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당첨되었다.(2)
드라마처럼 1등에 당첨되었다.
당첨이라는 건 그의 생애 한 번도 겪지 못한 일이었다.
당연히 지금의 상황은 예상 밖이었다.
솔직히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으나 호준은 내색하지는 않았다.
‘21억 명 중에서 1등이라니.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지.’
놀라운 일이었지만 마음을 가라앉혔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지 않던가.
그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침착하자.’
리무진 뒷좌석에 앉은 채 마음을 가라앉혔다.
운전대를 잡은 남자의 말에 의하면 맞춤형 기기 제작을 위해 연구소에 간다고 했다.
호준은 잠시 목이 말라 두리번거리다 차내 냉장고에 비치된 탄산음료를 마셨다.
토깍.
톡톡 튀는 탄산이 그의 가슴을 가라앉혔다.
그렇게 잠시 차에서 쉬는 사이 연구소 부지에 도착했다.
‘시설이 깔끔하고 독특하네.’
호준은 휙휙 지나가는 동물 모양 원예장식과 식물 모양의 건물을 구경했다.
유토피아 트레이드마크인 버섯 모양 건물도 보였다.
리무진은 부드럽게 미끄러져 중앙에 위치한 버섯 모양 건물 앞에 멈추었다.
“도착하셨습니다.”
남자의 말에 호준은 차에서 내렸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왜 장승처럼 서 있지?’
건물 앞에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그들은 서른 명 이상으로 보였는데 하나같이 자세가 똑같아서 희한해 보였다.
“저분들은 왜 모인 거죠?”
호준의 물음에 남자는 씩 웃으며 답했다.
“아, 호준 님을 기다리는 겁니다.”
“저를 위해서요?”
“네, 그렇습니다. 저분들은 테스트를 위해 모인 인재이십니다. 척추, 눈, 두뇌 등 각 신체 분야에서 실력이 최상위급인 실력자랍니다.”
“기기 하나 제작하는데 꽤 많은 인력이 필요하군요.”
호준의 대답에 남자는 길을 앞장서며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맞춤 제작은 비싼 만큼 보급형보다 신체 동화율이 뛰어나고, 많은 전문 인력이 투입됩니다. 보다 부작용의 우려가 적고 현실적인 체험이 가능하죠. 경험자 말로는 현실과 구분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혹시 호준 님은 기기 사용이 처음이십니까?”
“아,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더 놀라시겠군요. 정말 생생한 경험을 하게 되실 겁니다. 지금부터는 신체 측정을 할 텐데 필요한 게 있으시면 편히 말해 주십시오. 잘 부탁합니다, 호준 님.”
“저도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호준은 남자를 따라 신체 측정을 받으러 갔다.
그들의 뒤로 수십의 인력이 따라붙었다.
* * *
“유호준 님, 기기에 몸을 맡기시면 됩니다. 네. 편하게 숨 쉬세요! 네. 좋습니다.”
호준은 안내대로 캡슐 안에서 편한 자세로 누웠다.
캡슐 안은 폭신하고 시원했다.
캡슐 속 재질에 몸이 닿자 청량감이 느껴지고 잠이 솔솔 쏟아졌다.
‘부들부들해서 느낌이 좋네.’
호준은 부드러운 감촉에 감탄하며 자리를 잡았다.
곧 테스트 요원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준 님, 준비되면 말해 주십시오.”
“네. 준비됐습니다.”
“그럼 유호준 님, 신체 스캔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캡슐 뚜껑이 닫힐 때 소리가 납니다. 모쪼록 편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취이이익―
반쯤 열린 캡슐 뚜껑이 바람 소리를 내며 닫히기 시작했다.
철컥
캡슐 뚜껑이 완전히 닫히자 완전히 어두워졌다.
어둠 속에서 새하얀 빛이 번쩍였다.
눈부심에 눈을 감았다 뜬 호준은 잠깐만에 뒤바뀐 풍경을 보고 감탄했다.
“하아…!”
오색빛깔의 폭죽이 터져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숨을 쉬는 것을 잊을 만큼 장관이었다.
팡 팡 파파파팟
민트색, 푸른색, 보라색 등.
가지각색.
수천수만의 빛 입자가 올챙이처럼 꿈틀거리며 살랑댔다.
호준의 머리 위로도 무수한 빛 입자가 흘러내렸다.
눈이 즐거워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기분 좋게 쇼를 관람하는데 경쾌한 알림음이 들렸다.
【띠리링 ― 체크완료!】
【신체 스캔을 완료했습니다.】
【테스트를 종료합니다.】
취이이이익―
아쉽게도 테스트는 길지 않았다.
호준은 캡슐의 뚜껑이 저절로 열리자 비비적거리며 일어났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호준 님! 이제 테스트는 끝입니다.”
“아, 네.”
안내원의 경쾌한 목소리에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캡슐을 빠져나왔다.
그에게 안내원이 외투를 건네며 부드럽게 말했다.
“제품은 2주 뒤 자택으로 보낼 예정입니다. 괜찮으신 시간대를 알려 주시면 그때 보내겠습니다.”
“음, 오후 7시에 보내 주십시오.”
“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시간을 지정한 호준은 궁금한 점이 생겼다.
보통 맞춤형 기기는 서너 달 걸린다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빨리 제작되는가 하는 의문.
그는 참지 않고 바로 궁금한 점을 물었다.
“주문형 제작은 오래 걸린다고 들었는데 2주면 충분한 겁니까?”
그의 질문에 안내원은 곱게 웃으며 대답했다.
“보통은 그렇습니다만 이번엔 경우가 다릅니다.”
“음… 뭐가 다르다는 거죠?”
“이벤트를 위해 제작인력을 다 확보해 둔 상태거든요. 재료도 한곳에 다 가져다 놓은 상태구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인력이 있으니 제작속도가 빠를 수밖에요.”
“그렇군요.”
“유호준 님은 전 세계에서 가장 최신 버전의 기기를 가지실 겁니다. 정말 운이 좋으시네요.”
“아, 네.”
“그럼 이제 건물 밖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문 앞에서 대기 중인 리무진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편히 돌아가십시오.”
호준은 연구원과 인사를 마치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연구실 건물을 빠져나오자 리무진 곁에 서 있던 남자가 그에게 다가와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테스트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자택까지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유토피아 건물에서의 시간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갔다.
‘기대되는데.’
리무진에 오르는 호준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 * *
시간은 파도처럼 흘러갔다.
설치 당일이 다가왔고 설치는 1시간 만에 끝났다.
이제 접속하는 일만이 남았다.
“매끈하니 이쁘네.”
호준은 흐뭇하게 기기를 한번 쓸어 보았다.
세련되게 잘빠진 은회색 캡슐은 보기만 해도 흐뭇했다.
새 차를 뽑으면 기분이 이럴까.
그는 캡슐 상단에 음각된 HJ.
자신의 이니셜을 몇 번 쓸고는 어깨를 스트레칭했다.
본격적으로 유토피아에 접속할 시간이니까.
“들어갈까.”
호준은 캡슐 안에 들어가 편안한 자세를 갖췄다.
캡슐 안 물질은 포근히 몸을 감쌌다.
‘진짜 침대보다 편하다니까.’
취이이익―
그가 움직임을 멈추자 캡슐 뚜껑이 닫히기 시작했다.
찰각
뚜껑이 완전히 닫히자 눈앞에 푸른색 육각형이 펼쳐졌다.
수백 수천 개 별이 펼쳐진 우주 공간.
호준은 둥둥 떠 있었다.
몸이 부유하는 감각이 정말 생생했다.
‘화질이 차원이 다르네.’
수천의 별이 터지는 광경을 초고화질로 보았다.
잠시 넋을 놓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호준이 눈알을 굴리며 구경하는데 청아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유호준 님, 유토피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유호준 님은 유토피아를 만드는 창조주입니다.】
촤라라락!
허공에 큼지막한 붉은 장미가 떠올랐다.
츄아앗
장미잎이 쫘악 벌어지더니 새하얀 요정이 팔다리를 쫙 펴며 튀어나왔다.
요정은 날개를 팔락거리며 춤을 췄고 요정이 지나간 자리에는 별가루가 반짝였다.
감미로운 BGM이 울려 퍼지고 수백 수천 개 폭죽이 터지고.
요정은 광란의 춤사위를 펼치며 그를 맴돌았다.
‘무대에 올라온 것 같아.’
호준은 눈을 굴리며 인트로 영상을 만끽했다.
티팅 팅 팅―
하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안내 문구가 떠올랐다.
【유토피아】
【당신이 주인입니다.】
【태초에 점이었던 세계는 무한한 세계로 확장되었습니다.】
【초보자 가이드를 위해 기본적인 사항을 안내합니다.】
【유토피아를 구성하는 99개 국가, 99개 종족은 전 영토에 흩어져 있어…】
“스킵!”
2주 동안 공부했기에 튜토리얼은 스킵해도 괜찮았다.
영상을 생략하자 요정이 장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꽃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금색 판이 나타났다.
금색 판은 학교 칠판만 한 크기였는데 황금빛으로 눈부시게 빛났다.
두두두둥
웅장한 북소리 BGM이 울려 퍼졌다.
‘드디어… 직업 선택이구나.’
호준은 떨리는 눈으로 금색판을 바라봤다.
지금은 유토피아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바로 직업을 선택하는 순간.
유토피아는 한번 직업을 고르면 레벨 10까지 키워야 했다.
‘직업을 바꾸려면 레벨 10이 되어 리셋하는 방법밖에 없지.’
리셋 제한은 게임 규칙이었다.
캐릭터 리셋은 오직 레벨 10 이후에만 가능하도록 시스템에 설정되어 있었다.
유저들은 직업 리셋을 언제든 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게임개발사는 기본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리셋을 원하는 플레이어는 울며 겨자 먹기로 레벨 10까지 올려야만 리셋이 가능했다.
그러니 이번에 선택한 직업으로 레벨 10까지 버텨야 하는 것.
‘앞으로 꽃길을 갈지, 가시밭길을 갈지. 직업에 따라 미래가 다르다.’
황제, 대장군, 귀족, 영주, 노예, 여관집 주인 등.
직업은 다양했고 랜덤 방식으로 고를 수 있었다.
300개 카드 중 하나를 선택하면 바로 직업이 적용됐다.
물론 랜덤 방식이기에 선택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이왕이면 생산계열 직업을 하고 싶은데.’
사전에 직업군을 조사하던 호준은 원하는 직업이 생겼다.
바로 농사일과 관련된 직업이었다.
농장 주인이 괜찮아 보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강원도에서 아버지 농사일을 보고 배웠고 약간의 향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농사일하는 걸 좋아했다.
‘흙냄새도 풀 냄새도 좋고.’
이왕이면 직접 키운 작물로 요리해 보고 싶었다.
그 밖에 동물 키우는 직업도 환영이었다.
애완동물 샵 주인도 좋고.
뭐가 됐든 생산 쪽 직업이면 좋겠다는 생각에 호준은 미소지었다.
철컥
효과음 소리에 고개를 들자 판 위로 유려한 필기체가 떠올랐다.
드디어 직업 선택이 시작되었다.
【유토피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십시오!】
【직업에 따라 다른 과업이 주어집니다.】
【그대에게 주어지는 직업 카드는 총 300개】
【미래는 당신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떨리네.’
호준은 주먹을 불끈 쥐고 카드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츠츠츠츠츳
섬광이 터지더니 수많은 카드가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카드는 판 위로 날아가 팍 소리를 내며 판에 고정되었다.
호준은 차분히 판에 박힌 카드들을 바라봤다.
깨알같이 많은 카드들을 그렇게 바라보는데….
“어…?”
예상과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다.
‘왜 내용이 다 보이지…?’
보이지 말아야 할 카드 내용이 다 보였다.
직업명과 업무 관련 내용까지 전부 다.
수많은 후기를 보았지만 카드 내용이 보인다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무작위로 고르는 카드인데 카드의 내용이 다 보이다니.
핵이라도 쓰지 않은 이상 말이 되지 않았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인데. 대놓고 보이네.’
그는 빤히 노예 카드를 바라보았다.
【노예】
【주 업무】 : 바닥 걸레질, 아침 문안인사, 아가씨 신발 시중들기, 주방 보조, 창고 청소
【메인 퀘스트】 : 노예장 되기
【부가 퀘스트】 : 주업무와 관련된 집안일이 주를 이룸.
노예, 요리사, 집사…….
수많은 직업 카드들이 즐비했다.
그렇게 각종 카드를 쇼핑하듯 둘러보던 호준은 뭔가 번뜩이는 것을 발견했다.
“저건….”
유일하게 한 카드가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