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작은 희망을 쏘아 올리다
“이 정도면 되겠지?”
호준의 외양간을 빠져나온 진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막 요정의 쉼터 바로 옆에 가판대를 설치한 참이었다.
“왠지 오늘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그는 싱글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미르나 송이, 그 밖의 동물들은 분주하게 그릇을 옮기고 장사 준비 중.
다들 바쁜 분위기다.
얼른 일 준비부터 해 놓을까.
“세팅 시작하자.”
진수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약을 진열대에 진열했다.
착 착 착―
차곡차곡 쌓은 약들이 가판대에 가득 찼다.
“흠. 이렇게 꽉 차면 기분이 좋단 말야.”
제일 위층에는 비싼 해독 포션, 저주 해독 포션, 성수가 담긴 알약 등을 올리고.
중간부터는 가장 잘 나가는 피로도 감소 포션과 기타 포션을 배치했다.
가격설정까지 마치면 장사 준비는 끝.
‘뚝딱이네.’
순식간에 준비를 마친 진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준 형이 보이지 않는다.
가게 안에서 요리하는 중이려나?
진수는 터벅터벅 호준이 있을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보인 광경은 그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헉!”
진수는 테이블 위에서 식사 중인 두 사람을 보고 심히 당황했다.
뉴스로 얼굴을 익힌 이주영 길드 마스터.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 이세주가 테이블에 앉아 호준과 대화 중이었다.
그릇이 옆 테이블에 치워진 것으로 보아 식사는 마무리 단계인 듯했다.
진수가 당황으로 몸이 굳어있자 호준이 다가와 그를 챙겼다.
“이 친구는 저랑 같이 일하는 진수입니다. 제가 말한 그 의대생이죠. 진수야, 이쪽은 파괴왕 이세주 님이다. 그 이세주 회장님 맞아.”
“아, 안녕하십니까. 파, 파괴왕 이세주 님.”
“허허. 반갑소. 진수 군. 자네가 그 성실하다는 의대생이구만.”
“과찬이십니다.”
이거 진짜 실화냐.
진수는 이세주 회장과 악수하면서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갔다.
그런 진수를 챙겨 옆에 앉힌 호준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그 계약 건은….”
진수는 침착하게 대화를 주도하는 호준을 바라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형은 담이 진짜 크네. 누가 보면 옆집 아저씨랑 얘기하는 줄 알겠다.’
진수가 볼 때, 대화의 중심에 있는 호준은 전혀 떨려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호준은 이주영 길드 마스터와 이세주 회장 앞에서도 당당하고 능숙하게 분위기를 주도했다.
이게 사회인의 연륜인가.
진수는 속으로 감탄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화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삐롱 삐롱―
이세주의 손목시계에서 알람이 울렸던 것.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이세주는 시계를 톡톡 두드려 꾀꼬리 알람을 끄고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쉽지만 이만 일어나 봐야겠네. 미룰 수 없는 스케줄이 있는 터라.”
이세주 회장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김치찌개가 담겼던 접시를 한번 쓱 보았다.
어찌나 맛있던지.
기회만 된다면, 해외에 출장 갈 때마다 싸가고 싶을 정도였다.
한 그릇 더 못 먹은 것이 무척이나 아쉽지만 슬슬 일하러 갈 시간이었다.
“덕분에 맛있게 잘 먹고 가네, 호준 군.”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군요.”
“들다마다. 해외로 나가는 일이 많다보니, 한식이 얼마나 그리운지 모르네. 물맛도 다른 게 외국이니 밥이야 오죽하겠나.”
“외국에 나가면 한국이 더더욱 그리운 법이죠.”
호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이주영이 대화에 참여했다.
“아버지가 한식 마니아시거든요. 떡볶이, 김치찌개, 불고기 등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드세요. 양식은 느끼하다고 잘 안 드시니 외국과는 잘 안 맞기도 하신 편이죠.”
“자고로 한국인은 밥을 먹어줘야 배가 든든한 법이지. 시원한 국물에 밥 비벼 먹으면 추위도 싹 가시고.”
“그래서 오늘 아침 라면 국물에 밥 비벼 드셨어요? 아무리 그래도 아침은 든든히 드시고 가셔야죠. 라면 국물은 너무 부실하잖아요. 아빠는 나이도 있으신데.”
“라면이 확 당기는 날에는, 안 먹어주면 종일 생각난단다. 크흠.”
호준은 티격태격 말을 주고받는 부녀를 바라보며 옅게 미소지었다.
사회 고위층 가족은 왠지 보통사람들과 다르고 대화방식도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이 둘은 그런 선입견을 확 깨주었다.
둘의 대화는 여느 집에서나 들을 만한 대화였으니까.
주식도, 사업 이야기도 아닌 라면이 아침식사로 적절한가 아닌가를 두고 둘은 티격태격했다.
‘재미있네.’
결국 둘의 대화는, 이주영의 의견 쪽으로 기울었다.
아침 라면은 위에 부담되니 저녁이나 점심에 라면을 먹자는 것.
딸에게 한 수 물러준 이세주 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호준에게 악수를 청했다.
“허허. 내가 말로는 절대 못 이긴다니까. 자네도 자식이 생기면 알게 될 걸세. 다음에 계약할 때 보세.”
“네. 다음에 또 뵙죠. 편히 들어가십시오.”
호준이 이세주 회장과 악수를 나누자, 그 옆의 이주영이 말을 걸었다.
그녀는 장난스러운 얼굴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호준 님, 저도 이만 업무 때문에 가보겠습니다. 광고 건은 이미주 PD님과 함께 절차를 빠르게 진행하겠습니다. 빠르게 진행해도 괜찮으신가요?”
“물론이죠.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이주영과 악수를 마치자 둘은 가게를 떠났다.
굳이 사양했음에도 정당한 금액을 지불하고 싶다며 음식 값으로 1,000골드를 지불하고서.
“슬슬 가게를 열어볼까?”
호준이 기지개를 켜며 진수의 곁으로 걸어가자.
멍하니 서있던 진수가 알림 소리를 듣고 흠칫 놀라 인터넷창을 켰다.
요정의 쉼터 뉴스 알림을 설정해두었는데, 그 알람이 빠른 속도로 울리고 있었다.
“어…?”
진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화면을 한번 보고는, 호준에게 화면을 공유했다.
“형. 오늘 인기 폭발하겠는데요?”
진수가 공유한 화면창을 들여다본 호준은 그와 마찬가지로 눈을 크게 떴다.
화면에는 일련의 사진으로 가득했다.
【에이스 길드 자유게시판】
【파괴왕 이세주 님과 함께 요정의 쉼터에 가다!】
【작성자】: 이주영
【밥 비벼 먹기 딱 좋은 돼지고기 김치찌개.jpg】
【살살 녹아내리는 모짜렐라 치즈가 잔뜩! 돼지고기 김치 치즈 볶음밥.jpg】
【요정의 쉼터 김치요리 아직도 안 먹어봤다면, 강추!】
【#요정의쉼터, #맛집탐방, #파괴왕이세주, #여러분이아는그분맞음】
이주영이 올린 맛깔나는 김치찌개와 김치볶음밥 사진이, 속보로 뜨기 시작했다.
“김치 더 만들어 놔야겠네.”
아무래도 손님이 폭발적으로 늘어날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김치찌개와 김치볶음밥을 찾는 손님이.
* * *
호준의 예상대로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요정의 쉼터, 이세주 회장의 첫 방문지로 선정!】
【이세주 회장, 김치찌개 먹으러 유토피아 접속하다?】
【세대를 뛰어넘는 유토피아, 노년층 관심 이어져】
【50대 이상, 캡슐 문의 전화의 절반 육박】
【주춤하던 50대 이상 세대 캡슐 구매율, 상승 예상돼】
뉴스화가 되면서 기존 방문객에 더블로 늘어났으니까.
줄 선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가 폭발할 지경.
휘륵 탁탁―
호준이 모카번 반죽을 주물주물해 오븐에 넣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손님이 많으면 요리가 확 줄어드는 것이 당연지사이지만.
다행히도, 준비한 재고가 한번에 나가는 일은 없었다.
가게 운영방식을 새롭게 정했기 때문.
【포장 불가, 매장에서 먹는 것만 가능합니다】
바로 포장 불가 선언.
요리를 포장으로 한 번에 팔아치우면, 파는 입장에서는 편하다.
‘돈도 한번에 들어오고, 오래 장사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장이 불가능하도록 한 것은, 기다리는 손님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미어캣처럼 두 손을 든 채로, 언제 줄이 없어지나 쳐다보는 손님들.
그런 손님들이 한둘이 아니고 수백이다.
포장을 허가해버리면, 앞선 손님들이 요리를 싹 쓸어가버릴 것은 당연지사였으니 포장 불가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다행히, 손님들도 싹쓸이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라고 말하니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잘한 선택이었지.’
결과적으로 포장 불가는 괜찮은 선택이었다.
가게가 손님들로 미어터졌지만, 준비한 요리는 적당한 속도로 줄어들었다.
아직 팥빙수 400여 개, 스테이크, 치킨, 튀김, 떡볶이 수백여 개.
김치볶음밥과 김치찌개 백여 개.
주스 800여 개와 발효주, 캐비어, 커피 음료가 상시 대기 중이었다.
부드러운 모카번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이야. 역시 유명한 값을 하네.”
“그러니까. 오길 잘했음.”
“김치찌개 국물 한번 끝내준다.”
“볶음밥 완전 바삭해. 내가 만드는 건 이렇게 안 되던데.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손님들도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호준은 흐뭇한 얼굴로 식사를 즐기는 손님을 보다가 바람을 쐬러 가게바깥으로 나갔다.
그런데.
어라?
진수가 벌써 가판대를 접고 있었다.
장사가 잘 되지 않은 것일까.
슬쩍 살펴보니 볼이 붉게 물들었다.
실랑이라도 한 것일까.
호준은 슬쩍 다가가 가판대를 다 접은 진수에게 물었다.
“진수야. 김치볶음밥 먹을래?”
“엇. 저 김치볶음밥 킬러인데 어떻게 아셨어요?”
진수가 흔쾌히 따라나섰다.
호준은 진수를 데리고 가게 안 직원용 테이블로 데려갔다.
직원이 먹을 수 있게 마련한 테이블.
그 위에 호준은 치즈를 듬뿍 얹은 김치볶음밥 접시 두 개를 내려놓고 마주 앉아 수저를 들었다.
“형, 잘 먹겠습니다.”
진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치즈와 볶음밥을 떠 입에 쏙 집어넣었다.
세상 행복한 표정을 보니 시무룩해 보였던 건 착각이었던 건가.
호준은 김치볶음밥 한입에 흐물흐물 녹아버린 진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사는 벌써 끝난 거야?”
그 물음에 진수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형. 벌써 다 팔렸어요. 올 매진이라구요!”
아니. 30분도 안 돼서 다 매진이라고?
호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벌써 매진이라고?”
“네. 믿기지 않지만 사실입니다. 매출 8만 골드가 넘었죠. 후후.”
“진짜 잘 팔리네.”
“그쵸! 제 생각에는 손님들이 음식을 배불리 먹고 마음이 느긋해진 것 같아요. 까다로운 손님도 별로 없었구요. 그리고 형 농장에서 재배한 약초로 만든다고 하니까 다들 군말 없이 사더라구요.”
“잘했다. 앞으로 가게에서 계속 팔면 되겠네. 시간도 절약하고.”
“맞아요. 형 말대로 하면 되겠더라구요. 진짜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형. 전 군말 안 합니다.”
“잘 되었다니 다행이네.”
일이 잘 풀렸다니 호준으로서도 보기 좋았다.
진수와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저런 싹싹하고 밝은 성격 때문이었다.
손톱 밑에 가시가 껴도 하루종일 불쾌한 게 사람 심리인데.
진수는 양다리가 절단되어 십 년 넘게 생활했다.
일상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말할 것도 없겠지.
학교를 다니기도 힘들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평범한 것을 누리지 못했을 아이가 모나지 않게 자란 것은 그만큼, 저런 긍정적인 자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호준은 자신 몫의 김치볶음밥을 더 덜어주었다.
“많이 먹어라. 학교 생활은 어때?”
“사실, SNS에서 제가 수능전형으로 들어왔는데 특별전형으로 들어왔다고 꼽 주는 선배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성적 통지서 보여줬더니 입을 꾹 다물었어요.”
“배가 아팠나보군.”
“뭐. 그런 거겠죠. 사실 제 성적이면 보통 의대보다 공대를 가거든요. 요새 유토피아 본사 신입 연봉이 1억이 넘어서 이과생들은 다 카이스트로 빠지는 추세예요.”
“의대는 어쩌다 가게 된 거야?”
“어렸을 때부터 꿈이 의사였어요.”
“어렸을 때부터?”
“네. 제가 다리가 절단되고 나서, 부모님이 전국을 돌아다니셨거든요. 그때 제 다리를 복원해줄 수 있는 분은 외국에 있었죠.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외국에 갈 형편은 못 되었구요.”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지금이라도 수술해 보는 건 어때?”
“아뇨. 아직 6년 치 등록금 마련하는 것만 해도 벅찬걸요.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그때 해도 괜찮을 거 같아요. 저는 이미 익숙해졌으니 참을만해요, 하하.”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진수는 남은 김치볶음밥을 한입에 넣었다.
“저는 신체 복원 수술 전문 의사가 되고 싶어요. 해마다 심각한 교통사고나 군부대 사고로 다친 사람들이 정말 많거든요. 그분들이 저처럼 불편하게 사는 게 아니라 최대한 편하게 살도록 돕는 게 제 꿈입니다.”
꿈을 말하는 진수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멋진 꿈이네.”
호준의 칭찬에 진수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접시가 깨끗하게 볶음밥을 다 먹었다.
그 뒤로 호준은 진수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눴다.
다리 복원 수술은 재정적인 여력이 될 때 해외를 돌아다니며 본격적으로 알아볼 생각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호준은 작은 가능성을 떠올렸다.
‘미국이라면 가능할지도.’
전 세계에 파견된 미군 중에 다치는 사람도 많을 테고.
그런 다친 군인을 돕기 위한 신체 복구 분야 역시 발달하지 않았을까.
‘이미주 PD에게 한번 알아봐 달라고 해야겠군.’
볶음밥 접시를 설거지하러 가는 진수의 뒷모습을 잠시 본 호준은 메시지함을 열었다.
이미주 PD에게 간략히 병원 정보를 알아봐달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그 순간.
그는 몰랐다.
작은 메시지가 진수에게 큰 희망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