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제국의 기를 올려라
"!"
루디의 시선이 방구석에 있는 남자의 손을 향했다.
남자의 손은 막 나무 기둥에서 튀어나온 심지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파지직 타들어가는 심지 끝이 순식간에 기둥 안으로 숨어든다.
보는 순간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도화선이다.'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루디는 순간적으로 칼을 떨구고, 손끝으로 마력 방패를 냈다.
동시에 등 뒤의 레빈에게 말한다.
"레빈, 방으로 들어오지 마라. 내 앞에 서지 마."
"예, 폐하!"
레빈이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루디의 손에서 뻗어 나온 에너지 막이 함장실의 허공을 가로질렀다.
비닐처럼 얇은 전기막이 안개 퍼지듯 파직 파직 빛을 내며 늘어난다.
힘 조절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출력은 최고였다.
다른 때보다 강한 마력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물건의 단면을 태우며 쭉쭉 허공을 잘라갔다.
마력 방패가 닿는 부위마다 가느다란 선이 생겼다.
심지가 타들어간 기둥 밑부분에 마력 방패가 닿으면서 벽에도 가로로 길게 선이 생겼다.
거의 동시에, 바로 앞에 있는 아루바소 함장이 다리에도 마력 방패가 닿았다.
다리는 그대로 서 있는데, 함장의 몸이 앞으로 기우뚱하며 석상처럼 넘어갔다.
"으, 으아아아아!"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는 상태로, 적의 함장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아루바소 함장이 바닥에 누운 채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다리를 쳐다보았다.
매끈하게 잘린 다리의 단면으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우뚝 서 있던 다리가 그제야 힘을 잃고 바닥으로 넘어졌다.
"맙소사."
함장이 숨을 마시며 작게 말한다.
루디는 그쪽에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수평으로 펼친 마력방패를 옆으로 기울이며 살짝 흔들었다.
마력방패가 닿는 곳이 화르륵 재가 되어 흩어지면서 공간이 생겼다.
잘라진 기둥 사이로 심지가 살짝 보인다. 확실하게 불이 붙지 않은 걸 확인하자, 겨우 안심이 되었다.
위쪽에서 타들어간 심지는 흔적도 없이 먼지가 되어 사라진 뒤였다.
루디는 심지가 들어있는 기둥 쪽으로 다가갔다.
깊고 어두운 구멍을 들여다본다. 심지가 길게 늘어져 어둠 속에 삼켜져 있었다. 그 끝이 화약고에 닿아 있다고 생각하자 끔찍해졌다.
아루바소 함장은 여전히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힐끔 함장을 노려보자, 레빈이 등 뒤에 바짝 붙어서 물었다.
"폐하, 칼을 드릴까요?"
말없이 손을 내밀자, 레빈이 공손히 칼을 그 위에 올렸다.
차가운 빛을 내는 칼에 마법을 걸자, 검은 곧바로 웅웅 소리를 내며 빛을 발했다.
바닥을 향해 지그재그로 검을 휘두른다.
아루바소 함장은 눈을 크게 뜬 상태로 입을 벌리더니 그대로 여러 조각이 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위쪽에서 요란한 함성 소리가 울렸다.
"상황이 끝난 모양입니다."
레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웃었다.
"아아, 그런데."
루디는 자신이 잘라놓은 함장실을 보고 어깨를 약간 늘어뜨렸다.
"이건 어쩌지. 엉망이 됐네."
아까는 경황이 없었는데, 일이 끝나고 보니 너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력 방패가 함장실에 한정된 게 아니라 그 옆의 옆까지 길게 뻗었던 모양이다.
한쪽 벽이 완전히 갈라져 그 너머가 보였는데, 몇 개의 공간이 완전히 잘려 있었다.
뒷일을 생각하는 건데 잘못했다.
"확실히, 좀 지나치셨네요."
레빈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
해전은 처음이라 여러모로 실수가 많았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잖아. 다음에는 좀더 잘 할 수 있겠지."
"그런 말이 있나요? 처음 들어 봅니다."
"...."
루디는 어깨를 으쓱한 뒤 레빈과 함께 함장실을 나왔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호위를 맡은 병사들이 따라온다. 호위 병사들은 어두운 실내를 경계하면서 루디의 주위를 빈틈없이 에워쌌다.
끄트머리에 있는 계단으로 향하자 제국 병사들이 포갑판으로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루디를 발견한 대장 한 명이 서둘러 달려왔다.
"폐하, 갑판에 있는 적은 모두 제압했습니다. 현재는 포갑판을 돌면서 남은 적을 확인하는 중입니다."
사각진 얼굴에 미소를 띠며, 대장이 말했다.
"혹시 적이 구석에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조심해 주십시오."
"그래, 자네도 조심하게."
"물론입니다, 폐하. 집에서 늑대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아이들이 기다리니까요."
크하핫, 큰 소리로 웃으며 대장이 떠나가고, 루디는 문득 궁에서 기다리고 있을 리리샤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년에는 나도 토끼 같은 자식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
이제 겨우 스무 살인데 유부남에 애 아빠라니,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갑판 위로 올라가자, 적의 병사들이 한데 모여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적병 몇 명은 무리에서 약간 앞에 떨어져 있다.
푸테그린 제국의 대장이 다가와 말했다.
"저 앞에 있는 자들은 배의 운영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는 대장급들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우리나라를 침략하려 했던 놈들이다. 본보기로 목을 매달아라."
"알겠습니다, 폐하."
루디는 무리가 되어 바닥에 이마를 대고 있는 적의 포로에 시선을 주었다. 대부분은 겁에 질렸지만 몇 명은 험악한 눈으로 제국병을 노려보고 있었다.
루디는 막 몸을 돌리려는 대장을 불러 세웠다.
씩씩하게 부르셨습니까, 하고 묻는 대장에게 목소리를 약간 낮춰 말했다.
"아직 눈이 살아있는 놈들이 있다. 그런 놈들 중에서 한두 명을 골라 완전히 기를 죽여라."
루디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들을 힐끗 보았다.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채찍처럼 미지근한 짓은 하지 마라. 한 번에 공포를 주는 게 오히려 피해를 줄이는 일일 거다. 한 명은 저들 앞에서 혀를 뽑아. 그래도 기가 살아있다면 두 손, 그 다음에는 두 발을 잘라라."
"예."
대장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루디는 대장에게서 시선을 돌려 바다 쪽을 보았다.
다른 배에서도 상황이 마무리된 모양이다. 푸테그린 제국의 깃발이 선 배가 몇 군데 있었다.
"레빈, 제국의 기를 올려라. 지금부터 이 배는 제국의 것이다."
"예, 폐하."
레빈이 공손히 절을 하고 몸을 돌렸다.
곧바로 레빈의 커다란 목소리가 갑판 위로 울렸다.
"제국의 기를 올려라!"
"와아아아아아!"
푸테그린 병사들의 환호성이 배 전체를 뒤흔들며 울려 퍼졌다.
뱃전에 선 루디의 뒤편에서 포로로 잡힌 적병의 비명이 들려왔다. 루디의 명령대로 혀를 잡아빼는 모양이다.
차마 뒤돌아보지 못한 채, 루디는 오만한 모습으로 고개를 쳐들고 먼바다를 보았다.
포로의 비명소리를 막으려는 것처럼, 레빈과 호위 병사들이 루디의 뒤를 겹겹이 둘러쌌다.
그래도 소리는 바닷바람을 타고 넘실넘실 귓가를 두드린다. 비명 한 마디 한 마디가 루디의 심장을 찌르는 비수가 되어 박혔다.
***
정말 오랜만에 잘게 썬 고기가 들어있는 스튜를 먹었다. 제국병사는 모두 이렇게 맛있는 걸 먹고 있는 걸까. 지금까지 먹어본 스튜 중에서 가장 맛있다.
이빨쥐는 허겁지겁 한 그릇을 먹어 치우고 빈 그릇을 혀로 핥았다.
그 모습을 곁에서 본 제국 병사가 갑자기 다가와서 침대 위에 앉아있는 이빨쥐를 끌어안았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작게 말한다.
"한 그릇 더 갖다 주마."
이빨쥐 나라의 말이었다.
"그래도 괜찮나요?"
"아니, 너는 안 된다고 하더라."
"...."
역시 그렇겠지.
이빨쥐의 어깨가 조금 처졌다. 하지만 병사의 다음 말은 이빨쥐를 약간 놀라게 했다.
"넌 속이 너무 약해져서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이면 안 된다고 들었어. 하지만 그렇게 맛있게 먹는데 배탈 좀 나면 어떠냐. 우리 같은 뱃사람에게 배탈 정도는 우습지."
"어."
두 그릇이나 먹어도 되는 걸까. 그래도 혼나지 않나. 배에서의 식량은 모자라면 모자랐지 넉넉하지는 않은 법이다.
'게다가 나는 제국 사람도 아닌데.'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서 말하지는 않았다. 괜히 그렇게 말했다가 뒤늦게 맞아, 너는 제국병이 아니었지, 라고 밥을 못 받게 되면 곤란하다.
"내 동생도 너만한 나이지."
제국 병사는 툭툭 이빨쥐의 머리를 치더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한 뒤 방을 나갔다.
이빨쥐는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보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이 방에 있었는데, 방에는 아까 그 제국 병사뿐이었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제국 병사는 이빨쥐가 깨어난 것을 보자 절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 뒤에 스튜를 가져다주었다.
킁킁, 이빨쥐는 몸을 앞으로 구부려 냄새를 맡았다. 깨어난 직후에는 깨닫지 못했는데, 부러진 발목에는 부목과 이상한 냄새가 나는 약이 붙어 있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또다시 노예로 쇠사슬에 묶여서 지내게 되는 걸까.
상처에 약을 붙이고, 맛있는 음식까지 먹여주는 걸 보면 통통하게 살을 찌워서 노예 시장에 팔아버리려는 걸지도 모른다.
자신이 비싼 노예가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어딘가 먼 곳에서는 가격이 다를 수도 있다. 이 세계는 넓은 곳이니까.
조금 불안해졌다. 상황을 봐서 기회가 있으면 도망쳐야 할까.
'어딘가 정박하는 것 같으면....'
생각에 잠겨있는데 문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제국 병사가 음식을 가져온 걸까. 자기도 모르게 입에 침이 고였다.
하지만 들어온 것은 제국 병사가 아니었다.
이빨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
이빨쥐가 본래 타고 있던 배에서 조타수를 맡고 있던 사람이었다.
조타수는 선장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다. 이빨쥐같은 하급 선원한테는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높고 높은 신분이었다.
그렇지만 조타수는 유난히 이빨쥐를 귀여워해서 종종 음식을 나눠주곤 했다. 이빨쥐가 예전에 기르던 토끼를 닮았다고 들었다.
[그놈, 참 맛있었지.]
그렇게 말하며 입맛을 다시던 조타수의 얼굴을, 이빨쥐는 한동안 잊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배에서 식량이 모자라게 되면 자신을 잡아먹는 것은 아닐까, 하고 처음에는 엄청나게 겁을 먹었다.
나중에 다른 선원에게서 그건 조타수가 신참들한테 자주 하는 농담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토끼를 길렀다는 말은 사실일 거다. 잡아먹었다는 것도.
"어...."
하지만 조타수는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루바소 병사들이 칼로 노예들을 찌르던 바로 그곳에 있었으니까.
겁이 더럭 났다. 저건 정말로 조타수일까. 혹시 이전에 선배들에게서 들었던 유령이 아닌가. 자신을 물속으로 끌어들이려고 찾아온 유령일지도 모른다.
조타수가 옆으로 다가오더니 주먹으로 그의 머리를 툭 내리쳤다. 아프다. 살아있는 몸을 가진 사람이다. 정말로 조타수 님이야!
조타수가 히죽 웃었다.
"이눔아! 왜 귀신 본 얼굴이야."
"조타수님!"
우왕, 하고 울음을 터뜨리자 조타수가 투박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툭툭 쳤다.
"아파요."
"뱃놈이 그 정도로 아프다고 엄살을 부려서야 쓰것냐."
조타수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이빨쥐의 뒤통수를 퉁퉁 쳤다. 아프기는 하지만, 그게 조타수에게는 쓰다듬는 것과 같은 행동이라는 걸 안다. 이빨쥐는 주먹으로 눈을 비비며 울다가 고개를 들었다.
"죽었는 줄 알았어요."
"죽을 뻔했지. 칼에 맞는 놈 옆에서 나도 찔린 것처럼 쓰러져 누워있었다. 시체 더미 속에 계속 누워 있다가 나중에 제국군이 와서야 일어났지."
조타수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나는 비겁한 놈이야, 라고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비겁하지 않아. 조타수 님이 살아남는 수단 중에 비겁한 건 없다고 말했잖아요."
"...."
배에 오른 뒤, 이빨쥐는 가장 중요한 게 살아남은 거라고 배웠다. 식수가 모자라면 오줌을 받아 먹어서라도 살아야 한다고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그래...그래."
조타수는 한동안 이빨쥐의 머리에 손을 올려두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이 모두 한참을 울어젖힌 뒤, 조타수가 물었다.
"한데 너는 어떻게 할 거냐?"
"예?"
"이대로 제국배에 남을 건지, 아니면 고국으로 돌아갈 건지 묻는 거야."
"어!"
이빨쥐의 눈이 둥그레졌다.
"우리, 노예 아니에요?"
"이 녀석아, 노예한테 누가 먹을 걸 제대로 주고 치료까지 시켜 줘! 예나 지금이나 멍청한 건 똑같구나."
조타수가 가래 끓는 것 같은 목소리로 웃는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나는 조타수 지위까지 갖지는 못하겠지만 제국배에 남기로 했다. 어차피 우리 배는 없어진 거고, 새로운 배를 찾아다니기에는 나이도 있으니까. 너는 어쩔 거야?"
"저, 저도."
이빨쥐는 말을 하다 입을 다물었다. 조타수는 그만한 경력과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제국에서 받아주었을 거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괜찮아. 너도 제국 배에 남고 싶으면 그렇게 할 수 있어. 제국에서는 선원이 부족하다더라. 게다가 너는 정령님이 구해준 아이라고 해서 함께 있겠다고 하면 대환영일 거야."
"어. 정령님이요?"
이빨쥐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설마, 설마....
"뭐야, 기억나지 않냐?"
"꿈이라고 생각했어요."
"넌 정령님이 구해서 데려왔다고 하더구나."
"진짜냐."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그때,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뽀독, 뽀독, 그런 소리다.
"...."
조타수가 눈을 크게 뜬 채 이빨쥐의 뒤쪽을 보고 있었다. 완전히 굳었다.
이빨쥐가 천천히 몸을 돌리자, 창문에 빛이 나는 뭔가가 길게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커다란 빛의 지렁이 같은 것이 벽을 더듬었다. 뽀독뽀독 소리는 그게 움직일 때마다 창문에서 나고 있었다.
"저, 저건 뭐죠?"
이빨쥐가 묻자, 잔뜩 굳어있던 조타수가 넙죽 엎드리며 외쳤다.
"정령님!"
어라, 저게 정령이야? 뭔가 좀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지렁이 같은 게 뻗어 나온 뿌리가 움직이더니 창문에 불쑥 눈이 나타났다. 동그란 눈이 껌벅껌벅 거리더니 이빨쥐의 모습을 잡았다.
정말 이상하게 생겼다. 지렁이 같은 건 코였던 것 같다.
'저게 얼굴이었어.'
처음 보는 동물이다. 아니, 빛인가.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긴 코를 가진 동물 모양의 빛이 기쁜 듯 코를 약간 흔들었다. 마치 자신을 향해서 웃는 것 같다.
"아! 그게 코였구나."
문득 이빨쥐는 바닷속에서 자신을 끌어당긴 것이 저 코라는 걸 깨달았다.
정말로 저 이상한 빛의 동물한테, 아니 정령님한테 도움을 받은 거였구나.
이빨쥐는 다리 때문에 부자연스러운 몸을 앞으로 구부려 꾸벅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넌 이제 내 거 해도 되지?]
이상하다.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닌데, 진짜로 뭔가 소리가 들린 것도 아닌데, 왠지 정령님이 그렇게 말하며 웃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