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88화 (188/201)

#188 나죽고 너죽고 함께 죽자

이제 더 이상은 안 될지도 모른다. 아니, 안 된다.

필사적으로 물을 긁던 손가락은 이미 힘이 빠지고, 부러진 다리에서는 더 이상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온몸이 무겁기만 하다.

됐어, 이제 그만. 더 이상 발버둥은....

열여섯 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건 배에서 지낸 3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너무 피곤하다. 물에 휘감긴 피부가 무거워졌다.

벌어진 입으로 물이 꾸역꾸역 들어온다. 공기가 빠져나가 보글보글 위쪽으로 올라갔다. 몸이 물에 짓눌려 찌부러지는 것 같다.

바닷물은 목이 탈 것처럼 쓰고 짜다. 쿨럭쿨럭, 그 물을 먹고 다시 뱉어내며, 이빨쥐는 서서히 물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문득, 힘 빠진 눈동자가 조금 밝아졌다. 눈에 힘을 주자 희미하게 빛이 들어왔다. 검은 물 사이로 뭔가가 반짝거린다.

'...정령...님...?'

아, 다행이다. 물속에 빠져 죽으면 뱃사람은 그대로 차가운 바닷속에 갇혀버린다고 들었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정령님이 마중 와주는 것뿐이다.

'...감사합니다.'

빛이 길게 뻗어와 그의 몸을 감았다. 무거운 물을 밀치며 몸이 정령님에게 끌려간다. 위로, 위로, 이빨쥐는 정령님에게 이끌려 신의 나라로 들어간다.

그렇게 생각했다.

***

[주인님! 주인님! 점보가 사람 주워왔어!]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게 아닐까.

고개를 들어보니 점보가 뭔가를 등에 업은 채 훌쩍훌쩍 날아오고 있었다.

긴 코를 위로 올려 단단히 붙잡고 있다.

"...점보."

대체 뭘 주워온 거야.

축 늘어져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시체인지도 모른다. 왠지 끔찍해졌다.

[바다에 들어있었던 거야! 점보가 찾았으니까 점보 거예요. 응? 이거 점보 거지? 응? 응? 주인님. 점보 주세요.]

점보가 머리 위에서 빙빙 돌면서 외쳤다.

[점보 심심할 때 같이 놀아도 돼요? 놀아도 되지?]

"우선 이쪽에 내려놔. 사람은 물건이 아닌 거야, 점보."

[하지만 점보가 찾았는걸. 점보가 찾았어요. 주인님, 점보는 이 사람이랑 같이 있고 싶다. 데려가고 싶어요.]

점보가 빙빙 날면서 위아래로 덜컥덜컥 움직이는데도 등에 타고 있는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만일 시체면 어쩌지. 점보가 사람 시체를 들고 왔을까 심하게 걱정이 되었다.

아!

루디는 점보가 내려오려고 폼을 잡는 순간 입을 열었다.

"드래곤, 점보가 우리 배에 몸을 박지 않도록 해줘."

모습을 감추고 있던 드래곤의 꼬리가 불쑥 나타나 점보의 몸을 휘감았다.

[꾸엑!]

점보가 비명을 지르며 코를 흔든다. 그 때문에 위에 태우고 있던 사람의 몸이 옆으로 흘러내렸다.

드래곤은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던 것처럼 사람의 몸을 두 손으로 받았다.

꼬리로는 그대로 점보를 감은 채, 드래곤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왔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살아있어. 남자 꼬마로군.]

드래곤이 허공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팔을 내밀었다.

근처에 있던 병사가 달려와 사람을 받았다.

아직 아이였다. 십대 중반 정도 되었으려나. 하지만 얼굴에서 짐작할 수 있는 나이보다 몸이 작다.

아이는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붙여 만든 것처럼 말라 있었다. 발목 하나가 이상한 모양으로 꺾여 있다.

"맙소사! 군의관을 불러라."

루디는 병사에게 명령을 내린 뒤, 아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드래곤은 살아있다고 말했지만, 아이의 피부는 전체가 퍼런 기운을 품고 있었다.

정말로 살아있는 걸까.

루디는 축 늘어진 아이의 목에 손을 댔다. 차갑다. 잠시 손가락을 대고 있자 희미하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다행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죽을 것이다. 계절은 여름이라고 해도, 너무 오래 바닷물에 있었던 것 같다.

군의관이 달려와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살아나겠느냐?"

군의관이 고개를 숙이고 나직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먹은 것이 없는지 너무 말랐습니다."

"...."

"하지만 이 아이는 뱃사람입니다. 평범한 육지 사람보다 강합니다. 살아날 거예요."

군의관의 말을 보충하듯이, 옆에 있던 함장이 말했다.

"뱃사람의 생명은 질긴 것이니까요."

루디의 시선이 아이의 다리를 향했다.

부러진 아이의 발목에 사슬의 흔적인 것 같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루디는 그걸 보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잘 돌봐 줘라."

"예, 폐하. 걱정 마십시오. 뱃사람은 바다에서 건진 사람을 귀히 여깁니다. 망망대해에서 배에 발견될 정도의 운을 가졌다면 어느 배에서도 살아날 수 있는 정령의 가호를 가진 사람이니까요."

군의관이 허공에 떠 있는 점보와 드래곤을 보았다.

"하물며 정령이 데려온 아이 아닙니까."

군의관이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감겨있던 아이의 눈꺼풀이 움찔하더니 입이 달싹거렸다. 루디가 들어본 적 있는 외국의 언어가 푸른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정령...님...."

***

따뜻한 기운이 무거운 피부에 닿는다.

신의 나라인가. 드디어 그곳에 도착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이빨쥐의 눈꺼풀 너머로 밝은 빛이 쏟아져왔다.

뭔가가 그에게 계속해서 속삭이고 있었다.

[남자 꼬마야, 일어나라. 주인께서 너의 삶을 바라신다...꼬마야, 일어나라...주인의 앞에서 죽지 말아라...아이의 죽음은 주인의 마음을 갉아 먹는구나...일어나라, 아이야.]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들어왔다. 그게 정말로 목소리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꾸만 그에게 속삭인다. 일어나라, 살아라,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와 함께 몸에 찌릿한 것이 조금 흘러들어왔다. 몸이 따뜻해졌다.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빨쥐는 눈에 힘을 주었다. 목소리가 자꾸만 일어나라고 말을 건다. 정령님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정령님의 명령이라면 그 말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을 뜨자, 아름다운 남자가 그를 보고 있었다. 깊은 밤의 바다와 같은 색깔의 머리를 가졌다.

이 사람이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던 머릿속 목소리가 말한 주인님은 이 남자다. 어쩌면 이 검은 머리의 남자 역시 정령님일지도 모른다. 쏟아지는 빛이 검은 머리 표면에서 반짝반짝 튀었다.

"...정령...님...."

그렇게 말하고 나니 정말 정령님인 것 같다. 여러 날 물을 먹지 못한 몸에는 수분이라고는 전혀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눈물이 차올랐다.

"...정령님...."

그렇게 다시 한번 말하자, 검은 머리의 정령님이 빙그레 웃었다.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지고, 흐린 시야로 정령님이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젖은 머리칼을 정령님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애썼구나. 이제 걱정할 것 없다."

그의 나라 언어였다. 정령님이 어째서 인간 나라의 말을 하는 걸까. 머리가 느리게 돌아가면서 그런 생각이 들고, 잠시 뒤에는 검은 머리의 정령님 외에도 그를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어, 여기는 정령님의 나라가 아닌가. 신의 나라로 들어온 게 아냐?

그렇게 생각한 뒤에야 겨우 자신이 배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익숙한 배의 흔들림이 그제야 느껴졌다.

'그렇다면 검은 머리의 정령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국의 황제님이다. 이곳은 제국의 배다. 그는 먼 대륙으로 배를 타고 나갔다가, 제국을 침략하려는 아루바소에 노예로 잡혀 있었다. 하지만 바다로 뛰어들어, 어쩌면 정령님에게 도움 받아 이곳에 오게 된 걸까.

황제가 몸을 일으키고 병사들이 그를 데려가기 위해 잡았다.

안 돼. 안 돼. 말해야 한다.

정령님이 그를 이곳으로 데려왔다면 반드시 알고 있는 걸 말하라는 뜻일 거다.

소문으로 들었던, 빛의 생물을 부리는 황제님을 위해 자신이 살아난 것이 틀림없었다.

"...도망...도망가세요. 황제님, 도망 가요. 저기에는 대포가...포갑판에 대포가 많아요...화약도 잔뜩 있어...통마다 있어요...."

다른 곳을 향하던 황제의 얼굴이 이빨쥐를 향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빨쥐는 팔을 올렸다. 그냥 가게 해서는 안 된다. 황제님한테 말해야 해.

내 말을 들어주세요. 도망가 주세요. 저 배에는 대포가, 화약이 있어요. 가득 있어요.

머릿속에서 생각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입이 터졌다.

"...도망가야 해요. 커다란 대포가 포문마다 있어요. 화약이 든 나무통이 포갑판 중앙에 가득가득...백 통 넘게 있는데 배 밑에는 화약이 더 있대요...하부 포갑판에도 화약이 있어요...펑 하고 터져요. 불을 붙이면 엄청나게 타요. 배 전체가 터진대요."

단숨에 말하는 동안 황제가 가까이 와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래, 알았다. 고맙구나."

황제가 이빨쥐의 나라말로 부드럽게 말한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다정한 목소리일까.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모두 죽었다.

엄격하지만 공정하던 갑판장님도, 항상 쾌활하게 웃던 목수 아저씨도, 엄한 얼굴밖에 하지 않던 선장님도 죽었다. 그를 못살게 굴던 선배도 모두 죽어버렸어.

어떤 사람은 배에 타자마자, 어떤 사람은 일하다 죽어 바다에 버려졌다.

정령님이 발견할 수 있도록 꽂아주는 작은 막대기 하나 없이 물속에 처박혔다.

아무리 악독한 놈도 정령님을 맞이하는 막대 한 개는 시신의 몸에 묶어 주는데, 저들은 그런 것조차 없이 바다에 버렸다.

그런 식으로 물에 빠진 몸과 영혼은 정령님이 찾지 못해서 영원히 바닷속에 갇히게 된다.

땅에서 난 물건이 없으면 정령님은 사람을 찾을 수 없어. 모두 차가운 바다 밑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배에 오르면 모두가 가족이다.]

그렇게 말하던 선배의 말이 머릿속에서 바닷물처럼 부서져 떠돌았다.

이빨쥐는 울면서 소리쳤다.

"...함장실에 줄이 있대요. 배 밑 화약실로 가는 긴 줄이 있어서, 거기에 불을 붙이면 화약실로 곧바로 줄이 타들어가 배가 터진다고 했어요. 도망가세요."

이빨쥐는 저들의 말을 모른다. 간단하게 와, 가, 죽어, 등의 말은 알게 되었지만 그 외의 아루바소 말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함께 노예로 일하던 갑판장님은 똑똑한 사람이었다. 귀동냥으로 그들의 말을 듣고 배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갑판장님은 죽기 전에, 미개인들이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아루바소의 함장과 조타수가 하는 말을 훔쳐 들었다.

"저 배는 적과 함께 죽는 무기래요. 마지막 순간이 오면 적을 모두 죽여버리는 거라고 했어요.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거래요."

부드럽게 웃던 황제의 얼굴에 더욱 예쁜 미소가 걸렸다. 태양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는데 해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네 말을 듣지 못했다면 큰일이 날 뻔했구나. 고맙다. 하지만 이제 그만 쉬어라. 더 무리해서 말을 한다면 몸에 무리가 갈 거야."

황제의 손이 이빨쥐의 눈을 덮었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지금까지 눈을 어떻게 뜨고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피곤해졌다.

눈이 무겁다. 입술도, 손가락도, 숨 쉬는 것조차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를 만큼 온몸이 무거웠다.

황제님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귓속으로 들어왔다. 아이, 소중, 몇 단어는 알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가 제국말로 뭔가 말하고 있었다.

***

"이 아이는 우리의 은인이다. 소중히 대접하게. 절대로 죽이지 마라."

루디가 말에 군의관이 고개를 숙였다.

"그나저나 악독한 놈들이군요."

레빈이 곁에서 중얼거렸다.

"해전에서 백병전이 많기 때문에 생긴 함정인가 봅니다. 적이 배에 오르면 함께 죽겠다는 걸까요? 우리도 저런 걸 나라 곳곳에 만들어 두는 게 좋겠습니다. 똑똑하네요."

레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데 화약이라는 게 그 정도로 위력이 강한 걸까요? 적이 도망칠 시간도 없이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저들이 대포와 총을 쏠 때 사용한다는 건 들었는데, 어떤 건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루디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화약이 어떤 건지 모르는 레빈으로서는 그 정도 밖에는 예상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화약이 수백 통, 수천 통 있는 배가 터진다면 그 정도로는 끝나지 않는다.

"아이가 말한 대로라면, 저 배가 터지는 순간 근처에 있는 배들도 모두 말려들 거야. 저 아이는 그야말로 생명의 은인이다."

"...."

레빈이 가만히 루디를 보았다. 어깨를 으쓱하고 중얼거린다.

"가끔씩 폐하는 우리가 모르는 이치를 꿰뚫고 있는 것 같아요. 마생물을 폐하가 만든 거라고는 알고 있지만, 정말로 그들이 신의 사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레빈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정말로...폐하가 신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가끔 들어요."

아니, 거기에서는 먼저 다른 의심을 해보자. 전생자라든가, 예지몽을 꾼다든가, 마녀의 능력이라든가, 그런 거.

평상시와 달리 진지한 모습의 레빈을 보고, 루디는 히죽 웃었다.

"레빈, 내가 평범한 인간이라는 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자네가 가장 잘 알겠지."

레빈이 약간 기가 막히다는 듯 루디를 보았다.

"폐하의 어릴 때를 봤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거거든요."

"...."

어째서?

평범하게 보이려고 엄청 노력했는데. 그 모든 노력이 사실은 헛짓이었나.

두 사람의 교환을 보고 있던 함장이 소리 없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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