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잠이 오지 않는 이유
그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이 어느 배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거의 동시였을 것이다.
망루에서 전방을 살피던 선원이 큰 소리로 외쳤다.
"뭔가가 다가온다! 하늘을 나는 것이, 맙소사, 빛나고 있잖아. 저게 뭐야!"
먼 수평선을 보면서 잠시 경직되어 있던 망루 선원이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적이다! 적의 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푸테그린의 국기다!"
망루 선원은 경고할 때 사용하는 커다란 쇠판을 정신없이 두들겼다. 쨍 쨍 쨍 쨍! 쇳소리가 배 전체로 울려 퍼졌다.
"한두 척이 아니야. 최소한 서른 척 이상! 적습이다! 적의 배가 오고 있다! 배에 병사가 타고 있다!"
망루 선원의 말은 곧바로 근처에 있던 다른 선원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배에 퍼졌다.
대런의 눈이 가늘어졌다.
함장인 그의 눈에는 아직 먼바다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점이 하나 있는가 정도로 보였다.
하지만 망루는 가장 눈이 좋은 뱃사람이 맡는다. 그가 푸테그린의 배라고 하면 그럴 것이다.
'이상하군. 병사들이 탄 배가 수십 척이라고 하면 분명 전쟁 준비를 하고 왔다는 말인데, 우리를 목적으로 온 건가? 하지만 어떻게 찾아낸 거지? 그렇다고 우리 아닌 다른 곳을 목표로 했다고 보기에도 이상한 위치인데.'
출발하기 전 푸테그린 제국에 대해 조사한 것들이 떠올랐다.
그리 많지는 않다. 지금 세상에서는 드물게 황제가 강력한 정권을 쥐고 있는 나라라든가, 국기의 모양, 보유하고 있는 배의 종류 같은 것들이다.
거기에는 푸테그린이 해상에서 그리 강하지 않다는 사실도 들어있었다.
실제로 페리에 교역하러 온 푸테그린의 배는 상당한 구형이었다. 아루바소에서는 몇십 년 전에나 사용하던 유형의 배로, 현재는 많이 쓰이지 않는다.
그런 나라에서 먼 해상까지 배를 운용할 이유가 없다. 이곳은 다른 곳과 전쟁을 하러 가는 길목이라고 보기에는 정말로 말이 안 되는 위치였다. 확실하게 푸테그린의 배는 아루바소를 노리고 온 것이다.
점처럼 멀리 보이는 푸테그린의 배가 약간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망루 선원이 처음에 말했던 빛나는 것이란 저것일까. 하지만 하늘을 난다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저게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할 일은 똑같지만.'
대런은 곁에 있던 조타수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투 준비를 하라"
대런의 명령이 조타수를 통해 다시 옆에 있는 병사들에게 전해졌다.
곧바로, 다른 배들에게 전투 준비를 명령하는 깃발이 줄을 타고 올라갔다.
선원과 병사들의 움직임이 어수선해진다.
포병대장이 부하들에게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포를 준비하라! 포병은 제자리로! 포병은 제자리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화롭던 배는 순식간에 뛰어다니는 병사와 고함 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포문을 열어라!"
"객실의 칸막이를 제거해!"
"당장 엉덩이 들고 뛰어!"
"서둘러라!"
배 위에 설치된 대포에 병사들이 달라붙었다. 대포 한 대를 준비하고 발포하는 데에는 13명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병사들은 재빨리 대포를 정렬하고, 화약통과 심지에 불붙일 준비를 했다.
아래쪽 포갑판에 설치된 대포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망루 선원이 다시 크게 외쳤다.
"하늘을 나는 것이 적의 배와 함께 다가오고 있습니다! 적의 배 상공에 하늘을 나는 게 있다!"
하늘을 나는 거?
아까도 들었지만 그게 뭔지 전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어쩌면 매나 독수리 같은 새를 배에서 기르는 걸지도 모른다. 새의 몸에 금속을 달아 햇빛 속에서 반짝이는 거려나.
하지만 푸테그린의 배가 조금씩 다가오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새 치고는 너무 크다. 게다가 눈의 착각이 아니라면 실체 없이 그저 빛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대런 스튜어트 함장은 미개한 대륙 출신의 선원들이 빛의 정령에 대해 떠들던 것을 생각해냈다.
저게 그거다.
아직 정확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단순한 직감이었다. 하지만 지금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갑판장!"
대런은 근처에서 선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갑판장을 불렀다.
갑판장이 겅중겅중 뛰어 달려왔다.
대런은 그를 가까이 불러 목소리를 약간 낮춰 말했다.
"미개인 노예들을 지금 당장 죽여버려라."
"예?"
"저 배가 다가오기 전에 죽여.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야 한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바다에 빠뜨."
"아니, 너무 느리다. 미개인 노예가 다가오는 적을 봐서는 안 돼. 놈들이 떠들던 걸 기억하나?"
갑판장의 얼굴이 신중해졌다.
"정령 말입니까?"
"그래, 놈들이 그거라고 떠들기 시작하면 우리 병사와 선원에게도 동요가 생긴다. 그전에 처리해."
"알겠습니다."
갑판장은 무슨 말인지 금세 깨닫고 몸을 돌렸다. 갑판장이 병사를 이끌고 곧바로 갑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했다.
배에는 온갖 미신이 난무한다.
그중에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될 만큼 형편없는 것들도 있었다.
검은 벌레를 밟으면 며칠 내로 바다에 빠진다거나, 등 뒤에서 누군가 불러 뒤돌아보았는데 아무도 없으면 그날 밤에 죽는다든가.
이 세상에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다는 건 생각해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데도, 배를 타는 사람은 한 번 그런 말을 들으면 무시하지 못한다. 신경이 쓰이게 된다. 그리고 어느새 그림자처럼 항상 붙어 다니는 그 말에 침식당해해버린다.
한 명이 그런 걸 믿으면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포는 전염되는 것이다. 한 명이 두 명이 되고 다섯 명이 되어,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면 공포는 전체에 퍼져 있게 마련이었다. 배에서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적이 몰고 오는 게 뭔지는 몰라도, 일단 정령이니 뭐니 하며 떠들기 시작하면 공포는 순식간에 전체로 퍼지게 될 것이다.
'내 배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둘 수는 없지.'
대런은 입을 굳게 다물고 멀리에서 다가오는 적을 노려보았다.
***
일부 기술이 있는 사람은 다르지만, 대부분의 노예는 가장 힘들고 더러운 일을 했다. 일을 하다 죽으면 시체는 바다에 버려지고 다른 노예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식사는 이틀에 한 번 뻑뻑한 죽을 받았다.
죽을 만들 때 사용되는 물은 선원들이 평상시 먹는 식수가 아니다. 그들이 사용하고 남은 물을 모아서 썼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노예에게 귀중한 식수를 낭비할 이유는 없다. 노예 따위보다는 식수가 더 중요하다. 배에서 선원 노릇을 하고 있었던 사람은 모두가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노예도 사람이다. 더러운 물을 잘못 먹으면 설사도 하고 심하면 죽는다.
앞니가 입술 사이로 길게 삐져나와 이빨쥐라고 불리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며칠간 먹은 게 잘못됐는지 설사를 했다. 그걸 이유로 죽도록 맞은 뒤 이틀이나 배급을 받지 못했다. 눈이 빙빙 돌았다.
열세 살에 처음 배에 오른 뒤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이다. 일 년 전에 성실함을 인정받아 배의 목사 밑에 잡다한 일을 맡아하는 조수 겸 제자로 들어갔다. 그대로 일을 배우고 시간이 지났다면 어떤 배에서도 제 몫을 하는 목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빨쥐는 절그렁거리는 쇠사슬을 질질 끌며 걸었다.
노예는 다리에 긴 사슬이 연결되어 배 여기저기에 고정되어 있다. 배가 침몰하기라도 하면 그대로 바다 밑에 끌려가 선체와 함께 수장될 것이다.
"...."
적이 나타났다는 외침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푸테그린 제국이라고 한다. 사방이 시끄러웠다. 병사들이 난폭하게 선실을 나누고 있는 벽을 두들겨 깨고 있었다.
이빨쥐가 있는 곳도 마찬가지로 난리다. 병사들이 노예를 때리며 화약통을 운반하도록 다그쳤다.
푸테그린 제국은 대국이다. 강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 배에는 안 된다.
먼 대륙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이 배는 딱 한 번 다른 곳과 싸운 적이 있었다.
싸움이랄 것도 없다. 그저 무장이 된 상선을 발견하고 대포를 무수히 쏜 것뿐이다. 단지 그렇게 했을 뿐인데, 저쪽 배는 돛대가 부러지고 선체에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렸다.
아루바소는 상선의 물건과 식량을 이쪽 함대의 배에 나누어 실은 뒤 유유히 그 배를 떠났다.
이빨쥐가 몰래 포문 틈으로 바라봤을 때, 공격을 당한 상선은 서서히 침몰 중이었다. 타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노예로 빼내온 자 빼고는 모두 죽었을 것이다.
제국도 마찬가지다. 이 배에는 당할 수 없다. 대포가 있는 한 이 배는 무적이다.
사방에서 울리는 병사의 고함소리에 쫓기듯, 이빨쥐는 화약이 들어있는 나무통에 손을 얹었다.
"이 굼벵이 같은 놈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이빨쥐에게 화가 난 병사가 나무 막대를 그의 어깨에 내리쳤다.
"악!"
이빨쥐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허둥지둥 화약통에 달려있는 밧줄에 손을 걸었다. 아프다고 멈췄다가는 더 맞는다. 이 배에 타고 있으면서 질리도록 당한 일이다. 이빨쥐는 밧줄을 꽉 움켜쥐었다.
화약통에는 굵은 밧줄이 붙어 있다. 줄은 뚜껑 가장자리에 뚫린 구멍으로 나와 느슨하게 묶여 있다. 그 줄을 붙잡아 대포 앞으로 옮기면 된다.
하지만 너무 무거웠다. 평상시에도 무겁고 힘든 편이었지만, 지금은 설사에 제대로 먹지도 못한 터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빨쥐는 이를 악물고 화약통을 들었다. 조금 질질 끌더라도 이대로 가져가면 된다.
하지만 한 발자국 걸음을 옮겼을 때 어깨가 시큰하면서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눈이 빙빙 도는 느낌이 들면서 한순간 전신에서 힘이 빠졌다.
이빨쥐는 앞으로 엎어지면서 통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뚜껑이 어긋나면서 화약이 바닥에 쏟아진다.
화가 난 병사가 그를 향해 굵은 막대를 내리쳤다.
"이 쓸모없는 놈! 밥만 축내는."
이빨쥐는 지독한 화약 냄새 속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한 번, 두 번, 병사가 계속해서 막대를 내리쳤다.
그것이 멈춘 것은 비명소리와 함께 다른 병사들이 상부 포갑판으로 들어온 뒤였다.
병사들이 갑자기 칼을 휘둘러 노예를 죽이기 시작했다.
이빨쥐를 때리던 병사가 동작을 멈추고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함장님의 명령이다. 모두 죽여."
"어, 지금인가요? 하지만 지금 죽이면.... 전투가 끝난 뒤는 안 됩니까?"
그 뒤에도 병사들의 이야기는 이어졌지만, 이빨쥐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계속 죽고 싶었다. 잠이 들 때마다 아침에는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제발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대지의 정령에게 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죽는다고 알자, 갑자기 맹렬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쳐 올랐다.
아직 젊은데 죽고 싶지 않다.
상부 포갑판으로 들어오는 계단 입구 쪽에서는 이미 병사들이 노예를 죽이고 있었다. 칼로 마구 찌른다. 사방이 붉은 피로 가득했다. 무섭다.
이빨쥐는 병사들이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린 틈에 발목을 느슨하게 잡고 있는 쇠사슬을 보았다.
'이것만 벗기면.'
평상시라면 생각도 못 할 짓이다.
이빨쥐는 이를 악물었다.
이전에도 사슬에서 발을 빼내려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뒤꿈치가 걸려서 아무래도 빠지지 않았다.
'지, 지금이라면 가능해. 가능하니까, 빨리, 겨, 결심해야 돼. 빨리.'
노예들의 비명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서두르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이빨쥐는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몸이 덜덜 떨렸다.
그는 옆으로 쓰러진 화약통의 밧줄을 풀었다. 밧줄에 잡혀있던 뚜껑이 떨어지자 화약이 더 쏟아졌다.
이전과 달리 설사에 시달리고 밥을 못 먹어 마른 몸은 뼈만 남아 있었다. 지금이라면 약간만 손을 대면 빠진다.
이빨쥐는 나무 뚜껑으로 발목을 힘껏 내리쳤다. 피부밑으로 뚜둑, 하는 감각이 전신에 퍼져갔다. 아프다. 엄청나게 아프다.
이빨쥐는 이를 악문 채 덜렁거리는 발을 잡아 완전히 구부린 뒤 쇠사슬에서 빼냈다.
뒤늦게 이빨쥐를 발견한 병사가 외쳤다.
"저놈이 쇠사슬에서 빠져나왔다!"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이빨쥐는 바닥을 손으로 짚으며 달렸다. 발목이 부러져 발을 제대로 디딜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것조차 신경 쓰지 않고 달릴 정도로, 이빨쥐는 다급했다.
화약통에서 대포가 있는 곳까지는 가깝다.
이빨쥐는 순식간에 대포가 놓인 포문에 도착했다. 그대로 대포가 놓인 나무판을 밟고 올라가 대포 위에 엎드렸다.
병사의 손이 그의 발을 잡았다. 부러진 다리 쪽이다.
"끄악!"
비명을 지르면서, 이빨쥐는 팔로 대포를 밀어 포문 밖으로 몸을 당겼다.
부러진 발목이 뚜둑 소리를 내며 약간 늘어났다.
병사가 발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발가락 쪽이라 제대로 잡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잡고 있던 힘이 빠지자 이빨쥐의 몸은 순식간에 포문으로 빠져나갔다. 허공에 몸이 뜨는가 싶더니 곧바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빨쥐의 몸은 선체에 부딪치면서 바닷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갔다.
그가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는 함께 일하던 노예의 비명소리였다.
***
루디는 아루바소의 배에 가까워지면서 자신의 생각이 어쩌면 너무 단순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루바소의 군함은 제국의 배보다 훨씬 컸다. 단순히 길이가 길다는 뜻이 아니다. 높이도 훨씬 높았다.
아루바소 배의 포문은 드래곤에게 들은 대로 2열이었다. 둥근 대포 구멍이 나란히 서 있다. 대포 따위 별게 아니라고 알고 있는 루디의 눈에도 장관이었다.
게다가 지구에서 본 유람선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화려하다. 돈을 얼마나 쏟아부으면 저렇게 화려한 모습의 배가 될까 궁금할 지경이다. 배 전체가 유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솔직한 말로 약간 압도되었다. 지구와 달리 이 세계에는 전기로 돌아가는 기계가 없다. 기계의 도움 없이 저걸 모두 손으로 만들었다는 말이잖아. 인간에게 불가능은 없다더니, 정말 대단하다.
옆에 있던 사령관이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훨씬 훌륭한 배로군요. 저런 게 여러 척이라...."
"저 배를 나포하면 다룰 수 있겠는가?"
"글쎄요."
사령관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달려있는 돛의 형태도, 개수도 다르다.
베에는 문외한인 루디의 눈에도, 제국의 배를 운용하는 선원들이 저 배를 쉽게 다룰 수 없다는 건 명확하게 보였다.
배 안은 어느새 조용해져 있었다.
'다들 위축된 건가.'
무리도 아닐 것이다. 상대는 루디조차 압도당할 정도로 대단해 보이는 군함들이다. 저걸 상대로 겁을 모른다면, 그건 용감한 게 아니라 그저 무모한 바보일 것이다.
하지만 저쪽이 자신있게 내밀고 있는 대포는 단순히 뚫린 구멍으로 쇠구슬을 쏘아대는 철통일 뿐이었다. 이쪽의 무기와는 전혀 다르다.
그걸 모르는 것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마찬가지. 그렇다면 알게 해주면 된다.
배의 성능이 제아무리 저쪽이 좋다 한들, 원거리에서 박격포 한 방이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리는 판자 쪼가리 아닌가.
무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아루바소를 물리치는 건 어른이 아이 손목 비트는 것보다 쉽다.
루디는 후후, 웃으며 몸을 돌렸다.
일거수일투족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병사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병사들에게 안심을 주기 위해서 루디는 한껏 거만한 웃음을 띠었다. 조금이라도 그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루디가 손을 올리자 점보가 귀를 펄럭거리며 다가왔다.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며 묻는다.
[주인님! 불렀어요? 내가 가서 부수고 올까?]
"너는 인간의 싸움에 끼어들어서는 안 돼. 잘못하면 적도 아군도 모두 너에게 휘말리게 될 거다."
루디는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저쪽 배 근처에 가서 한 번 빙글 돌아보고 와 주겠니? 적의 군함이 어느 정도로 움직일 수 있는지 한 번 보고 싶구나."
[네! 점보가 다녀올게요! 임무다! 임무 받았다!]
점보는 신이 나서 귀를 펄럭거렸다.
루디의 말은 병사들에게도 모두 들린다. 병사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긴장했는지 병사들이 침 넘기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루디는 다시 몸을 돌려 점보가 적의 배를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옆의 사령관에게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는 선원들의 확보에도 신경을 쓰게. 적의 선장은 죽이더라도 다른 선원의 경우에는 가급적 죽이지 말고 생포해."
"알겠습니다."
사령관이 문득 주저하면서 말을 이었다.
"한데, 폐하."
"응?"
"두렵지 않으신가요?"
루디는 히죽 웃으며 사령관을 보았다.
"적이 두렵냐고 묻는 거면 전혀 그렇지 않아. 내 무기와 나의 병사들이 더 강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
루디는 가만히 적의 배를 보았다.
"내가 걱정하고 있는 건 하나뿐이야. 저 배들 중에 아마도 몇 척 정도는 버려야 할 거라는 사실. 저 배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생각해 보게. 이 대륙에는 없는 기술력이 저 배에 응집되어 있는 거야. 그런 배를 몇 개라도 낭비한다고 생각하면...."
루디가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며칠 동안은 잠도 오지 않더군."
"폐하, 그래서 며칠간 잠을 못 주무신 거군요."
뒤에 서 있던 레빈이 불쑥 말했다. 기가 막힌 모양이다.
두 사람의 교환을 듣던 사령관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루디가 허세가 아니라 진심으로 이 전쟁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
아니, 정말로 걱정은 했다.
배를 건조하는 데에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간다. 시종장이 여러 번 그렇게 말했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적의 배를 보니, 한 대도 빼놓지 않고 먹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몇 대 정도는 어쩔 수 없이 침몰시키거나 파손하게 될 것이다. 잘못하면 배를 끌고 갈 선원이 없어서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최악, 선원이 모자라 놓고 갈 지경이 되면 드래곤과 점보에게라도 끌고 가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