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농사 시작 (1)
호준은 상경한 뒤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대학생 때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자격증 시험과 외국어 공부에 매진했고 독하게 준비한 끝에 목표했던 해외 영업일을 할 수 있었다.
취업한 뒤에도 쉴 틈이 없었다.
실무는 그가 생각한 것과 많이 달랐다.
책과 현장은 다를 수밖에 없었고 실무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결국 그는 회사를 퇴근해서 쉬지 않고 실력을 쌓았다.
국제에서 통용되는 자격증을 따고 외국어를 꾸준히 공부했다.
틈틈이 전문 서적을 독파했다.
매일 밤 그는 유명 교수들이 평생 연구한 내용을, 침대 위에서 흡수했다.
오랜 시간 노력한 끝에 몰입해서 독서하는 습관을 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모여 입사한 지 4년이 지났다.
4년 동안 그는 가르칠 것이 많던 신입사원에서 유능한 인재로 성장했다.
하루하루 쉬지 않고 노력한 결과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호준은 자신의 성과에 성취감을 느꼈다.
그러나 성취감과는 별개로 쉬고 싶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마치 배터리가 방전된 느낌.
흔히 말하는 번아웃 증후군 증상이었다.
오랜 기간 쉬지 않아서 정신적으로 고갈된 상태.
그런 상태이기 때문일까.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요정과 비료를 만드는 일은 즐거웠다.
무척이나.
그리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쩌걱!
“오 명중입니다!”
“끼룩!”
호준은 비료 제작을 위한 마지막 나무판을 깼다.
그의 옆에서 요정들도 박수를 치며 구경했다.
나무판이 바닥에 떨어지자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완벽한 타격입니다!】
【제작 완료 (100%)】
【비료 1개를 얻었습니다】
【제작 스킬을 레벨업했습니다】
【퀘스트 목표 : 비료 10개 (달성)】
【퀘스트 성공】
【퀘스트 보상으로 산딸기 씨앗 10개를 얻었습니다】
‘이제 씨앗을 심으면 되겠군.’
호준은 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주머니를 양손으로 받아 소중히 챙겼다.
씨앗이 담긴 붉은 주머니 입구에서 상큼한 향이 올라와 미소가 지어졌다.
숨을 깊이 들이켜니 기분도 상쾌해졌다.
“냄새가 좋네요!”
“그렇지?”
【미르가 궁금해 눈을 이리저리 굴립니다】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높이 치켜든 미르에게도 냄새를 맡게 해주었다.
“끼루루루!”
【미루가 달콤한 산딸기향에 중독성을 느낍니다】
‘중독성? 그렇게 좋나?’
용이라 후각이 예민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 속에서 호준은 미르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미르는 머리를 주머니에 파묻고 흡흡거리는 게 흡사 중독용 같았다.
향기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이라 호준은 미르를 놔두고 나직이 생각했다.
‘그나저나 여기 산딸기는 무슨 맛일까. 궁금하네.’
슬슬 미르를 주머니에서 떼어내고자 하는데 새로운 퀘스트가 떴다.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호준은 차분하게 퀘스트를 살펴보았다.
【직업 퀘스트】싱싱한 과일 수확하기(1)
【퀘스트 목표】: 산딸기 10개를 수확하십시오.
【퀘스트 설명】
사탕처럼 달콤한 산딸기를 수확하십시오.
산딸기는 요리에 다양하게 활용되는 팔방미인 과일이랍니다.
비료가 뿌려진 땅에서 자란 산딸기는 품질이 더 오래 유지됩니다.
물을 충분히 주어서 잎사귀가 마르지 않게 해주세요.
【퀘스트 보상】: 꿀사과 나무 씨앗 10개
결국 산딸기를 수확하라는 퀘스트였다.
어차피 농사할 생각이었기에 호준은 차분히 생각을 해 보았다.
일단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농지를 어디에다 설치하냐는 점.
잠시 별이와 상의한 끝에 호준은 호수 주변을 더 돌아보고 적당한 장소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렇게 호준 일행은 산책하듯 호수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평화롭네요. 사람도 하나 없구.”
“그러게. 다들 전투하느라 바쁜 모양이네.”
“끼루루!”
미르는 산책이 즐거운지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별이도 쾌적한 바람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다들 여유롭게 경치를 관람하고 산책을 이어갔다.
평화로운 산책이 이어지는데 먼발치에서 농지를 하나 발견했다.
【버려진 농지】
【소유주】 : 없음
【줍기】
가까이 가보니 버려진 농지는 그냥 농지와 외관이 똑같았다.
호준이 빤히 농지를 바라보자 별이가 부연 설명했다.
“이건 누군가 버리고 간 농지네요.”
“그럼 내가 주워도 상관없는건가?”
“물론이죠. 이대로 두면 24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이런 건 줍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오늘 왠지 운이 좋은데요?”
“그러게.”
호준은 피식 웃으며 【줍기】 버튼을 클릭했다.
그러자 농지가 그의 소유로 전환되었다.
【농지를 주웠습니다】
【현재 소유한 농지의 개수는 10개입니다】
‘그나저나. 여기 좀 괜찮은데?’
무료 농지를 얻고 주위를 보니 의외로 주위 경관이 마음에 들었다.
탁 트인 전경.
호숫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호숫가에는 낚시하기 좋은 넓은 바위가 놓여있고.
바위 옆에는 5m 높이 느티나무도 있었다.
문득 머릿속에 계획이 떠올랐다.
‘나무 아래에 평상을 깔고, 낮잠 자면 괜찮겠는데.’
초등학생 때 매미가 목청이 찢어지게 울던 여름날.
마당의 평상 위에서 잠든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시원한 바람이 땀을 적셔주고.
매미의 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한적한 오후를 즐기던.
‘여기로 하자.’
호준은 마음이 이끄는대로 결정을 내렸다.
그는 별이와 미르를 향해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이제부터 여기서 살자. 다들 어때?”
“저는 호준 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마을과 거리도 적당하고 바람도 적당하고, 마음에 드네요.”
“끼루루룩!”
【미르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음에 들어합니다】
호준은 싱글거리는 별이와 꼬리를 설레설레 흔드는 미르를 보며 마주 웃었다.
그들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싹을 틔운 순간이었다.
* * *
터전을 잡았으니 그다음은 밥벌이를 해야 하는 법.
호준은 산딸기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단계로 농지 10개를 호수와 가까운 곳에 설치했다.
농지를 호수와 가깝게 한 이유는 농작물에 물을 편리하게 주기 위함이었다.
농지를 설치한 다음 농지에 비료를 듬뿍 뿌렸다.
비료를 뿌리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지 않았다.
비료의 냄새가 심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냄새는 괜찮았다.
‘생각보다 냄새가 괜찮네.’
구수한 비료 냄새는 연한 된장찌개 냄새와 비슷했다.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부지런히 비료를 뿌리고 나면 또로록 메시지가 떴다.
【비료로 인해 농지의 품질이 향상되었습니다】
비료를 다 뿌린 다음 씨앗을 심을 차례가 되었다.
씨앗을 심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냥 뿌리면 된다는 거지?”
“네. 씨앗을 뿌리면 씨앗이 스스로 땅속으로 들어갑니다!”
“참 별일이네.”
호준은 직접 보기 위해 씨앗 1개 분량을 농지에 뿌렸다.
파파팍
씨앗에 발이 달린 것일까.
물방울모양의 씨앗이 스스로 회전하며 땅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불과 1초도 안 되어서 사라진 씨앗들.
“진짜 빨리 들어가네.”
호준은 다른 농지에도 씨앗을 뿌려보았다.
파파팍
이번에도 씨앗은 뿌리자마자 땅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렇게 씨앗 뿌리기도 신속하게 마무리했다.
“이제 물을 줘야 농작물이 빨리 자랍니다!”
마지막으로 물을 줄 차례였다.
물뿌리개 같은 것이 있으면 편할텐데 지금은 가지고 있는 것이 없었다.
호준은 제작 카탈로그를 열어 물뿌리개를 만들지 말지 고민했다.
‘농작물이 10개밖에 안 되니까 그냥 손으로 물을 퍼서 나를까.’
그렇게 고민하는데 별안간 미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끼루룩!”
고개를 돌리니 미르가 동그란 바가지 하나를 물고 뒤뚱거리며 오고 있었다.
미르는 바가지를 호준의 발치에 내려놓고는 의기양양하게 앉아있었다.
“거지의 나무바가지?”
호준은 떠오르는 정보창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거지의 나무바가지】
【등급】: 9등급
【설명】: 길거리 거지가 동냥할때 쓰는 나무바가지다.
움푹해서 돈을 담기에 편리하다.
제법 튼튼해서 이걸로 머리를 맞으면 은근히 아프다.
“미르야. 이거 어디서 났어?”
“끼루루!”
미르가 꼬리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풀숲이었다.
“풀숲에 굴러다니던 걸 주워온 모양입니다.”
“그러게. 그런데 이거. 물을 담기에 괜찮을 거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크기도 큰 편이구요.”
탕 탕
바가지는 손으로 두드려보니 제법 튼튼했고 물이 샐 만한 구멍도 없었다.
한번 해 보자는 마음으로 호준은 호숫가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와
농지에 다가갔다.
농지 하나에 물을 듬뿍 뿌리자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산딸기가 시원한 물을 좋아합니다】
【작물의 성장이 빨라집니다】
【산딸기 새싹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어…! 자란다!’
쌍떡잎이 흙 위로 살포시 머리를 내밀었다.
떡잎은 수줍게 제 무게의 몇 배나 되는 흙을 양옆으로 밀어냈다.
물을 조금 더 부어주자 떡잎이 기분 좋은 듯 잎을 사르르 흔들었다.
【새싹이 당신의 관심에 기뻐합니다】
【새싹은 당신의 손길을 받고 싶어합니다】
‘귀엽네.’
호준은 반응하는 떡잎을 보며 활짝 웃었다.
작지만 통통한 잎사귀에 호준은 조심히 검지를 갖다 대고 떡잎을 쓰다듬어 주었다.
“반갑다.”
【새싹이 잎을 흔들어 인사합니다】
잎을 살랑살랑 흔드는 새싹을 보며 호준은 왠지 예감이 들었다.
한동안 농사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