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야, 나도 무섭다
드래곤의 여의주를 몸에 받은 뒤, 리리샤의 입덧은 지금까지가 거짓말인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입맛이 돌아오고 나른하던 것도 없어졌다. 잠은 더 많아졌지만 뭘 먹어도 소화를 잘 해낸다. 먹고 자고 일어나면 다시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단 이틀 만에, 리리샤는 예전의 그녀로 되돌아왔다.
리리샤는 자신의 어릴 때 기억이 원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그녀가 루디의 냄새가 있을 때만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건 단순히 마력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리리샤가 실망했던 것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쯤이 되어서야 루디는 리리샤가 자신이 없을 때 먹었던 모든 것을 토해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남작 부인은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입덧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고 심한 여성의 경우에는 음식을 거의 못 먹는 일도 많지만, 그래도 남편이 없으면 다 토해내는 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중대한 해전을 앞에 두고 있는 상태라 조금만 더 두고 보자 생각했다고 한다.
"저의 불찰입니다. 지금의 마마 모습을 뵈오면 확실히 그때가 이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제가 판단을 잘못하였습니다."
한적한 시간, 집무실로 찾아온 남작 부인이 머리를 낮추고 벌을 청했다.
하지만 누가 알 수 있었을까.
드래곤이나 겨우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먼 옛날에 한 번 있었던 일일뿐이다. 그것도 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정말 누군가에게 죄가 있다면 너무 강한 마력을 가진 루디 자신이 가장 잘못한 것이겠지.
루디는 남작 부인을 일어나게 한 뒤 씁쓸하게 말했다.
"나 역시 황후가 나날이 말라가고 있는 걸 보면서도 눈치채지 못한 일이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루디는 시종장에게 시선을 주었다.
"황후의 몸에 일어났던 일은 모두 기록해 두도록 하게."
먼 훗날, 또다시 누군가 너무 강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날지도 모른다. 그때 기록이 남아있다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자가 드래곤의 여의주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원인을 아는 것만으로도 도움은 된다.
"알겠습니다, 폐하."
시종장이 대답하는 것을 보고, 루디는 작게 숨을 토했다.
해상에 나가 싸울 결심을 한 이후에도, 계속 리리샤의 일이 마음에 걸려 있었다.
자신이 없을 때 토한다는 사실을 몰랐어도 눈앞에서 먹는 음식의 양이 너무 적은 거다.
그대로 가면 몸이 쇠약해지는 것은 분명했다.
'후후.'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흘렀다.
드래곤은 점보를 감시하고 멈추는 일만 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
하지만 결국 점보가 해야 할 일을 자신이 모두 하고 있다. 배의 숫자와 위치를 기억하고, 리리샤가 임신하자 위험하지 않도록 여의주까지 내놓았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여의주는 드래곤의 몸 일부를 떼어내 마력을 덧붙인 거라고 한다.
드래곤과 점보의 몸은 마석가루에 주문을 써서 만든 것이다. 소량의 마석가루로 되어 있다. 그것을 다른 이에게 준다는 것은 적은 양이라고는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만드는 것 자체가 보통의 마생물은 할 수 없다.
인간이 흡수할 수 있는 여의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마력과 루디가 적어 넣은 주문뿐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이 세상에 적응한 마생물의 몸을 필요로 한다. 지금 세상에서는 오직 드래곤만이 가능했다.
'역시 드래곤도 마음속으로는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단지 그는 루디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 서운할 뿐인 것 같다. 어쩌면 겉으로는 점잖고 똑똑해 보이지만 실제 정신 연령은 점보와 별다를 게 없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창밖의 해가 한창때의 빛을 잃고 있다. 창에서 밀려드는 더운 열기는 여전하지만 냉기를 뿜는 마도구에 밀려 집무실 안은 시원했다.
"황후에게 가자."
루디는 몸을 일으켰다.
일을 마감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내일은 드디어 출진이다. 조금이라도 더 리리샤 곁에서 시간을 보내주고 싶었다.
집무실 안의 관리들은 여전히 일을 손에서 떼지 못한 채 루디를 배웅했다.
황후궁으로 향하는 거라 레빈과 젊은 시종들은 집무실에 남는다.
시종장과 나이 든 시종 여러 명을 이끌고 걷는 황궁의 복도는 왠지 조금 쓸쓸하게 보였다.
점보가 부순 창을 고치는 동안 리리샤는 황후궁의 다른 방에서 머문다. 근래에는 자주 있는 일이라 예비 방은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루디가 방으로 들어가자, 시녀들이 조용히 몸을 숙였다.
리리샤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채 자고 있었다.
"그만. 깨우지 마라."
타이라가 리리샤를 깨우려는 걸 말리고, 루디는 조용히 소파로 다가갔다.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리리샤를 안아 올리자, 몸을 동그랗게 구부리며 찰싹 붙어왔다.
"나머지는 내가 황후의 시중을 들지. 오늘은 둘만 있게 해줘."
루디의 말에 남작 부인이 고개를 낮추고, 시종과 시녀가 모두 물러갔다.
리리샤가 깨어난 것은 아침해가 떠오르기 직전이었다. 품에서 꼼지락거리며 움직이길래 내려다보자 옷 안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리리샤, 뭐 하는 거야?"
"루, 부적을 만들었어요. 이걸 지니고 있으면 절대로 바다에 빠지지 않는대."
리리샤가 내민 것은 손가락처럼 길고 작은 주머니였다. 달콤한 꽃향기가 풍겼다.
"고래뼈를 깎아서 만든 게 안에 들어 있어. 이 주머니는 내가 만든 향유로 향기를 입힌 거예요. 루를 지켜줄 거야."
"고마워."
"내가 걸어줄게요."
목걸이로 만든 주머니를 루디의 목에 걸어준 뒤, 리리샤가 그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에 입술을 붙이고 말한다.
"부디 무사히 나와 아기에게 돌아와주세요."
"그래.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리리샤."
리리샤가 어둠 속에서 방긋 웃었다.
"루가 천하무적인 건 알고 있는걸. 전혀 걱정하지 않아."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리리샤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루디는 리리샤를 품으로 당겨 꼭 안았다.
'괜찮아. 혹시라도 배가 모두 난파되어 망망대해에 떨어진다 해도, 마력을 이용해 바닷물을 모두 증발시켜서라도 길을 만들어 돌아올 테니 걱정할 필요 없어. 반드시 그대에게 돌아온다.'
그렇게 속삭이자, 리리샤가 작게 웃었다.
그렇지만 이 세계에 운석이라도 떨어지지 않는 한, 루디 자신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은 없지 않을까.
루디는 깜빡깜빡 다시 잠이 드는 리리샤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서둘러 돌아올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 금방이다. 해전은 육지와 달라서 도착지까지 가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다.
해가 떠오를 때까지, 루디는 조용히 리리샤를 안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루디는 황궁을 떠나 북쪽에 있는 항구로 향했다.
***
항구에 커다란 배가 즐비하게 정박해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이번 해전에 동원된 배는 모두 41척이다.
그중 3척은 먼 대륙까지도 무리 없이 오갈 수 있는 대형 범선이지만 나머지는 크기와 성능이 조금 떨어지는 구형이었다.
시종장과 해군 사령관이 불안해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상대편 적은 모두 들어본 적도 없는 신형 군함이다. 게다가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뭐, 불안하지 말라는 게 무리일 것이다.
그나마 구형 배 중에서 5척은 신형 3척이 생기기 전까지는 당대의 최신형이었던 거라 조금 낫다. 그래봐야 도토리 키재기지만.
말에서 내려 배에 오르려는데, 갑자기 엄청난 환호성이 울렸다. 항구 전체가 떨어져 나갈 것 같다.
병사들이 환호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들자, 먼 하늘에서 드래곤과 점보가 날아오고 있었다.
곁에 있던 사령관이 감탄한 듯 중얼거렸다.
"황궁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크군요."
"아,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루디의 얼굴에 히죽 웃음이 떠올랐다.
점보는 모습을 바꿀 수 없지만 드래곤은 크기를 약간 조정하는 게 가능하다. 아주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이라면 크거나 작게 만들 수 있었다. 이번에는 루디의 요청으로 몸을 크게 부풀린 것이다.
정령에 대한 믿음은 여러 곳에 퍼져 있지만, 특히 뱃사람에게 절대적이었다.
사령관의 말에 따르면, 선원과 해군 중에는 대지의 정령이 바다에 빠진 사람을 지상으로 이끌어준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대지의 정령은 배가 난파되어 위험에 빠진 사람을 섬이나 지상으로 안내하고,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에도 바닷속으로 끌려가는 영혼을 끌어올려 지상의 가족에게 인도해 준다던가.
그런 믿음이 있다면 이용하지 않는 게 바보일 것이다.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어쩔 수 없다. 적을 만나기도 전에 위축되어 버리면 이길 수 있는 전쟁도 져버린다.
루디는 환호하는 병사들을 보면서 배 위에 올랐다.
닻이 올라가고, 부두에 묶여 있던 밧줄이 풀렸다. 돛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다. 돛대 위에서 돛을 조정하는 선원들의 모습이 마치 원숭이 같았다.
사령관이 출항을 명령하자 배가 서서히 항구를 떠나기 시작했다.
드래곤과 점보는 미리 말해둔 대로 하늘을 크게 선회하면서 천천히 바다를 향해 날아갔다.
처음에는 작은 섬이 곳곳에 보였지만, 배는 이내 사방이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에 이르렀다.
이쪽을 봐도 저쪽을 봐도 시퍼런 바닷물뿐이다.
루디의 곁에 서 있던 레빈이 먼 수평선을 보면서 말했다.
"폐하, 단순히 무기를 시험하려고 배에 타는 것과는 좀 다르네요. 어쩐지 바다 한가운데 있으니 무서운 느낌이 듭니다."
"...."
"갑자기 배에 구멍이 나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레빈, 플래그 세우지 마라."
"예?"
플래그가 무슨 뜻인지 몰랐던 모양이다. 레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루디는 조용히 바다를 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야, 나도 무섭다.
*
마차를 타도, 말을 타도, 멀미를 한 적은 없었다. 지구에서 살 때도 마찬가지다. 멀미라는 건 모르고 살았다.
하지만 배는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배에 오르고 몇 시간 만에 레빈과 루디는 발밑이 고정되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단단히 알게 되었다.
배라는 게 잠시도 가만있지를 않는 거야. 겉으로 볼 때는 그다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안에 있으면 끊임없이 배 전체가 출렁거렸다.
낮에도 그렇지만,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잠을 잘 수 없었다. 계속 작은 나무 통을 붙잡고 토하느라 입에서는 하루 종일 시큼한 냄새가 났다.
'리리샤, 굉장히 힘들었겠구나.'
배를 타고 나서야 겨우 임산부의 괴로움을 알 것 같다.
루디와 레빈이 웩웩거리면서 통에다 구토를 할 때마다 선원들이 상쾌하게 웃으며 며칠만 지나면 괜찮다고 위로했다.
믿을 수 없었지만, 그들의 말대로였다. 며칠 지나자 구토가 조금씩 잠잠해졌다.
조금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루디보다 레빈의 적응이 빨랐던 것이다. 루디가 아직도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데 레빈이 먼저 생생해졌다.
"나이도 내가 훨씬 아래인데 어째서...."
루디가 중얼거리자 레빈이 상쾌한 미소를 띠었다.
"폐하와 저는 단련의 정도가 다르니까요."
"...."
왠지 조금 억울해졌다.
하지만 확실히 근래에는 서류작업이 많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제 아이 아빠도 되는 터이니, 다시 단련을 해야 할 시기가 온 건지도 모른다.
'황궁으로 돌아가면 단련 시간을 늘리는 게 좋으려나.'
아직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아이가 아빠보다 시종이 더 멋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곤란하다. 왠지 성질이 났다.
레빈이 그런 마음을 짐작한 것처럼 큰 소리로 웃었다.
"이봐, 폐하께서 나를 질투하신다. 내가 더 멋지게 될까 봐 그러는 거야."
근처의 병사와 선원들에게 말하자, 다들 왁자지껄 웃기 시작했다.
루디가 탄 배가 시끄러워지자 궁금했던 모양이다.
점보가 귀를 펄럭이면서 다가와 하늘을 빙빙 돌았다.
[주인님! 왜 웃는 거야? 왜? 나도 웃고 싶어요!]
점보가 가까이 오자, 몇몇 선원들이 정령님이라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 사이 대부분의 병사와 선원들은 점보와 드래곤에게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몇몇은 마생물이 가까이 올 때마다 황송해한다.
점보가 엣헴, 소리를 내며 빙빙 그 선원들의 위를 돌았다.
망루에 올라가 있는 선원이 점보와 드래곤을 향해 두 팔을 크게 흔들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드래곤이 멀리에서 한 바퀴 허공을 돈다.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전쟁을 하러 가는 것 같지 않았다.
해가 뜨고 밤이 오면 다시 해가 뜬다. 잔잔한 바다 위에서 배는 똑같은 날을 여러 번 반복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잠시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드래곤이 큰 몸을 허공에서 흔들며 멀리에서 날아왔다.
[적의 배를 발견했다.]
아아, 드디어.
루디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