞에 편의점이 있고, 배달하면 빠르게 음식이 집 앞까지 오고, 온라인으로 식료품 주문이 가능하고, 제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여기 사는 게 편하고 좋으니까요.”

타닥타닥타닥―

기자들의 타자를 치는 손놀림이 분주해졌다.

그의 이민에 대한 발언은 온라인상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호준, 게이머 이민 거부 의사 밝혀】

【호준의 선택, 게이머 이민 유행하는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

【호준, 기자회견 이후 요정의 쉼터 구독자수 상승 중!】

뉴스를 본 한국 네티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 요새 이민 간다는 뉴스가 많아서 씁쓸했는데. 가뭄의 단비 같네요.

└ 아무리 외국이 좋다 해도, 익숙한 환경을 떠난다는 게 쉽지는 않은 듯.

└ 훌쩍 떠나버린 철새한테 철퇴를 날리네ㅋㅋㅋㅋ

└ 외국 가면 복지가 좋은 대신 세금을 많이 뜯긴다는 얘기도 돔.

└ 사실 우리나라만큼 편한 데가 없지.

【K그룹 & 호준 콜라보레이션에 세계 각국이 주목!】

【K그룹 단독계약 예상계약금은 최소 400억원!】

광고 계약과 관련된 내용이 뉴스화되었을 무렵.

푸욱―

호준은 기자회견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밴 안에 있었다.

그는 의자의 푹신한 감촉을 느끼며 조금 전 내린 결단을 되짚었다.

【지정하신 계좌로 80억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계좌로 80억 원이 입금되었고.

그 돈으로 무얼 할지는 이미 정해주었다.

‘전부 골드로 전환한다.’

그는 잊지 않았다.

회사 레벨업까지 얼마 안 남았다는 메시지를.

과연 80억 원을 현질하면, 골드로 전환하면.

회사 레벨업이 몇 번이나 될지 궁금해졌다.

온라인으로 80억 원을 골드로 전환한 뒤.

그는 식사를 간단히 하고 유토피아에 접속했다.

【유토피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보유자금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 회사가 레벨업합니다!】

【회사 레벨업 성공!】

【회사 레벨업 성공!】

【회사 레벨업 성공!】

………

【새로운 특성을….】

80억 현질의 결과는 짜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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