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고맙다, 레빈
"함장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 두어라. 그쪽에서 우리를 방문했으니 우리 역시 답례를 해야지."
"예, 폐하."
레빈은 황제의 말에 깊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머리를 약간 끄덕이며 웃었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못했다. 바로 뒤에는 혀를 잡아빼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포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차마 그곳에 눈을 향하지 못했다.
선원의 비명소리에 가늘게 흔들리는 황제의 눈썹을 보면서, 레빈의 마음은 조금 안타까워졌다.
어째서 이 사람은 익숙해지지 않는 걸까.
그만큼 많이 겪었으면 감정이 희미해 질만도 한데, 황제는 여전히 잔인하면서 동시에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아루바소 선원은 두 손목이 잘린 뒤에야 처벌이 끝났다.
황제는 그제야 몸을 돌려 아루바소의 선원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냉엄한 목소리로 황제가 말했다.
"우리를 따르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푼다. 하지만 반항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면 한 명도 빠짐없이 저 꼴이 될 것이다."
이 전쟁에는 어렵게 아루바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 데리고 왔다. 말이 능통하지는 않았지만 일상적인 대화 정도는 할 수 있는 정도였다.
레빈이 그자에게 눈짓하자, 통역은 떠듬떠듬 황제의 말을 아루바소의 언어로 번역해 포로들에게 외쳤다.
포로들이 부들부들 떨면서 이마를 바닥에 대고 엎드렸다.
황제는 흘끗 그들의 모습을 본 뒤 몸을 돌렸다. 그리고 본래 타고 있던 제국의 배로 걸음을 옮겼다.
호위들이 줄줄이 황제의 뒤를 따라 걷는다. 레빈도 함께 제국의 배로 향했다.
루디가 타고 있던 제국의 배는 황제가 승선한다고 결정되자마자 그를 위해 여러 시설을 보충하고 뜯어고친 것이다. 아루바소의 배가 더 크고 신형이라고 해도, 실내장식과 편의시설은 당연히 제국의 배에 못 미쳤다.
'게다가 피투성이가 된 아루바소의 배에 있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하시겠지.'
제국의 배로 옮겨타기 전, 황제의 뒤쪽에 있던 호위 중 한 명이 레빈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그는 황제의 시중을 위해서 배에 오른 시종 중 한 명이다. 당연히 레빈의 상사였다.
황제의 뒤를 따르던 레빈은 그의 신호를 받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지금부터 황제의 시중은 그 사람이 맡는다. 레빈에게는 다른 일이 있었다.
황제의 모습이 제국의 배로 완전히 사라진 뒤, 레빈은 목을 매달기로 한 포로들에게 다가갔다. 가장 신분이 높아 보이는 포로를 찾아 그 앞에 선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걸 이 남자에게 통역해 주게."
"예."
"너희들 나라의 위치는 어디냐."
"...."
포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리 큰 기밀도 아닐 터인데 말하지 않는다.
레빈은 조용히 칼을 들었다.
포로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흘렀다. 제국의 말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처분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포로가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레빈이 칼을 날렸다.
포로의 머리가 떨어졌다.
레빈은 그 옆에 있던 포로의 앞에 섰다.
다시 묻는다.
"너희들 나라는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
"...."
잠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바로 앞에서 동료가 죽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레빈은 조용히 칼을 들었다.
"기, 기다려! 대답! 대답합니다!"
통역이 빠르게 포로의 말을 전했다.
그다음부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질문에 대답이 늦어지면 목을 친다. 그렇게 해도 포로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아루바소라는 나라의 위치, 국왕의 이름, 일반적으로 알 수 있는 것들....
짧은 시간 동안, 레빈은 몇 달에 걸쳐 조사해온 내용의 몇 배나 되는 걸 알아낼 수 있었다.
갑판 위가 피로 흥건하게 젖었다. 피가 흘러 신발을 적신다. 레빈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붉은 핏자국이 여기저기 찍혔다.
레빈은 물끄러미 그것을 쳐다보았다.
뭔가에 익숙해지는 것은 이렇게나 쉽다. 예전에는 사람 손목 한 번 꺾어본 적 없는 자신이 지금은 어떤가.
'누구나 상황에 맞게 마음을 변질시켜 가는데.'
그분은 마치 영원히 변치 않는 순결한 성직자 같다. 혹시라도 그것이 쌓이고 쌓여 먼 훗날 그의 마음을 병들게 하면 어쩌나 싶어서, 레빈의 가슴이 걱정으로 약간 조였다.
'황후 마마가 폐하의 숨 쉴 곳이 되어주시면 좋으련만.'
레빈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포로들의 모습을 힐끔 보고 레빈이 명령을 내렸다.
"남은 놈들은 예정대로 돛대에 매달아라."
병사들이 포로를 끌고 간다. 질질 끌려가며 포로들이 아우성을 쳤다. 말을 몰라도 무슨 뜻인지 알겠다. 물어보는 대로 모두 대답했는데 어째서 살려주지 않느냐는 거겠지.
"우리나라를 침략하려 했던 놈들을 살려줄 리 없잖아. 배 때문에 몇 놈이라도 살려주는 걸 감사히 여겨야지."
레빈이 중얼거리는데, 통역이 그것까지 포로들에게 아루바소 말로 전했다.
뭘 그런 것까지 전하나 싶어 통역의 얼굴을 본 레빈은 약간 놀랐다.
참혹한 장면에 겁을 먹은 듯, 통역의 얼굴이 흙빛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당신은 적이 아니니까 죽이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자, 이번에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죽인다는 단어가 들어갔기 때문에 레빈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듯했다.
"거 참, 겁이 많은 사람이군요."
옆에 있던 병사가 기가 막힌 듯 중얼거렸다.
***
바다로 나올 때보다 돌아가는 길은 훨씬 시간이 걸렸다.
아루바소의 배는 대부분 무사했지만 어느 정도의 손상은 피할 수 없었다. 그대로 운항할 수 있는 배가 대부분이긴 해도 몇 척은 수리가 필요했다.
특히 돛이 제대로 펼쳐지지 않거나 활대를 조정해 돛의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면, 겉으로는 멀쩡해 보인다 해도 운항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차라리 선체가 부서져도 돛 쪽이 멀쩡한 편이 훨씬 낫다나.
결국 손상된 배는 바다 위에서 긴급 수리를 했다. 제국의 배도 완전히 무사하지는 못해서 어느 정도는 손을 봐야 했다.
수리에는 각 군함의 목수들이 총동원되었다. 거기에는 아루바소 배의 목수들도 참여했다.
아루바소의 해군은 장교나 대장, 책임자 급을 제외하면 대부분 국가에 강제 노역으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병사도, 선원도 비슷했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납치되듯 끌려온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다.
강제로 끌려왔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딱히 국가에 대한 충성심도 없었다. 어이없을 만큼 쉽게 제국에 협력하기로 마음을 돌렸다.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지기는 했지만, 제대로 성심성의껏 일하면 일정 기간 후에는 다소 대우를 좋게 해주기로 약속한 것도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뭐, 눈앞에서 싹뚝싹뚝 잘려나가는 머리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테지만 말이다.
루디는 제국의 선원과 목수보다 열심히 일하는 아루바소 선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쓴웃음을 흘렸다.
수리를 하는 사람들과 별도로, 한쪽에서는 제국의 선원들이 아루바소 배의 돛을 조종하는 방법을 익혔다.
루디가 볼 때는 이 배의 돛대나 저 배나 다 똑같아 보이는데, 선원들에게는 비행기와 전철만큼이나 달랐던 것 같다. 모두가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힘을 합해 노력한 덕분에, 아루바소의 군함은 당당하게 제국의 깃발을 달고 바다 위를 미끄러질수 있었다.
배는 순조롭게 항해를 계속해 마침내 항구에 닿았다.
*
북쪽의 항구 도시는 황실령에 속한 곳으로, 충성심 강한 대관이 다스리고 있었다.
배가 항구에 들어서자, 도시 전체가 떠나갈 듯한 환호성이 울렸다. 사람들이 두 팔을 올리고 떨어져나갈 듯 흔든다.
루디는 환호하는 백성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뒤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 땅을 딛는 순간 이상한 감각에 휩싸였다. 발이 땅에 제대로 붙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바닥이 흔들리지 않은 채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너무 이상하다. 몸이 흔들흔들 제멋대로 움직이려고 했다.
레빈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당황한 표정으로 어설프게 몸을 움직였다.
"그런 느낌은 처음에만 약간 느껴질 뿐입니다. 정상적인 일이니 놀라지 마십시오."
함장이 빙그레 웃는다.
어느새 루디와 레빈, 그리고 호위 병사 주변을 둘러싼 선원들이 웃고 있었다.
북쪽의 항구에 도착한 뒤 나흘간, 루디와 제국의 해군을 위한 승전 축하가 열렸다.
대대로 해군이 약한 제국의 대승리다. 루디와 해군은 거의 전설의 영웅같은 대접을 받았다.
참전했던 해병과 선원들을 위해 술과 요리가 연신 옮겨지고, 매일 화려한 승전 무도회가 열렸다. 항구 도시의 거리 곳곳에서는 연일 꽃잎이 뿌려졌다.
육지와 달리 바다에서는 미리 사람을 보내 승리를 알릴 수 없다.
그런데도 용케 이만큼이나 화려하게 준비했다고 감탄했더니, 도시의 영주가 공손히,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제국의 관리들은 모두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고맙구나. 그대들의 믿음 덕분에 승리의 여신이 우리에게 미소를 지은 것이다."
"무슨 말씀을. 모두가 폐하의 놀라우신 능력 덕분입니다."
그런 말을 진지하게 하니, 정말 부끄럽다.
루디는 길게 말하지 않고 얼렁뚱땅 넘기며 낮에는 도시의 거리에 나가 백성을 만나고 밤에는 승전 연회에 참석하는 나날을 보냈다.
마지막 나흘째의 밤, 루디는 밤늦도록 이어진 무도회장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마지막 밤이라 그런지 유난히 활기가 넘친다. 다른 때면 이미 연회가 끝날 시간인데도 여전히 모두가 화사한 이야기 꽃을 피우며 춤을 추었다. 여기저기서 웃음꽃이 피었다.
황궁의 무도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항구가 있다는 특성상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원래 도시의 분위기가 그런지, 황궁보다 많이 자유로웠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말투도 조금씩 부서져 있었다.
그 분위기에 취해서일까. 루디 역시 황제의 가면이 약간 벗겨졌다. 모처럼 신경 쓰지 않고 술을 약간 마셨다. 마지막 날이니 내일이면 황궁으로 떠난다는 느슨함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과 약간의 잡담을 하며 웃는데, 한 명의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높이 틀어올린 머리에 가느다란 목을 가진 여자였다. 머리를 약간 기울이며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스쳐 지나갔던 루디의 시선이 다시 되돌아가 여자의 옆얼굴을 잡았다.
본 적이 있는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뚫어지게 여자의 얼굴을 보다가 문득 먼 옛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 그녀다.'
오래전, 루디가 처음 노예로 잡혔을 때 만났던 여자다. 군인들을 상대하는 창관 노예로,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아들이 있다고 말했던 여자. 루디가 노예 마차를 탈 때 몰래 손에 육포를 쥐어 주었던 그 여자였다.
레빈이 루디의 곁에 바짝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하급 남작의 첩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본래는 폐하의 앞에 세울 수 없는 천한 신분의 사람입니다만, 한 번 정도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실 거라 생각해 불렀습니다. 황궁 쪽이라면 출입이 불가능한 신분이지만 이곳은 기준이 다소 느슨하니까요."
"...."
한 번이었다.
루디는 보리스에게 훈련을 받던 은색 노예의 시절, 딱 한 번 레빈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했었다. 언젠가 만나면 은혜를 갚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그때 죽었을 거라고.
하지만 먼 옛날 스치듯 지나갔던 일개 노예다.
황제가 된 뒤 그녀를 떠올렸지만, 시간이 오래 지난 뒤라 찾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병사를 상대로 하는 창관의 노예는 워낙 혹사당하는 탓에 오래 살기 힘들다. 이미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찾아냈구나.'
레빈이 그녀를 찾아내 대신 은혜를 갚았다. 창관의 노예가 갑자기 남작의 첩이 될 리는 없다. 분명히 그가 손을 쓴 거다.
"고맙다."
루디의 나지막한 말에 레빈이 히죽 웃었다.
"...그녀는 지금 행복한가?"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보호자인 남작은 온화한 성품의 사람입니다. 첩이 자신에게 오기 전 낳았던 자식까지 불러들여 보살필 정도로 착한 사람이지요."
"아들을 만났구나."
"예, 그녀의 아들은 현재 남작의 집에서 집사 후보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 일하고 있는 늙은 집사가 은퇴하면 그 뒤를 맡을 거라 알고 있습니다."
"...."
"한 번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시겠습니까?"
루디는 잠시 망설였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 했다 이상한 오해라도 받으면 그녀에게 해가 된다."
루디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공연히 그녀를 불렀다 혹시라도 그녀가 황제의 마음에 들었다는 소문이라도 서면 이용하려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잘 살고 있다면 됐어."
루디는 그렇게 말하고 잔에 남아있던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레빈, 황궁으로 돌아가자."
갑자기 리리샤가 못 견디게 보고 싶어졌다. 이제 무도회는 거의 끝을 보이고 있다. 황제가 자리를 비워도 상관없을 것이다.
레빈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원하시는 대로."
루디는 연회장에서 나오자마자 말에 올랐다. 오랜만에 만난 흑마가 주인을 반기며 푸드득 발을 굴렀다.
"피곤하실 텐데 마차를 이용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레빈이 권했지만, 마차를 타면 느려진다. 말이 훨씬 빠르다.
흥분해서 제자리를 서성이는 흑마의 목을 두드려 진정시키면서 루디는 빙그레 웃었다.
"레빈, 어릴 때를 기억하고 있나? 가끔 누가 빠른지 달리곤 했었지."
"제가 더 많이 이겼지요."
"그래. 하지만 이제는 다를 거야."
루디는 웃으며 말고삐를 당겼다. 말이 발을 높이 들었다.
"이제는 내가 자네보다 빠르지."
"아니, 폐하. 그건 반칙입니다. 말이 달리는 걸로 따지면, 폐하가 당연히 유리하잖아요."
레빈의 항의 소리를 들으며 루디는 말고삐를 흔들었다.
흑마가 쏜살같이 튀어나간다.
뒤늦게 레빈이 훌쩍 자신의 말에 올라 그를 뒤따라왔다.
따닥 따닥, 말굽이 흙을 차내는 소리가 요란하다. 뒤에서 투덜투덜, 레빈의 불평 소리가 들려왔다.
루디는 더욱 말을 재촉하며 중얼거렸다.
정말 고맙다, 레빈.
전쟁터를 한 번 지날 때마다 루디의 마음은 조금씩 금이 간다.
숨기고 있었지만, 아마도 레빈은 그걸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오늘 그녀를 부른 걸 거다.
루디의 마음에 금이 가면 레빈과 시종들이 거기에 덕지덕지 약을 바른다. 조금이라도 금이 간 걸 고치려고 노력해준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라. 그대들이 내 곁에서 그토록 감싸주는데 내가 어찌 강해지지 않을까.'
금이 가도, 부러져도, 다시 새로워진다. 상처 난 밑에서 새살이 돋아 나왔다. 그래서 더욱 강해진다. 상처투성이 마음이지만 절대로 약하지 않다.
루디는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