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90화 (190/201)

#190 죽어라, 괴물 놈들

"화약이 젖었어! 점화하지 않는다!"

"으악!"

"살려줘, 다리가!"

아수라장이다. 사방이 비명과 고함소리로 가득했다.

무거운 나무통이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며 사람을 치고, 화약은 쏟아져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대포알이 쏟아져, 배가 흔들릴 때마다 갑판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함장 대런은 망연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적의 망루에서 막대의 빛이 쏘아지는 일 따위는 이제 안중에도 없다. 모두 무지막지하게 쏘아지는 물줄기를 피해서 도망치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돼서 저토록 세찬 물줄기가 쏘아지는 건지는 모르겠다. 아는 것은 거기에 맞으면 사람도, 대포도 그냥 날아간다는 사실이다.

적은 대포를 모두 못쓰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는지, 몇몇 물줄기를 하늘로 높이 쏘았다.

하늘로 올라간 물은 투둑투둑 그대로 배에 떨어졌다. 마치 인공적으로 폭우를 만들어낸 것 같다.

그 때문에 갑판에 있는 대포는 모두 물에 젖어 있었다. 대부분의 대포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것 같다.

화약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부서지거나 넘어지지 않은 화약통도 많았지만 사용할 수 없다. 모두 눅눅하거나 젖어있었다.

병사들이 들고 있던 총의 화승(도화선)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불씨가 꺼져 있었다.

아래층에 있는 대포도 상황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보지 않았어도 갑판 위보다 심한 상황일 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깔리고 끼인 사람이 아래층에서 지르는 비명에 귀가 아팠다.

아래쪽 상황을 살피러 갔던 포병 대장이 헐떡이며 달려왔다.

"대포가 젖어서 작동하지 않습니다!"

포병대장은 계속해서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상부와 하부 포갑판에 있는 대포가 전부 그렇습니다. 놈들이 포문을 향해 물을 쏘아대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그 안에 물줄기를 쏘고 있어요."

포병 대장의 얼굴이 새파랗다. 어쩌면 그 역시 겁에 질린 건지도 모르겠다.

"물살이 너무 세서 상당수의 대포가 제자리를 벗어났습니다. 다행히 선체가 크게 파손되지는 않았지만 화기는 쓸모없어졌습니다. 대포가 제자리에 있더라도 포문이 부서져 밖을 겨냥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물이 쏟아지는 상황에서는 총도 사용할 수 없어요."

포병 대장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딘가에 부딪친 걸까. 멍하니 쓸데없는 생각을 잠시 하다, 대런은 정신을 차렸다. 잠시 혼이 빠졌던 모양이다.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대런은 얼굴을 돌려 제국의 배를 노려보았다. 적의 배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놈들은 백병전을 걸어올 거야. 배가 가까워지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지. 그렇게 되면 결국 놈들도 물을 쏠 수 없게 된다. 아직 승산은 있어."

"...."

"병사들을 모아라. 포갑판에 있는 병사들도 모두 불러와. 갑판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 여기에서 막지 못하면 그야말로 끝이야."

"알겠습니다."

포병 대장이 다시 달려나갔다.

포병 대장이 함장의 명령을 전하고, 여기저기에서 대장들이 부하들을 불러 모아 대열을 갖추었다.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그의 명령을 다른 배에 알리는 깃발이 올라갔다.

여전히 병사들은 허둥지둥 물을 피해 도망치고 있었지만, 몇몇은 점차 상황을 인식한 것 같다. 소수지만 눈빛이 달라진 병사가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얼굴이다.

육지와 달리 배는 후퇴할 곳이 없다. 등 뒤에는 망망대해 바다뿐이다. 지금은 겁을 먹고 주춤거리는 병사들도 마지막에 몰리면 모두 그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결국엔 모두가 어쩔 수 없이 결사적이 된다.

'괜찮아. 아직은 승산은 있다. 놈들이 우리 배에 오르고 혼잡해지면 물을 쏠 수도 없겠지만, 망루에서 빛으로 우리를 죽이는 것도 어려워질 거야.'

망루에 올라가 있는 적병이 제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적과 아군이 뒤엉켜 있는 곳에 빛을 쏠 만큼 무모하지는 않을 거다. 그런 상황에서는 까딱 잘못하면 아군을 죽이게 된다. 저들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아직 지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싸울 수 있어.'

바다를 등 뒤에 두고 싸우는 병사는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의 힘을 낸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위기에 빠졌지만 벗어날 수 있었다.

대런은 검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선원들도 그렇지만, 특히나 배를 책임지고 있는 함장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다른 선원과 달리 함장은 적에게 잡히면 열이면 열, 모두 죽는다.

대런은 이를 악물었다. 인생은 어째서 이렇게 잔인한 걸까.

'이번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예정이었는데.'

새로 취항한 배로 공적을 올린 뒤, 그는 왕으로부터 작위와 영지를 받을 예정이었다. 귀족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군인의 길을 걸어온 그에게, 이 뒤에는 안정적이고 새로운 인생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데 막판에 이런 일이 되다니.'

대런은 자신의 배를 둘러보았다.

아루바소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단 한 척의 신형배다. 여기에 들어간 돈은 해양강국인 그의 나라에서도 한 척밖에 만들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

저들이 쏘고 있는 물줄기의 강도 정도면 이 배를 더 엉망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돛대와 돛을 엉망으로 만들면 배는 움직일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이 배를 강탈하려는 것.

'빼앗길 수는 없어.'

이 배 없이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 혹여 이곳에서 목숨이 살아난다 해도 고국의 왕에게 죽을 것이다.

'빌어먹을.'

대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놈들에게 배를 넘길 바에야 차라리 모두 함께 가라앉는 편이 낫다.

대런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분노로 뇌가 이글이글 타는 것 같다. 서서히 적의 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적이 온다! 놈들의 더러운 발을 이 배에 올리지 마라!"

대런의 고함소리가 갑판 위로 울려 퍼졌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놈들이 쏘아대는 물이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물에 젖은 생쥐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아루바소의 병사들이 배의 난간에 몰렸다.

활을 챙겨든 병사들이 저마다 화살을 메겼다. 총보다 위력이 약하다고는 해도 화살 역시 피부를 뚫는 무기다. 놈들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인 이상 맞으면 죽을 것이다. 설마 불사신은 아닐 터이니.

다행히 이쪽의 선체가 훨씬 높았다. 오히려 놈들이 가까이 다가와주는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루바소의 병사들은 마지막 남은 용기를 끌어모으며 적을 맞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제국의 배에서 수백 개의 빛이 쏟아졌다.

적의 망루에서 아군을 노리던 것과 똑같은 빛이었다.

난간에 서서 화살을 겨누던 병사들이 반응할 틈도 없이 푸드득 제자리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몇몇 병사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굳어 있다가 빛을 몸에 맞고 쓰러졌다.

"으, 으아아."

바로 옆의 동료가 죽은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병사 한 명이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가 퍼져나가자, 공포가 전염된 것처럼 연이어 새된 비명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병사들은 활과 화살을 내던지고 등을 돌렸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난간에서 벗어나려고 아우성을 친다.

"맙소사."

대런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빛을 쏘는 무기는 한 개가 아니었나. 설마, 그런 무기가 수백 개 있었던 건가.

"괴물. 괴물놈들."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다.

궁병을 죽인 뒤, 적은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일제히 아루바소의 배 위, 허공으로 빛을 쏘았다.

사람에게는 닿지 않는 높이다.

어느새 배의 난간에는 아루바소의 병사가 한 명도 서 있지 않았다. 아루바소의 병사는 아무도 난간에 다가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

제국의 배는 두 척이 한 쌍이 되어 움직였다.

높이가 다르기 때문에 아루바소의 배에 가까이 가면 본래 이쪽이 위험하다.

물대포 때문에 수가 줄었다고는 해도 적의 총이 모두 못쓰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아직도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격총을 일제히 쏘자, 적은 우스울 만큼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허긴, 사람을 죽이는 빛이 쏟아지고 있는 난간에 접근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이 얼어붙은 사이, 제국의 배는 유유히 적에게 접근했다. 배가 서로 부딪친다. 배 옆면이 서로 긁히면서 선체가 크게 흔들렸다. 드드드득, 소리와 함께 옆으로 튀어나온 배의 일부분이 조금 부서졌다.

"갈고리를 걸어라!"

대장들의 명령이 떨어지자, 제국의 병사들이 일제히 아루바소의 배를 향해 갈고리를 던졌다.

"서둘러!"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똥 싸지르겠다는 각오로 엉덩이에 힘주라구!"

누군가가 내지른 고함 소리에, 긴박한 전투 중인데도 여러 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누구야, 진지한 싸움터를 우스개로 만든 놈이.

루디는 레빈과 얼굴을 마주하고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적의 배를 갈고리가 단단히 얽어매자, 여러 개의 사다리가 놓였다.

요란한 함성과 함께 제국의 병사가 사다리를 오른다.

뒤늦게 몇몇 아루바소 병사들이 사다리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이미 푸테그린의 병사들이 적의 배에 올라간 상태였다.

여기저기서 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디도 훌쩍 몸을 날렸다.

적선에 오르자마자, 검을 크게 휘둘러 앞을 가로막은 적병을 벤다.

루디의 시선이 병사들이 싸우는 모습을 지나쳐 적의 함장을 찾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벌써 함장실로 갔나.'

루디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리를 움직였다.

아루바소 병사들은 한때 전의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지만, 적과 아군이 뒤엉킨 상태라 제국군이 저격총을 사용하지 못하자 결사적으로 항전하기 시작했다. 양국의 병사들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루디는 그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어디선가 나타난 적병이 루디의 뒤에서 검을 날렸다.

곁에 바짝 붙어 있던 레빈이 몸을 돌리며 한칼에 적의 목을 떨군다.

루디는 힐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대로 갑판을 진행해 걸었다. 저들을 상대할 틈이 없다. 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앞을 가로막는 적병을 베어 넘기면서, 루디는 어느새 달리기 시작했다.

점보가 구해온 아이에게서 함장실의 위치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서두르자.'

잘못하면 배가 통째로 날아간다.

푸테그린의 대장들이 크게 소리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선원은 죽이지 마라! 일할 수 있는 선원은 죽이지 마!"

"어쩔 수 없다면 다리를 노려라! 목숨은 붙여 둬."

"선원하고 병사를 구분 못하는 바보 녀석은 무조건 다리를 노려."

루디는 그 소리를 들으며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훌쩍 계단을 여러 개 건너뛰어내린다. 물대포 때문일 거다. 바닥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어두운 복도로 접어들자, 군데군데 부서져 있는 선실의 모습이 보였다. 어떤 곳은 문짝이 통째로 날아가고, 바닥에는 잡다한 물건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바짝 붙어서 쫓아오던 레빈이 중얼거렸다.

"크게 부서진 곳은 없어도 이걸 다 고치고 정리하려면 꽤 걸리겠습니다. 물대포도 함부로 쓸 게 아니네요."

"아, 나도 그 생각을 했다."

가볍게 대답하면서 달려간 끝에서, 루디는 목표로 삼았던 함장실의 문을 발견했다. 들었던 대로 함장실 문에는 유난히 화려한 장식이 새겨져 있었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루디는 엑스칼리버를 발동해 문을 가르고 방으로 뛰어들었다.

***

모든 게 끝이다. 한때 승승장구하던 자신의 경력도,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화려하게 출항했던 이 배의 운명도 모두 끝났다.

대런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걸 다른 손으로 잡아 누르면서, 대런은 함장실 구석에 선 채 여러 번 숨을 몰아쉬었다. 긴장 때문에 들락날락하는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벽과 벽이 만나는 모서리에는 약간의 물건을 올려놓을 수 있게 만들어진 선반이 있다. 모습은 평범했다. 그저 네모난 나무 기둥을 싹둑 잘라놓은 것 같은 형태다.

대런은 선반 위에 놓인 작은 물건을 손으로 훑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약간 젖은 바닥으로 물건이 떨어져 둔한 소리를 냈다.

선반은 위가 열리게 되어 있다.

대런이 힘을 주자, 끼이익 녹슨 소리를 내며 뚜껑이 열렸다.

뚜껑 안은 빈 공간이었다. 좁고 긴 구멍이 길게 바닥으로 이어져 있다.

아무것도 없다.

단지 관의 안쪽에 도화선이 한 개 붙어 있을 뿐이다.

저 밑바닥, 화약이 쌓여 있는 곳으로 향하는 굵은 심지 한 개만이 관의 벽 안쪽에 붙어 있었다.

"죽어라, 괴물 놈들."

대런은 중얼거리면서 심지에 불을 붙였다.

문이 잘리면서 검은 머리의 남자가 뛰어들어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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