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봉인 해제 (1)
한 카드가 남다른 존재감으로 주위 카드를 압도했다.
새까만 카드 틈에 저 혼자 광채가 흘러나오니 당연한 결과였다.
호준은 범상치 않은 카드 쪽으로 날아가 카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카드 위에 적힌 직업명은 [요정왕].
요정왕이라는 문구만으로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요정왕이라… 처음 듣는 직업인데. 내용을 한번 보자.”
호준은 차분히 카드 내용을 훑고 나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직업명] : 요정왕
[등급] : 레전더리
[주업무] : 요정 다스리기, 식물 돌보기, 요리하기, 동물 돌보기, 낚시, 제작
[메인 퀘스트] : 요정국 건설
[부가 퀘스트] : 주업무와 관련된 퀘스트
[특별 혜택] : 최초로 요정왕 직업 선택 시 특수 아이템을 1개 지급합니다.
[현재 요정왕 직업군 종사자] : 0명
“레전더리 직업이네.”
직업은 3등급으로 나뉘었는데 낮은 순으로 노멀, 레어, 레전더리였다.
노멀은 흔하고 레어는 드물고.
‘레전더리는 정말 드물지. 너무 숫자가 적으니까.’
레전더리 직업을 가졌다고 공개한 사람은 그가 알기로 50명이 안 되었다.
21억 명 중에 50명.
직업을 비공개한 사람이 많다고 쳐도 타 직업 대비 레전더리급은 구하기 힘든 직업이었다.
그러니 지금 레전더리가 뜬 것은 운이 좋다는 말 외에 설명할 말이 없었다.
‘운이 좋네. 게다가 카드를 보고 고를 수 있으니 카드깡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
보통 레전더리 직업을 가지는 경우는 두 가지였다.
먼저 뽑기 운이 좋은 경우.
이건 수많은 카드 중에 딱 레전더리를 뽑는.
정말 운이 좋아야만 가능한 케이스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카드깡을 해야 했다.
두 번 세 번을 넘어 수십 번까지.
레전더리가 나올 때까지 계속 도전했다.
이 행위를 일명 ‘카드깡’이라 불렀다.
카드깡은 당연히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보통은 카드깡을 하다 지쳐 적당한 직업에 안주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런데 카드를 보고 뽑을 수 있는 능력을 발견해 버린 것이니….
그들 입장에서는 사기라고 말할 만도 했다.
호준은 이 상황을 부담 없이 받아들였다.
‘생산직이니 한번 해 보자.’
원하던 생산직이니 기대가 되었다.
주 업무는 요정 돌보기, 농사, 요리, 목축, 제작, 낚시.
생산 스킬에 요정까지 부릴 수 있다니 더욱 흥미가 생겼다.
그는 과감히 카드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손바닥과 카드가 닿자 모래알처럼 카드가 부서지고 광채가 퍼져 나갔다.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유호준 님. 요정왕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요정왕 특전으로 모든 생산물의 품질이 향상됩니다]
[요정왕 특전으로 모든 생산물의 생산 소요 시간이 절반으로 단축됩니다.]
[요정왕 특전으로 농사 경험치가 2배 증가합니다.]
[요정왕 특전으로 낚시 경험치가 2배 증가합니다.]
[요정왕 특전으로 목축 경험치가 2배 증가합니다.]
[요정왕 특전으로 요리 경험치가 2배 증가합니다.]
[요정왕 특전으로 제작 경험치가 2배 증가합니다.]
[요정왕 특전으로 스킬 요정왕의 댄스를 배웠습니다]
[요정왕 특전으로 신성한 팔찌를 획득했습니다.]
[요정왕 특전으로 전 스탯이 +2 오릅니다.]
‘특전이 꽤 많네.’
호준은 담담하게 메시지를 보았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생산품 품질이 좋아지고.
생산에 걸리는 시간이 줄어들고.
생산활동으로 얻는 경험치가 증가했다.
특전은 좋은 것들이 많았기에 마음에 들었다.
더군다나 추가로 요정왕의 댄스라는 스킬과 성스러운 팔찌.
스탯도 추가되었다.
‘요정왕의 댄스라. 무슨 스킬이려나.’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보다 시선을 끄는 것은 팔찌였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은빛 팔찌.
‘디자인이 괜찮네.’
신성한 팔찌는 은은히 빛나는 것이 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호준은 왼손 검지로 은빛 팔찌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얇은 형태의 은팔찌.
팔찌 가운데에는 손톱만 한 붉은 보석이 반짝였다.
보석을 쓰다듬자 갑자기 팔찌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보석에서 손을 떼자 그 즉시 팔찌가 진동을 멈췄다.
진동하는 팔찌가 미심쩍어 그는 갸웃거렸다.
‘설마 팔찌가 살아 있는 건가.’
팔찌가 말을 하는 상상을 하다가 그는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팔찌가 살아 있다니 소설에서나 나올 일이지 않은가.
피식 웃는데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유호준 님, 새로운 닉네임을 설정하시겠습니까?]
[현재 이름으로도 플레이 가능합니다.]
닉네임은 미리 생각해 뒀기에 호준은 바로 말했다.
“호준. 호준으로 하지.”
[호준 님으로 설정되었습니다.]
[현재 호준 님의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호준]
[직업] : 요정왕
[레벨] : 1
【힘】7 【정신력】7 【민첩】7 【요정력】7
[최근 변화] : 전 스탯 +2
‘요정력이 뭐지? 요정왕이라 있는 건가?’
호준은 요정력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물어볼 새가 없었다.
순식간에 하얀 구름이 몸을 휘감았으니까.
휘감긴 몸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메시지가 떴다.
[요정왕 호준 님]
[유토피아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5초 뒤 유토피아에 접속합니다.]
[5]
[4]
갑작스러운 입장 통보에 호준은 팔찌를 꽉 쥔 채로 마음을 다스렸다.
[2]
[1]
[유토피아에 입장합니다]
섬광이 전신을 감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커다란 광장에 홀로 서 있었다.
* * *
광장은 혼잡했다.
사람은 많았고 분위기는 시끌벅적했다.
“거기 음식이 그렇게 맛있어?”
“그렇다니까. 입에서 살살 녹아서 한번 가면 또 가게 된다니까.”
“한번 가 봐야겠네. 내일 데이트하기로 했는데 자기한테 말해 봐야겠다. 그런데 가격은? 너무 비싼 거 아니야?”
“얘가. 가격 비싸면 내가 갔겠니? 가격도 딱 적당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명당 1골드. 그 정도면 충분히 배부르게 먹고도 남아.”
“오 대박. 가성비도 좋네!”
호준으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진 카페 테이블에서 두 여자가 수다를 떨었다.
그들이 입은 새하얀 드레스는 튤립을 엎어 놓은 모양이었다.
머리는 크루아상을 얹어 둔 것 같았다.
영화에서 볼 법한, 현대와 어울리지 않는 꾸민 모습에 호준은 신기함을 느끼고 빤히 바라봤다.
그들은 호준을 본체만체하며 대화를 나눴다.
‘음… 중세 영화에 들어온 느낌이네.’
화질이 좋아서일까.
눈앞의 광경이 정말 현실 같았다.
“아 글쎄, 던전이 너무 어려워서 실패한 거라니까. 내가 약해서 실패한 게 아니라고.”
“입만 살아가지고는.”
서로 티격태격하며 마차로 향하는 턱수염을 기른 남자들.
“자, 나른한 고양이 여관에 한번 왔다 가세요! 맛좋고 질 좋은 음식이 가득합니다! 내부 게시판에 집사 모집 공고도 붙었으니 한번 보고 가세요! 술 한잔하시면 더 좋구요!”
호객행위를 하는 단발머리 어린 여자아이는 열 살 정도로 보였다.
NPC일 게 분명했지만 눈이 마주치자 해맑게 웃었다.
그렇게 잠시 사람들을 구경하던 호준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마을 구경이나 해볼까.’
[요나스 마을]
마을 간판을 지나 호준은 넓은 거리를 성큼성큼 걸었다.
그렇게 발을 옮기는데 뒤에서 쿵 소리와 함께 누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어이! 위험하니까 비키라고!”
호준이 뒤로 고개를 돌리자 이미 때는 늦은 상황이었다.
중형차만 한 마차가 그를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일촉즉발의 순간, 마부가 팔을 마구 흔들며 어서 비키라는 듯 소리치고 있었다.
금방 소리친 사람이 그인 모양이었다.
‘위험하다.’
호준이 뒤늦게 움직이려는 순간, 팔찌가 세차게 진동했다.
츄아아아앗!
팔찌의 보석에서 바람이 발사됐다.
바람의 힘은 놀라웠다.
호준은 바람의 추진력 덕분에 순식간에 뒤쪽 벽까지 날아갔다.
마부는 순식간에 뒤로 이동한 그를 보고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허, 마법사였구만. 도로를 다닐 땐 주위를 항상 살피시오. 마차에 부딪히면 좋은 꼴 보기는 힘들 테니.”
말을 마친 마부는 채찍을 휘둘렀다.
말이 히힝― 하고 울며 쏜살같이 달려갔다.
순식간에 마차는 사라졌다.
호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팔찌는 조금 전 기행이 믿기지 않을 만큼 평범했다.
‘날 도와준 건가.’
아무리 봐도 위험한 순간 자신을 구하기 위해 팔찌가 힘을 발휘한 상황이었다.
그가 팔찌를 빤히 들여다보자 정보창이 떠올랐다.
호준은 그 내용을 살펴보며 눈을 크게 떴다.
【성스러운 팔찌】
【등급】: ???
【아이템 설명】: 특별한 힘이 봉인된 팔찌입니다.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모습으로 보아 팔찌에 영혼이 숨어들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완전히 봉인을 풀기 위해서는 제작 기술을 연마하는 방법을 추천합니다.
【착용 효과】: ???
【특이사항】: 판매 불가
‘힘이 봉인되어 있으니 언젠가 도움이 되겠군.’
봉인을 풀면 드러날 힘이 궁금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팔찌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고맙다. 구해줘서.”
부드럽게 웃으며 팔찌를 어루만지자 팔찌가 진동했다.
조금 전과 달리 조금 부드러운 진동이었다.
웅 웅
마치 별거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 같아 호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팔찌를 왼 손목에 채우자 메시지가 연달아 떴다.
【성스러운 팔찌를 착용했습니다.】
【팔찌가 봉인되어서 착용 효과가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팔찌 착용으로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퀘스트?’
호준은 퀘스트창을 신중히 바라보았다.
【퀘스트】팔찌의 봉인을 풀어라(1)
【퀘스트 제한 시간】: 1시간
【퀘스트 목표】
팔찌에 갇힌 요정에게 도움을 주세요. 요정은 머리를 쓰다듬는 걸 특히 좋아합니다!
【퀘스트 보상】
봉인 일부가 해제됩니다
연계 퀘스트 진행 가능
결국 퀘스트 내용은 팔찌에 갇힌 요정을 구출하라는 것이었다.
퀘스트를 해결할 유일한 단서는 요정이 머리를 쓰다듬는 걸 좋아한다는 내용.
고개를 갸웃하던 호준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쓰다듬는 걸 좋아하면. 지금까지 팔찌를 만질 때마다 웅웅대는 건 좋아서 그런 건가?’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했다.
쓰다듬는 걸 좋아하니 접촉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한번 해 보자.’
그는 빈 포도주 통 위에 앉아 팔찌의 보석 부분을 살살 쓰다듬었다.
램프를 닦는 만화 주인공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우웅 우웅―
팔찌는 바로 반응했다.
손가락이 접촉할 때마다 진동이 점점 세졌다.
쓰다듬는 횟수가 스무 번을 넘었을까.
우우우우웅―
팔찌가 지금까지 중 가장 센 강도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제법 힘이 좋은데?’
팔이 위아래로 마구 흔들렸다.
마치 펄떡이는 물고기를 팔목에 붙여 놓은 느낌이 들었다.
진동이 셌지만 호준은 보석을 골고루 쓰다듬어 주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드디어 이변이 일어났다.
팡!
팡 하는 연기가 피어오르며 메시지가 떴다.
【퀘스트 성공】
【퀘스트 보상으로 요정이 일부 해방되었습니다】
【요정이 당신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연기 너머로 새하얀 날개가 사부작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