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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99화 (199/201)

#199 마리의 소원

정원에는 약간 무질서하게 자란 풀이 한가득이다. 봄이 되면서 쑥쑥 자란 풀들은 부드러운 바람에 흔들리며 고운 향기를 냈다.

예쁘지는 않지만 작은 꽃을 피우는 식물들은 어느 하나 먹지 못하는 게 없다. 모두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귀하고 높으신 분이 사는 황궁 일각에 이토록 볼품없는 풀이 자라고 있는 걸 누군가 안다면 기가 막힐 것이다.

마리는 흔들리는 식물의 냄새를 맡으며 눈을 감았다. 이렇게 조용히 살게 되었으니 더 이상은 바라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은 욕심쟁이다. 행복하다 싶으면 그걸로 그쳐야 하는데, 슬금슬금 새로운 욕심이 생겨났다.

얼마 전, 캄캄한 황궁 하늘을 날아다니는 빛의 생물들을 보았다. 황제가 소유하고 있는 신비한 것들이다. 그들이 기쁨에 겨워 하늘을 나는 걸 보고, 마리는 황후가 출산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오후, 후궁의 저택으로 기별이 왔다. 황후가 무사히 황태자를 낳았다는 소식이었다.

무엄하게도, 마리는 마음속에서 황후 리리샤를 자신의 딸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말한 적도 없고, 말할 생각도 없다.

오히려 말을 하면 큰일이 날 것이다. 고귀한 분을 천한 노예가 딸로 생각하다니, 그렇게 황당한 일이 어디 있을까.

그렇게 몰래 숨긴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번, 정말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황태자 님을 만나 뵙고 싶어졌다.

보잘것없는 노예 주제에 그런 생각을 하다니, 머리가 이상해진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번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자꾸만 그쪽으로 쏠렸다.

'누구를 닮았을까.'

머리는 황제와 똑같은 검은 색상이려나. 아름다운 황제와 황후의 자식이니 그 미모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코도, 입도, 귀엽겠지.'

눈을 감은 채 황제와 황후의 얼굴을 조합해본다.

하지만 두 사람의 얼굴을 아무리 합해도 도무지 아기의 얼굴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는 볼수 있을까.

리리샤 황후는 이곳에 자주 오니, 어쩌면 한 번 정도는 만나 볼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한 번이면 되는데.'

한 번, 정말 딱 한 번만 죽기 전에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뭐, 나디아 마마가 언젠가 황태자님을 보게 되시면 그때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황후의 모친이니, 나디아 마마는 아마 황태자를 볼 수 있을 거다. 나디아 마마를 통해 전해 듣는 것도 괜찮다. 머릿속에서 명확하게 떠올릴 수만 있으면 족하니. 그날이 기다려졌다.

눈을 감은 채 햇빛을 받고 있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리 님, 여기 있었군요."

저택에 출입하는 시종이었다.

이 나라의 시종은 대부분 귀족 가문 출신이다.

귀족이 아니라도 노예인 마리보다는 훨씬 높은 신분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매번 자신에게 님자를 붙여서 말한다. 들을 때마다 황공해져서 제발 그러지 말아 줬으면 싶지만, 시종들은 그런 말투를 그만두지 않았다.

마리는 허둥지둥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시종님, 어서 오세요."

"후후. 그렇게 당황해하지 마십시오. 오늘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예? 무슨."

"폐하께서 마리님과 나디아 마마를 모셔오도록 분부하셨습니다."

"어...."

마리는 당황해서 손을 허벅지에 문질렀다. 이곳에 산 지 오래되었지만 황제가 이 저택 밖으로 부른 적은 없었다. 유일하게 이곳을 나간 건 황제와 황후의 혼례가 있던 날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황태자께서 오늘 눈을 뜨셨습니다. 폐화와 황후마마께서 그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하십니다."

"...그, 그래도 되나요? 황태자님을 저같이 미천한 사람이...."

마리가 당황해서 허둥지둥하자 시종이 부드럽게 웃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와 황후 마마는 그대를 가족으로 생각하시는데요. 그런 말씀을 하시면 서운해하실 겁니다."

시종의 말에 얼굴이 빨개졌다.

마리는 구름을 타고 있는 기분으로 저택 안에 들어갔다.

나디아 마마에게 황태자를 보러 가게 되었다는 말을 전하고 가장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괜찮은 옷을 만들어 두는 건데.'

저택에 원단과 액세서리는 꾸준하게 공급되었다. 마리가 옷 만드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황태자가 태어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아기에게 입힐 옷과 이불, 그리고 리리샤가 매우 좋아했던 인형 같은 걸 만들어 두었다.

그것을 건네줄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그저 황태자를 위해 뭐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한 옷은 없다. 어딘가에 나갈 예정도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외출용으로 한 벌 정도는 만들어 둘걸 그랬다.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지둥하는 자신과 달리, 나디아 마마는 당당했다. 역시 본래 왕족이었던 사람은 뭔가 다른 것 같다.

두 사람이 저택 밖으로 나가자, 예쁜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황후가 타는 것처럼 화려하다. 공연히 주눅이 들었다. 이런 마차에 자신같이 초라한 사람이 타도 괜찮을까.

저택은 자신의 영역이다. 초라한 모습을 해도, 화려한 황궁에서 먹을 풀을 기르고 염소젖을 짜도 당황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 밖은 다르다. 바깥세상은 마리보다 높은 사람이 사는, 마리가 한없이 초라해지는 공간이었다.

그런 마음을 알았던 걸까.

시종이 입을 열었다.

"마리님은 그저 평소대로 하시면 됩니다. 만일 마리님에게 화려한 옷이나 꾸민 겉모습이 필요했다면 폐하께서는 옷과 장신구를 함께 보내셨을 테지요. 폐하께서 신경 쓰지 않아도 시종장이 반드시 알아서 준비했을 겁니다."

시종은 부드럽게 웃으며 마리를 보았다.

"하지만 폐하도, 시종장도 그런 걸 하지 않았습니다. 마리님은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충분하기 때문이에요. 굳이 내가 변해야 하지 않나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는 그 모습 그대로, 그 성품 그대로 있어도 좋습니다. 그것이 폐하가 바라시는 모습입니다."

"...."

시종의 말은 마리의 가슴에 깊이 스며들었다.

"...감사합니다."

마리는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나디아 마마와 마차에 올랐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가볍게 저택 밖을 달려갔다.

나디아 마마가 태평한 얼굴로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거칠고 투박한 자신의 손이 다소 거칠어진 하얀 손에 잡힌다.

"황제는 우리 두 사람의 아들인 거지. 아니, 유모까지 셋인가."

나디아 마마가 경쾌하게 웃는다. 그녀의 정신은 시간이 가면서 완고할 정도로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이제는 전혀 혼란 없이 황제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아니지만요, 마마.'

마리는 속으로 중얼거린 뒤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마차는 처음 보는 화려한 궁에 멈췄다.

문을 열면서 시종이 조용히 말했다.

"현재 황후궁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황후 마마와 황태자께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실 때까지 이곳에는 측근 시종과 시녀 등 반드시 필요한 사람만 다니게 됩니다. 그러니 다른 이를 만날지도 모른다고 위축되실 필요는 없어요. 마음을 편히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마리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나디아 마마와 함께 궁안으로 들어간다.

건물이 너무 화려해서 눈이 빙글빙글 돌아갈 것 같다. 긴 복도를 걸어가자, 시종과 기사가 지키고 있는 문이 나왔다.

시종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신분을 확인하지도 않고 문 앞에 선 시종들이 문을 열었다.

방안에 들어가자마자 화려한 금빛 머리가 와락 그녀를 덮쳤다.

"마리!"

깜짝 놀랐다. 마리는 당황해서 품 안에 달려와 안긴 리리샤 등에 손을 돌리며 말했다.

"리리샤님! 맙소사, 뛰지 마세요. 출산 직후 아닌가요?"

"괜찮아."

리리샤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디아 마마보다 먼저 자신에게 달려오는 그녀가 귀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힐끔 나디아 마마를 보았지만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나디아 마마는 자신의 친자식이 황제라 믿고 있기 때문에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마리, 오랜만이야."

황제가 가까이 다가오며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본 황제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단순히 나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습은 이전과 비슷했지만 몇 년 사이에 분위기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왠지 자신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황제의 저택에서 먹을 걸 걱정하던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현재의 황제와 어릴 때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 조그마하던 아이가 언제 이렇게 되었을까.'

어려운 시절은 모두 지나갔다. 지금은 루디도, 리리샤도, 모두 행복해 보였다. 심장이 따뜻해진다.

이렇게 좋은 날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마리는 서둘러 눈꺼풀을 내렸다.

황제의 웃음소리가 가까이 들리더니, 나디아 마마를 향해 손이 쑥 내밀어졌다. 황제가 자연스럽게 나디아 마마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나디아 마마가 기쁜 듯이 웃으며 말했다.

"황제, 축하합니다. 아버지도 기뻐하실 거예요. 아마 신의 나라에서 누구보다도 크게 웃고 계실 겁니다."

아버지라고 하면, 역시 상황제 폐하를 말하는 거겠지.

친모의 말에, 혹시라도 리리샤가 상처받지는 않았을까 살짝 훔쳐보았지만 그런 분위기는 없었다. 리리샤는 어깨를 움츠리며 웃고 있었다.

황제도 부드럽게 웃는다.

"감사합니다...어머님."

문득 황제와 시선이 마주쳤다. 황제는 장난꾸러기처럼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나디아 마마를 안쪽으로 인도했다.

그것을 잇는 것처럼, 리리샤가 아이처럼 웃으며 그녀를 잡아끌었다.

"마리, 우리 아기를 봐. 내가 아기를 낳았어. 아들이야."

정말, 이 공주님은 나이를 먹어도, 아이를 낳아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설마 다른 사람 앞에서도 이런 식일까. 무지한 마리조차도 그건 안 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걱정이 되었다.

리리샤의 손에 이끌려 안쪽으로 가자, 남작 부인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마리도 황공해하며 허리를 굽혔다.

그때 작은 침대에 누워있는 아기가 보였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고귀한 색상인지는 노예 출신인 마리조차 알고 있다. 게다가....

"맙소사."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예쁜 아기는 본 적이 없다. 보는 순간 심장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리리샤가 아기를 안아 올려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안 된다. 이 고귀한 아기에 어찌 노예가 닿을 수 있을까. 멈칫하자, 루디가 그녀의 등에 손을 댔다.

"안아 줘, 마리. 그 아이도 우리가 받은 것처럼 사랑해 주세요."

이렇게 꿈같은 일이 있어도 되는 걸까. 한 번 그 모습만 눈에 넣을 수 있으면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 황궁에 들어온 이후로는 행복한 일만 가득가득이다.

조심스레 아기를 안자, 나디아 마마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품 안을 보았다.

"우리 황제를 많이 닮았어요."

나디아 마마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나왔다.

"리리샤 님의 모습도 많네요. 여기, 입술을 좀 보세요. 삐죽 거리는 게 완전히 똑같아요."

"어머, 그런 걸까. 잘 모르겠어. 코는 황제의 것을 갖다 놓은 것 같고, 후후, 정말, 이쪽을 보면 황제를 닮았는데 저쪽으로 보면 또 황후를 닮은 것 같기도 하구나. 이상해."

행복한 시간이 지나갔다. 잠시 뒤에는 리리샤가 아기 젖을 먹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어머나 세상에, 정말 오래 살고 볼일이다.

단란한 황제 부부의 모습에 나디아 마마와 자신, 그리고 남작 부인이 더해진다.

잠시 뒤에는 타이라의 모습도 보였다. 처음에 보았을 때는 고집쟁이 아이였을 뿐인데 타이라도 많이 컸다.

오늘의 일을 잊을 수 없을 거다. 작은 추억 상자에 장면 하나하나가 차곡차곡 쌓였다.

유모가 보았다면 참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도 지금쯤 먼 곳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는 걸까.

후궁으로 돌아가는 길, 하늘 높이 떠 있는 구름의 모습이 문득 유모의 얼굴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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