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89화 (189/201)

#189 괴물의 입속에 스스로 걸어 들어간 건가

바람이 오는 방향에 따라 돛을 조정한다. 여러 개의 돛이 각각의 바람을 안고 부풀었다.

이 시대의 배는 엔진의 추진력 없이 돛이 잡아내는 바람만으로 움직인다.

먼바다까지 그걸 보면서 왔지만, 아직도 이 배에 엔진이나 노가 전혀 없다는 걸 생각하면 신기하달까, 왠지 이상하다. 어떻게 바람 만으로 이 커다란 배가 움직이는 걸까.

선원들이 돛대에 달려있는 돛의 방향을 다시 바꾼다. 돛마다 줄줄이 달려있는 밧줄을 요령 있게 당기자, 바람을 안은 돛이 약간 움직였다.

직진으로 미끄러지던 배의 속도가 약간 느려졌다.

루디는 고개를 돌렸다. 아루바소의 배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함장에게 말했다.

"대포의 사정거리는 아까 보았겠지. 닿지 않는 거리까지 다가가자. 그쯤에서 저격을 한 뒤에, 아루바소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곧바로 접근해 갈고리를 건다."

"알겠습니다, 폐하."

함장의 지시가 내리자, 선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쪽에 서 있던 토끼와 거북이가 물끄러미 아루바소의 배를 보고 있었다.

저격은 지금처럼 먼 거리에서도 가능하다고 들었지만, 이 배에 타고 있는 두 사람이 특별할 뿐이다. 같은 1급이라 해도 다른 배에 있는 저격병은 조금 더 접근해야만 한다.

루디는 두 명의 자격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노려야 할 것은 돛을 조정하는 선원이다. 함장과 조타수는 그다음이야. 배가 아루바소에 완전히 닿아 우리 병사가 저 배에 넘어갈 때까지, 절대로 누군가가 돛을 움직이게 하지 마라. 아딧줄에 손을 대는 자는 모두 죽여."

토끼와 거북이가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히죽 웃었다.

"예, 폐하."

"...예, 폐하."

거북이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한데...그 뒤에는...함장과 조타수...중에...누구를 우선하면 될까요...."

"조타수야. 방향키를 잡는 자는 그게 누구든 쏴버려라."

"...예, 알겠습니다."

토끼와 거북이는 곧바로 저격을 위해 망루로 올라갔다. 날렵하게 움직이는 선원들과는 다르다. 한 발 한 발 천천히 올라갔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망루에 오른 뒤, 준비한 밧줄을 허리에 감아 돛대에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고 기대본다.

한참 동안 그렇게 좁은 망루 위에서 구석구석 돌아다니던 두 사람은 마침내 좋은 자세를 찾은 모양이다.

몸을 고정하고 무기를 겨누더니 동상이라도 된 것처럼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한동안 그렇게 있더니, 슬그머니 두 사람의 팔이 올라갔다. 준비가 됐다는 신호다.

움직이지 않기 시작한 때와 지금은 전혀 다른 점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데, 그들에게는 뭔가 다른 걸까.

어쨌든 좋다. 준비는 끝났다.

루디는 고개를 돌려 아루바소의 배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성능 좋은 배라도 돛과 키를 움직여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저 빈 나무통일뿐이지."

루디의 얼굴에 히죽 미소가 떠올랐다.

***

함장 대런 스튜어트는 제국의 배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어디를 봐도 이쪽보다 배의 성능이 떨어지는데, 제국에서는 자신들 숫자가 더 많다는 것을 믿고 덤비려는 모양이다. 점점 더 접근해오고 있었다.

"정말, 정령이니 뭐니, 그런 걸 믿는 미개인은 어쩔 수 없군. 아는 게 없으니 실력의 차이도 몰라. 자신들이 죽으러 오는 건 줄도 모르고 저리 기세등등이지 않나."

옆에서 키를 잡고 있던 조타수가 캇캇, 끓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정령이라고 해서 대단한 건 줄 알았는데 그냥 날기만 하더군요. 웃겼습니다."

"우리도 바보 같았어. 기껏해야 그럴싸해 보이기만 하는 속임수에 아까운 대포알만 써버렸으니."

옆에 들리도록 일부러 큰 소리로 대화한다.

근처에 있던 선원들도 이끌린 것처럼 웃고 있었다.

다행히 정령이니 뭐니 하는 빛의 코끼리는 선원들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저 하늘을 날아다니기만 했기 때문이다.

보기에는 낯설고 신비했어도 배를 부수거나 바다를 거칠게 하는 등의 신기는 일으키지 못했다.

'정말, 괜한 걱정이었어.'

어쩌면 정말로 그저 눈속임이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때 망루에 있던 선원이 큰 소리로 외쳤다.

"함장님! 적의 망루에 긴 원통형 막대를 이쪽에 겨누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막대?"

대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적의 배 망루를 쳐다보았다.

적의 배 높은 곳에는 망루 한 개에 한 명씩, 두 명이 올라가 있었다.

망루 선원이 그들을 보고 곧바로 알린 이유를 알겠다. 서 있는 자세가 이상했다. 원통형의 피리처럼 생긴 막대기를 총처럼 이쪽에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저게 뭐지? 처음 보는 건데.'

자세를 보면 총일까 싶지만, 그것은 아닐 것이다. 거리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형태가 총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그저 막대기인 것 같다.

'정령이니 뭐니 떠들어댔던 것처럼 단순히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뿐일지도 모르지.'

어쩌면 저들에게는 미신이 너무 강해서 아무런 득도 없는 행동을 예사로 하는지 모른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데 단순한 믿음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거다.

'워낙 미개한 나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적의 망루에서 기묘한 빛이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어!"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나왔다. 그냥 막대기가 아니었나?

빛은 조금 전에 날아다녔던 코끼리처럼 투명하고 맑았다. 햇빛을 예쁜 색으로 물들여 모아놓은 것 같다.

대런은 잠시 넋을 잃었다. 어쩌면 빛의 코끼리도 저런 식으로 만들어낸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빛의 끝을 더듬었다. 막대에서 나온 빛은 곧바로 이 배에 닿아 있었다.

막 막대기 빛의 끝을 확인하려는데,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

배 바닥에 선원이 쓰러져 있었다. 이마에 붉은 점이 하나 찍혀 있다.

저게 뭐지, 생각하는 순간 핏방울이 맺히더니 주르륵 붉은 선이 생기며 얼굴 밑으로 떨어졌다.

"뭐야."

대런이 망연히 그걸 보고 있는데, 다시 빛이 쏘아졌다.

돛을 조정하던 선원의 귀로 빛이 들어갔다.

총소리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조용히 빛이 닿았을 뿐이다.

하지만 빛이 선원의 귓속으로 들어가자마자, 픽 쓰러진다.

그리고 빛은 다시 이동해 다른 선원을 향했다. 이번에도 아딧줄을 잡고 있는 자였다.

"도망쳐!"

"빛에 닿으면 죽는다."

"돛대 근처에 있으면 안 돼."

"아딧줄에 손대는 자가 죽는 거야."

배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대런은 정신을 차리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란 떨지 마라! 돛에서 떠나지 마. 살고 싶으면 저 배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 바람을 강하게 받아야 해!"

하지만 공포에 빠진 선원들은 함장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돛에서 멀어지려고만 했다.

"우리도 대응사격을 한다. 대포를 준비해!"

대런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포병 대장은 병사들을 이끌고 대응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병사가 대포 앞에서 포구에 화약을 밀어 넣는다. 긴 막대로 꾹꾹 눌러 넣은 뒤 물러서자, 심지에 불이 붙여졌다.

"발사!"

대포알이 허공을 날아 적의 배를 향했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대포알은 적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다에 떨어졌다.

시선은 그대로 적의 배를 향한 채, 대런은 곧바로 조타수에게 명령을 내렸다.

"방향을 돌리게. 저 배에서 멀어져야 해."

"알겠습니."

함장을 향해 대답하던 조타수의 말이 끊겼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린 순간 조타수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양 눈 사이에 붉은 점이 생겨 있었다. 피가 주르륵 조타수의 콧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맙소사!"

대런은 곧바로 몸을 숙였다. 적이 노리지 못하게 배의 구석으로 몸을 굴린다.

벽에 바짝 붙어 적의 시야에서 몸을 숨긴 뒤에야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놀라서 잠시 동안 숨을 쉬지 못한 것 같다. 폐가 오그라들어 숨이 가빴다.

'빌어먹을! 저건 대체 뭐지.'

소리 없는 총? 총알 대신 빛으로 쏘는 것인가.

"말도 안 돼.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는데."

대런은 몸을 숨긴 채 벽을 타고 움직였다.

시야가 변하면서 다른 제국 배의 망루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도 조금 전에 본 것과 같은 빛이 쏘아지고 있었다. 다만 그 빛은 이 배가 아니라 다른 아루바소의 배를 향하고 있었다.

"설마, 모든 배에 이런 빛이 쏘아지고 있는 것은....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맙소사,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푸테그린 제국에는 어떤 괴물들이 살고 있었던 거지.

'괴물의 입속에...스스로 걸어 들어간 건가.'

끔찍한 상상이 뇌 속을 꽉 채웠다.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는 괴물 속으로, 홀린 듯 줄줄이 알몸으로 들어가는 자신들의 모습이 보인 것 같았다.

너무 무지하면 위험에 맞부딪칠 때까지는 그것이 위협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얼마전에 했던 말이다. 그것은 적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였던 거였을까.

***

"적의 움직임을 봉쇄했습니다. 저격병은 정말 대단하군요."

함장이 감탄한 듯 중얼거렸다.

그 뒤에는 곧바로 아루바소의 배에 접근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배가 점점 아루바소의 사격 범위 안으로 들어간다.

배의 곳곳에서 대장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의 대포는 물대포로 상대한다. 정확하게 포문을 노려!"

루디와 미리 협의한 대로 차례차례 명령이 내려졌다.

배의 측면에 대부분의 대포가 위치한 아루바소와 달리, 푸테그린 제국은 물대포의 설치와 이동이 자유롭다.

흔들리는 걸 고정하기 위해 설치대는 만들었지만, 무거운 적의 대포와 달리 물대포는 한 명이 짊어지고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무게였다. 급하게 다른 장소에서 필요하면 덜렁 들고 가면 된다.

게다가 물대포 중 일부는 운반이 쉽도록 바퀴가 달린 수레에 고정되어 있었다.

수레를 끌고 가거나 들고 가는 등, 선미 후미 상관없이 갑판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사용하고 싶은 장소에서 쏘면 된다.

물대포는 고민 끝에 최대한 위력을 낮춘 것을 사용하기로 했다. 적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대포를 적시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강했다.

루디가 갑판에 설치된 물대포에 병사들이 서는 것을 보고 있는데, 레빈이 엑스칼리버를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폐하."

공손히 칼을 내민다.

그걸 받아들자, 지켜보던 병사들이 요란하게 함성을 질렀다. 해병들은 루디가 엑스칼리버를 들고 싸우는 모습을 이번에 처음 본다. 흥분한 병사들의 콧김이 여기까지 닿는 것 같았다.

펑, 펑, 소리를 내며 적의 배에서 대포가 쏘아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리서 떨어지던 포탄이 배 가까이에 떨어져 물이 튀었다.

"물대포 준비!"

푸테그린 배에서도 명령이 떨어졌다.

"적의 배에 구멍 내지 않도록 조심해라! 지금은 적이지만, 잠시 뒤면 우리 배가 된다. 흥분한 끝에 마구 물대포를 쏘아대는 놈은 나중에 엉덩이를 처맞을 줄 알아!"

"예!"

와하하 웃음이 터지는 가운데에서도 힘찬 대답이 돌아왔다.

"좋아, 물대포 발사!"

명령과 함께 수십 개의 물줄기가 허공으로 쏘아졌다.

몇 개는 조금 빗나가 포문 옆으로 향했다.

저격총과 달리, 물줄기는 완전한 직선으로 날아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약간은 포물선을 그리게 된다. 그 때문에 완벽하게 조준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세찬 물줄기가 둔하게 선체를 때리자, 아루바소의 배가 조금 흔들렸다. 와지끈, 선체가 약간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

물대포를 조준하는 병사가 마도병기의 각도를 약간 변경해서 제대로 맞춘다.

열린 포문 너머로, 대포 안에 화약을 밀어 넣던 적병이 물대포의 세찬 물줄기에 밀려 날아가듯 사라졌다.

그 직후, 대포도 받침대와 함께 뒤로 날아갔다.

루디는 갑판에 선 채 적의 배를 노려보며 외쳤다.

"배를 더 가까이 붙여라. 속도를 높여! 적에게 반응할 기회를 주지 마라!"

돛을 조정하는 푸테그린 선원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줄을 당겨 돛의 방향을 바꾸어 바람을 가득 맞는다. 배가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적에게 접근해갔다.

펑, 소리와 함께 대포알이 푸테그린의 배에 적중했다. 바로 루디의 옆이다. 선체가 크게 흔들렸다.

"폐하의 주위를 지켜라. 몸으로 덮어!"

레빈이 외치면서 루디 곁으로 붙었다. 호위를 맡은 병사들도 겹겹이 루디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함장이 움찔하며 배를 후진시키려는 듯 입을 열었다.

루디는 칼을 바닥에 댄 채 몸의 균형을 맞추면서 외쳤다.

"나한테 신경 쓰지 마라. 괜찮아. 배를 더 붙여."

"하지만 폐하."

함장의 말을 막으며 루디는 강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명령이다, 함장. 절대로 배를 물려서는 안 돼. 가까이 붙여라. 갈고리를 걸어."

루디가 말하는 동안, 망루 위에 있던 저격병이 포문에 가까이 있던 적병을 쏘았다.

대포를 맡고 있던 적병 몇 명이 순식간에 저격총을 맞고 바다로 떨어졌다.

아마 그들이 루디 근처에 떨어진 대포를 맡은 병사였던 것 같다.

그때, 다른 대포에서 쏘아진 포탄이 배를 향해 날아왔다. 정면으로 루디의 얼굴을 향하고 있다.

"폐하!"

레빈의 절박한 소리를 들으며, 루디는 엑스칼리버를 발동했다.

웅웅 소리를 내는 칼을 두 손으로 들고 훌쩍 몸을 날린다.

"하앗!"

외침 소리와 함께 위에서 아래로 칼을 가르자, 커다란 쇠포탄이 반으로 잘라졌다.

"엇!"

"헉!"

병사들의 숨 마시는 소리를 들으며, 루디는 칼을 횡으로 그었다.

철 포탄은 정확하게 네 조각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쿵, 소리와 함께 주변의 바닥이 약간 흔들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뒤,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와아아아아!"

루디는 병사들을 둘러 보았다.

"주춤하지 마라. 적을 향해 돌진해! 신의 가호는 우리에게 있다!"

루디의 외침 소리와 함께 푸테그린의 배는 빠른 속도로 아루바소의 배를 향했다.

너무 놀랐을까.

잠시 동안 아루바소의 배에서는 대포가 쏘아지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