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봉인 해제 (2)
호준은 빤히 바라봤다.
“후아아압!”
기지개를 쫙 켜는 손바닥만 한 요정을.
허리까지 오는 하얀 머리카락.
새하얀 교복풍 원피스.
전신은 밀가루를 빚어 만든 인형처럼 새하얬다.
백색 눈동자에 붉은 입술.
요정은 지나가면 한 번쯤 돌아볼 만한 미인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올려다보더니 치마를 부여잡고 인사했다.
“봉인을 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팔찌에 갇혀 있던 요정입니다.”
“반갑다. 나는 호준이다. 네 이름이…?”
그 물음에 요정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입을 열었다.
“저도 이름이 갖고 싶은데… 이름이 없네요….”
【요정이 이름이 없어 풀이 죽었습니다】
【요정에게 이름을 지어 주면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요정은 쪼그려 앉아 바닥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입술이 삐죽이 나온 풀 죽은 얼굴이었다.
메시지의 내용으로 보아 이름을 지어 주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호준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요정에게 물었다.
“요정아. 내가 이름을 지어 줄까?”
그 말에 요정은 벌떡 일어나더니 날개를 파닥거렸다.
활짝 웃는 모습이 만개한 백합 같았다.
“정말이신가요? 사려 깊으신 분이네요! 감사합니다. 호준 님!”
【요정이 기분이 좋아져 날개를 파닥입니다.】
【요정이 당신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호준은 그녀를 요리조리 보며 잠시 이름을 고민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문득 떠올랐다.
부르기도 간단하고 잘 기억나는 괜찮은 이름이.
눈이 반짝이는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 생각난 것이다.
“네 이름은 별. 별로 지을까 하는데. 어때?”
“오옷! 좋아요! 정말 고운 이름이네요. 제게 이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이는 날개를 마구 파닥거리며 춤추듯 날았다.
그녀의 주변으로 요정가루가 뿜어져 어깨 위로 쌓였다.
【요정이 기쁨에 겨워 특제 요정가루를 뿌립니다.】
【요정가루 효과가 적용되어 이동속도가 10% 향상되었습니다.】
【요정가루 효과가 적용되어 3시간 동안 기온과 상관없이 청량감을 느낍니다.】
‘음… 시원하네.’
요정가루 효과는 확실했다.
가루에 닿는 순간 뇌에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시원해졌다.
청량감은 바로 이 느낌을 두고 말하는가 싶었다.
“고맙다.”
“별말씀을요!”
생긋 웃는 별이와 마주 웃다가 호준은 문득 아까 보았던 힘이 궁금해졌다.
지금은 가루 버프이지만, 아까 이상한 바람을 쏘지 않았던가.
호준은 바로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별아. 아까 마차 왔을 때, 바람을 일으킨 게 너야?”
“네. 맞아요! 팔찌 안에서도 바깥이 다 보이거든요. 위험해 보이시길래 그만…. 이제 보석에서 나왔으니 바람 마법은 자유롭게 쓸 수 있습니다.”
“바람 마법이라면 바람을 손으로 쏘는 건가?”
“네! 아까는 윈드 미사일인데요, 윈드 미사일은 윈드 애로우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요정력만 있으면 10발 정도 쏠 수 있어요.”
“10발이나. 대단하네.”
“언제든 말만 해 주세요! 파앗 하고 쏴 버릴 테니까요.”
“후훗. 그래.”
‘호신용으로 좋겠네.’
그렇게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궁금한 부분이 생겨났다.
바로 요정력에 관한 것이었다.
애초에 요정왕이란 직업이 최초이기에 아는 바가 없었다.
호준은 그 즉시 별이에게 물었다.
“별아. 요정력은 무슨 힘을 말하지?”
“요정력은 요정끼리 교환 가능한 힘입니다.”
“교환이라고?”
“네. 호준 님의 요정력을 언제든 호준 님 소속 요정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 그럼 네게 요정력을 줄 수 있는 거야?”
“네. 서로 검지를 대고서 힘을 주겠다고 생각하면 요정력이 전달됩니다. 자 여기 손가락을 대 보시겠어요?”
호준은 그녀의 말대로 검지를 갖다 댔다.
그리고 힘을 전달하겠다고 생각하자 반짝이는 불빛이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와 손가락을 타고 별이에게 전달됐다.
【요정력이 전달되었습니다.】
메시지까지 떴다.
별이는 손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한마디로 요정력은 요정의 배터리인 거죠. 호준 님의 요정력이 높아지면 소속 요정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
지금이야 한가하지만 나중에 힘을 나눠줄 일이 생길 때 괜찮겠다 싶었다.
‘팔찌에 말동무도 얻고. 왠지 시작이 좋네.’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 * *
마을은 생기가 넘쳤다.
호준은 별이를 어깨에 태우고 마을 주요 건물을 둘러보았다.
눈을 빛내며 재잘거리는 별이는 소풍 온 아이 같아 보였다.
둘이 마을을 구경하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호준은 현실에는 없는 귀여운 조카와 여행 온 기분이 들었다.
“아, 여기는 대장간인데 제작 스킬을 배우려면 10골드가 필요합니다. 신발류 등…….”
별이는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관련된 설명을 해 주었다.
그 덕에 호준은 건물에서 사고파는 아이템, 배울 수 있는 스킬도 배웠다.
그렇게 일일 가이드 별이와 순탄하게 마을을 구경했다.
마을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간 곳은 목장이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가자 어미 소가 목청을 높여 크게 울었다.
음메에~
얼룩소가 울자 자식으로 보이는 송아지가 가까이 다가가 볼을 핥아 주었다.
두 소는 서로를 마주 핥더니 먹이통으로 가버렸다.
소들이 사이좋게 여물을 먹는 모습을 보며 호준은 미소를 지었다.
‘평화롭고 보기 좋네.’
그는 잔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마을을 둘러보는 데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겨우 10분 만에 돌아볼 정도이니.
마을은 작은 규모임에도 필요한 것은 다 있어서 살기에 괜찮아 보였다.
“마을이 조금 작은 편이네.”
별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요나스 마을은 인구도 적고 부지 규모도 작은 편이죠. 하지만 교통의 요지라서 발전 가능성이 높습니다.”
“교통의 요지라고?”
“네. 요나스 마을은 수도로 가는 길목에 있거든요. 그래서 유동 인구가 주민 수보다 월등히 많답니다. 마차가 지나다니는 것도 다 수도로 오가는 사람들 때문이죠.”
“그렇군. 오가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군.”
그 이야기에 호준은 아이디어가 번뜩했다.
농사를 지어 요리해서 지나가는 사람한테 팔자는 생각이었다.
단순하지만 괜찮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차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그렇게 생각을 갈무리하는데 별이가 말을 걸어왔다.
“호준 님, 마을 남쪽에 가는 게 어떨까요?”
“음. 남쪽에 뭐가 있지?”
“마을 남쪽에는 큰 호숫가 있습니다. 호수 주위에는 버섯이 많이 나는데 가격이 나가는 편이에요! 버섯을 따다 잡화상에 팔면 스킬을 배울 골드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음. 버섯 따기라.”
괜찮은 제안이었다.
가격도 그렇지만, 한 번도 버섯을 따 본 적이 없어서 호기심이 생겼다.
따다가 지치면 호수에 발을 담그고 쉬어도 되고.
호준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별아. 그쪽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 줄래?”
“넵!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별이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호준은 느긋하게 걸어갔다.
따사로운 햇살이 기분을 나른하게 해 주었다.
한가로이 산책하는데 누군가 그를 붙잡았다.
“저 잠시, 뭐 좀 여쭤봐도 될까요?”
호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 둘, 남자 둘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호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죠?”
분홍 머리 여자가 앞으로 나서더니 입을 열었다.
“초면에 죄송합니다만 너무 궁금해서요. 혹시 어깨에 올려 두신 그건 말하는 인형인가요? 인형이라면 어디서 구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호준은 그녀의 말에 바로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이런 사태에 대비해 별이와 대책을 마련해 둔 상태였다.
요정왕이라는 직업을 굳이 공개하지 않으면서 대놓고 요정을 부려도 될 만한 대책을.
“이 아이는 제 소환수입니다.”
“아아아―”
소환수라는 말에 다들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당연했다.
소환사는 요정왕보다 훨씬 인지도 높은 레어 직업이었으니까.
예상대로 사람들은 소환사라고 둘러대니 더 이상 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여자는 별이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소환할 당시 상황을 꼬치꼬치 물었다.
“혹시 소환할 때 특이한 증상은 없었나요?”
“아뇨. 다른 이들과 똑같았습니다.”
“뭔가 다른 음식을 드셨다거나….”
“공복이었습니다.”
“그럼 옷이나 아이템은 특이한 걸 걸치지 않으셨나요?”
“지금 그대로 초보자 의복을 입었습니다.”
“아―”
여자는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하자 아쉬움을 담아 탄식했다.
그녀의 눈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뒤에 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으나 호준은 모른 체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눈치였지만 그는 먼저 입을 열어 질문을 차단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네. 초면에 죄송합니다.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부러움 섞인 시선을 뒤로하며 호준은 부지런히 길을 걸었다.
그렇게 마을 남쪽에 위치한 호수에 도착했다.
“눈이 부시군.”
호수는 눈부시게 빛났다.
아쿠아마린을 갈아 넣은 듯 푸른 호수였다.
숲과 물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었다.
숨을 들이마시자 폐에 공기가 가득 차올랐다.
별이 말 대로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준이 기지개를 켜며 풍경을 즐겼다.
그런데 별이가 별안간 소리쳤다.
“호준 님, 저기 좀 보세요!!”
그녀의 외침에 호준도 그 손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어…?”
“크에엑!”
어린아이가 배를 잡고 풀밭을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이 가득 담긴 신음을 토했다.
얼굴이 거무죽죽한 게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크르륵!”
입에 거품까지 무는 상황.
“가 보자.”
“네!”
호준은 별이를 데리고 재빨리 아이에게 달려갔다.
달려간 이는 호준만이 아니었다.
숲속에서 튀어나온 노인이 아이를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노인은 서럽게 울며 아이를 안고 울분을 토했다.
“아이구. 필립! 무슨 일이냐! 정신 차려라 필립! 아이구 내 아들! 얼른 정신을 차리거라! 어서!”
아버지라 추정되는 백발노인은 아이를 마구 흔들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크르르릅.”
아이가 눈을 뒤집고 정신을 못 차리자 노인은 또다시 서럽게 울었다.
“흐윽… 흑. 필립! 제발!”
호준은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 움찔거리면서도 그 곁에 있었다.
한참을 울던 노인이 호준의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눈물로 그렁그렁한 눈을 한 채로 말했다.
“자, 자네는 누구인가!”
“호준입니다.”
“호준이라. 자네, 제발 우리 아들 좀 살려 주게! 애가 일어나지 않아! 땡땡무늬 버섯만 있으면 우리 아들이 살 거야.”
“땡땡무늬 버섯이요?”
난데없이 땡땡무늬 버섯이 무슨 말이지…?
호준이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노인이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았다.
“제발… 그 버섯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그랬네. 분명히 그랬어!”
노인의 눈물이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순간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퀘스트 메시지였다.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직업 퀘스트】 농사를 시작하세(1)
【퀘스트 제한 시간】: 30 분
【퀘스트 목표】: 촌장에게 땡땡 무늬 버섯 5개를 주기
【퀘스트 설명】: 아들이 원인 모를 복통으로 쓰러지자 촌장이 깊은 시름을 잠겼습니다.
하필 그날 아침, 정체 모를 도인이 “땡땡무늬 버섯을 모아 두게.”라고 말했다는데.
촌장은 아들을 구하고자 버섯을 가져오는 이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고자 합니다.
【퀘스트 보상】: 무료 농지 지급, 촌장과의 호감도 +10, 연계 퀘스트 진행
“잠깐… 무료로 땅을 준다고?”
버섯 따러 왔다가 땅을 얻을 기회를 잡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