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예고편
마을 근처에 레드 게이트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퍼지자, 주민 대부분이 피난을 갔다.
그들은 생업도 다 접고, 뒷산 혹은 이웃 마을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 피난 행렬을 마다하고 마을에 남은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촌장 윌리엄과 몇몇 주민들이었다.
“호준 님이라면 성공하실 거야!”
“지금까지 봐 온 호준 님이라면 분명 멀쩡히 나오실걸!”
“허허. 그렇고 말고.”
촌장 윌리엄은 제나와 루돌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염을 쓸어넘겼다.
그는 아들을 보내 주민들을 안전히 대피시키도록 하고, 그 자신은 게이트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떠나지 못한 이유는, 긴 시간 가꾼 마을을 몬스터들의 손아귀에 내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이렇게 몇몇 주민들이 곁에 모여 외롭지 않게 기다릴 수 있었다.
촌장으로서는 게이트 곁에 남아준 주민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씨앗을 파는 잡화점 주인 제나, 목장 주인 루돌프, 텔레포트 장치 관리자 올라까지.
모두 호준과 얼굴을 익힌 이들이었다.
‘흠. 부디 성공했으면 좋겠는데.’
윌리엄은 담배를 뽁뽁 피며 게이트를 빤히 바라봤다.
저 게이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재앙이 닥칠 것인가.
물론 호준이 게이트를 막을 수 있는지는 100퍼센트 확신할 수 없었다.
누구도 미래는 예측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윌리엄은 믿고 싶었다.
“돌아올 게야.”
지금까지 봐온 모습대로라면, 분명 돌아올 것이라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동안, 남은 시간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남은 시간】
【1분 00초】
【59초】
【58초】
게이트 위에 적힌 시간이 줄어들어 0초가 되는 순간.
도전자가 게이트를 빠져나오거나, 몬스터가 빠져나오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꼴깍―
윌리엄과 마을 주민들이 주먹을 꼭 쥔 채로 숫자를 바라보았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이가 또 한 명 있었으니.
‘아직까지 안 나왔다는 건, 결국 실패한 건가.’
나무 위에서 지켜보던 관객, 이주찬이었다.
그는 인사팀장 최진철의 지시 때문에 게이트를 살피게 된 에이스 길드원이었다.
막 신입으로 길드에 들어갔지만, 이주찬은 나름 얼음 마법사로서 실력을 자부했다.
‘에이스 길드에 들어온 이런 역사적인 날, 레드 게이트나 구경하고 있다니.’
그로서는 시간이 아까울 만도 했다.
계속 팀장님 옆에 붙어 있었다면 보다 친목을 다질 수도 있었을 텐데.
홀로 뚝 떨어져 있는 신세보다 덜 심심할 테고 말이다.
마음은 그렇지만 그래도 팀장님의 지시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이트 터지면 바로 가고말고.”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사진.
그 사진 한 방만 찍고 바로 이 마을을 떠나면 그만이리라.
주찬은 마을 사람들과 달리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호준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늪괴물하고 레드 게이트랑은 비교가 안 되지.’
주찬이 보기에 호준의 레드 게이트 도전은 신입사원의 치기 어린 행동으로 보였다.
뭐에 씌지 않고서야, 제 발로 사지를 찾아갈 리가 있을까.
‘지푸라기 안고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거지.’
보아하니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는 데는 성공한 모양이다만.
이번에는 경우가 좋지 않았다.
【3초】
【2초】
【1초】
주찬은 구름 카메라를 설치하고 사진을 찍을 준비를 취했다.
【0초】
번쩍―
0초가 되는 순간, 하얀빛이 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곧이어 서서히 빛이 사라졌을 무렵.
주찬은 카메라 작동 버튼을 누르고, 눈을 활짝 떴다.
찰칵―
【사진을 저장하였습니다!】
어디 잘 찍혔나 볼까.
천천히 시야를 확보한 주찬이 카메라를 본 순간.
‘말도 안 돼……!’
주찬은 입을 떡 벌리며 할 말을 잃었다.
“아이구! 고생했네!”
“어머. 얼굴이 하얀 걸 보니, 고생을 많이 했나 봐요!”
“호준 님, 대단하세요! 어디 다친 데는 없으신가요?”
“허허허! 자네 정말 대단하구만. 얼굴이 조금 허옇게 뜬 것 빼고는 괜찮아 보이는데. 괜찮은 겐가?”
호준은 마을 사람들과 껴안으며 격려를 듬뿍 받고 있었다.
겸손하게 웃으며 마을 사람들과 인사하는 호준의 모습을 보며, 주찬은 조금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멀쩡할 수가 있지? 머리조차 흐트러지지 않았잖아.’
호준은 들어갈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보통 많은 이들이 격렬한 전투를 끝내고 거지꼴이 되기가 일쑤이거늘.
호준은 막 다림질한 제복을 입은 것처럼 깔끔함 그 자체였다.
별이가 젖은 제복을 싹 말려 보송보송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주찬은 가늠할 수 없었다.
“끼루끼루~”
“사악!”
“메에!”
호준과 같이 떠났던 요정들의 울음소리 또한 경쾌했다.
다들 멀쩡하다 못해 기운이 넘쳐 흘렀다.
동물들은 또 어떤가.
하나하나 놀이공원에라도 다녀온 것처럼 신이 나 꼬리를 살랑살랑댔다.
특히 거대 뱀은 입꼬리가 히죽 올라가 반달 모양이 되었다.
‘괴물들인가.’
레드 게이트 솔플의 사례가 과연 몇이나 될까.
동영상 시스템이 도입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솔플에 대한 소문만 떠돌 뿐.
실제로 얼마나 솔플이 이루어졌는지는 주찬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도 확실히 아는 것은 레드 게이트 솔플은 자살행위라는 상식이었다.
‘적어도 국내에는 없겠지.’
멀쩡하게 걸어나올 플레이어는, 국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눈앞에 호준이라는 자는, 실제로 해냈다.
그것도 소풍 다녀온 것처럼, 아주 쉽게.
‘대체 얼마나 대단한 실력인 거야.’
주찬이 느끼는 것은 질투가 아니라 동경이었다.
그는 평소 실력을 과대평가했던 스스로를 반성하는 한편, 호준을 눈여겨보며 부러움을 느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많은 이들이 따를 정도로 인품이 훌륭하군.’
너무 많이 차이나면 질투보다는 동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주찬의 경우도 그러했다.
‘맙소사. 저런 분을 무시했다니.’
조금 전까지 자신이 호준을 무시했던 것이 생각나 그의 볼이 붉어졌다.
이 상황은 마치 아마추어 선수가 올림픽 국가대표선수를 몰라보고 무시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보는 눈이 부족했군. 반성하자.’
주찬은 겸손해진 자세로 카메라를 몇 번 톡톡 두드렸다.
팀장님에게 보고하기 위한 인증샷용 사진을 찍은 것이었다.
그렇게 사진을 몇 장 더 찍고서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다들 놀라겠군.’
목격담을 듣고 놀랄 길드원들을 생각하며, 주찬은 피식 웃었다.
* * *
평소처럼 작업실에서 밤을 지새우는 이미주.
그녀는 머그잔에 커피를 담고 있었다.
쪼르르―
커피포트에는 차가운 커피가 흘러나왔다.
맛은 없겠지만, 어차피 상관없었다.
커피는 맛이 아니라 머리를 맑게 하고자 마시는 거니까.
꼴깍―
커피를 원샷한 이미주는 흐뭇한 얼굴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종일 들여다본 모니터를 보았다.
【저장 중】: 66%
호준의 첫 레드 게이트 전투 영상, 아낌없이 편집을 마친 영상이 저장 중이었다.
“흐음!”
그녀는 눈을 감고 1시간 전을 떠올렸다.
호준이 레드 게이트에 들어간다는 연락을 보내왔고.
그 즉시 실시간 영상을 공유받아 편집을 진행했다.
친구 혜정이 퇴근해서 홀로 작업해야 했지만, 편집 속도가 빨랐기에 문제는 없었다.
‘편집할 게 별로 없지. 군더더기가 별로 없으니.’
호준의 전투 영상은 깔끔했다.
전투, 그리고 일상 영상으로 분리해서 잘라내기만 하면 되었다.
버릴 부분이 별로 없어서 편집도 간편하게 끝마쳤다.
【저장 완료】: 100%
【영상을 마지막으로 확인하시겠습니까?】
따닥―
미주는 마지막으로 확인에 들어갔다.
장엄한 얼음산을 배경으로 한 영상은.
‘완벽해.’
마음에 쏙 들었다.
압도적인 전투력을 뽐내는 호준과 그 일행들.
그리고 마지막에 쿠키영상으로 넣은, 썰매 타기 부분도 흡족했다.
따닥―
【업로드를 시작합니다!】
업로드만 끝나면 이제 자신의 일은 끝이다.
최선을 다했으니, 이제 결과에 승복하는 일만이 남았을 뿐.
미주는 환하게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어깨에서 우두둑우두둑 소리가 나도 별 신경을 쓰지 않으며 그녀는 책상을 짚고 일어섰다.
띠링―
에러음 소리를 듣고 확인하자, 입력칸에서 커서가 깜박거리고 있었다.
【………】
【업로드 영상 제목을 입력하십시오】
“아 맞다.”
제목을 입력하는 것을 깜박하다니.
미주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는.
‘그걸로 하자.’
<레드 게이트 솔플> 이라고 적어 넣었다.
심플하지만, 핵심을 관통하는 제목이었다.
아무나 도전하지 못하는 레드 게이트를 무려 혼자, 솔플로 성공했다는 건 훌륭한 성과였다.
제목을 입력하고서 다시 업로드가 진행되었다.
【영상을 성공적으로 업로드했습니다】
“후우―!”
이미주는 안경을 벗고 침대로 골인했다.
리모컨으로 암막커튼을 켬과 동시에 그대로 꿈나라로 직행했다.
종일 일로 바쁜 하루였기에, 많은 성과를 이루어 냈기에.
그녀는 누구보다 행복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이미주가 깊이 잠든 사이.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혜정】: 자냐? 야근하느라 수고했어! 푹자!
【혜정】: 얘, 영상 진짜 잘 만들었다. 칭찬해. 우리 미주!
【혜정】: 대박, 벌써 조회수 10만 찍었어! 댓글 폭주야!
혜정의 메시지가 차곡차곡 쌓여 갔다.
* * *
남들이 다 정장을 입을 때, 홀로 몸빼 바지를 입는다면 주목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튀는 행동을 하면 주목을 받기 마련이다.
안 보려 해도 볼 수밖에 없는 것.
레드 게이트가 깨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몇몇 플레이어들이 레드 게이트에 도전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경쟁이 치열한 방송계에서는 튀어야 살아남았다.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레드 게이트 도전을 선택했고.
【생애 첫 레드 게이트 도전기!】
【피로 물든 레드 게이트, 도전합니다!】
【레드 게이트 독점 공개! 소문의 진실을 파헤치다!】
【레드 게이트 도전을 위한 필수 정보 완벽 정리!】
이와 같은 콘텐츠를 쏟아냈다.
그러나 반응은 그리 좋지 못했다.
내용이 부실했으니까.
대부분 영상의 패턴은 비슷했다.
먼저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 말을 한참 하며 시간을 끌고.
중간에 광고 하나 본 다음.
또 썰을 풀고서 레드 게이트에 들어간다.
안타깝게도 레드 게이트 내부 영상은 길게 이어지지 못한다.
“으악!”
“크윽!”
단말마와 함께 플레이어가 죽어버리니까.
구경은커녕, 숨만 조금 쉬다가 죽어버리는 영상이 대부분이었다.
제대로 된 레드 게이트 탐사 영상은 전무했다.
그래서 레드 게이트 영상이 나올 때마다, 시청자들의 평은 좋지 못했다.
└ 재미 없음. 보는 시간이 아깝다.
└ 제목 어그로 쩐다. 어그로의 1 값이라도 하면 볼 텐데.
└ 낚였네 낚였어.
└ 제목만 보면 게이트 깬 줄 알겠다.
└ 이쯤 되면 레드 게이트 제목 나오면 거르는 게 답 아니냐?
└ 완전 공감 22222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는 이유는, 과대 포장하는 제목 때문이었다.
제목에 낚인 시청자들이 뿔이 나는 분위기 속에서.
그런 선입견을 깨버리는 영상이 등장하자, 분위기는 급반전되었다.
【레드 게이트 솔플】
└ 솔플이라고?
└ 여태 제대로 된 솔플은 한 번도 없었잖아?
└ 다들 마른 장작개비가 불타듯 들어가자마자 작살났지 ㅋㅋㅋ
└ 이것도 그런 거 아냐?
솔플이라는 단어가 주는 파급력은 놀라웠다.
단숨에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았으니까.
게다가 호준의 이름을 아는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 믿고 본다. 호준갓킹님!
└ 늪괴물 다음은 레드 게이트냐 ㅎㄷㄷ
└ 스케일 쩌네.
└ 영상 업로드 개빨라 ㅋㅋ 이미주 PD 올나잇한듯
└ 빠르니까 좋다 좋아!
그들은 영상을 클릭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수많은 시청자들이 눈을 크게 뜨고 영상을 보았다.
└ 대박 ㅋㅋ 진짜 솔플이네 ㅋㅋㅋ 이건 학살쇼임. 백귀 학살쇼.
└ 펭귄이 날개치기로 백귀 뺨 때려서 죽임ㅋㅋㅋㅋ
└ 송이도 잘 싸우는데? 쥐방울만 한 녀석이 뿌리 타고 다니면서 싸움!
영상은 다양한 동물들의 전투신이 이어져서, 보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는 데다.
눈썰매 쿠키영상은 특히 호평을 받았다.
└ 썰매 속도가 무슨…ㅋㅋ 개무섭겠다.
└ 갓호준님 볼 펄럭거린다ㅋㅋㅋㅋ 넋나간 표정 완전 웃김. 캡쳐해야지!
└ ㅋㅋㅋㅋ 진짜 ㅋㅋㅋㅋㅋ 사오정인줄 ㅋㅋㅋㅋㅋㅋ
└ 이무 은근 볼매다. 재주가 많아. 애교도 많구. 뱀이나 키워볼까.
└ 이무기 본 사람 1000골드 드림. 위치 정보만 확인되면 돈 드림, DFKFHS132로 메시지 주세요!
└ 어릴 때 눈썰매 타던 시절 생각나네. 포대자루에서 타다가 돌부리에 부딪혀서 엉덩이에서 피났는데 ㅋㅋㅋㅋ 추억이다 진짜.
└ 눈 던지고 노는 것도 요즘엔 맘대로 못하져. 골목 뛰어다니며 놀던 시절도 다 옛이야기임 ㅠ
호준은 댓글을 보며 옅게 웃었다.
‘재미있네.’
댓글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과 감상을 공유하는 것은 기분이 색달랐다.
호준은 창을 쓱쓱 내리며 댓글을 가볍게 읽어나갔다.
그렇게 비스무레한 댓글을 읽어내려 가는데.
└ 이주영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이주영?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음 모르겠다.”
호준은 별 생각 없이 댓글을 넘겨버렸다.
그 댓글이 앞으로 일어날 놀라운 일의 예고편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