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주스 가게 시작 (3)
호준은 외로움을 많이 느꼈다.
20대 초반.
그는 친구를 만나도 가끔 외로움에 사무쳤다.
근본적인 외로움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가끔 무척이나 외로웠다.
그렇다고 연애를 하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참… 그때는 외로움을 많이 느꼈지.’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몸을 혹사시키면 외로움을 한동안 잊을 수 있었다.
그 시절에는 취직하면 외로움을 덜 느낄 거라 생각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건 명백한 착각이었다.
취직하면서 오히려 외로움을 더 많이 느꼈다.
점점 친구를 만나는 시간은 줄어들고 경쟁은 치열해졌다.
‘회사생활도 쉽지 않았지.’
회사는 총성 없는 전쟁터였다.
이 전쟁터에서 살아남으려면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려야 했다.
남이 하는 대로.
남이 원하는 대로.
자신을 잘 꾸밀 줄 알아야 인정받았다.
호준은 사회가 원하는 대로 전력 질주했다.
쉼 없이 달리면서도 옆구리 한구석에는 외로움이 늘 자리했다.
그는 외로움을 이기고자 책을 읽었다.
책은 일시적으로 외로움을 잊게 해주었다.
밤늦게까지 만화책을 보며 박장대소했다.
읽는 책을 가리지 않아 장르소설, 판타지소설을 많이 읽었다.
한번 책에 몰입하면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책에 몰입하며 외로움을 잊고자 했다.
그러나 마음속의 외로움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친구들을 만나도 이건 해소되지 않았다.
오랜 시간 같이해 온 외로움은 정말 질기고 질겼던 것이다.
그나마 호준은 책을 읽는 방법을 터득한 것에 만족했다.
책은 일종의 소화제였다.
잠시 상태를 완화해주는.
그렇게 책으로 외로움을 달랬는데 최근 상황이 급변했다.
놀랍게도 최근 들어 그는 책을 읽지 않아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 호준은 가판대 시식 행사를 진행하다가 불현듯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아마 요정때문일거야. 요정하고 만난 뒤로 웃는 일도 많아졌으니까.’
호준은 수년간 자신을 괴롭히던 외로움의 사멸을 요정들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요정들과 함께한 뒤로 작은 일에도 웃었다.
함께 있다 보면 푹 쉴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지긋지긋한 외로움이 마음속에서 점점 죽어간 게 아닐까.
“꿀꺽꿀꺽―”
호준은 가판대 맞은편에서 시식용 주스를 먹는 남자를 보았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요새 소화도 잘되고. 속도 편해졌네. 요정효과인가.’
업무시간에 스트레스도 줄어들었고 웃는 일도 많아졌다.
옆 부서 직원에게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냐는 말도 들었다.
아무래도 요정이 복덩어리인 모양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비과학적일지라도 요정이야말로 상담이나 약보다 더 확실한 치료법이었다.
“뀨우우우!”
때마침 토순이의 까끌까끌한 혀가 목덜미를 쓸었다.
귀를 손톱으로 살살 긁어주자 토순이가 큐큐큐―거리며 웃었다.
울음소리가 요망하기 그지없었다.
보드라운 털과 털끝으로 전해지는 온기.
그가 생각하기에 요정을 보면 홀리는 게 당연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마음을 뺏기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으랴.
【토순이가 당신에게 애정을 표합니다】
토순이의 귀가 은근슬쩍 가슴 언저리를 문질렀다.
민들레 솜털이 닿는 느낌에 미소를 지으며 토순이를 덥석 안아 포옹했다.
“뀨우웅―!”
토순이의 저항을 무시하며 빵 냄새를 들이마시자 바게트 생각이 났다.
귀엽기만 할 것인지 향기도 너무 좋았다.
이렇게 완벽한 존재가 또 있을까.
“저기… 주스 병은 여기에 놓을게요! 잘 먹었습니다.”
때마침 시식을 마친 남자가 주스 병을 가판대 위에 올려두었다.
호준은 토순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남자에게 인사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네, 잘 먹고 갑니다!”
호준은 정신을 차리고 일에 집중했다.
그는 시식용 주스 병을 들고 크게 소리쳤다.
“다음 분 앞으로 와주세요!”
“접니다!”
그러자 단발머리 여자가 가판대 앞으로 다가왔다.
귀를 살짝 덮은 붉은색 단발머리와 붉은 눈이 매력적인 여자였다.
꿀꺽 꿀꺽.
주스를 들이켤 때마다 그녀의 붉은색 동공이 점점 커졌다.
마침내 주스를 다 마신 그녀가 주스 병을 가판대에 내려놓더니 화사하게 웃었다.
“정말… 말이 필요 없는 맛이네요. 제가 마신 그 어떤 주스보다 맛있습니다.”
그녀의 와인색 눈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극찬이 이어졌다.
“여기 오기를 잘한 것 같아요. 이렇게 맛있는 주스를 맛보다니. 덕분에 갈증이 싹 달아났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호준입니다.”
“그렇군요. 호준 님. 저는 정보상 일을 하는 엘리아라고 합니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조사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정보를 파는 직업이죠. 요하나 마을 너머로 갈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정보가 필요하면 말씀해주세요. 저 그리고 호준 님. 혹시 주스가 남아있나요? 앞에 사람들이 좀 사가는 것 같던데. 이대로 그만 먹기는 아쉽네요. 다른 맛도 괜찮으니 남은 걸 다 사고 싶습니다.”
그녀는 눈을 빛내며 조심스레 물었다.
호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토순아!”
“뀨우우!”
귀를 쫑긋대던 토순이는 주스 병을 귀로 집어 들어 올렸다.
귀가 모차렐라 치즈처럼 쭉 위로 늘어나 주스를 들어 올려 엘리아의 손아귀에 놓았다.
엘리아는 주스를 받으면서도 히익―하며 놀랐다.
그녀가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어머! 신기한 능력을 지닌 소환수네요. 동글동글한 게 모닝빵 같기도 하고!”
“뀨우우!”
“목소리도 귀여워라!”
“저희 가게 귀여움 담당입니다. 아, 그리고 이제 그 주스가 마지막입니다. 더 이상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하나라도 사서 다행이네요. 한 병에 40골드 맞죠?”
“네. 골드는 가판대 위에 올려주세요.”
“잠시만요!”
그녀는 주스를 가방에 넣고 가판대에 40골드를 올렸다.
【산딸기 바나나 주스(4급)을 잃었습니다】
【40골드를 얻었습니다】
거래가 끝나자 그녀는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앞으로 여기서 장사하시는 거죠?”
“그럼요. 주스 종류를 천천히 늘려볼 생각입니다.”
“토끼바위, 토끼바위… 기억해둬야겠어요. 다음에도 맛있는 주스 기대할게요. 그럼.”
그녀는 붉은색 로브를 펄럭이며 마을을 향해 힘차게 걸어갔다.
그녀 뒤로도 손님이 5명이나 있었으나 아쉽게도 주스는 재고가 없었다.
호준은 주스가 완판되었다는 사실을 고지하고 시식 주스를 나누어 주었다.
다행히 주스 한 병당 15번 정도 먹을 수 있기에 남은 이들이 먹기에 충분한 양이 남아있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고맙네. 시식 주스라도 맛보게 해줘서.”
“이번에는 못 사지만 다음에는 꼭 사야겠어요.”
손님들은 아쉬워했지만 시식은 할 수 있기에 큰 불만은 없었다.
그렇게 시식 행사를 끝내고서 사람들은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떠났다.
“잘 먹고 갑니다!”
“맛이 진짜 좋았어요!”
“다음에도 꼭 들를게요!”
“토끼바위, 잊지 않을게요!”
사람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각자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아까보다 다들 힘이 넘치네.’
힘차게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자 왠지 마음이 뿌듯해졌다.
시간을 체크해 보니 판매를 시작한 지 겨우 15분밖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의외로 빨리 팔렸네.’
15분 만에 주스 10개 완판.
첫 판매임을 감안하면 괜찮은 결과였다.
호준은 무덤덤하게 결과를 받아들이며 이번에 판매한 주스 목록을 체크했다.
【산딸기 사과 주스(4급)】× 5
【산딸기 바나나 주스(4급)】× 3
【산딸기 키위 주스(4급)】× 3
4급 주스 11개를 팔았고 440골드를 획득.
적지 않은 수확을 올릴 수 있었다.
무려 440골드.
호준은 돈을 쓸데가 생각났다.
바로 농지와 씨앗을 사는 것이었다.
과일 수확량을 늘려야 더 많은 주스를 만들 수 있었다.
‘이왕이면 새로운 과일도 키워보자. 그러면 맛이 더 다양해지겠지.’
다양한 과일이 주렁주렁 매달리는 상상을 하자 왠지 기대되었다.
과일을 가공해 주스를 파는 일은 생각보다 보람 있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웃는 걸 보니까 왠지 기분이 좋단 말이야.’
직접 만든 주스를 사람들이 먹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호준도 덩달아 웃음이 났다.
현실에서 요리를 잘 못 하는 호준으로서는 어색하지만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왕이면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행복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
새로운 도전을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츄릅 츄릅―
“아하하. 간지러워 토순아.”
토순이가 귓불을 핥는 바람에 팔짝 뛰고 말았다.
이제 보금자리로 돌아갈 시간이기에 호준은 토순이를 안고 다리를 움직였다.
“토순아. 주스도 다 팔았으니까 별이랑 미르랑 아무 보러가자.”
“뀨우우우!”
【토순이가 기쁨에 몸을 부풀립니다】
품 안에서 부풀어 오른 토순이는 부푼 인절미 같았다.
토순이는 몸을 발라당 뒤집어 분홍색 배를 드러냈다.
배에 짧은 솜털이 났는데 손끝으로 문지르니 수면 바지 재질처럼 보들보들했다.
손길이 닿자 토순이는 골골골 울며 귀를 늘어뜨렸다.
토순이는 아무래도 마음을 훔칠 줄 아는 요망한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요망한 토끼 같으니라고.”
“뀨우웅!”
오동통한 배를 살짝 누르자 토순이는 웅―하고 울면서도 자세를 유지했다.
【토순이가 계속 만져달라고 합니다】
요망한 의도에 호준은 기꺼이 넘어가 주었다.
쪼물쪼물
그렇게 토순이의 배를 만지작거리며 호준은 보금자리로 향했다.
외로움을 이겨낸 그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그의 손은 토순이의 배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어…? 벌써 다 파신 거예요?”
“끼우우?”
“므으으으?”
풀밭을 뒹굴거리던 요정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호준에게 다가왔다.
호준은 요정들을 모아놓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15분 만에 완판이라는 소식에 별이는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와아아…! 제대로 준비해서 가게 차리면 대박 날 것 같은데요?”
“그런가…?”
“끼루루!”
“무우우!”
다른 요정들도 축하의 의미로 바닥을 뒹굴며 재롱을 피웠다.
만나서 반가워서 그런 건지 축하의 의미인지 알 길은 없었지만.
어쨌든 하는 짓이 대견해 한 명씩 배를 간지럽혀주었다.
한바탕 요정들과 놀고서 호준은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했다.
별이는 땅과 씨앗을 산다는 말에 적극 동의했다.
“저도 호준 님의 의견처럼 땅과 씨앗을 사는 게 좋겠어요. 가게를 차리려면 주스도 더 많이 만들어야 하니까요.”
“동감이다. 지금 만들어둔 주스는 없지?”
“네. 아직 수확하려면 시간이 남아있어요.”
“하긴. 떠난 지 15분밖에 안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럼 나는 천천히 마을 갔다 올 테니까 네가 수확을 맡아주렴.”
“넵! 다녀오세요! 저 혼자서도 괜찮으니 애들이랑 다녀오세요.”
“그럴까?”
믿음직스러운 별이는 혼자 있어도 괜찮다고 했다.
호준은 그녀에게 떠밀려 나머지 요정들을 안아 들었다.
“아무우우!”
토순이가 머리 위에. 미르와 아무가 양팔에 안겼다.
“자 이제 출발이다.”
“뀨우우!”
“끼루루!”
“아무우우!”
“다녀오세요!”
다시 요정과 한 덩어리가 되어 호준은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요정들은 온전히 몸을 맡겼고, 호준은 소중히 그들을 안았다.
심장과 심장이 교차했다.
숨과 숨이 이어졌다.
마음과 마음이 닿았다.
그사이에 외로움이 비집고 들어 올 틈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