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행복이 내리는 바다
추운 시기에 접어들면서 훌쩍 짧아진 해가 어느새 모습을 감추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고 방에는 창문마다 덧창과 커튼이 닫혔다.
시녀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허리를 폈다. 황후궁의 시녀는 어디에서도 아름다운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누가 보지 않더라도 흉하게 몸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 그렇게 배웠다.
복도를 걷던 시녀의 얼굴에 문득 미소가 걸렸다.
벌써 그런 시간일까.
난방과 전등 마도구에 황제의 마력을 보충하는 마생물의 행렬이 복도마다 이어졌다.
빠르게 달리며 예술처럼 마력을 담는 생쥐와 여우, 허공에 매달린 샹들리에 곳곳에 놓인 마도구를 향해 날갯짓하는 빛의 새, 그리고 제일 느리게 달리지만 항상 열심인 뒤뚱뒤뚱 펭귄들.
이제는 익숙해진 광경에 황궁 사람들이 모두 수고하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 평범한 광경 속에서, 황후궁의 신참 시녀는 걸음을 빨리했다.
오늘은 황후궁 깊은 곳에 외부인은 출입 금지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황제에게는 이미 오늘 황후가 시녀들과의 업무 협의와 지시 때문에 오후 시간에는 만날 수 없다는 전갈을 보내 두었다.
그리고 황후의 몸이 아픈 곳은 없으나 뱃속 아이가 놀라 하룻밤은 모실 수 없다는 말도 전했다.
뭔가 미묘한 말투가 되었지만 어쩔 수 없다.
아프다고 하면 당연히 의사를 부르는 등 난리가 날 테고, 단순히 쉬고 싶다고 하면 황제가 함께 있어주겠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저렇게 미묘한 말이 나온 거다.
'폐하는 우리 마마에게 매우 다정하시니까. 잘못하면 잠이 들 때까지 곁에 있어주겠다고 하실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오늘은 그래서는 안 되니까.'
황후를 가까이 모시는 측근 중에서는 가장 말단인 시녀는 척추를 쭉 펴면서 가슴을 내밀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 있는 제국의 황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여성이 바로 자신의 주인이다. 후궁 한 명 두지 않을 만큼 황제의 총애는 깊고 깊었다. 자랑스러운 마음에 저절로 가슴이 펴졌다.
세간에서는 푸테그린 제국의 황후가 남자의 정신을 빼먹는 요염한 미녀라는 소문도 있다던가.
'뭐, 실제 마마와는 전혀 다르지만.'
그래도 어떻게 보면 소문은 진실을 꿰뚫고 있다. 황후가 어떤 여자에게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황제의 사랑을 받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시녀는 복도의 기둥 뒤에 서서 품에 숨긴 술병이 보이지 않도록 천으로 잘 감쌌다. 그 위에 깨끗하게 접은 리넨 천을 올린 뒤 황후의 방을 향해 걸어간다.
평상시에는 석상 취급하던 기사들에게 새침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지만, 역시나 방을 지키는 기사들의 표정은 움찔도 하지 않았다.
'역시 이 인간들은 우리가 방 안에서 뭘 해도 모르는 게 틀림없어.'
겉으로는 인간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진짜로 석상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이 기사들이 말하거나 표정이 움직이는 걸 본 적이 없다.
간간이 얼굴이 달라지는 걸 보면 분명히 교대는 하고 있을 텐데, 언제 사람이 바뀌는지 본 적도 없었다.
좋아, 완벽해. 아무도 우리의 오늘 밤을 모른다.
시녀는 만족스럽게 웃은 뒤 시종이 열어준 문으로 들어갔다.
시종에게는 비밀을 지켜달라고 남작 부인이 교섭을 했을 거다. 아무 걱정 없이 오늘 밤 하루는 놀아도 좋다고 남작 부인이 말한 걸 보면 틀림없겠지.
시녀가 방으로 들어가자, 고참 시녀들이 키득거리고 웃으며 술병을 받았다.
"좋았어, 용케 가져왔구나."
"가슴이 떨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독한 술이 황후궁으로 들어가는 걸 누가 알면 그야말로 목이 달아난다구요."
물론 과장이다. 조금 독한 술을 들여갔다고 목이 날아갈 정도면 지금 황후궁에는 목 없는 시체만 우글우글할 거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걸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선을 넘어서 돌아온 병사 취급이다.
대단해, 대단해, 역전의 용사다, 그렇게 말하며 고참들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늘은 고참 시녀 중에서도 가장 황후 마마와 가까운 타이라의 '처녀의 밤'이다. 이미 유부녀가 됐지만 어쨌든 마지막 처녀의 밤인 거야.
그것도 남작 부인의 허가 아래.
"아앗! 그 그림은!"
시녀는 생각에 잠겨 있다 깜짝 놀라 달려갔다.
저것은 일전에 딱 한 번 극장에서 보았던 남자 배우의 알몸 그림이 아닌가.
"맙소사! 맙소사! 이렇게 훌륭한!"
"그렇지? 이 근육 좀 봐. 게다가 이건."
"꺄아! 부끄러워요."
시녀들이 꺅꺅 소리를 지르며 눈을 살짝 가리고 그림을 쳐다본다. 손가락 사이가 모두 살짝 벌어져 있었다.
황후 마마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중얼거렸다.
"어디가 멋있는 거야?"
엣헴, 하며 황후 마마가 점잖게 말했다.
"루가 훨씬 멋있다구. 루의 배에는 말이야, 길게, 이렇게, 선이 세 개나 그어져 있어.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도 들어가지도 않거든."
어머나, 어머나. 시녀들이 눈을 반짝거리며 황후의 곁으로 모였다. 순진무구하기만 하던 황후 마마가 성인 토크를 다 하시네.
누군가가 술잔을 돌렸다. 독한 술을 한 모금 마신 시녀 한 명이 푸우, 하고 술을 뱉어 버렸다.
다른 시녀가 깔깔 웃으며 포도주를 술에 타주고, 다른 시녀는 안주로 과일과 달콤한 꿀이 가득 든 과자를 내놓았다.
배우와 황궁에 근무하는 관리, 씩씩한 기사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쏟아지고, 가끔씩 황후 마마가 이야기에 참견하다 꾸벅꾸벅 졸았다.
밤이 깊어지자, 황후 마마는 결국 침대 위에 새우처럼 몸을 구부린 채 얼굴만 이쪽으로 하고 잠이 들었다.
두꺼운 모피가 황후 마마의 몸에 걸렸다.
따뜻한 마도구를 침대 근처에 두어 황후 마마의 몸이 차가워지지 않도록 한 뒤에도 여자들의 이야기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가끔 타이라가 황후 마마의 상태를 확인했다. 혹시라도 열은 없는지, 몸이 불편하거나 이마를 찡그리지는 않는지, 마치 어미 새가 새끼를 돌보는 것 같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굉장히 좋다, 이런 거."
아아, 정말 그렇다. 이런 분위기의 황후궁이라니, 아마 이 세계 어떤 나라에도 다시없을 거다.
시녀는 술잔을 쭉 들이켜고 소리가 나도록 잔을 땅에 내렸다. 고참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다른 이들과 깔깔 웃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시녀는 문득,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타이라가 황후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대는 모습을 보았다.
황후의 몸에 감히 손을 대다니, 평상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타이라는 누구보다 황후와 가깝지만 타인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방금은....
타이라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살짝 입술을 대고, 젖은 눈으로 황후 마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왠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시녀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안타깝다. 심장이 조이는 느낌이었다. 설마 금단의 사랑...?
타이라는 황후 마마의 모피 이불을 목까지 잘 여민 뒤 다시 시녀들의 이야기에 끼었다.
이런저런 실없는 이야기를 하다, 시녀는 타이라에게 몸을 돌렸다. 가만있을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라도 말해서 그녀를 안심시켜주고 싶다.
"남작 부인이 되신 거, 축하합니다, 타이라 님. 행복하세요! 황후 마마는 걱정 마시고요. 마음 놓고 저에게 맡겨 주세요."
할 줄 아는 건 별로 없지만 최선을 다해 황후 마마를 모시겠다, 마음을 놓아도 좋다, 그렇게 말하다 보니 왠지 눈물이 찔끔 나왔다.
타이라는 일할 때 엄격하지만 항상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남작 부인이 되어 멀리 간다고 생각하니 왠지 시원섭섭해졌다. 비록 자신은 할 줄 아는 것 없는 막내지만 타이라 선배 몫까지 열심히 해야겠다는 각오가 새로워졌다.
타이라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나 내일도 나오는데."
"아, 내일까지 근무하고 영지로 내려가시나요?"
"아니."
"...어?"
"미안하지만 은퇴하지 않아. 계속 계속 50 먹고 60 먹고 파파할머니가 되어도 황후궁에서 근무할 거야."
"뭐야, 그건 너무하잖아요. 고참이 안 빠지면 나 같은 건 영원히 막내잖아."
"하하."
타이라와 고참들이 깔깔 웃는다.
이 썩을 할망구 고인물들 같으니라구.
너무 화가 나서 독한 술을 두 잔 더 먹었다.
다음날, 황후궁 시녀들은 모두 시체처럼 새파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적당히 해야지요. 얼굴들이 그게 뭡니까."
남작 부인의 눈이 이마까지 치켜 올라가 있었다. 아직 겨울이 오지도 않았는데 차가운 눈보라가 방안에 몰아치는 것 같았다.
한데 제발 목소리 좀 줄여주세요. 머리가 땅땅 울려서 아파 죽겠습니다.
***
첫눈이 내리던 초겨울의 어느 날, 35개의 상자가 차례차례 배로 옮겨져 큰 궤에 담겼다.
아루바소의 함장과 책임자 급의 머리가 들어있는 상자다.
루디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 말을 앞으로 몰았다.
함장이 루디의 모습을 발견하고 앞으로 나왔다.
"폐하, 오셨습니까."
"그래, 오랜만이네. 배는 어때. 운항할 만하던가?"
루디의 질문에 함장이 빙긋 웃었다.
"예, 폐하. 훼손된 부위가 많지 않아 수리가 금방 끝났습니다. 돛을 다루는 것도 완벽하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만 익숙해졌어요. 아루바소의 선원들이 잘 해 주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루디는 말에서 내려 배에 올랐다.
이 배는 아루바소의 사령관이 타고 있던 배다. 루디가 함장실을 마력의 방패로 완전히 갈라놓는 바람에 가장 큰 피해를 받은 배이기도 했다.
선원들이 루디를 보고 저마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거미줄처럼 돛대와 돛대 사이에 걸쳐있는 줄에 올라가 있던 깡마른 소년이 루디를 보고 번쩍 손을 들었다. 마구 흔드는 폼이 아무래도 불안하다.
"저 아이는 노예로 잡혀있다 점보님한테 구출되었던 소년입니다. 현재는 목수 보조로 일하고 있는데, 실력이 상당합니다."
"다리는 다 나은 것 같군. 한데 저러다 떨어지는 것 아닌가?"
루디가 불안해서 묻자, 함장이 큰 소리로 웃었다. 주위에 있던 선원들도 재미있다는 듯이 배를 움켜쥔다.
"괜찮습니다. 저 아이는 다람쥐 같아요. 많은 선원을 봐왔지만 저 아이처럼 몸이 날래고 배에서 자연스러운 녀석은 본 적이 없습니다."
루디는 소년에게 손을 조금 들어주었다. 그게 기뻤던 건지, 이번에는 아이가 그물에 다리를 걸고 거꾸로 매달린 채 두 팔을 흔들었다.
"함장, 저건 좀 위험한 것 아닌가?"
"괜찮습니다. 만에 하나 줄이 끊어져도 저 녀석은 안 떨어질 겁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
루디가 얼굴을 찌푸리자, 함장이 히죽 웃었다.
"그물이 떨어지면 저 녀석은 그 옆의 돛줄을 잡고 날아가 다른 곳에 올라설 겁니다. 그만큼 날쌔요.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함장이 그렇게 장담할 정도라면 괜찮겠지만, 보는 사람의 심장은 섬뜩하다. 루디는 가끔 소년의 모습을 살피면서 배 안을 둘러보았다.
이 배가 온통 물에 잠기고 곳곳이 부서졌던 게 얼마 전인데 무슨 요술을 부린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말끔해졌다.
"페리에서 상자를 인도할 배는 찾았나?"
"예, 지난번 통역을 맡았던 사람이 한때 페리에서 무역을 했다고 합니다. 그가 잘 아는 배가 페리와 아루바소를 왕복한다더군요. 그 배라면 제대로 일을 처리할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아루바소 함장과 선원들의 머리는 직접 관련이 없는 제3자 입장의 배를 통해 보내기로 했다.
푸테그린을 침략하려던 것은 당연히 아루바소다.
하지만 루디는 아루바소의 함대를 푸테그린의 해역에서 먼바다에서 맞이했다. 푸테그린을 침략했다고 주장하기 어려웠다.
반대로 푸테그린이 아루바소의 배를 해적질했다고 덤터기를 쓸 우려조차 있다.
우습지만, 너무 이겨서 오히려 상대를 탓하기가 어려워졌다.
가장 무난한 방법은 바다에서 부딪쳤는데 아루바소가 해적질을 하려고 시도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잘린 머리가 든 상자는 아무 메시지 없이 그 나라의 국왕에게 보낸다. 그들이 당황하여 무슨 일인지 알아볼 무렵에는 무역국인 페리에 [아루바소가 해적질을 하려다 오히려 푸테그린에게 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뒤일 것이다.
바보 같은 이야기지만 진실이 어떻든 이 세상은 보이는 게 다다. 제대로 겉모습을 꾸며놓지 않으면 비난받는 건 이쪽이다. 어쨌든 적의 배는 모조리 이쪽이 가지고 있으니까.
함장이 손을 들어 약간 멀리에 있는 배를 가리켰다.
"저 배들이 이번에 함께 출항하는 상선입니다."
함장이 가리킨 배에는 연신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수레 가득 실은 밀가루와 곡식 포대가 연신 배에 옮겨졌다.
한 척이 아니다. 출항하는 상선은 여러 척이었다. 한꺼번에 여러 배가 한데 뭉쳐서 움직인다. 이전보다 규모가 훨씬 커졌다. 벌어들이는 수익의 규모도 커지겠지만 위험도 덩달아 극대화될 것이다.
루디는 잠시 배의 모습을 지켜보다 함장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쪽에서 먼저 손댈 필요는 없지만, 덤벼오는 놈들은 절대로 용서하지 말게. 다시는 우리 배를 넘보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부숴버려."
"예, 폐하. 익히 알고 있습니다."
적은 아루바소뿐만은 아니었다. 바다 건너 대륙에 있는 대부분의 나라는 눈이 시뻘게져서 신대륙을 찾아다니고, 만나는 배마다 약탈을 해대고 있었다.
그야말로 현재 바다는 양의 피를 빨아먹는 늑대 소굴이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요행이었다. 페리에 푸테그린의 부유함이 퍼지기 시작했으니 약탈당하는 건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다보니, 앞으로 향신료 무역을 위해 페리로 가는 푸테그린의 상선은 무력을 갖춘 전함과 함께 운항한다.
만일 바다에서 해적을 만난다면 이쪽도 철저하게 해적이 된다. 상대방 배의 짐은 모두 빼앗고 건강한 사람은 노예로 팔아넘길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도병기도 사용하기로 했다.
마력 보충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마생물을 이용한다. 그들이라면 아무리 먼 거리라도 순식간에 거리를 좁힐 수 있다.
배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이동할 필요는 있지만 마생물끼리는 마력을 서로 줄 수 있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한 마리를 배에 태운 채 이동하면 될 것이다.
루디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결국에는 해적이 되는구나.'
먼 대양에 진출하는 이상 필연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당히 우울해졌다. 영화로 볼 때는 낭만적일지 모르지만, 실제 해적은 그냥 바다의 도적일뿐이다. 낭만은커녕 피만 줄줄 흐른다.
갑자기 요란한 함성이 모든 배에서 울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점보가 귀를 펄럭이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저 녀석은 말썽 피우지 않고 잘 하고 있나?"
루디가 묻자 함장이 눈을 약간 크게 뜨며 말했다.
"말썽이라니요. 점보님은 정령의 역할을 충분히 잘하고 계십니다."
"배에 뛰어들지는 않고?"
"물론입니다. 배에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걸 배우셨어요. 뛰어내리고 싶을 때는 바다에 들어가십니다. 가끔은 물고기가 그 충격에 기절해서 떠오르기도 하지요."
그러면 축제가 벌어진다고 한다. 항구에 몰려온 사람들이 저마다 작은 배를 몰고 나가거나, 소쿠리를 하나씩 들고 바다에 뛰어들어 물고기를 건져 간다나.
점보가 구해내 데려가고 싶어하던 소년이 어느새 점보의 코에 매달려 있다.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분명히 허공을 낮게 날고 있었다.
"아니, 잠깐!"
깜짝 놀라 루디가 움직이자, 함장이 웃으며 말렸다.
"괜찮습니다."
그러는 사이, 소년은 점보의 코에서 뛰어내려 바다에 떨어졌다. 물고기처럼 유연하게 헤엄을 치자, 이번에는 어른과 함께 고깃배를 타고 나가 물고기를 건지던 소년이 점보에게 손을 흔든다.
점보가 가까이 접근하자 소년이 코에 매달려 약간 떨어진 바다 위로 이동했다. 그 소년도 바다에 풍덩 떨어졌다.
그리고 다른 소년이....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군."
루디가 말하자, 근처에 있던 선원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처음에는 이빨쥐와 선원에서 시작한 거였죠. 가끔 배에 떨어져서 다치는 사람도 있었어요."
다른 선원이 킬킬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금방 점보님도 익숙해지셨습니다. 지금은 배나 땅에 떨어지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래도 괜찮은 거냐.
루디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나왔는지 함장이 입을 열었다.
"뱃사람은 튼튼하니까요."
생각났다는 듯이 한 명이 중얼거렸다.
"아, 가끔은 너무 멀리 떨어뜨리고 오시네요."
"그때는 작은 배로 구출하러 갑니다."
"...."
루디는 귀를 펄럭거리며 날아다니는 점보를 보고 입을 열었다.
"바다로 나갈 때 점보를 딸려주지."
"그렇게 해주신다면 영광입니다. 모두가 기뻐할 겁니다."
개똥도 약에 쓸 데가 있다더니, 옛말 그른 거 하나 없구나.
루디는 사람들을 연신 바다로 날라 떨어뜨리는 점보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코와 꼬리를 붕붕 돌리는 점보의 얼굴은 굉장히 행복해 보였다.
'다행이구나. 너도 즐거이 있을 곳을 찾았으니.'
루디를 향해 날아오던 점보가 기쁜 듯이 바다에 몸을 박았다. 오랜만에 만난 탓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것 같다. 어쩌면 사방을 날아다니며 아이들을 물속에 빠뜨린 것도 자신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점보가 바다에 부딪치면서 요란한 물보라가 사방으로 튀어 배가 젖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점보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나 멋지지! 이제 주인님하고 엄마도 태울 수 있다! 점보가 하늘을 날게 해줄게요!]
역시, 자신이 활약하는 모습을 루디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뒤에 있던 레빈이 웃음을 감추며 말했다.
"다 젖으셨군요, 폐하. 겨울인데 감기 걸리시겠습니다. 일단은 옷부터 갈아입으시지요."
"그래."
조용히 선실로 향하는 루디를 향해 점보가 다시 외쳤다.
[주인님! 칭찬해 주세요! 나 멋지지? 멋지니까 좋지?]
"...."
점보가 바로 위의 허공에 뜬 채 눈을 반짝거리며 루디의 얼굴을 보았다. 점보의 코가 슬금슬금 루디의 머리를 기어 다녔다.
[근데 왜 젖었어, 주인님? 물 가지고 놀았어요? 주인님은 어린애 같구나. 그렇게 놀면 안 되는데. 감기 걸린단 말이야!]
기가 막혀서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점보가 기쁜 듯이 따라 웃는다.
[주인님, 행복하구나! 웃는 건 행복한 거래요.]
"그래. 네 덕분에 웃는 거야."
[점보 대단하다! 주인님을 행복하게 만들어! 점보 대단해!]
루디는 점보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선실로 향했다. 몸에 한기가 들면서 작게 재채기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