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황태자의 소원은 하렘
그 뒤로 4년, 푸테그린 제국의 함대는 먼바다 너머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이른바 해적 잡는 해적이다.
푸테그린의 배는 처음에야 식량과 조미료를 운반할 뿐이었지만, 차츰 금과 은도 거래하기 시작했다.
먼 대륙과 이쪽의 나라는 금과 은을 교환하는 비율이 서로 다르다. 한 곳에서는 금화 한 개가 은화 열 개인데, 다른 곳에서는 금화 한 개를 열다섯 개로 바꿀 수 있는 식이다.
그 차이를 이용해서 이쪽과 저쪽에서 금과 은을 바꿔, 푸테그린은 엄청난 차익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돈 놓고 돈 먹기다.
그렇게 수익을 올리고 있으니, 아루바소를 비롯한 다른 나라의 배가 그걸 보고 가만있을 리 없다. 배에 금은이 가득 담겨 있는 게 알려지자, 푸테그린의 배는 다양한 해적의 표적이 되었다.
이 세상의 해적이 모두 국가의 지원을 받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규모가 되는 해적은 하나도 빠짐없이 국가를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런 해적은 다른 나라의 배를 습격해 약탈할 수 있는 국가의 허가장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국가에서 배를 제공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때로는 정규 해군이 해적이라는 탈을 쓰고 바다에 나와 있기도 했다.
그런 만큼 해적은 상당히 강하다.
예전의 푸테그린이라면 백이면 백 패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 누구도 갖지 못한 무기를 지닌 푸테그린의 함대는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다.
덮쳐오는 해적을 백이면 백 모두 격파해 버렸다.
결국 푸테그린 제국이 나타나기 전에 해양을 지배하던 아루바소와 두 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했다.
적의 숫자가 너무 많으면 뛰어난 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힘들다.
루디는 이미 조금의 위험도 감수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놓았다. 푸테그린 제국의 배는 그 명령을 충실히 지켜, 연합군이 나타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배에 마생물이 붙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어느 누구도 마생물의 눈을 피해 제국의 배에 접근할 수 없었다.
계속해서 허탕만 치던 연합군은 결국 푸테그린 제국 본토로 습격해왔다.
"...."
루디는 먼바다에서 엄청난 굉음을 내며 터지는 배를 바라보았다.
세 나라의 연합군이 몰고 온 배는 모두 347척, 한결같이 최대 규모의 군함들이었다. 드래곤의 보고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가급적이면 배를 확보하고 싶었지만, 제국 본토에 남아있는 함대의 수는 적다. 그들을 배로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쩔 수 없이 루디는 지상에서 그들을 요격해 모두 바다에 가라앉히기로 했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마도병기에 요격당한 배가 먼 수평선에서 화려한 불꽃이 되어 가라앉아가고 있다.
배는 점처럼 작은데,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불길은 이곳에서도 또렷이 보일 만큼 거대했다.
크게 솟은 불길은 화약이 연이어 터지면서 다시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게 치솟아 올라간다. 적의 배가 쏘아 올리는 불꽃놀이가 언제까지고 그치지 않았다.
'정말, 신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제국 본토를 습격하자는 발상은 누가 한 건지.'
멍청한 짓이다.
배에 실려있는 무기가 본토 땅에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있어도 몇 개뿐이라고 추측한 걸까.
루디는 잠시 배가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다 말머리를 돌렸다. 흑마가 푸드득거리며 몸을 움직이자 말을 타고 뒤에 서 있던 레빈의 얼굴이 보였다.
"나머지 뒤처리는 수비군에 맡기고 돌아가자. 리리샤와 태어난 아이가 궁금해서 안 되겠어."
"예, 폐하."
레빈이 히죽 웃었다.
리리샤가 둘째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출산도 지켜보지 못한 상태였다.
출산 시의 보고는 한두 시간 간격으로 계속해서 이쪽에 도착했지만 직접 얼굴을 보고 싶었다. 무사한 아내의 얼굴을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 것 같다.
루디는 수비군 사령관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뒤 호위와 측근 몇 명만 데리고 항구 도시를 떠났다.
며칠을 쉬지 않고 말을 달려 황궁에 도착했을 때는 낮이었다.
먼지를 대강 떨어뜨리고 리리샤에게 향하자, 5살이 된 황태자가 아기 침대에 매달리다시피 해서 갓 태어난 동생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루디가 들어가자 황태자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달려오려던 아이가 멈칫하더니 점잖게 허리를 숙이고 한 팔을 앞으로 구부려 절을 했다. 작은 머리가 우아하게 기울어졌다.
"아버님,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그가 없는 동안 연습을 했던 모양이다. 발음도 말투도 우아한 동작도, 어디 한 곳 나무랄 데 없이 완벽했다.
"정중한 인사 고맙구나, 황태자."
루디는 부드럽게 반환한 뒤 팔을 활짝 펼쳤다.
"좋아, 공식적인 인사는 끝났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줄리앙이 크게 외쳤다.
"아버님!"
도도도도 짧은 팔다리를 움직여 달려와 그에게 안긴다. 루디는 줄리앙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아 허공에 올렸다.
"그새 또 자란 것 같구나."
"물론이에요, 아버님! 저는 이제 오라버니가 되었으니까요. 여동생이 생겼어요."
기쁜 듯 아이가 웃는다. 루디도 덩달아 웃는 얼굴이 되었다.
두 사람의 교환을 보던 리리샤가 침대에 앉은 채 킥킥거리고 웃었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사이에 몸이 자랐을 리가 없잖아요."
리리샤의 말에 줄리앙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니에요, 어머님. 진짜로 이만큼 커졌어요."
줄리앙이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아니, 한 달도 되지 않는 기간에 그만큼씩 자라면 순식간에 인간이 아니게 된다.
루디는 속으로 웃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섯 살의 남자아이에게 그 정도의 허풍은 껌이지.
루디는 아이를 안은 채 리리샤에게 다가가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리리샤의 입술이 약간 터있다. 보고서 상으로는 아무 위험도 없었다고 했지만, 출산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눈이 약간 들어가 있었다.
"루, 외로웠어요."
리리샤가 응석이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보냈다.
"그래, 옆을 비워 미안해, 리리샤. 하지만 나도 외로웠어."
"내가 훨씬 외로웠어."
두 사람 사이에 안겨 있던 줄리앙이 머리를 번쩍 들었다.
"나도 외로웠어요, 아버님."
"그래, 미안하다."
줄리앙이 옆에 있는 아기 침대를 잠시 바라보더니 루디와 리리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클리리스도 외로웠대요."
클라리스는 얼마 전에 태어난 공주의 이름이다. 줄리앙과 마찬가지로 검은 머리 검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마력소유의, 그것도 코레아 왕조인 여아였다.
태어난 지 이제 겨우 일주일인데, 미리부터 주시하고 있었는지 각국 각 가문에서 혼인 신청이 쏟아져 들어왔다.
줄리앙은 아기가 아직 말을 못 한다는 걸 생각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들었어. 클라리스가 외롭다고 했어요."
"그래."
루디가 머리를 쓰다듬자, 자신의 말을 믿어준 거라고 안심한 듯 아이가 웃었다. 줄리앙이 웃자, 그의 옆에 딸려둔 마생물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침대 위를 뛰어다녔다.
마생물에게 이끌린 것처럼, 줄리앙은 신발을 훌떡 벗어버리더니 침대 위로 굼실굼실 기어올라갔다.
리리샤 옆의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간다.
줄리앙은 힐끔 근처에 서 있는 남작부인을 보았지만,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불 속에 얼굴을 묻고 제 어머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불 속에서 줄리앙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님, 전쟁 이야기를 해주세요. 이번에 배하고 싸웠던 이야기."
"루, 나도 듣고 싶어요."
리리샤가 전쟁에 관심 있을 리는 없다. 그래도 아들이 듣고 싶어 하니 거기에 힘을 보태주는 것이다.
아이에게 전쟁 같은 건 들려주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다섯 살치고는 너무 어른스러운 줄리앙은 주변 환경 때문인지 전쟁과 나라 간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루디가 이번에 쳐들어온 연합군의 배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리리샤가 잠이 들었다. 역시 그녀는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줄리앙은 자신이 어머니의 이불에서 쫓겨나지 않는다는 걸 확신하자, 어느새 얼굴을 내놓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줄리앙의 눈이 흥분으로 반짝거렸다.
"아버님! 다음 전쟁에는 나도 데려가 주세요. 내가 있으면 분명 더 크게 이길 거예요."
"전쟁은 없을수록 좋은 거란다. 전쟁을 일으키는 군주보다는 전쟁을 미리 없애는 군주가 훨씬 훌륭한 황제야. 백성을 위한다면 전쟁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
"...."
루디의 말에 줄리앙이 입을 다물었다. 아직 어린아이인데 말이 지나쳤다.
루디는 줄리앙의 머리카락을 살살 흔들어 무너뜨린 뒤 말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 들었다. 너는 좋은 황제가 될 거야."
"네!"
생각났다는 듯이, 아이가 눈을 반짝였다. 자랑스러운 듯이 루디에게 말한다.
"아버님, 저는 미래에 하렘이 갖고 싶습니다."
"...."
나이도 젊은데 벌써 노망이 들었나. 이상한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하지만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줄리앙이 다시 말했다.
"아주 커다란 하렘을 갖고 싶어요."
"어째서 하렘이 갖고 싶은 건지 말해주겠니?"
루디의 질문에 줄리앙이 햇살처럼 웃었다.
"아버님이 황제는 백성을 소중히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잖아요."
"그래, 그랬지."
"시종장도 백성입니다."
"...."
"시종장이 레빈에게 말하는 걸 들었어요. 시종장은 황제의 하렘이 소원이랍니다."
"...."
"시종장에게는 비밀이에요. 몰래 들었다는 걸 알면 싫어할지도 모르니까."
나중에 깜짝 선물로 하렘을 줄 모양이다. 하렘이 무엇인지 알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웃음이 나왔다. 자신에게는 필요 없는 거였지만, 줄리앙은 또 다를지 모른다.
루디는 줄리앙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작게 말했다.
"네가 어떤 길을 가더라도, 이 아버지는 응원하마."
"감사합니다, 아버님."
그 뒤에도 몇 가지 전쟁 이야기를 해준 뒤에야 줄리앙은 잠이 들었다.
본래라면 황태자로서 있을 수 없는 행동이다. 황족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와 다른 건물에서 양육되고 한 달에 한 번 얼굴을 보면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이 황궁에서는 아이가 부모를 매일 만나는 것이 당연하다. 응석을 부리거나 가끔 부모의 이불에 파고드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것이 단지 루디 대에만 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줄리앙과 클라리스의 아이도, 그들의 자식도, 이 시대 다른 귀족과 왕족과는 달리 부모에게 응석을 부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이 잠이 든 뒤, 루디는 겨우 태어난 딸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줄리앙보다 작게 태어난 것 같다. 이전에 기억하던 갓난아기의 모습보다 훨씬 작았다.
여아이기 때문일까. 줄리앙 때보다 아기 침대 전체가 울긋불긋 화려하다.
루디는 갓 태어난 아기와, 나란히 누워있는 리리샤와 줄리앙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황족으로 태어난 이상 국민을 위해 희생할 의무가 있다. 황족이 누리는 사치스러운 삶은 공짜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의무를 바탕으로 했다.
하지만 동시에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행복한 아이로 자라, 밝고 아름다운 삶을 이어가줬으면....
루디는 남작부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런 양육이 계속되도록 해주게. 부탁하네."
"알고 있습니다, 폐하. 오래 곁에서 모셔왔으니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유모가 들어와도 같은 양육을 할 수 있도록 이미 제도의 정비가 시작되었어요."
황실의 양육 지침을 시종장과 협의하여 일부 고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남작부인도 점점 시종처럼 변해가는 것 같다. 그의 마음을 깊은 속까지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공주가 울음을 터뜨리려는 모양이다. 얼굴을 찡그리고 입술을 삐죽삐죽 움직였다.
딸이기 때문일까. 왠지 리리샤 어릴 때가 생각났다.
남작부인이 곁으로 다가와 아기를 안아올렸다.
"안아보시겠습니까?"
"그래, 이리 주게."
남작부인이 루디의 품에 아기를 안겨준다. 줄리앙을 처음 안을 때와는 달리 루디도 익숙하게 아기를 팔 위에 올렸다.
젖엄마가 언제든지 아이에게 우유를 먹일 수 있게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배가 고팠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잠시 흔들어주자 공주는 다시 잠이 들었다.
햇빛이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잠이 든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이 그 아래서 반짝거렸다.
어느새 마생물이 몰려와 세 사람의 잠든 모습을 지켜본다.
행복한 시간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