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요리 시작 (1)
일상은 평화로웠다.
호준은 로그아웃한 뒤 출근 준비를 했다.
평소처럼 가볍게 씻고 시리얼을 먹고 출근했다.
가상현실기기의 좋은 점은 게임을 하는 동안 잠자는 것처럼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잠자는 시간에 플레이하고 나머지 시간에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호준은 캡슐에서 피로를 푼 개운한 상태로 일에 몰두했다.
일상적인 업무와 새로운 업무를 마무리하자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다.
그럭저럭 별 탈 없이 하루가 끝난 것.
호준은 평소에도 그러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퇴근 시간이 기대되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에 밥을 먹다가 별이, 미르, 아무는 잘 있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고.
주렁주렁 열매를 매달고 있을 꿀사과 나무도 떠올랐다.
생각만으로 침이 고이게 하는 산딸기도 당연히 생각났고.
유토피아는 삶을 더 생기있고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띠로릭
퇴근하자마자 달려온 집안은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정돈되어 있었다.
호준은 후다닥 몸을 씻고 김밥헤븐에서 사 온 치즈떡볶이와 어묵탕을 먹으며 배를 채웠다.
그렇게 식사까지 마치고서 그는 잠옷을 입고 기기에 들어갔다.
【유토피아에 접속합니다】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그는 낙원으로 갔다.
* * *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메시지였다.
【수확 가능한 농작물이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호수와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리고 진갈색 오두막이 옆에 보였다.
풋풋한 나무 향을 맡으며 호준은 자신이 오두막 옆임을 깨달았다.
삐그덕
“호준 님!”
“무우우!”
“끼루!”
나무문이 열리고 요정들이 안에서 쏟아져나와 그에게로 달려왔다.
“다녀왔다.”
호준은 두 팔 벌려 달려드는 요정들을 안아주었다.
미르와 아무가 양쪽 옆구리를 파고들었고 별이는 날개를 사부작대며 근처를 맴돌았다.
호준은 미르와 아무의 폭신폭신한 옆구리를 조물락대며 별이에게 질문했다.
“별아. 별 탈 없이 잘 지냈니?”
“네. 물놀이도 하고 배고프면 과일도 먹으면서 기다렸어요. 그보다 확인하셔야 할 게 있는데….”
“확인이라고?”
“네.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잠시 저를 따라와 주시겠어요?”
“그래.”
호준은 갸웃하며 달덩이 같은 아무와 미르를 안고 그녀를 따라갔다.
아무와 미르는 안긴 채로 서로에게 팔을 뻗으며 장난을 쳐댔다.
별이는 폴폴 날아 오두막 뒤편에 멈추었다.
“어어…!”
호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언가를 보고 놀랐다.
그것은 과일 더미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과일 더미가 펼쳐졌던 것.
탐스러운 산딸기와 황금빛 꿀사과가 잔뜩 쌓여있었다.
얼핏 보아도 수십 개가 넘어 보였다.
호준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사정을 물었다.
“이렇게 많이. 언제 이렇게 딴 거야?”
“과일이 익을 때마다 한두 개씩 따다 보니까 금방 모이더라구요. 미르랑 아무도 많이 도와줬어요.”
“그랬구나. 고생했다.”
“별말씀을요.”
부지런히 수확물을 인벤토리에 넣어보니 과일의 개수는 상당했다.
전부 다 해서 100개가 넘었다.
【꿀사과(6급) × 40】
【산딸기(7급) × 90】
‘왠지 시작이 좋은데.’
호준은 흐뭇하게 웃으며 아무와 미르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까르르르르!”
둘은 몸을 요리조리 비틀면서 저항했으나 안겨있는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적당히 간지럽혀주다가 엉덩이를 톡톡 치며 다시 제대로 안아 들었는데, 갑자기 메시지가 나타났다.
새로운 퀘스트였다.
“오옷! 요리 퀘스트네요.”
“그래? 어디 보자….”
호준은 아무와 미르를 바닥에 내려주고 차분히 퀘스트창을 살펴보았다.
【직업 퀘스트】 과일 주스 만들기(1)
【퀘스트 목표】: 수동 믹서기로 과일 주스 5개를 제조하십시오.
【퀘스트 설명】
*과일주스는 천연 피로 회복제입니다.
*주스로 만들면 과일 맛이 한층 더 훌륭해집니다.
【퀘스트 보상】: 자동 믹서기 제조법
‘주스로 만들면 과일 맛이 더 좋아진다는 게 괜찮네.’
성명을 읽을수록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주목할 부분은 ‘주스로 만들면 맛이 훌륭해진다’는 문구.
산딸기의 맛을 알고 있기에 그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보다 더 맛있다니.
‘대체 얼마나 맛있다는 걸까.’
침이 저절로 고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산딸기 주스의 맛은 상상만으로도 기대됐다.
물론 내용도 만족스럽고 퀘스트 보상도 괜찮았다.
보상은 자동 믹서기 제조법.
기능은 잘 모르지만, 자동 믹서기라고 하니 요긴하게 쓸 데가 많을 것 같았다.
‘일단 저 수동 믹서기라는 것부터 만들어보자.’
호준은 먼저 퀘스트 목표에 적힌 수동 믹서기를 제작하기 위해 제작 카탈로그를 열었다.
그리고 해당 믹서기를 찾아보았다.
수동 믹서기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수동 믹서기】
【재료】 : 나무토막 90개, 돌조각 10개
【설명】
*요리 재료를 가공하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손잡이를 돌려 사용합니다.
*과즙을 짜거나, 단단한 곡물 등을 가루로 분쇄할 수 있습니다.
*과일 주스, 쌀가루, 밀가루, 설탕 등을 만들 수 있습니다.
【보유기능】: 원액추출 모드, 가루분쇄 모드
【제작 (재료 부족)】【닫기】
수동 믹서기는 네모난 통에 커다란 깔때기가 위에 달려있고, 옆에는 회전식 손잡이가 달린 형태였다.
깔때기에는 재료를 넣으라는 걸로 보였다.
재료를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갈리는 걸로 추정됐다.
문제는 수동 믹서기를 만들 재료가 부족하다는 것.
오두막을 짓고 풀 침대를 만드느라 나무토막도 남은 것이 없었다.
옆에서 잠자코 있던 별이도 그 부분을 집어냈다.
“음. 믹서기를 만들 재료가 부족하네요.”
“나무토막은 구하면 될 텐데. 돌조각은 어디서 구해야 하지.”
그때 별이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조언했다.
“호준 님. 나무토막이라면 충분히 있어요.”
“응? 어디 있다는 거야?”
무슨 말이냐는 의미로 되묻자 별이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미르가 힘자랑한다고 나무를 부숴놔서 나무토막을 주워다 놨거든요. 저쪽에 다 모아놨습니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은 느티나무 뒤편이었다.
슬쩍 다가가 보니 나무토막이 층층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많이도 모았네.”
언뜻 보아도 100개는 넘어 보였다.
“잘했다.”
“자꾸 칭찬해주시면 계속하고 싶어질 거 같아요.”
“그럼 계속 칭찬해줘야겠네.”
칭찬을 받자 별이는 어깨를 흔들대면서도 좋아하는 눈치였다.
호준은 피식 웃고는 별이를 어깨에 앉히고는 성큼성큼 나무토막 더미 쪽으로 다가갔다.
【나무토막】× 120
인벤토리에 넣고 보니 나무토막 개수는 무려 120개나 되었다.
이로써 나무토막은 충분히 모은 상황.
다음은 돌조각을 모을 차례였다.
“돌조각은 돌을 깨면 나오려나?”
“맞습니다. 돌을 깨다 보면 돌 조각이 나오고. 아주 가끔 광석이 나오기도 하죠. 호숫가에 굴러다니는 돌이 좀 있었어요!”
별이의 제보대로 호숫가에는 돌이 많았다.
미르와 아무가 물장구를 치는 소리를 들으며 호준은 동글동글한 돌들을 깰 준비를 했다.
호숫가 돌은 크기는 양은냄비만 한 크기로 조약돌처럼 매끈하고 동글동글한 돌이었다.
들어보니 무게가 제법 나갔다.
‘돌은 처음 깨보네.’
별이의 설명으로는 돌을 도끼로 내리치면 언젠가 깨진다고.
호준은 그 말대로 하기로 하고 돌 하나를 평평한 데에 놓았다.
그다음 도끼를 높이 들어 올려 돌의 정중앙을 내리찍었다.
까가강!
돌에서 섬광이 일어나더니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떨어져 나간 부분은 기다랗고 날카로운 돌 파편들이었다.
새로운 메시지도 떴다.
【돌을 타격했습니다】
【돌의 일부가 파괴되었습니다】
【돌조각】
【돌조각】
일격으로 돌조각 2개를 얻을 수 있었다.
호준은 이왕 하는 거 이 돌을 다 깨보기로 했다.
그는 거침없이 수직으로 돌을 내리쳤다.
까가강 까강 까가강
【돌을 타격했습니다】
【돌을 타격했습니다】
…….
파편이 쉼 없이 튀었다.
마침내 돌이 전부 사라지고 돌조각만 난무했다.
호준과 별은 돌조각을 모조리 주웠다.
【돌조각】× 20
‘생각보다 많이 모았네.’
호준은 이제 마지막 작업에 들어갔다.
재료를 다 모았으니 이제 제작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카탈로그를 열고 수동 믹서기 밑의 【제작】버튼을 눌렀다.
수동 믹서기 제작이 시작되었다.
【수동 믹서기 제작을 시작합니다】
【나무토막 90개, 돌조각 10개를 잃었습니다】
【수동 믹서기 제작을 위한 공정에 들어갑니다】
【에너지 100이 모일 때까지 자전거 바퀴를 빠르게 회전하십시오】
이번에 등장한 화면에는 자전거 한 대가 놓여있었다.
발을 빠르게 굴러서 회전시키라는 의미.
호준은 군말 없이 자전거에 올라탔다.
자전거 타기라면 자신 있었다.
‘자전거야 6살 때부터 밭두렁을 가로지르며 질리도록 탔다고.’
그는 6살 때 두발자전거를 뗐으며 논두렁을 누비고 다닌 전적이 있었다.
그만큼 자전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도시와 달리 호준이 나고 자란 시골 마을은 사람도 없고 차도 없었다.
그래서 자전거는 호준의 유년 시절 교통수단이자 놀이기구였다.
휭 휭 휭 휭
자전거에 올라타자 그의 실력이 드러났다.
호준은 쏜살같이 발을 굴렀다.
바퀴가 휙휙 돌아갔다.
바퀴의 속도만큼 에너지도 듬뿍듬뿍 쌓였다.
【에너지 2를 생산했습니다(누적 에너지 : 10)】
【에너지 2를 생산했습니다(누적 에너지 : 12)】
【에너지 2를 생산했습니다(누적 에너지 : 14)】
그의 신명 나는 발 구르기로 인해 에너지는 빠르게 치솟았다.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려 입술에 맺혔으나 호준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도시에 와서는 사고 위험 때문에 타지 못했던 자전거를 오랜만에 타니 기분이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 추억을 되새기며 발을 굴리다 보니 순식간에 에너지가 찼다.
【에너지 100을 모두 모았습니다】
【자전거에서 내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벌써……?’
메시지를 보자 호준은 조금 아쉬운 마음에 한두 번 발을 더 굴리고 자전거에서 내려왔다.
그가 내려오자 자전거와 창은 동시에 사라지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수동 믹서기 제조에 성공했습니다】
【수동 믹서기 1개를 얻었습니다】
【제작 스킬을 레벨업했습니다】
수동 믹서기는 카탈로그에서 본 그대로였다.
높이는 150cm 정도.
윗부분의 거대한 깔때기에 과일을 넣으면 통에 과일이 들어가고.
통 옆의 손잡이를 회전하면 과일이 갈리는 형태로 보였다.
“우와…! 진짜 크네요.”
“끼루루!”
어느새 달려온 미르와 별이는 믹서기를 보며 감탄했다.
둘의 몸에 비해 믹서기는 훨씬 컸기에 감탄할 만도 했다.
호준은 둘을 바라보다가 문득 아무의 행방에 생각이 미쳤다.
‘아무는 어디 있지?’
그가 두리번거리며 아무를 찾는데 별안간 별이가 크게 소리치며 날아갔다.
“안돼!! 아무야. 거기 들어가면 위험해!”
별이가 날아가는 방향을 보니 놀랄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무가 깔때기 뒤편을 기어오르고 있었던 것.
궁금해서 기어오른 모양이지만 깔때기 안으로 들어가면 위험할지도 몰랐다.
호준은 재빨리 손을 뻗어 아무를 깔때기에서 떼어냈다.
하마터면 아무를….
호준은 아찔한 상상에 고개를 젓고는 아무에게 철저히 주의를 주었다.
“아무야. 이런 기계는 위험하니까 함부로 올라가면 안 돼요! 절대로 올라가지 마. 알았지?”
“무우우….”
【아무가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무가 조금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미안해져서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 위험해서 그런 거란다. 우리 아무는 착해서 말도 잘 듣네. 앞으로도 조심할 거지?”
“무우우!”
【아무가 당신에게 신뢰를 느낍니다】
아무는 마음을 알아주었는지 금세 기운을 차렸다.
별이에게 아무를 맡기고서 슬슬 퀘스트를 하기로 했다.
【재료를 깔때기안에 넣어주세요】
친절하게도 메시지는 요리과정을 세세히 알려주었다.
‘꿀사과 주스를 한번 만들어볼까.’
호준은 꿀사과 주스를 먼저 만들기로 결정했다.
꿀사과 주스의 맛이 사뭇 기대됐다.
산딸기는 7급인 반면, 꿀사과는 6급이었으니까 맛이 더 좋을 것이 당연했다.
호준은 깔때기 속에 꿀사과를 하나 하나 넣었다.
【꿀사과(6급)을 잃었습니다】
【꿀사과(6급)을 잃었습니다】
데구르르.
꿀사과들은 깔때기를 굴러 통 안에 쌓여갔다.
꿀사과 10개를 넣고 나자 메시지가 떴다.
【믹서기 통이 가득 찼습니다】
【더 이상 과일을 투입할 수 없습니다】
【모드를 선택해주십시오】
【원액추출모드】【가루분쇄모드】
호준은 원액 추출모드를 선택했다.
【원액 추출모드를 설정했습니다】
【손잡이를 회전시키면 재료의 원액을 추출할 수 있습니다】
‘어디 한 번 해볼까.’
손을 몇 번 꺾으며 스트레칭을 마치고서 호준은 손잡이를 양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뱃사공이 노를 젓듯이 힘차게 손잡이를 회전시켰다.
그그그그극
과일이 갈리기 시작했다.
“으으으음……!”
“끼루루루!!!”
“무무무무무!”
아찔한 과일 향기가 퍼져나갔다.
모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호준도 예외가 아니었다.
‘장난 아니네…!’
향은 뇌를 저릿하게 했다.
은은하면서도 소름 돋을 정도로 감미로웠다.
과연 맛이 향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 정도였다.
방안에 두고 싶은 기분 좋은 향이었다.
지그그그극
손잡이를 돌릴 때마다 달큼한 사과 향이 진해졌다.
호준을 포함한 요정들은 숨을 들이마시며 나른하게 웃었다.
그들에겐 지금 이 순간, 이곳이 천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