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황태자 탄생하다
루디는 리리샤의 머리 밑에 팔을 넣어 살짝 안았다.
"괜찮아. 소변이 아니야. 아마 양수일 거다. 산파에게서 이야기는 이미 들었지?"
"양수.... 그래, 양수가 터졌구나. 다행이야. 나, 루 옆에서 그런 부끄러운 일을 한 줄 알고...정말 죽고 싶었어요...."
리리샤가 끅끅 소리를 내며 우는 걸 달래면서, 루디는 시선만 살짝 옆으로 향했다. 침대 발치에 남작 부인이 들어와 서 있었다. 남작 부인이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의원을 불렀습니다. 산파가 출산 준비를 마치고 들어올 겁니다. 지금부터는 여성들만의 공간이 되므로 폐하는 잠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잠시만 시간을 다오."
루디는 리리샤의 이마에, 코에, 뺨에 키스를 해나가며 눈물로 지저분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리리샤, 사랑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그대가 소중하다. 힘들더라도 부디 조금만 힘을 내줘. 내가 대신해 줄 수 있다면 하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 한 일이니, 미안하지만 리리샤가 조금만 힘을 내. 부탁이야."
"루.... 무서워요."
"그래, 나도 무섭다."
"루도?"
"그래. 이렇게 두려운 적이 없었던 것 같아. 그대를 잃게 되는 건 아닐까, 너무 아프지는 않은가, 너무 두렵다."
"...."
"그대가 나의 흑기사야. 부디 용기를 내고...."
이 시대의 출산은 매우 힘들다. 고통을 줄여줄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다.
루디가 가지고 있는 마법 주문은 다양하게 효과를 가지고 있지만 출산의 고통만큼은 줄여줄 수 없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 뭔가 하면 태아를 낳는데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출산 뒤의 회복을 도울 수 있는 주문은 이미 리리샤 몸에 새겨두었다는 점이려나.
하지만 그것도 무사히 아이를 낳은 뒤의 이야기다. 아이를 낳는 와중의 위험은 어찌할 수 없었다.
루디는 리리샤의 손에 키스를 부었다.
"미안, 리리샤. 그대의 몸에만 부담을 지워 미안하다."
눈물로 얼굴이 젖어 있던 리리샤가 손가락으로 루디의 가슴을 꾹 눌렀다.
"부담 아니야. 우리 아이인걸. 다만 조금 무서울 뿐."
그렇게 말하더니 두 팔로 루디의 목을 끌어안았다. 루디는 그녀가 하는 대로 몸을 밑으로 내렸다. 귓가에 리리샤가 속삭였다.
"루, 내가 부르면 들어와요. 누가 뭐래도 내게 와 줘. 무서울 때, 아플 때도 루가 있으면 다 나을 거야. 용기가 나와요."
"그대가 부르면 반드시 옆에 있을게. 혼자 두지 않아."
"응."
그 사이, 의사 파블로와 산파가 들어왔다.
출산은 산파가 모든 걸 맡아 지휘한다. 파블로는 위급상황에 대비해 칸막이를 치고 구석에서 대기할 뿐이다.
시녀들이 파티션을 겹겹이 침대 주위에 두르고, 하녀들이 물통과 리넨 천을 여러 장 가져왔다.
"죄송합니다, 폐하. 잠시 비켜주세요."
타이라와 시녀들이 여러 장의 천을 가지고 와 허리를 숙였다.
루디가 일어나자 시녀들이 리리샤의 몸 아래에 천을 여러 장 겹쳐 넣었다.
루디는 조용히 물러났다. 리리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지만 이곳에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있으면 방해가 된다. 시녀와 산파가 마음껏 행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삐 움직이는 시녀들 사이를 빠져나가, 루디는 황후방 옆의 대기실로 향했다. 시녀들이 황후를 위해 대기하는 방이다.
본래라면 황제가 있을 곳이 아니지만, 오늘만큼은 리리샤의 목소리가 가장 가까이 들리는 이곳이 루디의 장소였다.
황제가 여성의 출산 장소에 머무는 일은 없다. 황제는 아이가 탄생하고 뒤처리가 얼추 끝난 뒤에야 방문한다.
하지만 아내가 목숨 걸고 아이를 낳고 있는 상황에서 어찌 그리할 수 있을까. 루디가 굳이 이곳에 머물 것을 고집했다.
그런 상황이라 해도, 안타깝지만 황제의 업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계속해서 급한 일이 밀려왔다.
덕분에 고생하는 것은 나이 든 시종들이다. 황후의 내밀한 일이 벌어지는 장소에, 젊은 시종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오직 나이가 많은 시종들만이 움직였다.
나이 먹은 시종들이 서둘러 책상과 의자 등 황제가 있을 곳을 정돈하고 급한 서류를 수레에 담아 옮겨왔다.
급한 대로 자리가 마련되자 그들 역시 모두 물러갔다.
대기실에는 시종장만이 남아 있었다.
"미안하네, 시종장."
"별말씀을요. 폐하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루디는 억지로 의식을 집중해 서류를 읽어내려갔다.
가끔 펜을 멈추고 방문을 본다. 조금 열려 있는 방문 너머로 시녀들이 리리샤를 격려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진통 간격이 조금씩 짧아지는 모양이다. 처음에는 잠시 아프다 말았던 것이, 점점 앓는 소리가 길어지고 간격은 짧아졌다.
하루가 꼬박 지나고 새벽이 왔다.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된 것도 그쯤이었다.
리리샤가 강아지처럼 애처롭게 살살 운다. 아파, 아파, 하며 가느다랗게 울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칼로 마음을 얇게 베어내는 것 같다.
"남자라는 것은 참으로 무능하구나.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문득 중얼거리자 시종장이 위로하듯 말했다.
"폐하께서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겁니다."
"...."
시간이 조금 흘렀다. 여전히 사방은 캄캄하다. 리리샤의 목소리가 점점 더 고통에 잠식되어갔다. 더 이상은 서류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루디는 주먹을 움켜쥐고 방문 근처에 선 채 벽에 이마를 댔다.
산파와 시녀들이 계속해서 리리샤에게 말을 걸었다. 리리샤의 목소리가 고통에 못 이겨 비명처럼 커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가 루, 라고 울면서 자신을 불렀다.
발이 허공을 날아가는 것 같다.
바닥이 밟히는 느낌도 없이 허둥지둥 리리샤의 곁으로 향했다.
침대에 도착한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피는 익숙한 것인데, 그것이 리리샤의 몸에서 나온 거라고 알면 똑바로 쳐다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시선을 올려 리리샤를 본다. 땀으로 젖은 리리샤의 얼굴이 하얗게 되어 있었다. 정말 살아있는 걸까 두려워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리리샤."
"루, 아파."
"그래, 그래...사랑해 리리샤...귀여운 나의 부인...."
되돌려줄 말이 그것밖에 없다. 힘내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최대한 힘을 내고 있으니까.
한동안 힘들어하던 리리샤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고 아이의 머리가 보인다는 산파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울린 것은 그로부터 잠시 뒤, 억겁의 세월 같은 짧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황자님이십니다."
남작 부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높다.
시녀들의 화사한 비명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마생물들이 모두 가까이로 몰려 아기의 모습을 살폈다. 소리도 나지 않는데 시끄러워진 것 같다. 방을 가득 메운 마생물들의 빛이 방 전체를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빛냈다.
"건강하신, 매우 건강하신 황자님이세요."
남작 부인이 아기를 씻긴 뒤 부드러운 천에 감싸 루디와 리리샤에게 보였다.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다. 쪼글쪼글 목과 팔 다리에 주름이 져 있다. 예쁘다기보다는 이상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가락은?"
훌쩍훌쩍 울면서 리리샤가 묻자, 시녀들이 웃는다.
"손가락도, 발가락도 모두 정상입니다. 어디 한 군데도 나무랄 곳 없는, 매우 건강하신 황자님이세요."
조심조심 아기를 리리샤에게 안겨주자, 리리샤는 가만히 아기의 얼굴을 보았다.
"예쁘지 않은 것 같아."
톡, 한 마디 하자 다시 시녀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기는 본 적이 없습니다."
산파가 한 마디 하자, 남작 부인도 말을 더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두 분의 모습을 꼭 닮았어요."
아니, 그건 아니겠지. 주름투성이 아기 어디에 그런 모습이 있느냐.
루디는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리리샤도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하나도 안 닮은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리리샤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루디도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는 리리샤와 아기의 이마에 번갈아 키스를 해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리리샤, 감사합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다 해도 오늘의 일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배가 고픈지, 아니면 뭔가가 마음에 안 드는지 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봉황이 아기 위를 날면서 기쁜 듯 빛 가루를 떨어뜨렸다. 아기의 몸에 빛이 스며들면서 눈 녹는 것처럼 사라졌다.
아기가 잠시 멈칫하는 것 같더니 더 우렁차게 울기 시작했다.
마생물들은 기쁨을 못 이기는 것처럼 파드득파드득 움직이다가 저마다 밖으로 뛰어나갔다.
까맣던 하늘이 온통 불꽃놀이처럼 환해졌다.
누군가가 그걸 보고 아기가 탄생한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이 자리에서 나의 첫 아들을 황태자로 삼는다. 준비를."
루디의 말이 떨어지자, 시녀들이 출산에 사용된 물건을 거둬들여 나무통에 넣기 시작했다. 하녀들이 급하게 나무통과 물을 내가고, 침대의 휘장이 내려졌다.
황후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가려지자, 곧바로 시종장이 은쟁반에 몇 가지 물건을 담아 가져왔다.
공손히 절을 한 뒤, 시종장이 새빨간 얼굴로 우는 아기에게 시선을 주었다. 순식간에 시종장의 눈이 뿌옇게 되었다. 설마, 우는 건가.
시종장은 스윽 숨을 들이마신 뒤 은쟁반 위에 있는 작은 금잔에 손가락을 약간 담갔다.
"먼저 마력 측정을 하겠습니다."
마력을 측정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아기가 울어 감정이 밖으로 표출될 때 곱게 간 마석가루를 물에 개어 조금 바르면 된다.
가지고 있는 마력의 크기에 따라 마석가루에서 빛이 나오는데, 그걸로 대강 강약의 정도를 판단하게 된다.
듣기로는 은은한 빛이 약간 비치면 보통이라고 한다.
만일 아기에게 마력이 너무 없다면 황태자로 책봉하는 시기는 뒤로 미루어진다. 다음에 태어나는 아이를 기다렸다 결정하게 될 것이다.
드래곤의 여의주까지 복용하고 낳은 아이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약간은 긴장되었다.
시종장이 아기를 감싼 천을 조금 늦추어 발가락에 물과 마석가루 섞은 걸 조금 발랐다.
아기가 악을 쓰고 울면서 발을 꼼지락거리자, 순식간에 마석가루에서 빛이 뻗어 나와 사방으로 퍼졌다. 마치 순간적으로 태양이 방에 들어온 것 같았다.
"이, 이건."
시종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구석에 대기하고 있던 파블로도 놀랐는지 엇,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토록 진한 마력이라니!"
시종장이 감격한 듯 말했다.
"제 평생 이토록 강한 마력의 소유자는 본 적이 없습니다. 폐하, 감축, 감축드립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유례가 없을, 아니 그건 아니군요. 폐하께서는 이보다 더 마력이 강했다고 들었으니. 맙소사. 현 황제와 그 후대가 연이어...."
시종장의 얼굴이 싱글벙글이다.
지금이라면 몽둥이로 때린다 해도 웃고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서두르자. 시간이 걸리면 걸릴수록 이제 막 태어난 신생아에게는 무리가 된다.
루디가 손을 내밀자, 이전에 상황제에게 했던 것처럼 시종장이 바늘로 손가락을 찔러 피를 몇 방을 냈다.
그 피를 인장 반지의 표면에 떨어뜨려 충분히 묻힌 뒤, 루디는 아기의 배꼽 위에 살짝 대고 주문을 외웠다.
반지가 은은하게 빛나면서 인장과 똑같은 문장이 아기의 피부에 떠올랐다.
루디는 아이의 이마에 키스를 한 뒤, 엄숙하게 말했다.
"나의 아들 줄리앙을 황태자로 삼으니, 시종장은 시급히 이를 온 나라에 공표하라."
"명령대로 하겠나이다."
시종장이 조용히 절을 하고 물러났다. 행동은 평상시와 같지만 시종장의 입가는 귀까지 길게 찢어져 있었다.
아기는 곧바로 리리샤의 품으로 돌아갔다.
휘장을 올리고 들여다보자, 리리샤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리리샤의 몸이 힘들지 않도록 팔 밑에는 빈틈없이 쿠션이 대어져 있다.
아이를 보고 리리샤가 작게 미소를 띠었다.
어쩐지 말을 걸 수가 없다.
아이가 아이를 낳는다고 생각했는데, 여자는 출산을 함으로써 비로소 어머니가 되는 건지도 모른다. 아기를 보는 리리샤의 얼굴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리리샤가 고개를 조금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는다.
"피곤하지 않은가."
루디가 묻자 리리샤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피곤해요. 몸이 아직도 아파서 앉아있는 것도 힘든 데다,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귀찮을 지경이에요. 하지만 의원이 처음 며칠간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으니까."
리리샤가 정말로 어머니처럼 말한다.
루디가 놀란 얼굴을 하자 리리샤가 후후 웃었다.
그녀는 아이에게 시선을 주고 잠시 바라보다 불쑥 말했다.
"자꾸 보고 있으니까 루를 닮은 것 같아."
루디는 가까이 다가가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눈도 뜨지 않은 아이의 얼굴은 왠지 납작하고 찌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내 눈에는 아무도 닮지 않은 것 같아."
"여기, 이마가 닮았잖아요. 코도 조금 닮은 것 같고."
"...."
아니, 전혀.
잠시 동안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어느새 리리샤는 젖을 물린 채로 반쯤 눈이 감겨 있었다.
한동안 젖을 빨던 아기의 입도 멈췄다.
엄마도 아이도 자고 있는데 용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남작 부인이 조심스레 리리샤의 품에서 아이를 떼어내 안자, 루디는 리리샤를 침대에 편히 뉘었다.
그날부터 며칠 동안,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종소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제국의 모든 도시에서 울려 퍼졌다.
젊은 황제의 첫 아이 소식에 모든 사람이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