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파괴왕
두 중년의 남자가 중후하고 웅장한 원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왼쪽에 자리한 남자, K그룹 이세주 회장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며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이세주 회장 앞에 자리한 남자는 K그룹 계열사 사장으로, 이세주와는 40년 지기 친구이기도 한 김필주였다.
김필주가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방금 이미주 PD한테 연락이 왔네. 광고를 하겠다는군.”
“그런가. 다행이군.”
“천하의 이세주가 먼저 제안할 정도면,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 건가.”
김필주가 하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이세주, 그가 어떤 사람인가.
부친의 사망으로 기울던 회사를 단박에 살려낸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전 세계에 그 명성을 높이 드높인 K그룹을 만든 1등공신.
IMF, 리먼 브라더스 사태 등 위기 속에서도 성장세를 멈추지 않은 불도저 같은 인물.
K그룹을 세계에서 으뜸가는 기업으로 성장시킨 그가 지금 미소짓고 있었다.
과연 이세주를 저렇게 미소짓게 하는 인물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지.
김필주는 무척이나 궁금했다.
“흠. 괜찮은 사람이더군.”
“그래도 게임 플레이어일 뿐인데, 480억은 너무 과한 거 아닌가? 과연 그 정도 광고효과가 있을지 아직 모르는 일인데. 차근차근 금액을 높여도 괜찮지 않나.”
김필주는 우려를 담아 조언했다.
480억이라는 광고 단가를 듣고 놀라기도 했던 그였다.
‘연예인도 요즘은 그 정도 못 받지.’
요새 유토피아가 인기를 끌면서 연예인들의 인기도 한층 시들어 버렸다.
그래서 인기 있던 연예인들도 광고단가가 낮아졌고.
한때 잘나가던 연예인들은 대부분 종잣돈으로 부동산 투기에 빠져들거나.
혹은 해외에 자금을 은닉하거나 혹은 해외 도박을 하다 뉴스를 타고는 했다.
얌전하게 주식을 하다가 망하는 경우도 몇 보았다.
이런 시국에서 연예인보다 게임 플레이어에 더 비싼 돈을 들여 광고하다니.
친구가 새로운 시도를 한다니 조금 염려가 되는 것이다.
‘월 40억이나 줄 정도인지 잘 모르겠는데.’
40억이 누구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조금 염려되는 마음으로 김필주는 친우 이세주를 바라봤다.
그런데 이세주는 오히려 김필주의 예상과 달리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시장 반응을 봐서 금액을 더 높일 생각도 있네.”
“응? 높인다니? 40억에서 더?”
“그래. 괜찮은 반응이면 50억, 아니 60억이라고 못 하겠나.”
“허어.”
김필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이세주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테이블 위 종이 더미를 뒤적뒤적했다.
그는 곧 종이 하나를 집어 들어 김필주에게 내밀었다.
김필주가 무슨 내용이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자 이세주가 입을 열었다.
“한번 보게.”
“크흠. 이건….”
“우리 K그룹이 유럽과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데 쏟아부은 돈이지. 프리미엄 이미지를 얻기 위해 투자해야 했던 돈이 얼마인지 한번 보게.”
한 장짜리 보고서에는 미국과 유럽 분야에.
무려 10년이라는 장기간 동안 투자한 금액이 적혀 있었다.
일자리 창출을 위한 공장 건립과 직원 고용, 운영 기금으로 수백억 원은 기본이요.
봉사 단체 후원, 인턴 홍보 활동 후원.
야구, 농구, 축구 등 스포츠 후원금을 모두 합하니.
총합 금액에는, 480억 원은 껌값으로 여겨질 만큼 아득한 액수가 적혀 있었다.
“허어… 그렇구만.”
김필주는 친구가 하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480억 원은 투자비치고는 싸다고.
그 말을 하고 있었다.
1년 동안, 플레이어 호준 마케팅으로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이세주가 말하는 바는 바로 그 점이었다.
김필주는 자신이 했던 발언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으며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역시. 자네는 한 수 앞서 나가는군.”
김필주가 순순히 실수임을 인정하자, 이세주는 손을 휘휘 저으며 신경 쓰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괜찮네. 자네는 내 걱정을 해서 그런 거지 않은가. 이 소식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배 아파할 걸세. 이번에 람○○○○, 페○○도 제안했었다는군.”
“호오. 자네가 코쟁이들을 이겼구만. 축하하네.”
“흐흠. 고맙네.”
이세주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아쉽게도 친우 김필주와의 대화는 길게 할 수 없었다.
급한 전화가 온 김필주는 인사를 하고 떠났고, 회장실에는 이세주 혼자 남았다.
홀짝―
이세주는 에티오피아산 원두커피를 살짝 입에 넣고 음미하다가 꼴깍 삼켰다.
달콤쌉싸름한 커피가 그의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그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유토피아를 이용해야 살아남는다. 세상의 흐름이 그럴 거야.’
이세주는 유토피아에 전폭적인 투자를 하기로 이미 결심한 상황이었다.
그런 결단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운용 중인 미래정보전략실에서는 세계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정보 인프라를 모으고, 그 정보를 분석해 앞으로를 예측한다.
미래를 아는 자가 승리하듯이.
그는 그 정보를 토대로 세상의 흐름을 파악했다.
‘유토피아는 앞으로 날개 돋친 듯 성장하겠지.’
앞으로 유토피아는 아주 전망이 좋았다.
유토피아 현재 유저는 공식적으로 21억 3,422만 2,331명.
유토피아 본사가 하루 벌어들이는 수익금이 이미 천문학적인 금액에 달했다.
유토피아 본사가 사내 유보금으로 수조 원을 쌓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화 되었다.
앞으로는 더 돈을 쌓게 되겠지.
유토피아가 인기라는 것은, 곧 사람들이 가상현실에서 머무는 시간이 더욱 길어진다는 걸 의미했다.
즉, 전통시장에서 음식을 사 먹는 사람들 숫자는 계속 줄어들고, 유토피아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숫자는 계속 늘어난다는 것.
오프라인 산업은 죽어가고, 가상현실 산업은 살아난다.
앞으로 점점 플레이어 숫자가 늘어날 테니, 변화의 속도도 빨라질 것이다.
그 변화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었다.
최근 들어 노래방, 주점 등의 유흥시설 매출이 급락했다.
유흥시설을 갈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유토피아에서 친구들과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말이다.
음식점도 마찬가지였다.
유토피아 음식에 밀려서, 동네의 맛없는 음식점들은 망해가고 있다.
음식점 사장들은 이제 가상현실 음식과 경쟁하는 시대가 다가왔다.
TV 시청률도 급감 중이다.
TV는 노년층만 보는 옛날 구세대 미디어가 되어가고 있다.
‘유토피아 캡슐 가격이 내려가니, 앞으로 더 변화는 빨라지겠군.’
그리고 또 한 가지 변화는, 유토피아 본사에서 저가형 캡슐을 내놓기 시작했다는 것.
어제 자로 유토피아 본사에서 내놓은 캡슐은 8,000만 원 선이었다.
이 모델은 저가형 모델이고 호환성이나 게임 감도가 가장 안 좋은 기기이지만.
어쨌든 가격이 저렴해서 인기가 많았다.
‘앞으로 저가형 모델이 더 보급되면 플레이어는 급증할 거고.’
캡슐 가격 때문에, 캡슐 이용비용 때문에 못 하던 사람들이 더 많이 유입될 테고.
사람들이 현실보다 가상현실에 더 많이 머무르는 시대가 코앞에 다가왔다.
‘우리 K그룹이 우위를 점한다.’
그런 세상에서 K그룹을 살아남게 하려면, 힘이 필요했다.
이세주가 막내딸 이주영의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 광고계약 건을 추진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20대, 30대는 잘 보지도 않는 TV 광고, 3류 찌라시 뉴스를 뽑아내는 인터넷 뉴스 언론보다.
유토피아 광고가 훨씬 효과적이었으니까.
그가 호준을 알게 된 것은, 딸과의 대화를 통해서였다.
이세주는 서울 전경을 내려다보며 막내딸, 이주영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 아빠. 제가 사심이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요. 호준 님처럼 제대로 된 실력과 화제성을 동시에 가진 사람은 보기 드물어요.
― 흠. 자세히 얘기해 보거라.
― 요즘 유토피아 방송계 트렌드가 약탈 방화 살인 등 온갖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 천지인데, 호준 님은 그런 내용보다는 순수하게 사냥하거나 요리하거나 농사하거나. 그런 쪽으로만 하고 있어요. 클린한 방송이라고 볼 수 있죠.
― 클린이라.
― 네. 괜히 더티한 방송 쪽하고 계약하면 우리도 같이 싸잡아서 욕먹잖아요? 이왕이면 호준 님과 하는 게 괜찮죠. 비유를 하자면 호준 님은 진흙 속의 진주라고 할 수 있어요. 아마 저희 말고도 다른 기업들도 광고 제안을 했을 거예요.
― 다른 기업들도 말이냐.
― 당연하죠. 이미주 PD가 붙은 이후로 계약 얘기는 솔솔 흘러나왔을걸요.
― 흠. 그렇군.
― 이왕 진주를 발견했으면, 얼른 잡아야지 않겠어요? 호준 님과 연관되면 기업 이미지에도 긍정적일 거예요!
대화 이후, 이세주는 따로 호준에 관해 조사를 지시했다.
‘의외였지. 요새 책벌레는 흔치 않은데.’
조사 결과를 받아서 쭉 읽어본 이세주는, 조금 놀랐다.
호준은 직장을 서울에 잡은 이후로 근처 도서관에서 책을 연간 300권 이상 빌려본 다독가였다.
직장을 다니는 중에도 자격증을 수두룩하니 땄다.
해외영업, 유통, 무역과 관련된 자격증들.
그 점에서 일에 올인하는 성격을 잘 알 수 있었다.
‘직장에서도 평이 괜찮았지.’
업무를 잘 수행하고.
공과 사가 깔끔하다는 평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떼돈을 벌었을 텐데 회사를 그만두지도 않았고.’
특히 이세준은 호준이 회사를 때려치우지 않은 점을 높이 샀다.
그 점에서 책임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유토피아에서도 호준은 일벌레로 소문이 나 있었다.
요리에 농사에 싸움에.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싸돌아다닌다는 얘기가 돌아다녔다.
부지런한 일꾼.
나이 지긋한 이세준이 보기에 호준은 참으로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는 인재였다.
“우리 회사에도 이런 인재가 있었으면. 크흠.”
그가 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오게.”
문을 열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온 이주영이 활기찬 어조로 말했다.
“아빠. 계약 축하드려요.”
“크흠. 그래. 네 덕이구나. 람○○○○보다 선점할 수 있어서 다행인 일이지.”
“잘하셨어요. 계약하기 전에 한번 가보지 않으실래요?”
“응? 어딜 말이냐?”
이세주가 고개를 갸웃하자 이주영이 작게 웃고는 아버지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이세주는 바로 옆방 2호실 문을 활짝 열었다.
2호실에는 막 세팅된 것처럼 보이는 새 캡슐이 2개나 설치되어 있었다.
“짜잔! 캡슐 세팅해 놨습니다.”
“이 녀석. 언제 또 그걸 준비한 거냐.”
“후후. 김 비서님한테 얘기해서 살짝 준비해뒀죠. 요새 아빠가 쉬는 날이 없다고 김비서 님도 한숨이 이만저만 아니시더라구요. 오늘 아침 살짝 시간이 난다는 얘기 듣고 달려왔습죠!”
“녀석. 안 해도 되는 일을. 유토피아는 아이디도 없다 이 녀석아.”
“그냥 저 믿고 따라오시면 돼요! 아빠는 아이디랑 직업카드만 고르면 된다구요.”
“크흠. 알겠다. 들어가마.”
막내딸의 성화에 못 이겨 이세주는 캡슐 안으로 쏙 들어갔다.
캡슐이 닫히자 지천명의 나이를 넘긴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반짝거리는 이미지들이 가득 찼다.
“허어… 세월 참 좋군.”
이세주는 말없이 화질과 별들에 감탄하며.
유토피아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 * *
요정의 쉼터 본점.
오늘따라 다들 분주한 분위기였다.
“자. 테이블 여기다 놓고. 의자는 테이블당 4개로 넉넉하게 넣도록!”
“뀨뀨!”
“끼루!”
별이의 지휘 아래, 요정들이 야외테이블 설치를 했고.
순조롭게 100여 개의 테이블이 설치되었다.
“토순아. 스테이크 세팅 완료다.”
“뀨우!”
가게 내부.
호준과 토순이 콤비는 스테이크, 피자, 치킨, 그 밖의 튀김 요리와 떡볶이를 하느라 바빴다.
커피머신 앞에 선 베티와 샤롯은 레시피가 적힌 종이를 보며 두런두런 이야기했다.
“음음. 카페라테에 생크림, 설탕, 우유에 커피콩 열매를 넣고. 코코아는.”
“코코아 열매에다가 우유 넣고 설탕 추가하면 더 좋고!”
“바닐라라테는 아직 어렵겠네. 바닐라가 없으니.”
“코코아에는 역시 생크림 넣는 게 맛있네!”
둘은 커피머신에서 풍기는 커피콩 냄새에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앞치마까지 두르고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가게 오픈 10분 전, 요정의 쉼터는 활기로 가득 넘쳐 흘렀다.
쉬이잉―
그런데 갑자기 돌풍이 불어닥쳤다.
돌풍은 파라솔이 붙은 나무 테이블이 뒤집히기에 충분한 세기였다.
“히얍!”
눈치 빠른 별이가 역풍을 날려 바람을 상쇄시켰다.
무슨 일이지?
호준은 돌풍 소리를 듣자마자 가게 바깥으로 나왔고.
“크흠. 안녕하세요! 호준 님!”
“아아.”
손을 흔드는 방문객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김치전을 맛있게 먹어주던 이주영.
그녀가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이주영 님. 그런데….”
호준은 이주영에게 다가가 인사하고는 그 옆에 선 남자를 흘깃 보았다.
“이분은… 설마…?”
호준은 남자의 닉네임을 빤히 보았다.
“아. 닉네임이 조금 재밌죠?”
이주영은 피식피식 웃음을 참으며 옆에 선 남자를 소개했다.
호준은 그녀가 소개하는 남자를 슬쩍 보았다.
나무막대기를 들고 거적때기 같은 옷을 입은 남자.
누가 봐도 레벨 1로 보이는 그의 머리 위에는.
【파괴왕 이세주】
파괴… 왕?
게다가 이세주라면. 그 K그룹의?
대한민국에서 이세주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당황한 호준이 입을 벌리고 있자 이세주는 피식 웃었다.
‘많이 놀란 모양이군.’
그는 저런 표정에 익숙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만나면 당황해서 저런 표정을 짓곤 하는 걸 많이 봐왔으니까.
이세주는 막대기를 들지 않은 손을 먼저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반갑군 호준 군! 파괴왕 이세주일세!”
호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파괴왕 이세주의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