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질투
‘김치라…!’
호준은 김치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 이유는 새 의뢰때문이었다.
【의뢰명】: 발효음식 김치를 대령하시오!
【설명】: 올라라 할머니가 매콤한 김치를 먹고싶어 골병이 들었습니다.
할머니의 입맛을 만족할만한 맛좋은 배추김치를 10포기 가져오십시오!
【의뢰 조건】: 1시간 안에 배추김치 100포기를 가져오기
* 최소 1등급 이상이어야 함.
* 완성된 요리는 길드사무소에 제출하십시오.
【보상】
** 보상 1 : 전 스탯 + 10 상승
** 보상 2 : 경험치 30,000 EXP
** 보상 3 : 축복의 상자 1개
의뢰의 내용은, 무려 100포기의 배추김치를 만들라는 것.
100포기는 적은 양처럼 보이지만 이곳에서는 적은 양이 아니었다.
‘여기 배추는 수박보다 더 크니까. 힘이 훨씬 많이 들지.’
배추의 크기도 크기지만.
배추뿐 아니라 다른 재료들도 크기가 커서 상당한 노동양이었다.
그래서 1시간이라는 시간 제한은, 도전자에게 매우 불리한 조건.
‘그래도 보상이 훌륭하니까. 해야지.’
그러나 어려운 만큼 보상도 훌륭했다.
**보상 1 : 전 스탯 + 10 상승
무려 전체 스탯이 10씩이나 상승!
의뢰 한 번으로 전 스탯을 10씩이나 올리는 건 충분히 파격적인 보상이었다.
레벨 1업을 할때, 겨우 2포인트가 주어지니까.
거기다 보상은 더 있었다.
**보상 2 : 경험치 30,000 EXP
경험치도 넉넉히 줬던 것.
‘게장 때보다 딱 3배나 많네.’
게장 의뢰에서 1만 EXP를 얻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3배인 3만 EXP나 준단다.
‘레벨업은 충분히 하겠네.’
마지막으로 특별한 보상이 남아있었다.
**보상 3 : 축복의 상자 1개
‘음. 축복의 상자는 처음 들어보는데.’
축복이라.
불운의 상자는 아니니 나쁘지는 않을듯한데.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나중에 가봐야 알 듯했다.
‘어쨌든, 집중하자.’
훌륭한 보상이니만큼, 의뢰는 간단하지 않았다.
1등급 배추김치 100포기를, 단 1시간 안에 만들기.
‘시간 조건때문에 다들 못 하는 거겠지. 보상이 이렇게 훌륭한데도.’
그리고 김치는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가 너무 많아, 보통의 경우, 만들기 어렵다.
배추, 무, 마늘, 새우젓 혹은 액젓, 양파, 고춧가루, 매실청 등.
필요하다고 아무 재료를 갖다 쓸수도 없다.
재료의 퀄리티가 떨어지면 1급이 나오지 못하고.
요리가 1급에 도달하지 못하면, 만들어봤자 제출할 수 없게 되니까.
이러니저러니 초보자들은 절대 시작할 수 없는 의뢰.
‘나는 예외지만.’
그러나 호준은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조건이었다.
양질의 재료가 밭에 널려있으니까.
“여기 새우젓 대령했습니다!”
“그래. 별아. 여기다 놔.”
“넵!”
액젓대신, 미리 만들어둔 새우젓을 쓰고.
“뀨뀨!”
“핑구야. 그건 여기다 놓으렴!”
매실청대신, 복숭아 설탕절임을 쓰기로 했다.
나머지 야채들도 요정들이 차곡차곡 가져왔다.
착착착착―
그 사이 호준은 절임 배추를 만들었다.
배추를 소금물에 풍덩 빠트리고.
【배추가 소금물을 듬뿍 머금었습니다!】
때가 되면 끄집어냈다.
‘손을 쓸 필요 있나.’
【염력을 발동합니다】
염력은 신의 한 수였다.
이동 경로를 생각하면 배추가 알아서 움직였으니까.
그 덕분에 호준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절임 배추 100포기를 쌓아 올렸다.
마지막 포기를 쌓아 올리고서, 그는 양념을 만들기 시작했다.
양념을 만드는 법은 간단했다.
무, 양파, 마늘, 고춧가루, 복숭아 설탕절임.
재료를 한번에 믹서기에 넣고 갈면 끝.
쉬이이잉―
【맛좋은 김치 양념이 완성되었습니다!】
【재료의 신선도가 높아 결과물이 기대됩니다!】
【재료의 등급이 높아 결과물이 기대됩니다!】
“음, 색깔 좋네!”
붉은색 양념은 맞깔스러워 보였다.
살짝 손가락을 찍어 맛보니, 칼칼하다.
양념이 이 정도면 김치맛도 끝내주겠지.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니 얼른 만들어야겠다.
호준은 손목을 뚝뚝 꺾으며 배추 더미로 다가갔다.
그때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메이의 목축 경험치가 전달됩니다】
【목축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해 이제부터 로얄돼지를 키울 수 있습니다!】
【로얄돼지를 분양받기 위해서는, 목장의 루돌프를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오… 돼지라고?”
새로운 동물을 키울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무려 로얄돼지라는 이름.
기대가 된다.
이름만 봐서는 조금 귀한 돼지 같은데.
‘직접 봐야 알겠지.’
김치를 얼른 만들고 목장으로 달려가자 생각하는데.
별이가 포르르 날아와 어깨 근처를 날았다.
“저도 같이 거들까요? 혼자 하기에는 조금 많은 것 같아서요.”
상냥한 별이의 말에, 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별아. 그보다는, 네가 갈 데가 있다.”
돼지들을 만날 생각에, 호준의 눈이 반짝였다.
* * *
암막 커튼으로 햇빛이 차단된, 어두컴컴한 공간.
지하인지 지상인지 알길이 없는 공간.
컴퓨터 여러 대가 윙윙 비명을 지르며 가동되었다.
조용한 실내에서 컴퓨터의 윙윙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 공간에서 책상에 엎드려 자는 이가 있었다.
아담한 체구.
“으음― 으음….”
마른 체형.
책상에 딱 달라붙은 그녀는, 검은 머리를 느슨하게 묶은 채로 웅얼거리다가 벌떡 일어났다.
“하암― 잘 잤다.”
기지개를 켠 그녀는 비뚫어진 안경을 다시 똑바로 고치고, 마우스를 딸각거렸다.
어제 남은 작업을 계속 하려는 이 여성은, 이미주 PD였다.
밤새 일을 하다 평소처럼 책상에서 잠자고 다시 일어난 것.
그녀가 모니터로 빨려들어갈듯 일하고 있을 무렵.
덜컥―
누군가 문을 열고 작업실로 들어왔다.
“미주, 하이~”
“으응!”
“또 밥 안먹었지?”
“으응!”
“며칠 안 먹었는데?”
“하루… 인가? 잘 기억이 안 나.”
“아, 이러다가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하하. 내가 밥 안 먹고 한게 하루이틀이야. 괜찮을… 아. 어지럽다.”
“으이구. 너 좋아하는 숙주나물 해왔으니까 비빔밥이나 먹자. 고추장 있지?”
“당근이지! 혜정아, 역시 네가 최고야!”
“악 목아파! 저리가있어봐.”
“으으. 골 울려. 미안~”
이혜정은 얼른 친구를 간이침대에 눕히고는 준비해온 반찬들을 꺼냈다.
그녀는 이미주 PD의 편집 보조이면서, 가족이나 다름없는 친구 사이였다.
고등학교때부터 쭉, 지금까지 같이 일하고 매일 보다시피 하며 지냈으니까.
‘어머니 돌아가신 뒤로, 일에만 매달리니 원.’
미주의 먹을거리를 챙겨주는 것이, 혜정의 일과 중의 하나였다.
“진짜. 일을 열심히 하는 건 의미 있지만 그래도 몸은 좀 챙겨. 1일 1식이 건강에 좋다지만. 너는 머리 핑핑 굴리느라 에너지를 엄청나게 쓰는데. 적당히 먹어야 머리가 돌아가지.”
“우웅 알았어. 음~ 이번에도 맛있어~ 우리 혜정이 없으면 내가 무슨 낙으로 살아!”
“이거나 먹어.”
우물우물―
“네 비빔밥이 최고야!”
입을 우물대며 엄지를 들어 올리는 친구를 보며, 혜정은 옅게 웃었다.
그렇게 둘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양푼을 바닥내고 있었다.
따르릉―
핸드폰이 울렸다.
“누구지?”
이미주는 주섬주섬 일어나 핸드폰 화면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네. 무슨 용건이죠? 설리나 씨.”
전화응대를 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방금 전 순둥순둥하던 미소는 사라져 있었다.
“몇 번을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저는 마음에 드는 상대와만 일을 합니다. 돈만 주고 조종할 생각이라면 돈에 환장하는 PD를 고르시죠.”
차가운 일갈에도, 상대는 전화를 끊지 않은 모양이었다.
칭얼거리는 여자 목소리가 전화기를 뚫고 나올 지경이었다.
“상식 이하군요. 끊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이미주는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휴우―”
그녀는 한숨을 쉬며 얼굴을 손으로 감싸더니.
다시 핸드폰을 들어, 아예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누구길래 그래?”
친구의 질문에 이미주는, 나지막이 말했다.
“돈은 억만금이라도 줄 테니, 어떻게든 자기를 스타로 만들어 달래. 그래서 돈 밝히는 PD한테 가라고 했더니, 입에 게거품을 무네. 재벌가 딸이라는데.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야.”
그 말을 하며 이미주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혜정은 그런 친구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계산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한 둘이어야지.’
지위가 높아질수록, 등쳐먹으려는 사람들도 덩달아 많아진다.
그래서 높아질수록 더 겸손해지고.
높아질수록 더 조심하라고 했던가.
그래도 이미주는, 부자들의 일탈 같은 도박, 마약 등에 빠지지 않는.
성공한 이들 중에 가장 건전한 케이스였다.
“이번이 몇 번째 전화한 건데?”
친구의 물음에 이미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열 한 번이던가?”
* * *
“열 한 번이던가? 내가 무려 열 한 번이나 전화했는데. 감히 전화를 먼저 끊어? 지가 얼마나 잘났다고?”
“설리나 님. 진정하십시오. 20분 뒤에 쇼 행사에 나가셔야 합니다.”
“아 좀, 저리 가봐! 아악!”
푸른 머리의 젊은 여성이 화를 버럭버럭 내고 옆에서 집사인 듯한 남자가 굽신거렸다.
여자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자 책상이 들썩였다.
집사가 손짓하자 직원들이 고개를 숙이고 문밖으로 피신했다.
이제 대기실에는 푸른 머리 여자와 집사만이 남았다.
“이딴 쇼보다 이미주를 영입하는 게 100배 중요하다고. 내가 스타가 되려면, 좀 더 실력 좋은 PD가 붙어야 한단 말이야.”
머리에 붙은 화려한 복사꽃이 무색하게.
그녀의 얼굴은 화로 얼룩져 보기 불편했다.
“어떻게 50억을 거절하냐고? 6개월 일하는데 50억을 거절하는 건 진짜 미친× 아냐?”
“이미주 PD는 원래 돈을 보고 계약하지 않기로 유명합니다. 자기 소신이 뚜렷한 사람인지라.”
“알아. 지겹게 들었다고. 그 망할 완벽주의자. 대체 내가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냐고.”
“이미주 건은 그냥 포기하시죠. 굳이 그런 PD와 영상을 찍지 않으셔도. 설리나 님은 이미 훌륭하십니다.”
집사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그녀는 미국 재계서열 10위안에 드는 재력가의 외동딸.
평생 돈은 부족한 일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누군가는 꿈꿀만한 인생을 살고 있음에도.
그녀는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 한심한 소리 할 때가 아냐.”
그녀는 지금 질투에 사로잡혀있었다.
“트리니티는 TV쇼로 뜬 뒤로 승승장구하잖아. 이번에 패션사업으로 코가 제대로 높아졌던데? PD 주머니에 돈 꽂고 주인공 캐스팅된 거면서, 자수성가했다고 떠드는 꼴이 어찌나 웃기던지. 대체 내가 그 년보다 못한 게 뭐냐고!”
TV 스타가 된 친구를 보고 눈이 뒤집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자신도 돈만 들이면.
제대로 된 PD를 만나 영상을 내면, 성공한다고 계속 중얼거렸다.
‘그건 아닐텐 데.’
그러나 안타깝게도 집사가 보기에, 설리나는 그런 재질이 없었다.
실제로 증명되기도 했고.
설리나는 얼마 전, 홀로 패션쇼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PD에게 뒷돈을 두둑이 주고.
그 결과는?
당연히 대실패였다.
끼도 없고, 재미도 없고, 싸가지 없는 발언으로 반발만 불러일으켰다.
‘아버지 빽만 믿고 설친다며 욕을 바가지로 먹었고.’
결국 조기 종영으로 마무리됐다.
이제 PD들도 그녀를 다루기를 꺼렸는데.
설리나는 도리어 자신을 외면하는 PD를 탓했다.
그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이번에는 유토피아의 영상으로 대박이 나겠다며 이미주 PD에게 매달렸다.
“이미주 PD만 쓰면, 뜨는 건 한순간이라니까?”
그녀의 환상이 문제였다.
“난 스타야. 타고난 스타.”
자신은 스타이고.
어디서나 주목받아야 한다는 믿음.
그 광기 어린 믿음이 이미주 PD를 붙잡아야 한다는 집착으로 이어졌다.
“성공해서, 어떻게든 트리니티 코를 눌러버릴 거야!”
친구를 향한 질투가 그 원동력이 되었다.
집사는 그저 돌하르방처럼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누구도 말릴 수 없으니까.
“대체 돈을 주는데 왜 거절하는 거야? 미친 거 아냐?”
설리나의 안광이 사납게 번뜩였다.
“이딴 병아리나 찍어대니. 웃기기 짝이 없군.”
‘병아리 영상 보기 좋던데요….’
집사는 속으로 작게 반발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종종 피곤할 때 동물 영상을 보며 힐링하곤 했는데. 호준의 병아리들은 특히 귀여웠다.
작고 앙증맞은 토실토실한 엉덩이가 씰룩대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요새 아들이 병아리를 키우고 싶다고 안달복달해서 진땀을 빼기도 했다.
‘병아리가 짹짹대는 설리나보다는 백배 낫지.’
그런 집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설리나는 손톱으로 화면을 툭툭 내리찍더니, 말을 툭 내뱉었다.
“이 병아리 새끼들 좀 괴롭히면, 이미주한테서 연락 올지도 모르겠는데? 생각해보니 좋은 생각인 거 같아. 안 그래? 스미스?”
설리나의 발언에 집사는 깜짝 놀랐다.
왜 멀쩡히 사는 병아리를, 괴롭힌단 말인가.
‘병아리들이 위험해!’
집사는 어떻게든 말려보려고 머리를 쥐어짰다.
“하지만. 설리나 님. 아직 레벨이 30밖에 안되셨잖습니까. 이 플레이어는 꽤 강하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런 짓 하면, 구독자들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장비 갖춰서 가면 그만이고. 그리고. 병아리들이나 작은 동물들 납치하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 사람들이 상대하기 어려운 거지, 동물들이야 뭐. 멍청하기도 하고.”
이 겁 없는 아가씨를 어찌해야 하나.
집사는 말을 잇지를 못했다.
“그렇… 죠.”
그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진지하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뭘 말하던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여자니까.
“좋았어! 우르르 몰려가면 없어 보이니까. 혼자 가야겠다.”
설리나는 신이 나서 캡슐에 들어갈 생각에 싱글싱글 웃었다.
그런 설리나를 불쾌한 눈빛으로 보던 집사는 조심스레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어디론가 문자를 보냈다.
― 저기… 저는 일전에 연락드린 스미스입니다. 사실은 지금 설리나 님이… 민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메시지 전송을 마친 스미스는,
부디 어리석은 고용주가 헛된 생각을 버리기를 바랐다.
“음음~”
기분 좋게 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의 생각보다 병아리를 옹호하는 팬이 많고.
병아리도 화나면 무섭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