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외전 - 서쪽마녀 이야기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다른 여자가 낳는 걸 지켜보았다. 그 아이가 혼인하여 행복하게 사는 것도 지켜보았다.
한 번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서쪽마녀는 그들의 모든 삶을 지켜보았다.
어떤 사람은 그녀의 삶을 불행하다고 말할 것이다. 어쩌면 정말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한편으로는 행복했다.
언제 올지 모를 미래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절망적인 상황이라 해도, 그 사람이 눈앞의 현실에서 살고 있었다.
오랫동안 되풀이해온 삶 속에서, 그것이 행복이라 말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행복한 걸까. 더 이상의 행복을 서쪽마녀는 모른다.
사랑하는 남자가 죽는 것을 본 뒤, 서쪽마녀도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죽는 순간, 그녀는 적어도 불행하지 않았다.
***
여성은 15살이 되면 사교계에 나간다. 약혼자가 정해진 여성은 그의 파트너로 참석하여 자신에게 정해진 사람이 있음을 귀족사회에 알렸다.
아직 정해진 약혼자가 없는 경우, 사교계 데뷔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늦어도 18세가 되기 전에 결혼 상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여성의 적령기는 매우 짧아서 꽃이 피자마자 져버린다. 주춤하다 보면 혼기를 놓쳐, 문제가 있는 신랑감이나 후처 자리밖에 남지 않았다.
그나마도 찾지 못하면 수녀원에 보내진다.
데뷔 시즌이 될 때마다 당사자도, 딸을 시집보내야 하는 부모도 덩달아 마음이 급해졌다.
새로 쏟아지는 데뷔 신참과 전년, 전전 년도의 여성들 때문에 초혼 시장은 나날이 경쟁이 심해지지만, 재혼쪽도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재혼 시장에는 해마다 과부가 되는 여성의 숫자까지 더해진다.
결국 너 나 할 것 없이 다들 어렵다.
펠리시아는 올해 15세가 되었지만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았다. 할 예정도 없다.
대신 그녀는 초혼 시장을 건너뛰고 곧바로 재혼 시장에 던져졌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수녀원에 가지 않은 것은 마력을 타고난 덕분이었다. 마력이 없었다면 약간의 지참금을 소지한 채 수녀원에서 평생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오늘은 아버지가 이야기를 통해 놓은 몇 명의 남자와 연회에서 만나는 날이다.
맹인인 그녀가 무도회에서 춤을 출 일은 없다. 그저 참석하여 모습을 보여준 뒤, 그녀를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남성에게 팔릴 뿐이었다.
아버지는 재혼의 대가로 대금업자에게 빌린 돈을 탕감 받을 정도의 금액을 받기로 한 것 같다.
최대한 돈을 받아내기 위해 펠리시아는 새벽부터 시녀들에게 알몸으로 구석구석 씻기고 향유를 발라, 자신이 보지 못하는 아름다운 드레스로 몸을 감쌌다.
항상 입고 있는 까슬한 감촉의 드레스가 아닌 걸 보면 상당히 돈이 들어간 옷인 모양이다.
이런 곳에 쓸 돈이 있으면 그걸 빚 갚는 데 보태면 될 터인데, 씀씀이가 크고 타인의 눈을 의식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펠리시아의 목과 귀에 값비싼 보석까지 장식했다.
보석은 한 번 저당잡혀 대금업자에게 빼앗긴 것을 다시 빌린 것같다. 본래 자신의 것이었던 물건을 돈을 내고 빌린다. 정말 답이 없다.
"정말 아름답구나. 분명 그분들의 마음에 들 거다."
아버지가 감탄한 듯이 말했다.
자신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펠리시아는 은빛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대로 볼 만은 한 걸까.
시녀들이 매번 아름답다고 칭찬을 하지만, 잘 모르겠다. 나가본 적도, 집안사람 이외의 누군가와 만나본 적도 없기 때문에 그것이 빈말인지 정말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펠리시아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는 마차는 말이 끌고 있다고 한다. 저택 깊은 곳에서만 살아온 펠리시아는 그 말이라는 동물이 무엇인지 모른다. 다만 무섭기만 했다.
갑자기 소란스러운 상황에 이끌려, 덜컹거리는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간다. 마음이 불안해서 지금 당장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곁에 있는 건지조차도 모르겠다.
지나친 진동에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누구도 그녀를 잡아주지 않았다.
펠리시아는 손을 더듬어 벽에 붙어 있는 긴 줄을 잡고 오직 그 덜컹거리는 긴 시간을 참아냈다.
무도회는 무슨 후작가에서 열린다고 들었다. 어떤 가문인지 아버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 세상에 어떤 가문이 있고, 그 가문이 어느 정도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펠리시아는 모른다. 말해봤자 입만 아플 뿐이다.
펠리시아는 맹인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았다.
글을 읽을 수 없으니 문자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니 여자들 대부분이 중요시 여기는 자수도 하지 못한다.
유일하게 배운 것은 [웃고 있어라] 그것 한 가지였다.
웃으면 그녀는 아름답다고 한다.
어떻게 보이는지 펠리시아는 모르지만, 14살이 되던 해 여성 한 명이 몇 달간 그녀에게 붙어 있었다.
낯선 여성이었는데, 그녀가 가르친 건 고개를 얼마나 기울이고 입을 얼마나 벌려 어떻게 웃는지, 그런 것이었다. 단순하게 그것만을 끈질기게 몸에 익히게 했다.
아마 그때부터 아버지는 펠리시아가 성년이 되면 남자들에게 판매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마차가 멈췄다.
펠리시아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낯선 장소로 끌려갔다.
아버지의 걸음이 너무 빠르다. 거의 달리다시피 쫓아가는데, 외부에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지 사방의 소리가 죽었다.
잠시 뒤에는 약간 거리를 두고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 여자의 웃음소리, 처음 맡아보는 온갖 향기.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하지만 무도회장으로 들어가는 것 같지는 않다. 공간을 두고 들리는 음악소리에 가까워지는 기미가 없었다.
어쩌면 긴 복도일까.
펠리시아는 한참 동안을 걸어 마침내 음악소리가 멀찍이서 들리는 곳에 닿았다.
아버지가 걸음을 멈췄다.
어머니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어머니와는 떨어졌다.
차갑고 냉정한 어머니지만, 왠지 그녀라도 이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기다리자, 낯선 발자국이 가까이 다가왔다.
"호오, 남작, 이 여성이 자네 딸인가?"
늙은 목소리였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다. 왠지 그 목소리에 들어있는 감정이 끔찍해서 몸이 떨렸다.
아버지가 아부하듯이 말했다.
"예, 올해 열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어떠십니까."
"사랑스러운 아가씨구나. 두려워하는 얼굴은 마치 꽃이 떨고 있는 것 같다."
늙은 남자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목덜미에 코를 가까이 댄 것 같다. 숨을 들이마시는 감각에 자기도 모르게 작은 비명소리가 나왔다.
몸을 움츠리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팔을 움켜쥐고 움직이지 못하게 잡았다.
늙은 남자가 귓가 가까이에서 말했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없군. 방에 가서 확인을 하고 결정하고 싶네."
"그것은 조금. 딸아이는 오늘 백작님 외에도 두 건의 약속이 있습니다."
"...불쾌하군. 감히 같은 날 여러 명을 저울질하다니."
늙은 남자와 아버지가 옥신각신 다투기 시작했다. 그 틈에 아버지의 손에 힘이 풀렸다.
펠리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팔을 빼고, 몸을 돌렸다.
미처 깊이 생각하지도 않은 채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펠리시앗!"
아버지의 성난 목소리가 들린다. 펠리시아는 더욱 겁을 먹고 달렸다. 타닥타닥 자신의 발소리 위에 아버지의 신발 소리가 쫓아왔다.
바로 등 뒤에서 아버지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펠리시아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누군가의 강한 팔에 훌쩍 안겨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버지가 비명을 지른다.
"연약한 여성에게 폭력이라니. 이게 무슨 짓인가, 콘시니 남작."
"고, 공작 각하! 아니, 그 아이는 저의 여식으로."
아버지가 횡설수설하지만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만이 머릿속을 맴돈다.
이 목소리....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래, 이 목소리다. 오랫동안 찾아왔던 바로 그 사람이다.
머릿속이 불꽃튀는 것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마치 머리 안에 태양이 들어간 것 같았다.
"어, 어엇! 페, 펠리시아, 너, 머리가."
아버지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하얗게 빛난다. 보이지 않지만 알 수 있었다.
"재미있는데, 설마 서쪽마녀인가?"
공작이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서쪽마녀....'
잠시 그 말이 머릿속에 남았다 사라졌다.
펠리시아는 보이지 않는 눈을 들어 공작 각하에게 시선을 향했다.
"서쪽마녀를 아시나요?"
펠리시아의 질문에 공작이 나지막한 소리로 웃는다.
"아니, 모른다. 하지만 이야기는 들었지. 대대로 이천 년 정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마녀가 있었다고 하더군. 엄청난 마력을 지녔다고 하던데, 이런 식으로 발현하는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어딘가에서 까마귀 울음소리가 울렸다.
아, 나의 까마귀다. 나의 소중한 까마귀. 시조가 만들어주었던, 그리고 루디를 사랑했던 그 까마귀가 서쪽마녀를 찾아왔다.
펠리시아는 손을 공작 각하의 가슴에 대고 살짝 밀었다.
"죄송합니다, 각하. 부디 저에게 제대로 인사할 기회를 주세요."
공작이 펠리시아를 내린다. 펠리시아는 몸에 익히고 있던 궁정 예법에 따라 우아하게 몸을 굽혔다.
"콘시니 남작의 둘째 딸 펠리시아입니다."
"너, 너, 어디서 그런 작법을 배웠느냐."
아버지가 말하는 사이, 그녀를 구매하려던 남자가 쫓아왔다.
"이런, 카펜더 공작 각하 아닙니까."
"렌달 백작. 오랜만이군요. 올해 손자를 보았다고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한데...."
렌달 백작이 목소리를 감추며 아버지와 펠리시아, 그리고 카펜더 공작을 번갈아 보았다.
까마귀가 기둥 근처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제서야 펠리시아는 공작과 백작,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머리가 허연 렌달 백작의 이마에 주름이 새겨졌다. 그는 억지로 웃는 표정을 만들어 카펜더 공작을 보았다.
"부끄럽지만, 재혼을 생각하고 있지요. 남작과 그 상담이 있어 오늘 만나고 있었던 터라, 죄송하지만 각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렌달 백작이 눈짓을 하자 아버지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펠리시아는 더 이상 그가 하라는 대로 할 생각이 없었다.
카펜더 공작에 대해서는 세상사에 무딘 펠리시아도 들어본 적이 있다. 부모의 사고로 이른 나이에 작위를 이은 젊은 공작이다. 그의 나이는 열여덟, 아직 미혼이었다. 열세 살에 부모가 돌아가신 뒤, 영지를 경영하는데 바빠 혼인을 약속하거나 따로 만나는 여성도 없다.
이번에야말로 누구보다 가장 먼저 그를 만났다. 겨우, 겨우, 출발선에 섰다.
펠리시아는 아버지를 향해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근처까지 와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까마귀가 수백 마리 날아와 순식간에 복도를 메웠다.
까악까악, 새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억! 이게 뭐야."
"뭐, 뭐. 마녀인가!"
아버지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졌다.
렌달 백작은 거의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두 사람이 자신에게서 물러난 것을 확인한 뒤, 펠리시아는 공작에게 몸을 돌렸다.
"공작 각하, 혹시 영지에서 마녀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글쎄, 마녀가 하는 일에 따라 다르겠지."
공작 각하가 씨익 웃었다.
아, 저 미소. 루디의 미소와 똑같이 닮았다. 아주 조금 몸이 굵고 키가 커진 걸 제외하면 이전에 보았던 모습과 거의 똑같은 것 같다. 여전히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제 아버지에게 약간의 돈을 주고 저를 사시면 천군만마를 얻는 것보다 적을 막는 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카펜더 공작의 영지의 끝은 야만족이 사는 초원과 가깝다고 들었다. 자잘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서 영지를 떠날 수 없다고, 시녀가 소문을 말한 적이 있었다. 병사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형편일 것이다.
"그대는 요즘 여성답지 않군. 재미있는데. 좋아,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씨익 웃는 공작의 미소에 가슴이 떨렸다.
공작은 그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돈을 주고 혼인계약서를 받았다.
아버지는 오늘 그녀를 팔 생각이었기 때문에 혼인증서를 품속에 넣고 있었다.
계약서에는 앞으로 남작과 펠리시아의 사이에 아무런 법적 관계도 남지 않았다는 조항도 있었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인신매매에 가까운 형태로 펠리시아를 보낼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정말로 계속해서 가족 운이 없네.'
펠리시아의 어깨가 자기도 모르게 조금 떨어졌다.
훗날 공작이 마음 내킬 때 국왕에게 허가를 받으면 그대로 혼인이 성립한다.
물론, 영원히 허가를 받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 증서를 공작이 받음으로써 그녀는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의 소유물이 되었으니까.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계속 그녀가 바랐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황도에 올라왔던 공작은 펠리시아를 데리고 영지로 내려갔다.
그 뒤로는 정신없이 바쁜 날이 이어졌다.
야만족의 침략은 끈질기고 성가시다. 이쪽의 군대가 준비하고 도착하면 벌써 도망치고 없었다.
하지만 시야를 공유할 수 있는 펠리시아와 까마귀라면 그들의 움직임을 곧바로 잡을 수 있다.
처음에는 적은 수였던 펠리시아의 까마귀는 순식간에 수가 늘어나, 점점 공작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덩달아 그녀도 공작에게 중요한 인물이 되어갔다.
영지에는 루디를 찾아온 마생물이 곳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주인에게 필요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멀리에서 지켜보고, 가끔 외로움을 못이긴 것처럼 주인이 머무는 공간 근처에 나타날 뿐이었다.
어쩌면 루디와 마생물 사이에는 자신이 모르는 약속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러 번 찾아봤지만, 리리샤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던 해의 일이다.
급한 일이 있다며 혼자 황도에 갔다 온 공작이 불쑥 말을 걸어왔다.
"펠리시아, 그대는 나를 사랑하나?"
"...."
한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펠리시아가 가만히 있자, 부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공작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약간 불만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사랑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 그대는 이미 황제가 인정한 나의 부인이다."
"네?"
기절하지 않은 것은 그동안 야만족과 싸우며 늘어난 정신력 덕분일 것이다.
깜짝 놀라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는데, 갑자기 따뜻한 것이 입속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공작의 혀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이미 온기가 떨어지고 난 뒤였다.
"어...나는...."
"사랑해, 펠리시아. 부디 나와 결혼해 줘. 이제 와서 그대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건 상상도 하기 싫다. 내 곁에 있어줘."
"...."
이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명목상의 소유로도 만족했다. 이렇게 행복한 일은 이전에 한 번도 없었으니, 그걸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
"내가 불만인가?"
공작의 질문에 황급히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 위에서 공작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귀엽구나, 펠리시아. 처음부터 왠지 마음에 끌렸다. 처음 본 여자인데, 아무래도 눈에 걸리는 거야. 이게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는 건가 싶었다."
그것은 아니다. 단지 기억에는 없지만 이전에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눈에 걸린 것뿐.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은 이 남자와 분명하게 묶였다.
펠리시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일이라도 당장 리리샤가 나타날지 모른다. 그러면 이 남자는 그녀를 사랑했던 과거로 돌아가버릴지도 몰라. 자신이 공작을 만남으로써 과거를 떠올린 것처럼, 그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다.
"가, 각하. 부탁이 있어요. 제발, 오늘, 그, 저를...안아...주세요...."
목소리가 점점 작게 기어들어갔다.
공작이 꿀꺽 침을 삼킨다. 어째서인지 평상시에는 들리지 않는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펠리시아, 이건 그대의 잘못이다. 그대가 나를 부추긴 탓이야."
공작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고 성큼성큼 방을 향해 걸었다.
"지금부터 모든 업무를 내일까지 중단해 주게. 아무도 방해하지 마."
공작이 집사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펠리시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그의 품 안에서 몸을 작게 웅크렸다.
그로부터 일 년 반이 지난 어느 여름 날, 펠리시아는 예쁜 딸을 낳았다.
'리리샤를 찾을 수 없었던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펠리시아는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는 딸을 안은 채 물끄러미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사랑스러운 아기의 얼굴이 삐죽삐죽 울기 직전이 되었다.
"오, 우리 공주님이 화가 나셨구나."
공작이 부드럽게 웃으며 딸을 안자, 울음이 터지려던 아이의 얼굴이 다시 평온해졌다.
"우리 딸은 아버지를 너무 좋아하는군."
공작이 웃으면서 말한다.
글쎄, 그건 틀림없는 사실일까요.
펠리시아는 가만히 있다가 물었다.
"아이 이름은 정하셨나요?"
"글쎄, 몇 개 후보가 있는데, 당신과 함께 정하려고 기다렸어."
펠리시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저는 리리샤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요."
"흠, 그건 오래전 황후의 이름이 아닌가?"
"맞아요. 그녀는 행복하게 살다 갔다고 들었어요. 우리 아이도 그렇게 행복했으면 해요."
"리리샤라, 좋은 이름이야. 어쩐지 듣고 나니 그 이름 외의 것은 생각할 수도 없군."
아이의 이름은 리리샤가 되었다.
사람의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은 채 돌고 도는 것. 언젠가는 리리샤의 딸로 자신이 태어날지도 모른다.
펠리시아는 남편이 안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속삭였다.
"앞으로 잘 부탁해, 리리샤. 더 먼 미래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