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욕심의 딜레마
"저게 뭐야."
아루소바의 함장 대런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늘에 이상한 것이 있다. 분명히 살아있는 생물 같은데 빛으로 되어 있었다.
예전에 한 번 보았던 코끼리를 닮았다.
하지만 그건 분명히 육지에 사는 동물이었을 것이다. 저렇게 날거나 빛이 나는 생물은 아니었다.
코끼리를 닮은 빛의 생물은 펄럭펄럭 귀를 움직이며 점차 아루바소의 함대에 가까이 날아오고 있었다.
바다에 닿을 듯 말 듯 내려갔다 다시 조금 하늘로 떠오른다. 마치 장난이라도 하는 것처럼 위아래로 흔들흔들 날았다.
"맙소사, 저것이 정령이군요."
보고를 위해 옆에 와 있던 갑판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런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폈다.
미개인들이 정령이라고 떠들었던 일은 꽤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다. 그 말을 떠올렸던 걸까. 난생처음 보는 장면에 모두 압도되어 있었다.
'안 돼. 모처럼 노예까지 다 죽였는데 이래서는 그 일이 쓸모 없어진다.'
대런은 등을 쭉 펴고 벼락같이 소리쳤다.
"저건 적의 속임수다. 포를 준비해라! 저걸 하늘에서 떨어뜨려."
반드시 명중시키지 않아도 된다. 다만 정령이니 신의 사자니, 그런 말이 나오기 전에 선원들의 생각을 막으면 된다. 공포가 머릿속을 지배하기 전에 그 흐름을 끊어야한다.
오랫동안 함께 했던 갑판장이 민감하게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선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저건 눈속임이야. 미개인들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 술수를 쓰고 있다."
갑판장이 요란하게 소리치자,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선원들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저게 더 가까이 오기 전에 떨어뜨려라!"
대런이 다시 한 번 소리치자, 포병대장이 병사들을 다그쳐 갑판 위의 대포를 쏘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포탄이 허공을 날아갔다.
하지만 둥근 철 포탄은 빛의 생물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본래 대포의 명중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
가만히 서 있는 배를 맞추는 것도 근거리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다시 병사들이 대포를 준비하고 잠시 뒤에 포탄이 날아갔다.
빛나는 생물의 움직임이 별안간 빨라졌다. 마치 포탄을 향해 돌진하는 것 같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포탄 아래, 빛나는 생물이 몸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막 닿는 순간 몸을 뒤틀었다.
장난이라도 하는 것처럼 빛의 생물이 귀를 펄럭펄럭 요란하게 움직였다.
포탄은 아슬아슬하게 빛의 생물을 비껴 마다로 떨어졌다.
'우리를 놀리는 건가.'
대런의 얼굴에 험한 표정이 떠올랐다.
빛의 생물은 다시 훌쩍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계속해서 함대를 향해 날아온다. 더 이상 가까이 오면 대포를 쏠 수 없다. 잘못하면 아군 배에 맞는다.
"총을 준비해라."
대런의 명령이 떨어지자 화승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갑판 위에서 빛의 생물을 향해 무기를 겨눴다.
***
푸테그린 제국의 배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조용하다. 마치 모두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으로 가득하던 배에 괴이한 정적이 흘렀다.
문득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저게 대포...인가...."
병사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크게 갑판 위로 퍼졌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벼락같은 환호성이 배에 울렸다.
"와아아아아아!"
루디는 그 소리를 등에서 들으며 히죽 웃었다.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제국의 다른 배에서도 환호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대포라는 신무기에 겁을 먹고 있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박격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점보를 맞추기는커녕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포탄이 떨어졌다는 게 누구의 눈에도 명확하게 보였다.
위력도 명중률도 박격포에게 떨어지는데 사정거리조차 짧았다.
심지어 이쪽은 박격포가 너무 강해서 무기의 위력을 한껏 낮춘 물대포를 사용할 예정이다. 적의 대포가 저 상태라면 물대포조차 필요 없을지 모른다.
병사들의 사기가 오를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환호성이 잦아들 무렵, 루디는 몸을 돌려 병사들을 보았다.
자못 걱정스러운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고 루디가 말했다.
"너무 느슨해지지 마라. 이건 힘든 싸움이야. 저들의 배를 파손하지 않고 나포해야 하는 거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상처 입히지 않고 온전하게 배를 입수할 수 있을지, 그대들도 생각해 보면 매우 힘든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을 테지."
루디의 말에 병사들이 왁자지껄 웃었다.
레빈이 눈치 빠르게 병사들 틈에 끼어들어 대포에 대해 흠을 잡았다. 저건 돌멩이를 쏘아대는 투석기라던가, 너무 느려서 적이 대포 쏘는 걸 보고 물대포를 쏘면 도로 적에게 날아가겠다던가, 그런 농담이다.
병사들의 분위기가 화려해진 걸 보고 루디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잠시 뒤 병사들에게서 몸을 돌리자마자 루디의 표정은 진지해졌다.
점보를 향해 대포를 쏘아대는 적의 배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루디가 함정에게 말을 건넸다.
"생각보다 배가 빠르군. 함장,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령관은 신중한 표정으로 아루바소의 배를 쳐다보았다.
"돛의 움직임이 굉장히 정확합니다. 저 정도로 바람을 제어하다니, 선원들의 숙련도가 상당하군요. 분하지만 우리 선원보다 기술이 뛰어납니다."
"배를 손상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접근할 수 있을까? 백병전을 생각하고 있네."
함장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접근전을 벌이면 배의 크기와 움직임에서 우리가 뒤집니다. 배 두 척으로 양쪽에서 접근하며 움직임을 제어하면 또 모르겠지만, 상대를 손상하지 않고 가까이 가다가는 우리 배가 파손될 우려가 있습니다."
루디는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돛대를 망가뜨리면 어때? 수리해서 가져갈 수 있을까?"
"배에는 긴 항해 중에 배를 수리하고 유지할 목수가 있습니다. 실력 좋은 목수라면 어떻게든 수리가 가능하겠지만, 돛대가 완전히 부러진 상태에서는 어떨지 모르겠군요."
함장이 안타까운 듯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전투 중에 누가 죽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 배를 가장 잘 아는 목수가 죽어버리면 당장의 수리는 포기해야 할 겁니다."
"...."
루디는 잠시 아루바소의 배를 노려보았다.
어떻게든 저 배들을 모두 갖고 싶다. 기왕이면 선원들도 모조리 배에 딸려왔으면 좋겠다. 욕심이 지나치다는 건 안다. 하지만 저 배가 지니고 있는 가치를 생각하면 한 대라도 포기하기는 아까웠다.
'배에는 화약이 잔뜩 실려있을 테니 박격포는 쓸 수 없어. 돛대와 선체를 생각하면 물대포도 한정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다.'
결국 배를 붙인 뒤 몸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는데, 가까이 가려면 배의 능력과 운용 실력에서 뒤진다. 미치고 팔딱 뛰겠다.
루디가 힐끔 뒤를 보았다.
레빈이 금세 눈치채고 곁으로 다가왔다.
"레빈, 1급 저격병을 준비해 줘. 선장과 조타수, 그리고 돛대를 조정하는 선원을 노린다."
"알겠습니다."
레빈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곧바로 루디의 명령을 다른 배에 전달하는 깃발이 돛대 위로 올라갔다.
해군에도 저격총을 사용하는 병사는 있다.
다만 저격병은 아니었다. 단순히 사격을 할 뿐이다.
예전에는 저격총이 모자랐다. 그래서 일반 병사 중에서 실력이 좋은 사람만을 저격병으로 뽑아 훈련시켰지만, 지금은 일반 병사들에게도 사격 훈련을 받게 하고 있었다. 해군 뿐 아니라 모든 군대가 그렇다. 마도병기가 그 정도로 많이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칼이나 활과 달리 저격총은 약간의 훈련만 거치면 일정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사격 실력이 뛰어난 병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저격병으로 훈련받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출한 능력을 보이는 병사가 간혹 있었다. 그야말로 먼 저리에서 개미 한 마리조차도 저격이 가능한 실력자들이다.
루디는 그들을 따로 모아 저격 부대를 만들었는데, 아직 정식으로 그들이 전투에 참가한 적은 없다.
1급 저격병은 그 저격 부대에서도 최상위 성적을 기록하는 병사들이었다.
이 배에는 두 명, 다른 몇 척의 배에는 한 명씩 타고 있다. 1급 저격병은 숫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나머지 배는 2급 저격병이 맡고 있었다.
다만 그들도 해상에서는 훈련해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해전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이번 해전을 준비하면서 잠시 배에서 저격총을 몇 번 다룬 게 다였다.
'그들이 잘 해주면 좋은데.'
루디는 다시 시선을 아루바소의 배 쪽으로 옮겼다. 배와 배 사이를 날아가는 점보를 향해, 이번에는 화승총이 쏘아지고 있었다.
"...."
대포와 마찬가지로 총 역시 재장전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같은 방향에서 총을 쏠 때 약간의 사이를 두고 발사가 되는 경우가 잦았다.
'화승총이라는 게 심지를 불로 붙여서 쏘는 거였던가.'
구식총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정확하게는 모른다. 보고서에도 그런 세세한 부분은 적혀 있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이 약간 서늘해졌다.
저 먼 대륙에서는 마력이 없는 대신 과학이 발달하고 있다.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그들에게 뒤처지게 되는 날이 올지 모른다.
그날이 왔을 때, 제국과 이 대륙의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지구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른 대륙의 열강에게 굴욕적인 개방을 당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지금부터라도 대비해야 해.'
뒤떨어져 있는 수학과 과학 분야를 부흥시키고 더 많은 사람에게 교육의 혜택이 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뛰어난 인재는 나라에서 공부를 시키는 장학제도도 만들면 좋을지 모른다.
'우선은 저 배의 기술력부터 훔쳐내야지.'
루디가 가만히 아루바소의 배를 노려보는데, 등 뒤에서 레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1급 저격병입니다."
몸을 돌리자, 몸이 껑충하게 큰 병사와 키가 작은 병사 두 명이 긴 저격총을 품에 안고 서 있었다.
'토끼와...거북이?'
느낌이 딱 그렇다. 한 명은 마른데다 껑충하게 크고, 다른 한 명은 머리가 어깨에 붙은 것처럼 목이 짧고 키가 작았다.
키 큰 토끼 저격병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거북이 쪽은 행동이 조금 느린 것 같다. 반 박자 늦게 머리를 내렸다.
왠지 둘 다 조금 어설퍼 보인다.
루디의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레빈이 입을 열었다.
"어리숙해 보이지만, 막상 작업에 들어가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이 아이들은 제가 직접 뽑은 녀석들이죠. 제가 처음 데려왔을 때만 해도 요만했는데 많이 컸어요."
레빈이 허리께에 손을 대어 보이며 웃었다.
레빈, 너는 대체 몇 가지 일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음유시인도 하고 첩자도 하고, 그 외에도 다양한 걸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병사 모집도 하는 거냐. 어쩌면 레빈이야말로 천재가 아닐까. 요즘 들어 하는 생각이다.
토끼 저격병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느냐?"
"...예, 폐하."
목소리가 가느다랗다. 토끼는 살짝 시선을 올렸지만 루디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밑으로 내렸다. 굉장히 소심한 성격인 것 같다.
"괜찮으니 말해 봐라."
"...작업은 망루에서 합니다...올라가봤는데..."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루디는 쓴웃음을 짓고 얼굴을 약간 그에게 가까이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루디의 얼굴이 가까이 가자 더욱 긴장이 되었던 모양이다. 토끼가 사그라지는 목소리로 중얼중얼 말을 이었다.
"...조금 멀어요...조금만 더 가까이...가면...좋겠습니다...."
"그래, 어느 정도까지 가까이 가면 가능하겠느냐."
토끼가 두리번두리번 고개를 움직이며 아루바소 배들을 보았다. 그리고 가느다란 팔을 뻗어 조금 앞의 해상을 가리켰다.
"...저 정도면...."
"그 정도만 나가면 되겠느냐?"
"...예...그러면...그...뒤에...있는...5척까지...."
"...?"
잘못 들은 것 같다. 루디가 토끼의 얼굴을 쳐다보자, 옆에 있던 거북이가 느릿느릿 말을 꺼냈다.
"...5척...아니라...7...척...가능...합니다...."
듣기는 제대로 들었는데 아무래도 머리가 이상해진 모양이다. 설마 눈앞에 있는 저 배 말고 그 뒤의 배까지 저격이 가능하다는 건가.
루디는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먼 해상에 있는 배를 보았지만, 루디의 눈으로는 갑판 위에 어떤 옷을 입은 사람이 있는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니, 갑판에 사람이 있는지도 구분이 가지 않는다. 대강도 모르겠다.
다시 고개를 돌려 토끼와 거북이를 보고, 루디가 물었다.
"한 척이 아니라 5척, 혹은 7척까지 저격이 가능한가?"
"...예...."
"...네...에."
레빈이 와하하 웃으면서 말했다.
"폐하, 제가 뽑은 놈들이 평범한 녀석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
아니, 이건 평범을 넘어서 괴물인데.
루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만일 너희의 말대로 5척까지 저격이 가능하다면, 두 사람의 소원을 하나씩 들어주마. 제국에 해가 되는 게 아니라면 뭐든 좋다."
토끼와 거북이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기쁜 듯 웃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