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를 너무 잘함-25화 (25/200)

025. 주스 가게 시작 (6)

방문객은 혼자가 아니었다.

두 명.

한 명은 호준도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엘리아가 왜 여기?’

정보를 팔러 마을에 왔다던 엘리아가 여기는 무슨 일일까.

의아하게 느끼는 호준에게 다가온 엘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실례합니다, 호준 님. 잠깐 시간 좀 괜찮을까요?”

“말씀하시죠.”

“사실은 제가 여기 오게 된 이유는….”

그녀는 가판대가 아닌 오두막을 찾게 된 자초지경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고서 호준은 그 말을 되짚어 물었다.

“그러니까… 고객한테 주스를 줬는데 궁금하다고 해서 이 오두막까지 왔다 이 말이죠?”

“네. 워낙 완고하셔서… 그렇게 됐네요. 하하.”

결국 엘리아가 환심을 사고자 건네준 주스가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고객이 재촉하는 바람에 엘리아가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주스만을 위해 오두막까지 찾아온 이들.

갑작스러운 일이기는 했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직접 키운 과일로 만든 주스를 맛있게 먹고 또 먹고 싶어서 찾아왔다는데, 안 반길 리가.

호준은 방문객을 한번 살펴보았다.

엘리아의 고객은 연분홍색 머리칼이 어깨까지 내려오고, 맑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피부는 하얗고 눈빛에 총기가 가득해 강단 있어 보였다.

호준은 엘리아와 그리고 이곳까지 오고 싶어 했다는 고객, 분홍 머리 여자를 향해 말을 붙였다.

“주스를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저는 이 농장의 주인인 호준입니다. 여기는 제 소환수인 별이, 미르이구요.”

“안녕하세요!”

“끼루루!”

소개를 마치자 분홍 머리 여자가 낭랑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갑습니다. 호준 님. 저는 베아트리체라고 합니다. 잠깐 마실을 나왔는데 우연히 맛본 주스가 너무 맛있어서 갑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친절하게 맞아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베아트리체는 무릎을 살짝 굽히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의 음성은 노래처럼 리듬이 있어서 예의 바른 말의 내용과 잘 어울렸다.

그렇게 인사를 마치자 호준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베아트리체 님. 주스는 몇 개 필요한가요?”

“다 사고 싶습니다. 지금 있는 주스라면 다.”

“개당 40골드인데 다 사시겠다고요?”

40골드는 절대 싸다고 말할 가격은 아니었다.

주스가 완판되니 40골드가 별 것 아닌 듯해도 40골드는 토지 8개를 살 수 있고, 3급 마차 1시간을 탈 수 있는 돈이었다.

물론 이 가격에 대한 정보는 시식 행사 때 손님의 대화에서 들은 내용이라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펑펑 쓸 돈은 아니었던 것.

호준은 베아트리체의 다음 말에 주목했다.

그녀는 은은한 미소지으며 꼭 사야 하는 적절한 이유를 답했다.

“내일이 제가 사랑했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3주년 되는 날입니다.”

“……!”

“남편은 요리사였어요. 실력이 좋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과일주스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어요. 과일을 유독 좋아해서 과일주스를 맨날 만들었거든요. 주구장창 하나만 만드니 실력이 느는 모양이더군요.”

“그러셨군요.”

베아트리체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편은 과일주스를 워낙 좋아해서 늘 입에 달고 살았죠. 어느 날 강물에 물이 불어나서… 남편이 사고로 먼저 갔죠. 어쩔 수 없는 사고였어요. 그 뒤로 매년 비석에 과일주스를 뿌려줬어요. 저세상에서 그 좋아하는 과일주스 맛이라도 좀 보라고. 평소에는 잡화점에서 주스를 샀는데. 운명처럼 호준 님 주스를 맛보게 되었죠.”

그녀는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리며 사근사근 말했다.

“주스를 맛보며 예전 생각이 났어요. 남편이 만들어주던 주스는 먹고 나면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 느낌이 기억났습니다. 왠지 남편에게도 그 주스를 꼭 맛보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초대받지 못했음에도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네요. 송구합니다.”

베아트리체는 연신 죄송하다, 송구하다는 말을 하며 꾸벅였지만, 호준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말렸다.

맛있어서 이곳까지 찾아와준 것만도 고마운 일이었다.

조금 갑작스러운 방문이지만 그렇다고 불편한 것도 아니고.

호준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저는 좋아서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 요리에 기뻐해 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여기 와주신 것만 해도 제겐 큰 칭찬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잠시 여기서 기다려주시겠어요?”

“가, 감사합니다. 호준 님.”

회상 때문인지 눈시울이 붉어진 베아트리체를 엘리아에게 맡겨두고서 호준은 자동 믹서기 쪽으로 걸어갔다.

미르와 별이도 그 곁을 걸었다.

믹서기에 도착하니 주스는 생각보다 많아서 총 5개가 완성되어 있었다.

종류별로 다음과 같았다.

【산딸기 바나나 주스(4급)】 × 2

【산딸기 키위 주스(4급)】 × 2

【산딸기 꿀사과 주스(4급)】 × 1

‘이 정도면 괜찮겠다.’

너무 적을까 봐 걱정했는데 종류도 3가지에 5병이나 되었다.

호준은 다행이다 싶어 주스를 인벤토리에 챙겨 넣고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주스를 5개나 살 수 있다는 말에 베아트리체가 연신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기뻐했다.

“색깔이 곱네요. 그이도 좋아할 것 같아요. 저… 가격은 200골드 맞지요?”

“특별히 현지 가격으로 160골드에 해드릴게요!”

“으응… 네?”

160골드 선언에 베아트리체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잠시 입술을 말다가 한 손을 들며 반문했다.

“저, 하나에 40골드라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엘리아?”

“맞아요. 40골드. 수도에 비하면 완전 거저죠. 개당 100골드라고 해도 다들 살 겁니다. 주스라면 이골이 나게 먹어본 제 입맛을 속일 수 없다니까요.”

“그, 그래요. 호준 님. 160골드는 너무 싸요. 제값을 치르게 해주세요.”

베아트리체는 엘리아의 말에 힘입어 강경하게 200골드를 내밀었다.

그러나 호준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살짝 밀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는 그냥 줘도 괜찮지.’

그에게는 돈이 전부가 아니었다.

40골드.

어차피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돈이었다.

그의 꿈은 농사일해서 요정들을 부려 세계 정복을 하거나, 재벌이 돼서 갑질하겠다는 게 아니었다.

그냥 자신과 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만들어주는 것.

그들이 요리를 먹고 행복해하길 바랐고 호준 자신도 적당히 돈 벌며 적당히 즐기는 것을 원했다.

돈에 목매서 악착같이 살아가는 건 현실에서만 해도 충분했으니까.

그렇기에 멀리까지 품을 팔아 찾아온 베아트리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해주고 싶었다.

“하나는 서비스로 드리는 겁니다. 음식을 만드는 입장이 모두 그렇겠지만, 손님이 맛있게 먹어주는 게 제일 고마운 법이거든요. 그러니 160골드만 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호준은 그녀가 내민 동전 더미에서 40골드만 빼고 받았다.

그의 진심이 전달된 것일까.

베아트리체는 입을 달싹이다 말았고, 엘리아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베아트리체가 주스를 가방에 챙겨 넣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말하시니까 제가 할 말이 없어지네요.”

“대신 주위에 맛있다고 입소문 좀 내주세요. 하하. 농담입니다.”

그 말에 베아트리체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이 정도 맛이면, 입소문을 내지 않으려 해도 알아서 입소문이 날 거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호준이 농담으로 한 거라는 걸 알기에.

돈에 눈이 멀지 않은, 자부심을 지니고 일하는 청년의 모습에 베아트리체는 내심 감동했다.

“재미있으신 분이네요. 호준 님은.”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네요.”

“앞으로 더 재미있는 일이 많아질 것 같아요. 앞으로 가게 번창하시길 기원할게요!”

베아트리체는 치마를 부여잡고 무릎 인사를 하고는 엘리아와 함께 길을 나섰다.

몇 걸음 걷던 베아트리체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호준을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호준 님. 주기적으로 열리는 사교모임이 있는데 주스를 소개해도 괜찮을까요?”

그녀의 말에 호준은 잠시 생각했다.

사교 모임이라.

흔히 소설에서 읽은 사교모임을 떠올리자 귀족 여성들이 부채를 들고 티와 디저트를 먹는 광경이 떠올랐다.

케이크나 푸딩 그런 디저트가 커피 테이블에 올라가 있고.

과연 과일 주스가 그 달달한 디저트와 경쟁이 될까.

잠시 생각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속단은 금물이지.’

가능성을 속단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짓은 없었다.

뭐든 해보지 않으면 결과를 알 수 없는 법이니까.

어쨌든 그녀가 홍보해 주겠다는 말이니 나쁘지 않아 보였다.

“괜찮을까요?”

살짝 떨리는 목소리를 내는 그녀에게 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긍정에, 베아트리체는 태양처럼 환하게 웃었다.

* * *

숲을 벗어난 베아트리체는 오솔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방금 만난 호준.

농부이자 요리사인 그에 관한 생각이었다.

‘그에게 배울 점이 참으로 많았지.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 열정. 그리고 배려심까지.’

무엇보다 부러운 것은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점이었다.

눈빛에서 그 열정과 희망이 보였다.

‘그동안 너무… 시간을 허비했던 걸까.’

그녀는 남편이 사고로 간 뒤 화가라는 꿈을 접었다.

접었다기보다는 잊고 지냈다.

붓을 들지도 않고 잡일만 하며 지난 3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 긴 시간을 허비했던 것이 왠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더 분발하자. 지금부터라도 하는 거야.’

그녀는 가슴 깊이 파묻은 꿈을 꺼냈다.

그리고 다시 굳게 부여잡았다.

누군가의 주스에서 시작된 기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