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부모가 된 뒤에야 그 마음을 안다
황실의 유모는 먼 옛날에는 젖을 물리는 사람을 뜻했다고 한다. 출산 시 여성이 죽는 경우가 많은 데다 모친이 직접 아이를 양육하지 않는 황실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황실 유모는 그 의미가 약간 변했다.
현재의 유모는 젖을 물리는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 젖을 물리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아기의 양육에 관한 모든 것을 총괄하고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일종의 보모 역할이다.
황실 유모는 아기를 보살피는 시녀와 보모의 선정에서부터, 자신이 젖을 물리지 못하는 경우에는 젖엄마를 결정하고, 아기의 몸에 닿는 것과 입에 들어가는 모든 음식, 아기가 머무는 공간의 모든 것을 선택하고 제어했다.
하는 일이 그렇다 보니 당연히 선정 기준도 높다.
황태자의 유모쯤 되다 보면 특히나 그 자격은 까다로워졌다.
신분, 교양, 성품 등이 뛰어나야 하는 것은 물론이요, 자신이 직접 아기를 낳아본 적이 있어야 했다. 거기에 아기 모친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루디가 아는 한 그런 걸 모두 만족하는 사람은 세렌 남작부인뿐이었다. 결국 남작부인은 타이라에게 황후 필두 시녀라는 지위를 넘겨주고 황태자의 유모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변하는 것은 없다.
본래 황태자는 태어나자마자 세 살이 될 때까지 황후궁에 근접한 건물에서 양육된다. 황후의 자식들은 모두 어릴 때 그곳에서 기르게 된다.
하지만 루디는 그것을 좋게 보지 않았다.
갓난아기를 그런 곳에 홀로 보내, 대체 무엇을 어찌할 것인가.
이런 세상에서 현대 지구의 상식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한도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루디 마음속에서 갓난아기를 어미에게서 떼어내 혼자 기른다는 건 그야말로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세 살이 되어 황태자궁에 들어가게 될 때까지, 루디의 명령에 의해 아기는 그대로 황후궁 일각에서 지내게 되었다.
'솔직히 세 살에 황태자궁에 보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모든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세 살에 황태자 궁으로 들어가는 건 황제로 길러지기 위해 오랫동안 반복해온 규칙이다. 아이를 황태자로 삼지 않으면 몰라도 어느 정도는 타협할 필요가 있었다.
루디는 갓난아기가 자는 모습을 들여다보다 팔을 내밀었다.
조심 조심 천으로 감싸인 아기를 두 손으로 받쳐 올린다. 아기는 손바닥 안에 대부분이 들어올 만큼 작았다.
조각해 놓은 듯한 아기의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갓 태어난 아기는 손도 발도 작다. 루디의 손가락 크기조차 되지 않았다.
막 태어났을 때는 쪼글쪼글하고 이상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느낌이 또 다르다. 살갗이 투명해 보이는 것이 그야말로 인형처럼 예뻤다.
"작구나."
루디가 말하자, 남작부인이 조용히 웃었다.
"폐하, 너무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태자께서는 만지면 부서지는 신기루가 아니에요."
"...."
루디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루디의 손은 아기를 약간 올린 그대로 허공에 멈춰 있었다.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아 무서웠다. 혹시라도 힘의 가감을 잘못하여 그 작은 몸이 다치게 되면 어쩌나 싶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지 못한 채 멈춰 버렸다.
남작부인이 곁으로 다가와 아기를 그의 품에 제대로 안겨주었다.
"이렇게 팔 전체로 지탱하고 안으시는 거예요."
잠시 그렇게 안고 있었지만, 뭔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아기가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조금씩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세차게 울음이 터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리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루, 내가 시범을 보여줄게요."
아기는 리리샤의 품에 안기자 곧바로 조용해졌다. 아무래도 아버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말하자, 리리샤가 깔깔 웃었다.
아기를 낳고 일주일, 리리샤의 회복은 순조로웠다. 지금은 이렇게 아기방까지 스스로 움직여도 괜찮은 정도다. 처음에 걷는 건 물론이고 앉는 것조차 힘들어한 걸 생각해보면 많이 나아졌다. 루디가 새겨 넣은 주문은 도움이 된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은 드래곤의 여의주 덕분일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분명 리리샤의 몸은 아기를 낳기도 어려웠던 게 아닐까. 태어난 아기의 마력이 강한 것을 보고, 아마 확실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야 루디는 기억 속에 남아있던 어머니의 병약한 모습이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마력을 지닌 여성이었어도, 아마 루디가 가진 힘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그는 역대 최고라는 말을 들을 만큼 마력이 많은 아기였으니까.
지금까지 낳아준 부모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지구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라기보다는 그저 남 같기만 했다. 한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타까워졌다.
"...."
그날 밤은 꿈을 꾸었다. 기억으로만 보았던 어머니가 아기의 모습이 된 자신을 안고 어르는 꿈이었다. 꿈에서도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잠에서 깨어난 뒤, 현실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한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 눈물 사이로, 지구의 어머니도 오랜만에 기억했다. 이번의 삶은 지난번과는 다르다. 지금의 그는 지구에서 확실히 죽었을 것이다.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보고, 지구의 어머니는 여전히 슬퍼하고 계시는 걸까. 자신이 다른 세상에 멀쩡히 살아 자식을 낳고 행복하게 삶을 이어가는데, 그걸 모르고 어머니는 계속해서 슬픔에 잠겨 있는가.
어떤 기억도 희미해진다. 살면서 당하는 어떤 굴욕도, 슬픔도 언젠가는 잊어질 것이다.
하지만 지식을 잃은 슬픔도 잊혀질 수 있을까.
'부디 잊혀졌으면.'
루디는 품 안의 리리샤를 살짝 끌어당겨 안았다.
***
[뭐어어어어어어어어?]
점보는 자기도 모르게 펄쩍 뛰어올랐다.
한동안 주인님의 마력을 전해주던 동료가 오지 않았다.
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게 왔다 갔다 했는데 왜 며칠이나 오지 않을까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느림보가 되었기 때문이겠지 싶었다.
점보도 가끔 느림보가 되고 싶을 때가 있는 거야. 누구나 다 그렇다. 드래곤은 아니라고 하지만.
한데 알고 보니까 그 사이에 주인님한테 작은 주인님이 생겼다지 뭐야.
점보는 코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이리 걸었다 다시 저쪽으로 걸어갔다.
[어쩌지. 어쩌지. 생겼대! 생겨버린 거야. 아기가 태어났대!]
하필이면 자신이 없는 사이에 아기가 태어나다니, 정말 곤란하다. 점보는 허둥지둥하다 깜짝 놀라 외쳤다.
[드래곤아, 드래곤아! 나 가봐야 한다. 아기가 아프면 어쩌지? 점보가 가서 지켜줘야 하는 거야!]
분명히 드래곤이 또 말릴 거라고 생각했다. 드래곤은 점보가 하는 일마다 못하게 하니까.
하지만 의외로 드래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좋아, 이틈을 놓치지 말고 빨리 가자. 주인님한테 가자.
[드래곤아, 나는 다녀올 테니까, 드래곤은 여기를 지켜. 알았지?]
[기다려.]
드디어 기다려가 나왔다. 드래곤이 그 말을 할 줄 알았어. 하지만 기다리지 않는다. 절대로 가고야 말 거다. 계속 안 된다고 하면 싸워서라도 반드시 갈 거야.
점보는 인간이 싸울 때 하는 것처럼 코로 주먹을 쥐었다. 코끝을 둥글게 말아 드래곤을 때릴 준비를 한다.
하지만 드래곤이 한 말은 생각과 다른 거였다.
[이쪽을 다른 아이들에게 맡기고 가야지, 잘못하면 다시 돌아와야 할 거다.]
[응? 드래곤이 하면 되지 않니?]
[나도 갈 거야.]
[응? 드래곤이 왜?]
[....]
[드래곤도 아기 지키러 가는 거야?]
[...아니, 나는 네가 엉뚱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지키러.]
[하아.]
점보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건 바보인 자신도 알 수 있다. 드래곤은....
[드래곤아, 거짓말하지 마!]
[....]
[주인님이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하면 되잖아.]
[...점보, 너는 정말 바보구나.]
[바보라고 하지 마!]
화가 나서 코를 힘차게 위로 올리다 끝이 동그랗게 말린 걸 보았다. 주먹 쥐고 있었어. 맞아, 지금 아기 지키러 가려는 중이었다.
급하다고 발을 동동 굴리자, 드래곤은 서둘러 마력을 전하러 온 작은 아이들에게 함대와 사람들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바다를 둥둥 떠다니는 배는 언제 해적이라는 나쁜 놈들을 만날지 모른다. 점보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당연히 주인님의 부하가 위험하지 않도록 부탁해야 한다. 응, 알아. 알고 있었던 거야. 단지 조금 마음이 급했을 뿐이다.
드래곤이 점보를 보았다.
[가자.]
[....]
이상하다. 왠지 드래곤의 눈이 자신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드래곤도 주인님이 아니라 아기를 지키려고 가는 걸까.
[상관없는 거야!]
점보는 크게 소리 지르고 펄럭펄럭 하늘을 날아올랐다. 중요한 건 지금 점보가 아가한테 간다는 사실이다. 아가, 기다려 줘. 점보가 갈 때까지 절대로 위험에 빠지면 안 돼!
주인님이 있는 황궁에 도착했을 때, 점보는 조금 당황했다. 주인님의 마력이 두 개나 있잖아. 큰 마력하고 작은 마력.
[나, 나는 어디부터 거야 해?]
주인님도 중요하다.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주인님 보고 싶어. 하지만 아기를 지키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주인님이 점보한테 부탁했었다. 자신이 없어도 항상 아기를 지켜달라고.
물론 그때는 이미 아기가 주인님만큼이나 커진 뒤였지만, 주인님은 그렇게 아기가 커도 걱정스러웠던 거야. 그러니까 항상 아가는 지켜야 하는데....
[드래곤! 나는 어디부터 가면 되는 거야? 주인님이야, 아니면 주인님의 명령이야?]
옆을 돌아보며 물었지만, 드래곤은 그 자리에 없었다.
[....]
드래곤의 마력을 더듬어보자, 그 야비한 녀석은 작은 마력 옆에 있었다. 뭐야, 드래곤도 아가 지키러 온 거였잖아.
[나도 아가 보러 간다!]
점보는 크게 외치고 아가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
아까부터 밖이 시끄럽다. 바다 멀리 있어야 할 점보가 왜인지 밖에서 빙글빙글 날거나 때로는 코를 흔들며 소리치고 있었다.
'뭐, 소식을 듣고 왔겠지만.'
루디는 아기가 자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황태자가 머무는 방은 황후의 방에서 약간 걸어가야 한다.
루디는 가급적 리리샤의 방에서 가까운 곳을 선택하고 싶었지만, 적어도 황태자가 머물 만큼의 크기와 장식을 할 수 있는 방을 정하게 해달라고 시종장이 통사정을 해왔다.
그 말도 일리는 있다.
황태자가 머무는 방에는 전용 시녀와 유모, 그리고 수행원들이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이 딸려 있어야 한다.
모든 방이 그런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공간을 선택하려다 보면 후보지는 다소 떨어진 곳뿐이었다.
리리샤는 황후 전용 방 중에서 한곳을 주고 싶어 했지만 그럴 수는 없다.
방이 정해지자, 시종장은 아기가 태어나기 직전까지 계속해서 가구의 배치를 바꾸고 새로 물건을 넣어 꾸미며 준비를 해왔다.
루디가 방에 도착하자 시종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뜻밖에도 그곳에는 드래곤이 몸을 반쯤 투명하게 만든 채 서 있었다. 커다란 몸이 구부정하게 앞으로 기울어져 아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세렌 남작부인은 줄리앙 옆에 바짝 붙어 서서 눈도 깜빡하지 않고 드래곤을 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드래곤이 뭔가 하면 아기를 안을 생각이었는지 팔을 약간 내밀고 있었다.
드래곤이 위험하지 않은 존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을 거다. 여러 번 이 황궁에 온 걸 본 적이 있을 테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하는 건, 아마도 루디가 이전에 드래곤을 만난 직후 정신을 잃었던 적이 있기 때문일 거다.
루디가 들어가자, 남작부인은 여전히 드래곤을 경계하면서 조용히 몸을 낮췄다.
드래곤이 여전히 아기를 쳐다본 채 말했다.
[괜찮다고 이 인간 여자에게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군. 그대를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다. 나의 여의주를 태내에서 받은 이 아기는 절대로 나 때문에 위험하지 않아. 아까부터 저 여자가 계속 나를 위협하고 있어 조금 귀찮다.]
하하, 이런.
루디는 쓴웃음을 지으며 남작부인을 보았다.
"위험하지 않으니 약간 물러서도 괜찮네. 이 드래곤이 황후의 출산에 도움을 준 건 리리샤에게 들어서 이미 알고 있겠지?"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했습니다."
남작부인은 여전히 경계하는 눈치였지만 조용히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드래곤을 향한 채였다.
"조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황태자께서는 갓 태어나신지라 매우 약하십니다. 잘못해서 손을 대면 다칠 위험이 있으니."
남작부인이 드래곤을 향해 당부했다.
[알고 있다. 인간의 몸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는 익히 알고 있어. 마력이 몸 안 가득 있는 주인도 덧없이 가버렸다.]
드래곤은 가만히 아기를 보고 있을 뿐이지만, 왠지 몸 전체로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아기를 쳐다보던 드래곤이 몸을 돌렸다. 루디를 보고 그대로 몸을 낮춰, 마치 무릎을 꿇는 기사처럼 바닥에 엎드린다.
[나는 조금 화가 나있었는지도 몰라. 나를 두고 맥없이 가버린 주인에게, 아마 화를 내고 있었던 것 같다. 왜 더 살지 않았느냐고. 어째서 그렇게 짧은 시간만 살았느냐고. 하지만 나는 점보처럼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드래곤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용서를.]
"용서고 뭐고, 화를 내지도 않았어. 괜찮아."
루디가 말하자, 드래곤이 눈을 껌벅거리며 조금 웃는 것 같았다.
그때 창문 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커튼이 흔들리더니 기다란 코가 쑥 들어왔다.
더듬더듬, 아기를 찾는 것처럼 코가 움직인다.
그러더니 잠시 뒤 커튼 사이로 동그란 눈이 불쑥 나타났다.
[주인님! 나도 아기 지키러 왔어요! 주인님! 들어가고 싶어요! 문 좀 열어 주세요.]
아니, 너는 안 된다.
루디는 점보의 코가 아기를 향해 길게 뻗는 걸 보면서 웃어버렸다.
뽀득 뽀득, 창문틀이 점보의 머리를 못 이기는 것처럼 작게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