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96화 (196/201)

#196 루, 나 자다가 소변을 본 것 같아

인생의 앞에 뭐가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한때는 떵떵거리며 거상이라고 자신하던 그가 쫄딱 망해, 결국에는 전혀 낯선 나라에까지 가서 생고생을 하다 통역인지 뭔지가 될지 누가 알았을까.

"하아."

투자했던 배가 난파되어 모든 재산을 잃었을 때, 통역은 그것이 인생의 바닥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가 인생 최악의 위기라고.

하지만 틀렸다. 바닥 밑에 지하가 있는 것처럼, 최악 뒤에 더욱 심한 것이 도사리고 있었다.

통역은 부들부들 떨면서 손에 쥔 밧줄을 움켜쥐었다. 그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배에 단단히 감겨 있는 밧줄을 잡고 있었다. 배가 흔들리더라도 위험하지 않도록 대비한 것이다.

'이걸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 대비하는 게 좋겠다며 밧줄을 통역의 손에 쥐여준 것은 갑판장이었다.

갑판장은 친절이라는 의도로 한 행동일지 모른다. 하지만 통역에게는 그것조차 공포였다.

이들의 말을 거절하지 말라.

그렇게 생각했다. 죽어도 밧줄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지금은 웃고 있지만 언제 악마로 돌변할지 모른다. 이들이 한 말을 어기지 말자. 절대로.

'무서워. 이 사람들 무서워.'

통역의 눈에 물방울이 맺혔다.

바다로 나온 지 벌써 여러 달, 새해는 바다 위에서 지나가고, 어느새 추위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 통역이 타고 있는 푸테그린의 배는 매서운 바람 속에서 해적을 만났다.

아니, 해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대규모다. 해적단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정도로 수가 많았다. 더구나 상대는 아루바소와 막상막하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나라의 유명한 해적이었다. 우는 아이도 이 해적의 이름만 들으면 울음을 뚝 그친다고 들었다.

하지만 안 돼. 그런 악명 높은 해적도 이 위험한 인간들에게 걸리면 귀여운 토끼일 뿐이다. 먹이는 이쪽이 아니라 저쪽, 흉악한 해적단이 귀여워 보일 정도로 이 인간들은 위험하다.

"준비!"

"발사!"

명령이 떨어지자 세차게 물이 쏘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물대포다.

지난번 푸테그린의 황제가 있을 때 본 것과는 위력이 달랐다. 물대포가 쏘아질 때마다 와지끈 소리를 내며 배가 부서졌다. 해적의 배가.

'그, 그때는 일부러 약한 놈을 사용했던 걸까. 사실은 이렇게 강한 무기였었나.'

통역이 생각하는 사이, 맙소사, 해적단의 배 여기저기에서 돛대가 쓰러져 넘어갔다. 무슨 물이 이토록 흉악하단 말인가.

할 수만 있다면 눈도 귀도 모두 막아버리고 싶다. 하지만 안 되지. 밧줄 잡고 있어야 한다. 밧줄을 놓치면 이 흉악한 놈들에게 언제 죽을지 몰라. 사람을 산 채로 손모가지 자르는 놈들이다. 하라고 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잊어버리면 안 돼. 무섭다.

어느 정도 물대포를 뿌린 뒤에는, 푸테그린 병사들이 저격총이라고 부르는 긴 막대를 해적에게 조준했다.

막대마다 빛이 뻗어 나와 해적을 맞추자, 벌렁벌렁 사람들이 쓰러졌다.

겁에 질린 해적들이 토끼처럼 비명을 지르며 바다로 뛰어내렸다.

처음에는 총을 쏘아대던 해적들이지만, 지금은 자신들이 가진 무기로 이자들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총을 쏘는 놈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머, 멀쩡한 해적선이 없어. 모두가 다 가라앉기 일보 직전이다.'

돛도, 선체도 망가진 해적선에, 푸테그린의 함대가 서서히 접근해갔다. 갈고리로 배를 얽어 맨 뒤, 푸테그린의 병사들은 해적선에 실려있는 물건을 자신들의 배에 옮기기 시작했다.

당연하달까. 저항하는 해적은 이제 없다. 어쩌다 한두 명 덤벼오지만, 순식간에 저격총의 빛을 맞고 죽어버렸다.

"화약과 총도 잊지 마라!"

대장들이 병사들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자신들의 무기가 훨씬 뛰어난데 왜인지 푸테그린의 병사들은 저들의 무기도 함께 실었다.

연구라도 하려는 걸까. 대체 이놈들은 어디까지 탐욕스러운 건지 모르겠다.

쓸만한 물건과 식량들을 모두 옮긴 뒤, 푸테그린 제국의 배들은 서서히 해적선을 떠났다.

돛의 일부에 바람이 팽팽하게 담겼다. 배는 교묘하게 속도를 조절하며 흔들흔들 물 위로 미끄러졌다.

하지만 통역은 여전히 밧줄을 꽉 붙잡은 채였다. 너무 힘을 주어서 손아귀에 감각이 없다.

이런저런 일을 하느라 바쁘게 뛰어다니던 갑판장이 문득 그를 보았다.

"이런, 아직도 밧줄을 쥐고 있습니까. 이제 놓아도 괜찮아요."

놓을 수만 있다면 진작에 놓았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있어서인지 손을 풀 수가 없다. 계속 이빨이 딱딱 부딪친 탓에 턱 전체가 아팠다.

갑판장이 하하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서서히 손가락을 하나씩 떼준다. 간신히 밧줄을 놓자, 갑판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신은 겁이 너무 많군요. 다음에는 갑판이 아닌 선실에 있도록 합시다."

싫다. 그러다 잘못해서 배가 가라앉으면 어쩌란 말인가. 예전에 자신이 쫄딱 망하게 된 건 배가 난파당해 물건을 모두 실은 채로 가라앉았기 때문이었다.

떠듬떠듬 그렇게 말하자 갑판장이 한숨을 쉬었다.

'한숨 쉬지 마. 무섭잖아.'

눈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

그 뒤로는 순조로웠다.

물론 다시 해적을 만났어도 푸테그린의 배는 아무 일 없이 순조롭게 항해했을 것이다. 바다에 처박히는 것은 상대편 배였을 테니까.

푸테그린의 배는 무사히 교역국인 페리에 도착했다. 한때 그가 성공하고 다시 거지꼴이 되었던 애증의 고향에.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제국의 사람들은 그가 아루바소와 페리, 그리고 푸테그린의 말을 모두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알자 돈을 많이 주겠다고 꼬드겨 통역을 맡기더니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그 말은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두겠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

어떻게든 그만두고 싶지만 이 남자들 앞에 서면 입이 얼어붙어 버리는 거야. 무서워서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일이 끝나주면 좋겠지만,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자신은 언제까지고 그 배에서 통역으로 일하는 것 같다.

그래서 결정한 게 도망치자는 것이었다.

어차피 머리가 들어있는 상자를 아루바소로 보내면 자신의 일은 끝나는 거고, 도망친다는 굳은 결심을 보여주면 설마하니 쫓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페리 말을 할 줄 아는 선원도, 아루바소 말을 하는 자들도 있다. 그들끼리 어떻게 섞으면 뭔가 되겠지. 자신이 없어도 괜찮을 거다. 굳이 그를 뒤쫓아오면서까지 필요로 하지는 않아. 아마...그렇겠지?

하지만 기회는 한 번뿐이다. 잘못하면 도망쳤다는 이유로 손목과 발목이 뎅강뎅강 잘릴지도 모른다.

'무, 무서워.'

통역은 꿀꺽 침을 삼키고, 자신의 경쟁상대이자 친구였던 사람이 있는 곳으로 푸테그린의 함장을 안내했다.

배가 나가고 들어오는 시기는 대부분 일정하다. 지금 시기라면 아직 아루바소 방향으로 출발하기 전일 테니 딱 알맞을 것이다.

상담은 꽤 시간이 걸렸다. 당일에 끝나는 것도 아니다. 이삼일에 걸쳐 하게 된다.

상자 속의 상태라든가, 국왕에게 전달할 건지 아니면 그냥 국가 관리에게 넘길 건지, 그런 것들에 대한 협의 때문이었다.

푸테그린에서는 국왕에 직접 닿기를 원하는 모양이다. 금액이 엄청나게 비싸졌지만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역시 부자 나라는 뭔가 다르다.

그날의 통역은 그가 맡았지만, 양측 모두 상대방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으니 앞으로는 굳이 자신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날 밤은 배가 아니라 평범하게 페리의 여관에 머물렀다. 의외로 감시 같은 건 없었다. 그렇다면 당장 도망치려고.

그는 오밤중에 여관을 나왔다. 그날은 다른 여관에서 잠을 자고, 아침이 되자마자 이웃 마을로 향하는 정기마차를 탔다.

아는 사람이 약간 떨어진 도시에 살고 있다. 그 사람이 있는 곳까지 가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마차로 하루 반을 달리고, 다시 똥줄 빠지게 새벽부터 오후까지 걸었다.

드디어 목적지가 가깝다 싶어 마음을 조금 놓았을 무렵이었다.

문득 하늘을 쳐다본 통역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맙소사."

하늘에 커다란 귀를 펄럭거리며 날아오는 것이 있었다. 푸테그린 사람들이 정령이라고 떠받드는 빛의 코끼리다. 이름이 점보라고 했다.

점보가 뭔가 말하는 것처럼 입을 달싹거리더니 근처 바닥에 떨어졌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바닥이 파이고 사방으로 돌이 튀었다.

거기에서 톡 튀어나온 점보가 가까이 달려오더니 그를 코로 덥썩 감아 올렸다.

"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다 기절했다.

깨어났을 때 그는 푸테그린의 배 위에 있었다.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끌려와 버렸다. 귀신같은 놈들, 감시하지 않는 것 같더니 그게 아니었구나. 이제 손모가지, 발모가지가 뎅강뎅강 잘리는 건가.

'다시 한번 기절해버리고 싶다.'

***

[쯧쯧, 그만두라니까.]

드래곤이 투덜거린다.

점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래곤은 너무 냉정하구나!]

정말, 어째서 드래곤은 저렇게 나쁜 아이가 된 걸까.

점보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주인님 말씀을 모르겠어? 우리는 사람한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거야. 전쟁에는 참가하면 안 돼! 사람을 죽이는 것도 나빠! 물건을 부수면 안 돼!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한테는 도움을 주는 거야!]

[....]

점보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드래곤도 언젠가는 착한 행동을 하게 되려나.

[앞날이 구만리야!]

그렇게 말한 뒤, 점보는 배 위에서 몸을 떨고 있는 통역을 보았다. 무서웠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괜찮아. 무서운 건 금방 없어질 거다. 집에 돌아왔으니까.

[이제 안심이야.]

점보는 기쁜 마음에 귀를 펄럭였다. 몸이 위로 떠올랐다 다시 가라앉았다.

[주인님 만나면 자랑해야지! 점보가 길 잃은 사람을 배에 데려다줬다고 자랑하는 거야! 칭찬받겠지? 아, 지금 가보고 싶다. 주인님 보고 싶어! 주인님한테 갔다 올까?]

[그만두어라.]

[드래곤은 냉정하구나! 정말로! 주인님이 보고 싶지 않은 거야?]

[....]

왠지 모르겠지만 드래곤이 자꾸만 한숨을 쉬었다.

***

아직 날은 춥지만 어느새 매화나무에는 새눈이 통통하게 나오는 시기가 되었다. 머지않아 이른 꽃이 필 것이다.

루디는 눕는 것조차 힘들어하다 겨우 잠든 리리샤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얼굴이 아이 같다.

'이렇게 어린 얼굴로 아이를 낳을 건가.'

왠지 기분이 묘하다. 아이가 아이를 낳는 것 같았다.

리리샤의 이마에 살짝 땀이 배어 있다.

임신한 뒤로는 체온이 높아진 것 같다. 땀을 자주 흘렸다.

루디는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살짝 눈가를 닦았다. 속눈썹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자면서도 울었던 걸까.

리리샤는 요즘 들어 걱정이 많다. 아기 손가락이 다섯 개가 아니면 어쩌나, 발가락이 모자라면? 태어나는 애가 황태자가 아닌 여자아이면 어쩌지, 검은 머리가 아니면....

그런 식으로 끊임없이 걱정거리를 찾아내 때때로 혼자 울었다.

남작 부인의 말로는 원래 임산부는 그렇게 걱정이 많은 거라고 하지만, 너무 울어서 눈이 녹아 없어질 것 같다.

그녀의 불안을 없애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루디가 해줄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아기가 태어나도, 둘이 함께 짊어지고 고민하며 해결해나갈 거라는 말뿐이었다.

게다가 사실 불안한 건 루디 역시 마찬가지다. 그 역시 아기에 문제가 있으면 어쩌나 걱정이 태산이었다.

리리샤가 작은 소리를 내며 머리를 조금 움직였다. 꿈을 꾸고 있는지 뭔가를 입속에서 웅얼거렸다.

"부디 좋은 꿈을."

루디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의원 파블로는 2월 말에서 3월 초쯤 아기가 태어날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리리샤의 배는 최근 들어 급격하게 커졌다.

더 이상은 커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달이 되자 피부가 얇아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크게 되었다.

그 때문에 앉는 것도, 눕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안쓰러운....'

그녀의 힘듦과 고통을 대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루디는 안타까운 마음을 누르면서 리리샤의 손을 살짝 잡았다. 다른 손은 살며시 리리샤의 배에 손을 올려놓는다. 언제 아이가 태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배가 커져 있었다.

'건강하게 태어나 다오.'

마음속으로 중얼거리자,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갑자기 배 일부분이 톡 튀어나왔다.

'이건...발이 아닐까.'

이제 태아가 배를 찰 때마다 손인지 발인지 구분이 갈 정도로 아기의 몸이 커졌다.

가끔은 너무 세게 차서 리리샤가 아프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튼튼한 아기일 거라고 기뻐하는 리리샤가 너무 예뻐 보였다.

어느새 마생물이 침대 주변에 몰려와 있었다. 가만히 리리샤를 쳐다본다. 리리샤를 깨우지 않으려는 듯 모두 빛을 약간씩 줄여 어둡게 하고 있었다.

축복하는 것처럼 모두의 몸에서 작은 불씨가 날아 리리샤에게 떨어졌다. 빛의 눈꽃이 리리샤에게 내리는 것 같다.

약간씩 몸을 뒤척이던 리리샤의 움직임이 멈추고, 표정이 편안해졌다. 어쩌면 꿈속에서도 마생물을 만나고 있는 건지 모른다.

편안한 숨소리를 내는 리리샤의 모습을 보니 아주 조금 루디의 마음도 맑아졌다.

아직 창밖은 어둡다. 조금 더 자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루디는 리리샤 옆에 조용히 몸을 뉘었다.

리리샤의 출산이 다가오면서 루디는 잠이 적어졌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까 마음이 불안해서 작은 소리, 리리샤의 작은 움직임에도 잠이 깬다.

옆으로 누워 리리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니, 봉황 두 마리가 날갯짓을 하며 루디와 리리샤의 몸을 살짝 덮었다.

그동안 많이 피곤했던 걸까. 몸이 따뜻해지면서 어느새 루디의 의식은 얕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리리샤에게 산기가 보인 것은 그날 해가 떠오르기 직전이었다.

왠지 모를 축축함에 눈을 뜨자, 리리샤가 바로 누운 자세 그대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루디가 깬 것을 확인할 리리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루.... 나 자다가 소변을 본 것 같아."

미안한 듯 부끄러운 듯, 리리샤가 울면서 말했다.

양수가 터졌구나.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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