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눈썰매
자고로 죽음의 위기 앞에서는, 평소에 없던 힘도 나는 법이다.
막다른 골목에 갇힌 생쥐가 고양이를 무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끼아악!”
리더 백귀가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마지막 공격을 감행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동족들의 원수인 초록새.
그리고 초록새 위에 올라탄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리더 백귀는 죽을힘을 다해 뛰어 올랐다.
그는 부서져 떨어지는 얼음 조각을 밟고 점프해 위로 올라갔다.
날렵한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망토가 펄럭였다.
‘빙백검을 맞혀, 영원히 눈 감게 만들리라.’
그의 눈은 분노와 원망이 점철되어 활활 불타올랐다.
허나 용케 위로 올라오는 백귀를 발견한 호준은 도리어 차분했다.
오히려 미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살아있는 놈이 있군.’
그는 오히려 반가웠다.
너무 시시하게 끝나는 것 같아 아쉬웠으니까.
투지를 불태우는 백귀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끼루루!”
【미르가 브레스를 준비합니다!】
미르가 브레스를 준비하는 시간은 길면 30초.
짧으면 15초였다.
그 안에 끝내 버리리라.
호준은 검을 든 채로 외쳤다.
“광전사.”
파르륵.
스킬을 발동하자 푸른 불꽃이 일렁이며 그의 제복을 휘감았다.
【광전사 스킬이 발동됩니다】
【10분 동안 근력이 3배 상승합니다】
【10분 동안 민첩이 3배 상승합니다】
‘몸이 가뿐하네.’
광전사의 효과는 놀라웠다.
몸에 날개를 단 것처럼 가벼워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누가 전신에 에너지를 빵빵하게 주입한 것처럼 자신감이 차올랐다.
호준은 기분좋은 미소를 지으며, 인벤토리에서 플라잉 열매를 꺼내 사용했다.
【플라잉 열매를 사용했습니다】
【1분동안 자유롭게 날 수 있습니다】
펄럭―
그가 날개를 펄럭이며 미르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마치 로켓처럼 빠르게 이동했다.
민첩이 극도로 높아지면서 몸의 움직임은 눈으로 따라잡기 힘든 수준이었다.
호준이 제비처럼 자유자재로 날아오르자 그 모습을 본 백귀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백귀는 위기감을 느꼈다.
더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자신이 불리할 것은 자명했다.
자신은 날개가 없지만, 상대는 날개가 있었으니까.
백귀는 마지막 기회라는 마음으로 있는 힘껏 검을 내던졌다.
검은 호준의 심장을 향해 쾌속으로 날아갔다.
검이 빠르게 그에게 다다르던 순간.
호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염력.”
【염력을 발동합니다】
검이 호준에게 닿기 일보 직전.
스르륵―
검의 방향이 180도 바뀌었다.
“가라!”
호준이 손가락을 튕기자, 검이 자신의 주인인 리더 백귀를 향해 날아갔다.
검은 날아왔던 속도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백귀를 향해 되돌아갔다.
리더 백귀는 피하고자 허리를 굽혔으나, 검은 멈추지 않았다.
푹―
검이 백귀의 목을 뚫은 순간.
“쿨럭―”
백귀의 입에서 하얀 피가 솟구쳤다.
콰지지직―
백귀의 눈을 시작으로 얼굴, 어깨, 가슴,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반신이 얼음으로 변했다.
리더 백귀는 완벽한 얼음조각상이 되어 버렸다.
콰아앙―
그렇게 얼음이 되어버린 채로, 그는 차디찬 얼음 바닥에 추락했다.
백귀는 사라지고, 산산 조각난 얼음만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끝인가.’
날개를 펄럭이며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이, 미르가 다가와 끼룩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미르의 머리를 쓱 쓰다듬고서, 호준은 미르의 등 뒤에 올라탔다.
원래 자리로 자리잡는 순간, 메시지가 주루룩 떴다.
메시지를 보는 순간, 호준의 얼굴이 굳었다.
“뭐가 이렇게 많아?”
메시지가 끝도 없이 계속 올라갔다.
* * *
던전을 클리어한다고 바로 게이트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 나갈지는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종료 시간 22분 34초를 남겨두고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던전 바깥으로 나가고 싶을 경우, 접속 종료를 외치십시오.】
접속 종료를 외쳐 일찍 나가거나.
혹은 종료 시각까지 안에서 머무를 수 있는 것.
호준은 후자를 택했다.
그는 요정들과 잠시 얼음산 기슭에 머무르고 있었다.
“끼야아아~”
요정들은 이무 위에 올라타 눈썰매를 타며 신나게 놀고 있었고.
그는 바위에 걸터앉아 메시지를 차분히 들여다보았다.
이번 퀘스트로 얻은 것은 정말 많았다.
【칭호 백귀를 다스리는 자 획득!】
【칭호 효과】
【언데드 계열 몬스터를 상대로 데미지 200% 상승!】
“대박이네.”
레드 게이트 보상이 후하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이 정도로 좋을 줄이야.
이 칭호만 있으면 앞으로 언데드 몬스터를 상대로 2배나 데미지가 높아졌다.
즉, 100마리 죽일 시간에 200마리를 죽일 수 있다는 소리.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을 많이 남겨두고 퀘스트에 성공하여, 보너스 경험치가 주어집니다】
【총 경험치를 배분합니다】
【…………】
【배분 완료!】
【레벨업!】
【레벨업!】
【레벨업!】
【레벨업!】
【레벨업!】
【레벨업!】
【현재 레벨 : 45】
레벨이 무려 6이나 올랐다.
물론 백귀를 많이 죽이기는 했다지만.
1시간도 안 되어 레벨을 폭업했으니 기분이 안 좋을 리가 있을까.
뭘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새로 얻은 스탯은 모두 체력과 민첩, 근력에 골고루 분배했다.
“최고네.”
더욱 기분 좋은 사실은, 앞으로도 레벨 폭업이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7일간 경험치 300% 버프가 주어집니다!】
하루도 아니고 무려 7일.
일주일 동안 경험치가 3배나 뻥튀기된다는 소리였다.
추석이나 연휴에 보너스를 준다고 해도 1.5배가 최대인데.
무려 3배나 경험치 보너스를 주는 것은 레드 게이트라서일 것이다.
과연 일주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호준은 고심 끝에 방향을 정했다.
‘레드 게이트를 찾자. 레드 게이트가 가장 효율이 좋다.’
레드 게이트를 염두에 두는 이유는 간단했다.
‘같은 레벨 몬스터를 잡아도, 그냥 던전보다 레드 게이트 경험치가 더 많으니까.’
기본적으로 레드 게이트는 들어갈 때 플레이어가 가지는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에, 보상이 훌륭했다.
똑같은 오크라고 해도 레드 게이트에서 등장하면 경험치를 1.5배, 많으면 2배 더 많은 경험치를 주었다.
이런 파격적인 효과 때문에 초창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레드 게이트에 도전했고.
‘다들 처참히 실패했지. 레벨에 맞지 않는 몬스터가 떠서.’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레벨을 높이기는커녕 레벨이 낮아졌다.
이는 레드 게이트에서 몇 레벨의 몬스터가 나올지, 미리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50레벨 몬스터가 나오길 기대하고 들어가면, 70레벨 몬스터가 나오는 일이 비일비재 했으니까.’
레드 게이트가 인기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예상할 수 없는 몬스터가 나오고, 그 때문에 불필요한 비용과 시간을 소모하게 되는 것.
이런 피곤함 때문에 경험치를 많이 준다는 보상에도 불구하고, 기피하는 게이트가 되었지만.
‘내게는 기회다.’
이미 뭐가 나올지 아는 이상.
호준에게는 레드 게이트는 노다지나 다름 없었다.
레벨이 허용하는 한에서, 레드 게이트를 싹쓸이할 수 있는 기회인 것.
‘레드 게이트 정보를 찾아보자.’
그렇게 앞으로의 방향을 결정하고서.
그는 손아귀를 들여다보았다.
새하얀 얼음검이 보석처럼 빛났다.
【대백귀의 빙백검】
【레벨 제한】: 40
【등급】: 특 6급
【기능】: 물리 공격력 +150
【특수 기능】
―아이스 월 : 거대한 얼음벽을 생성한다. (유지 시간 최대 10분, 벽을 유지하는 동안 일정 체력 소모)
【아이스 월 쿨타임】: 없음
“타타니홀 검은… 다크니스를 줘야겠군.”
기존 타타니홀의 대검도 훌륭했지만, 빙백검은 타타니홀보다 더 훌륭했다.
무려 1등급이나 더 높은 특6급짜리 검이고.
물리 공격력도 상승했다.
게다가 특수 기능도 조금 달랐다.
그는 검 끝을 바닥으로 향하고 외쳤다.
“아이스 월.”
파스스스슥―
【아이스 월 유지를 위해 체력이 1 소모됩니다】
말 한 마디로 만들어낸 얼음벽은 거대했다.
덤프트럭의 옆면 정도의 넓이.
벽의 두께는 1m 정도.
벽도 단단하고 튼튼해서 방어벽으로 설치하기에 딱 괜찮았다.
‘음. 더 만들 수도 있나?’
문득 궁금해져 다시 메시지를 살폈다.
분명, 하나만 만들 수 있다는 말은 없었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해 보자.”
그는 얼음벽과 살짝 떨어져 다시 한번 외쳤다.
“아이스 월!”
파스스스슥―
【아이스월 유지를 위해 체력이 1 소모됩니다】
이전과 같은 메시지, 그리고 이전과 같은 얼음벽이 생성되었다.
얼음벽 2개를 유지하기 때문에 HP가 떨어지는 속도가 조금 빨라지기는 했다.
새로 만든 얼음벽을 쓸어내리며 그는 옅게 미소지었다.
“괜찮네.”
방어벽으로 설치하면 괜찮겠지.
차차 사용할 곳을 생각하기로 하고서 그는 빙백검을 손으로 쓱 쓸었다.
빙백검의 마지막 효과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프리징 : 상대에게 검을 꽂는 순간, 일시적으로 상대를 얼게 만든다. (유지 시간 최대 5초. 얼음과 친밀한 몬스터의 경우, 프리징 효과가 극대화되어 즉시 얼음화되어 사망합니다)
【프리징 쿨타임】: 1시간
“흠….”
프리징 효과를 보며, 호준은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죽인 빨강 망토 백귀.
그 녀석에게 하얀 검을 꽂았을 때 백귀는 얼음이 되어 죽어버렸다.
‘어쩌면 이 검이, 그 검일지도.’
아쉽게도 당장 테스트할 방법이 없었기에 나중에 확인하기로 하고 넘겼다.
프리징 효과 말고도 확인 못 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는데.
【플라테논 신전의 열쇠 획득!】
【히든 던전으로 가는 키를 획득했습니다】
【비활성화 상태입니다】
손바닥 크기만 한 금색 열쇠.
플라테논 신전의 열쇠라고 불리는 이것은,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쌀자루만큼 묵직했다.
아직 비활성화 상태라서 어떻게 발동되는지 알 길은 없었다.
‘이건 킵 해 두자.’
열쇠를 인벤토리에 넣고서, 호준은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어깨에서 나는 우둑우둑 소리를 들으며 청명한 하늘을 보니 속이 시원했다.
이제 곧 이곳과도 안녕인가.
경치만 놓고 보자면 가끔 놀러 오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멍하니 하늘을 보며 경치를 감상하는데 별이가 쪼르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호준 님! 뭐 하세요~ 어서 같이 눈썰매 타러 가요!”
“그럴까?”
별이의 등살에 못이겨 끌려간 뒤.
쉬이이잉―
그는 요정들과 함께 이무의 등에 올라타 눈썰매를 즐겼다.
산등성이에 회오리처럼 휘감아 내려가는 얼음길이 있었는데.
이무는 그 길을 따라 주루룩 미끄러졌다.
비늘을 미끄러지기 쉽도록 납작하게 했기에 이무의 내려가는 속도는 장난 아니게 빨랐다.
휘잉 휘잉―
꺄아아아!
왠지 얼음썰매하면 낭만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호준에게는 아찔한 경험이었다.
“아우… 후….”
얼음길 바로 옆에는 까마득하게 깊은 절벽이 놓여있던 것.
이무가 방향을 조금이라도 잘못 틀면 추락할 것만 같아서, 호준은 머리가 쭈뼛쭈뼛해졌다.
― 오른쪽으로 돈다 사악~ 왼쪽이다 사악~
이무는 몸을 방향에 따라 비꼬며 잘도 내려갔다.
요정들은 신이 나서 빨리 간다고 좋아했지만.
호준은 계속 보이는 절벽 때문에, 롤러코스터에서 끝없이 떨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렇게 헛숨을 들이키고 내쉬다 보니, 어느새 산의 맨 아래에 도착했다.
“꺄아아아!”
“와앙!”
“끼루루!”
허옇게 질린 호준을 붙잡고 요정들은 다시 타자고 아우성이었다.
“아니. 난 괜찮은데….”
“에이. 호준 님이 빠지면 안 되죠! 갑시다! 자!”
극구 사양했음에도 별이의 애원에 못 이겨 두 번이나 더 타고서.
그는 제한시간이 다 되어서야 이무의 눈썰매, 아니 지옥썰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