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 역전
“후! 이제 시작이군.”
“왠지 조금 떨리는데. 하하.”
흙바닥에 선 참가자들은 저마다 투지를 불태웠다.
누구나 1위를 하기를 원하지만, 누구나 1위가 될 수는 없다.
1위는 오직 한 명의 것.
누군가는 칼을 애정이 어린 손길로 어루만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계한다.
‘300명이라 그런가. 경기장의 삼 분의 일이 꽉 차네.’
호준은 벨트에 고정한 화살통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주위를 살폈다.
참가자들은 다들 긴장한 얼굴이다.
“어. 호준 님 아닙니까?”
“아 안녕하세요. 팔당 님?”
“하하. 기억하시네요. 가게가 아니라 이런 데서 다 뵙네요!”
마주 잡은 손이 흔들린다.
팔당의 새하얀 갑옷이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냈다.
팔당은 몇 번 가게에 찾아온 손님이었다.
‘직업이 성기사라더니. 빛을 띠는 걸 보니 맞는군.’
그의 갑옷에서는 새하얀 빛이 은은히 흘러나온다.
팔당은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에 남는 인데 고향이 팔당댐 근처라고 했다.
“장비를 갖춰 입으시니 또 달라 보이네요. 이전에는 편하게 하고 오셨죠.”
“하하. 매일 갑옷을 입고 다니면 불편한 법이니까요. 성기사라면 모름지기 백 갑옷을 입어야죠!”
팔당은 호탕하게 웃으며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친다.
캉캉―
철로 만든 장갑과 갑옷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가 난다.
성기사는 HP가 높고 신성한 주술을 쓸 수 있는 직업이다.
무력과 성스러운 주술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독특한 직업군이었다.
‘특히 악 타입과 상성이 좋지.’
팔당은 바닥에 칼을 꽂고는 넋두리를 했다.
“흠. 스테이지가 올라갈수록 난도가 높을 텐데. 어떤 미션이 나올지를 모르니 원 걱정입니다.”
“쉬울 리는 없겠죠.”
팔당의 말대로 콜로세움은 스테이지 시스템이었다.
스테이지 1을 시작으로 생존자 1명을 가릴 때까지 스테이지는 계속된다.
“음, 미리 조사를 좀 해 보니 깃발을 먼저 차지하는 미션도 있더군요. 깃발을 서로 가지기 위해서 싸우는 거죠.”
“아, 그건 저도 봤습니다. 서로 깃발을 차지하겠다고 배신에 배신하는 재미가 쏠쏠했죠.”
옆에 있던 남자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팔당은 신이 나서 팔을 휘휘 저으며 말한다.
“일정한 구역 내에서 생존자 10명이 될 때까지 싸우라는 것도 있더군요.”
“피도 눈물도 없는 규칙이지.”
둘은 죽이 잘 맞아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래도 보상은 훌륭하지 않습니까. 스테이지마다 보상을 주니.”
호준은 넌지시 말을 덧붙였다.
팔당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는 말입니다. 호준 님. 스테이지당 최소 100만 원이 넘게 보상을 주니. 다들 할 수밖에 없죠.”
“거의 보너스나 마찬가지니까요.”
스테이지 통과할 때마다 개인당 100만 원 이상이 주어진다.
그러니 다들 열심히 싸우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미션이 나올지 모른다는 건데.”
“운이 좋기를 빌어야겠죠.”
“허허. 여기서는 운이 좋은 게 최고죠. 그런데 이번 참가자 중에는 길드 소속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만? 비율로 치면 3분의 2 정도는 되겠는데요?”
팔당의 말대로였다.
개인 참가자는 대략 100명 정도.
나머지 200명은 길드 소속이었다.
“황색, 적색, 청색 옷이라. 옷이 다르니까 구분하기는 쉽네그려.”
길드마다 다른 색 제복을 갖춰 입어서 구분하기가 쉽다.
길드는 총 세 곳이었다.
팔당은 연신 길드원들을 힐긋거렸다.
좋은 장비가 부러운 모양이다.
‘확실히 아이템이 화려하긴 하네.’
호준이 보기에도 길드 소속 참가자들은 빛이 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갑을 갖춰 입었다.
화려하게 빛난다.
그러나 개인 참가자는 정반대였다.
전신무장은커녕 투구를 쓰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그나마 무기를 들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너무 대놓고 차이나네.’
이쯤 되면 한쪽은 절벽을 구르고, 한쪽은 꽃밭에서 꿀 따먹는 격이다.
“음. 저 투구 사려고 돈 모으는 중이었는데.”
“저 칼은 얼마짜릴까?”
개인 참가자 대부분이 부러움과 시기 섞인 시선을 보낸다.
그 시선을 눈치챈 것일까.
푸른색 제복을 걸친 길드원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개인 참가자 무리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큭. 꼭 똥이 마려운 강아지 표정을 하고 있군.”
“없이 사는 것들은 저래서 안 된다니까.”
“그냥 무시해. 실력이 안 되는 것들이니 신경 쓸 가치도 없다고.”
비웃음을 참지 못한 더벅머리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뭐라고? 강아지? 말이면 단 줄 알아? 길드 좀 들어갔다고 다냐? 엉? 다냐고!”
그를 따라 몇몇이 항의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지. 혹시 아나 내 칼이 네 배를 찌를지?”
“무슨 길드인지는 모르겠지만 10대 길드 아니면 어차피 하급이나 마찬가지 아냐?”
비난 섞인 말을 들은 길드원들은 얼굴을 붉혔다.
길드원 서넛은 삿대질하며 소리 질렀다.
“못 사는 것들이 입만 살아서!”
“누가 허접한지 겨뤄봐야 알지.”
“뭐야!”
“이것들이!”
“어디 한번 겨뤄보자고!”
거친 말이 오갔다.
어느새 두 세력이 서로를 향해 칼과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흠…….’
개인 참가자 뒤편에 선 호준은 말없이 사태를 관망했다.
‘저 사람은…….’
호준의 시선이 한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는 청색 제복에 새하얀 모자를 걸친 채로 걸어왔다.
청색 제복의 길드원들이 앞길을 터주었다.
“무슨 일이냐.”
“미하일 님! 저 녀석들이 주제도 모르고 건드리지 않습니까.”
길드원들은 시비의 책임을 더벅머리에게 전가했다.
“무슨…… 시비를 건 게 누군데.”
억울한 더벅머리가 변명하려다가 말을 멈추었다.
미하일이 순식간에 빼 든 칼날이 그의 목을 겨누었기 때문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 무슨…!”
“우리 길드에 시비를 걸었다면, 이 정도 각오는 되어 있을 텐데.”
“아 아니…….”
목에 칼이 닿자 더벅머리 남자는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호준은 누구나 들릴 만큼 또렷하게 말했다.
“시비는 그쪽이 먼저 걸었습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봤으니 증언할 수 있죠. 안 그렇습니까?”
호준의 물음에 사람들이 하나둘 말했다.
“저 사람이 먼저 저급하다니 못 사느니 하면서 말했습니다.”
“자기들이 시비를 걸어놓고 이쪽이 시비를 걸었다니. 적반하장이 따로 없군그래.”
사람들의 말이 들릴수록 미하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미하일은 호준을 똑바로 노려봤다.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쳤다.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미하일이었다.
미하일은 칼을 거두고 문제를 일으킨 셋을 향해 일갈했다.
“쓸데없는 일로 시끄럽게 굴지 마라.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있으면 상부에 이 일을 보고하겠다. 언제든지 길드 방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제명당할 수 있음을 잊지 마라.”
“죄, 죄송합니다.”
“바로잡겠습니다.”
길드원들은 늑대를 마주한 양처럼 순종하는 자세를 취한다.
미하일은 혀를 한번 차고는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움직이는 속도가 빠르다.’
호준은 바로 전에 미하일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되뇌었다.
삑―!
고음의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와! 시작이야!”
관중석에서 함성이 울려 퍼진다.
시작을 알리는 하얀 종달새가 경기장에 등장했다.
삐오리~!
종달새는 경기장을 한 바퀴 돌고 횃대에 내려앉았다.
경기장 한가운데에 거대한 전광판이 떴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벤트 진행을 맡은 바니바니입니다!”
글래머러스한 백금발 미녀가 원피스를 입은 채로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손을 흔들 때마다 훌륭한 몸매에 달린 토끼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우와! 이쁘다!”
“토끼 코스프레라니. 최고다!”
모두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바니바니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경기장의 뜨거운 열기에 몸이 달아오르네요! 아유 더워라. 모두 기다리시니 속히 이벤트를 진행하겠습니다. 경기에 앞서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부상을 먼저 보여드리겠습니다! 스킬 카드 외에도 오늘의 부상으로 주어질 것은 바로오오!!”
그녀가 손날로 오른쪽 아래를 가리켰다.
퓨욱!
손날 끝에서 쏘아진 레이저 포인트가 바닥에 꽂혔다.
쿠쿠―
황금빛 왕좌가 바닥을 가르고 올라왔다.
“순금으로 만든 왕좌에는 다이아몬드가 7,777개나 박혀 있답니다. 소장용으로도 제격, 판매용으로도 최고겠죠!”
“와아 멋지네!”
“우오! 왕좌래. 저거 팔면 얼마려나.”
“파는 걸 떠나서 집에 장식해두면 멋질 듯.”
“갖고 싶다 진짜.”
사람들의 욕망이 왕좌로 향했다.
도전자들이야 오죽하랴.
다들 욕망으로 눈이 번들거린다.
“자, 그럼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바니바니는 양손을 부여잡고 총 모양을 취하더니 하늘로 손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검지에서 황금 폭죽이 발사되었다.
삐이잉― 파앙!
폭죽은 거대한 공 모양으로 터졌다.
빛 입자가 사방으로 터진다.
후두두―
“우와!”
“오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황금비에 모두가 물개박수를 쳤다.
“그럼 스테이지 1을 시자악!!!”
【스테이지 1】
【미션】 : 살아남은 자가 150명이 될 때까지 싸워라.
【성공 보상】: 1,500골드, 다음 스테이지 진출
【현재 생존자 인원】 : 300명
전광판에 뜬 메시지는 간단하다.
150명이 될 때까지 싸워라.
“오, 1,500골드라고?”
“잠깐 싸우고 150만 원이면 개꿀이네.”
“아 나도 참가하는 건데.”
클리어 보상을 두고 관객석에서는 부러움 섞인 탄식이 흘러나온다.
“레드윙 길드 이쪽으로 모여라!”
“블루불 길드는 이쪽이야.”
“옐로우스타는 하나다!”
그러나 모두가 기대한 전투는 바로 벌어지지 않았다.
길드원들끼리 모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뭐야. 왜 저러는 건데?”
“왠지 불안한데…….”
개인 참가자들도 싸우지 못했다.
“젠장. 길드 녀석한테 너무 유리한 게임 아냐?”
“자기들끼리 뭘 구시렁거리는 거냐고!”
길드 녀석들이 한데 뭉치고 있으니 어느새 무대는 길드 녀석들 vs 개인 참가자 구도로 바뀌었다.
‘이번 미션은 길드 소속 참가자에게 유리해.’
길드원들은 일단 다 합하면 200명, 그리고 같은 길드끼리는 죽이지 않기로 합의를 볼 수 있었다.
그에 반해 개인 참가자는 홀로 모두와 맞서 싸워 살아남아야 한다.
‘나도 그쪽에 속하고.’
팔당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길드 녀석들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흠……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그 시선 끝으로 길드의 지도자 격인 녀석들이 뭔가를 논의하는 중이었다.
그 대화 내용을 엿들은 호준은 미소를 지었다.
‘예상대로군.’
호준은 팔당을 향해 눈을 마주치고는 넌지시 말했다.
“팔당 씨. 잠시만….”
대화를 마치고 나자 팔당이 눈을 빛냈다.
“자네가 말한 대로 판을 깔아주겠네. 나만 믿게!”
“고맙습니다.”
팔당은 호준의 화살 위에 손을 올리고 주문을 중얼중얼 외웠다.
그에게서 새하얀 오라가 피어오른다.
호준은 미리 챙겨온 단검을 한 손에 들고,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저들이 마음대로 하게 놔둘 수는 없지.’
“공격이다!”
“전부 죽여라!”
“싹 쓸어버려!”
드디어 길드원들이 개인 참가자 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치열한 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 * *
같은 처지에 있게 되면, 왠지 모르게 동질감이 들기 마련이다.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고 하더라도.
지금 길드원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개인 참가자들의 경우가 그러했다.
“오른쪽에 인원 부족하네. 뒤에서 좀 더 나오라고!”
“오케이! 뒤에서 가겠네!”
“힐러는 가운데로 와!”
“네!! 얼른 일어나세요! 힐!”
“크으윽! 고, 고맙습니다!”
고양이에게 내몰린 쥐들은 힘을 합쳤다.
힐러는 안쪽에서 다친 이를 지원하고 전사는 전방에 나선다.
다들 모르는 사이였음에도 의외로 잘 단결되어 싸우고 있었다.
“재수 없는 길드 녀석들!”
“다굴 치는 데 당할 순 없지!”
힘이 없다고 해서 자존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시하는 눈빛이 그들의 투지를 불태우게 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싸움에도 힘의 격차는 너무나 컸다.
점점 전선이 밀리기 시작했다.
“하아. 이쪽에 큭!”
털썩―
“단숨에 끝내버린다!”
“우오!”
적들은 숫자도 많고 장비도 훌륭하다.
힘의 우위 앞에서 개인 참가자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제기랄!”
“바퀴벌레처럼 많네!”
“저 제복 좀 안 봤으면 좋겠어!”
남아서 방어하고 있던 이들도 점점 지쳐갔다.
지친 몸으로 싸우다 보니 진형이 흐트러졌고.
“큭!”
“푸웁!”
사상자가 속출했다.
“누구 없어!”
“오른쪽이 뚫린다.”
한쪽이 뚫리면 와해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위태로운 상황.
“빨리 오른쪽으로 누구라도 가!”
절박한 외침이 울려 퍼진 그때였다.
눈이 부신 빛이 팍
터진 것은.
“성령의 가호!!”
빛을 뚫고 처절한 외침이 들렸다.
난데없는 빛으로 모두 주춤했다.
빛이 사라졌을 때, 사람들은 입을 벌렸다.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의 곁으로 새하얀 오러가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저자는…… 아까 미하일 님께 말대꾸하던 녀석 아냐?”
누군가 중얼거리자, 파란 제복을 입은 이들이 무기를 위로 들었다.
“죽여버리자.”
“가슴에 죽창을 꽂아.”
날카로운 살기.
그러나 호준의 표정은 마치 성자라도 되듯 온화했다.
그의 주위로 하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그에게서는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누구지?”
“아까 뒤에서 뭐 준비한다고 하던 녀석 아냐?”
호준의 정체를 잘 모르는 개인 참가자들 역시 갸우뚱하며 그를 보았다.
‘고마워요.’
호준은 긴 시간 동안 스펠을 걸어준 팔당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부탁하네!”
팔당은 씩 성격 좋은 미소를 짓고는 호준의 옆에 섰다.
검을 높이 들은 채로.
떡 벌어진 어깨와 올곧은 자세는 늠름한 중세기사 같았다.
‘이제 시작이다.’
맹독 화살은 적에게 타격을 입힌다.
그러나 일정 시간 힐러에게 치료를 받으면 회복할 수 있다.
그러니 적이 많으면 맹독 화살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기에 팔당에게 부탁했다.
‘무적이 되게 해달라고.’
【성스러운 가호가 당신의 화살에 내려집니다!】
【앞으로 5분 동안 화살에는 신성함이 깃듭니다】
【5분 동안, 이 화살로 인한 대미지는 그 누구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이제 화살에 맞으면, 죽음으로 가는 열차를 타는 것이었다.
맹독 화살의 효과는.
극독. 공포. 혼란.
멀쩡한 몸을 허수아비가 되게 만드니까.
‘5분 안에 쓸어버린다.’
호준은 활시위를 세게 당겼다.
이제 역전극을 시작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