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진격
덤불 속 백귀를 무찌른 뒤.
호준은 고심했다.
‘단시간에 해치울 방법을 찾아야 돼.’
제한시간은 1시간.
1시간 안에 1,000마리를 반드시 해치워야만 했다.
“냐아~”
“언제 따라왔어?”
“냐아~”
소리없이 다가온 다크니스에게 다가가니.
다크니스가 넌지시 앞발을 내밀었다.
“냐아~”
앞발을 내민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다크니스가 불길한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다크니스가 앞발로 그 방향을 가리킵니다!】
불길한 움직임이라.
뉘앙스를 보면 지난번처럼 몬스터를 발견한 것 같았다.
녀석이 가리키는 방향은 마을이 있는 방향.
호준은 머리부터 꼬리까지 쓰다듬으며 물어보았다.
“다크니스. 백귀들이 마을에 있다는 거냐.”
“냐아!”
고개를 끄덕끄덕이는 다크니스가 팔을 타고 올라왔다.
녀석이 어깨에 앉도록 내버려두며 호준은 넌지시 물었다.
“이 근처에는 백귀가 없어?”
“냐아~”
그 물음에 다크니스는 거침없이 고개를 저었다.
다크니스가 말하는 대로 가면 문제는 없겠지.
그동안의 전적 덕분에 믿음이 갔다.
“가자.”
잠시 뒤, 미르가 날개를 홰치며 날아 오르고.
“냐아~”
유능한 길잡이 다크니스를 필두로 호준 일행은 마을로 향했다.
* * *
백귀들은 그 나름대로 강한 몬스터였다.
오크나 고블린 같은 여리여리한 녀석들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강인한 피부.
기다란 혀를 통해 원거리 공격이 가능해 생존율도 높으며.
얼음처럼 차가운 피부 때문에 추위에도 잘 견딜 수 있었다.
그런 백귀들에게 사방이 눈천지인 이 지형은, 최고로 안락한 곳이었다.
그들은 추위에 익숙하고, 추위에 영향을 받지 않기에 이곳에서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했다.
오크나 고블린들은 그들에게 기를 팍 죽이고 굽혀 들어갔고.
가끔 나타나는 트롤들도 백귀들을 꺼렸다.
백귀들은 단체로 개떼처럼 달려들어 트롤 한 마리를 도륙하는 잔인무도한 성향을 띄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백귀들은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했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위치한 채로 도도하게 굴던 백귀들.
그들이.
“끼야앙!”
“끄아아아!”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갔다.
그러나 거대한 불구덩이가 그들을 집어삼켰다.
“푸와아아악!”
두더지가 아닌 이상, 공중에서 쏘는 브레스를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끄아아앙!”
“끼르릉….”
백귀들은 숯처럼 타버린 채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너무나 초라한 죽음이었다.
【미르가 백귀를 처치했습니다!】
【미르가 백귀를 처치했습니다!】
【미르가 백귀를 처치했습니다!】
【미르가 백귀를 처치했습니다!】
【미르가 백귀를 처치했습니다!】
【미르가 백귀를 처치했습니다!】
………
브레스 한 방으로 단번에 10마리나 무찌른 미르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다른 사냥감을 찾았다.
“잘했다.”
호준은 이마를 쓱쓱 쓰다듬으며, 다른 요정들을 살펴보았다.
“잘 싸우네.”
그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자리했다.
쿠앙― 쾅
이무는 가히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녀석이 앞구르기 한번 할 때마다 마을 집들이 와그작와그작 부서졌다.
그냥 깔아뭉개도 무시무시할 텐데, 비늘을 뾰족하게 세우고서 얼음집을 가루로 만들고 있었다.
연달아 세 번 덮치면서, 집을 완전히 가루로 만드는 꼼꼼함까지 보인다.
“깩!”
“끼욕!”
집이 가루가 되는데, 그 안에 있던 백귀가 무사할 리가.
백귀들은 비명도 못 지르고 집과 함께 으스러졌다.
【이무가 백귀를 처치했습니….】
수많은 백귀들이 사라져갔다.
【이무가 처치한 백귀가 100마리를 넘어섰습니다!】
【이무는 충분한 경험치를 획득하여 성장합니다!】
【이무의 체력이 상승합니다!】
【이무의 근력이 상승합니다!】
【이무의 민첩이 상승합니다!】
【이무의 비늘이 더 단단해집니다!】
걸어 다니는 무기 이무뿐 아니라 요정들도 전투에 한몫했다.
‘손발이 착착 맞네.’
토순이가 귀를 늘려 백귀의 발목을 감고, 핑구가 날개로 뒷목을 내리쳐 기절시켜버렸다.
그러면 왕뿌리가 백귀를 바닥에 내리치고 머리를 수박처럼 으깨버렸다.
“냐앙!”
다크니스는 닌자처럼 움직였다.
녀석은 백귀의 뒷목에 사지를 감고는, 백귀의 목을 옆으로 120도 꺾어버렸다.
― 뚝!
섬뜩한 소리와 함께 백귀가 혀를 빼내고 죽어버렸다.
특히, 이번에는 새로운 발견도 있었다.
바로 메이의 새로운 힘을 발견한 것.
“메에!”
메이는 후방부에서 털을 바짝 세우고 있었는데.
주기적으로 저렇게 크게 울었다.
메이의 울음과 동시에, 전체 요정들에게서 흰색 아우라가 일어났다.
그리고 메시지가 주룩주룩 올라갔다.
【메이가 요정들의 체력을 보충합니다】
【토순이의 체력이 회복 중입니다!】
【미르의 체력이 회복 중입니다!】
【아무의 체력이 회복 중입니다!】
【다크니스의 체력이 회복 중입니다!】
………
‘힐러 능력을 가진 양이라.’
“냐앙!”
뚜두둑― 뚜두둑―
메이의 힐링으로 기운을 차린 요정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호준은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필요할 때만 나서서 도와주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백귀가 많지 않았기에 지켜보기만 했다.
“호준님, 이 녀석이 마지막 녀석입니다!”
별이가 개선장군처럼 늠름한 얼굴을 하고 마지막 백귀를 데리고 왔다.
공중에 매달린 백귀는 혀가 꽈배기처럼 말린 채로, 기가 팍 죽어 있었다.
“캐액 캐액…!”
“이 녀석 말로는, 나머지 백귀는 성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별이가 잠시 입을 달싹이던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중요한 비밀을 말할 테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말합니다.”
비밀이라.
호준은 백귀를 빤히 바라보았다.
백귀는 구명줄을 붙잡듯, 아주 간절한 눈빛을 쏘아댔다.
혹시 모르니 알아보는 것도 괜찮겠지.
호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별이가 속닥속닥 백귀와 대화를 나누었다.
* * *
모든 동물에게 서열이 존재하듯이 백귀에게도 서열이 존재했다.
백귀들은 나이가 많을수록 서열이 높아졌다.
그래서 연륜이 있는 백귀들은 성을 지키며 편히 살고.
나이 어린 백귀들은 마을에 살면서 사냥을 담당했다.
평소처럼 늙은 백귀들은 평소처럼 식량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식량은 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녀석들이 오질 않는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다.”
“하긴.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지. 무슨 문제가 생긴단 말인가.”
어린 백귀들이 오지 않자 걱정스러운 마음에 백귀들은 성벽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발견하고야 말았다.
처참한 마을의 모습을.
“말도 안 돼!”
불타오르는 마을이라니.
그 불이 왜 생겨났는지는 잘 알 수 있었다.
뚱뚱한 초록새가 날아다니며 불을 내뿜고 있었으니까.
“괴물 새다! 통통한 초록새가 마을을 부수고 있다!”
마을이 잿더미가 되는 소름 끼치는 모습에 몇몇은 팔로 몸을 감싸며 오스스 떨었다.
드래곤을 본 적이 없는 그들은 미르를 통통한 초록새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저 기다란 지렁이는 무엇이냐!”
“마을을 다 뭉개고 있구나!”
문제는 습격자가 통통한 초록새뿐만이 아니라는 것.
이무의 난동부리는 광경은 재앙에 가까웠다.
백귀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대한 덩치에 압도되었다.
가까이에서 보면 얼마나 거대할까.
저 몸뚱이에 깔리는 것이 자신들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백귀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리더, 대책이 시급합니다.”
“저희는 리더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르겠습니다!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백귀들은 즉시 키가 큰 백귀에게 모여들었다.
키가 큰 백귀는 백귀 중 가장 오래 살아남은 백귀로, 홀로 붉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백귀들 중에 가장 강인한 자였다.
수천의 고블린을 홀로 무찌른 강인한 전사였기에 모두가 그의 결단을 존중했다.
“잠시 기다려라.”
리더 백귀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습격자가 언제 여기로 쳐들어올지 몰랐다.
하늘을 나는 적들을 상대해 본 적이 있었던가.
‘음. 산보다는 호수에서 싸우는 게 더 안전할지도.’
리더의 시름이 깊어져만 가던 그때.
최측근 부하 백귀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리더, 제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말해 보라.”
“마을에 있는 백귀는 고작 200마리에 불과합니다! 갑자기 습격을 당했으니 제대로 대항할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천 오백이 넘는 백귀들을 불러모을 수 있습니다. 다 같이 힘을 합한다면 분명 이길 수 있습니다! 전군을 한데 모아 힘을 합합시다!”
그의 발언에 다른 백귀들도 동조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 성은 우리가 지켜야죠. 적들을 물리칩시다!”
“백귀 만세!”
비록 불을 뿜는 초록새와 거대 지렁이는 미지의 존재라지만.
그들도 자존심이 있었다.
“백귀의 자존심이 있죠. 도망칠 수 없습니다!”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그렇게 백귀들의 함성이 성에 울려 퍼지자 리더는 결단을 내렸다.
“전부 성벽으로 모이도록 하라! 적을 몰살할 때까지 싸운다!”
“와아아아!”
“가자!!”
백귀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들은 지하에 거주하는 백귀들을 불러모아 성벽으로 끌어올렸다.
착 착 착 착―
성에 흩어졌던 백귀들이 널찍한 성벽을 가득 메웠다.
그들은 이무기와 초록새가 마주 보이는 성의 남쪽 성벽에 모여들었다.
산을 아우르는 성벽 전체에 골고루 분포하기보다는, 침입자들이 다가오는 정면 성벽으로 모여든 것.
“와라!”
“단숨에 죽여주마! 초록새 자식!”
어린 백귀들이야 전투 경험이 많지 않다지만.
그들은 수백 수천 번의 전투경험이 있는 노장들이었다.
그들은 갈고닦은 실력을 보여주겠다며 벼르고 별렀다.
모두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지만, 리더 백귀는 홀로 침착했다.
그의 시선은 통통 초록새를 향했다.
‘심장에 칼을 꽂아 주마.’
그가 쥔 빙백검은 상대의 피 한 방울까지 모조리 얼려버릴 수 있는 검이었다.
검이 새의 피부에 닿기만 하면, 초록새는 거대한 얼음 조각상이 되어 추락하리라.
그는 매섭게 초록새를 올려다보며 사정거리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렸다.
‘와라!’
그가 숨을 죽이고 손에 힘을 주던 그때.
어이없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뭐야?”
“리더. 무슨 일이십니까.”
뒤에서 부하들을 정비하던 부하 백귀가 허리를 굽힌 채로 물었다.
리더 백귀가 앞을 가리키며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새가 사라졌다.”
“네? 사라지다니….”
부하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눈썹이 휙 올라갔다.
난데없이 사라졌다니?
“저길 보란 말이다!”
리더의 재촉에 부하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하얀 지렁이와 초록새가 없는, 무척이나 푸른 하늘을.
“어?”
부하는 눈을 몇 번이나 비비며 확인하고는 말을 더듬었다.
“뭐야. 어디 갔지?”
“뭐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침입자 무리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다른 백귀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웅성거리며 동요하던 순간.
쿠쿠쿠쿵―
굉음이 울려 퍼졌다.
성이 위아래로 마구 흔들리자, 백귀들은 깜짝 놀라 몸을 낮추었다.
굉음이 시작된 방향은, 백귀들이 머무는 남쪽과 정 반대.
“북쪽 벽이다!”
북쪽 벽이라는 소식에 리더의 얼굴이 새까맣게 변했다.
“저 쪽은 얼음성의 근원이 자리한 곳이 아니더냐!”
“한시라도 가야 합니다! 근원을 지키지 못한다면….”
얼음성을 단단하게 굳히고, 방어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근원.
그 근원이 무너진다면 얼음성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할 수 없었다.
부하가 그 사실을 말하기도 전에.
챙그랑― 쾅!
근원이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젠장…!”
리더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웠다.
산을 뒤덮는 얼음벽과 그 안에 꽁꽁 갇힌 얼음성.
그 거대한 건축물이 일시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끼야악!”
얼음성이 무너지는데, 성벽에 서 있던 백귀들이라고 사정이 다를까.
날개가 달리지 않은 이상 도망갈 곳은 없었다.
수많은 백귀들이 얼음성과 함께 수십m 절벽에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그러한 아비규환 속에서.
미르에 올라탄 호준 일행, 그리고 순간이동을 한 이무기만이 유유히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