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드래곤의 여의주
황궁 전체가 술렁거린다.
전쟁이 가까워질수록 다른 때에는 없던 초조함, 불안, 그런 것들이 감돌고 있었다.
시녀들은 임신한 리리샤를 걱정하여 아무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대륙의 강자인 제국도 해전에서는 그다지 강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리리샤도 알고 있다.
지금까지 그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뚜렷한 바다의 강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륙의 나라들은 대부분 비슷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쳐들어온다는 적은 다른 대륙의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아주 먼 곳에서부터 배를 타고 온다고 들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리리샤는 잘 모른다.
다만 그게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위협이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루디가 점보와 드래곤을 데려간다는 것도 리리샤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그 아이들의 힘이 필요할 정도로 센 적인 거야.'
음식을 앞에 두지 않았는데도 구역질이 날 것 같다.
리리샤는 숨을 작게 여러 번 쉬었다. 조금 있으면 루디가 올 시간이다. 속을 진정시켜야 한다. 안 그래도 이것저것 일이 많은 그 사람에게 신경 쓰게 해서는 안 돼.
리리샤는 배에 손을 대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가, 아빠가 오는 시간에만 잠시 참아줘. 아빠가 걱정할 거야.'
음, 하지만 구역질이 멈추는 것 같지는 않다. 루디는 뱃속의 아기에게 매번 말을 걸곤 하지만, 역시 전혀 못 알아듣는 거야.
"?"
그때 갑자기 창문에서 소리가 들렸다. 뿌득 뿌득 뭔가가 부서지지는 것 같다.
고개를 돌리자, 점보가 얼굴을 창문에 넣은 채 코를 이리저리 휘젓고 있었다.
조심하는 것 같지만 점보의 얼굴이 움직일 때마다 창문틀이 뽀득 뽀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어느새 그런 장면에 익숙해진 시녀들이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다.
리리샤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었다.
타이라가 재빨리 곁으로 와서 바짝 붙었다. 혹시라도 점보가 잘못해서 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점보가 그럴 리 없다. 조금 바보 같기도 하고 이리저리 사고도 치고 다니지만, 그래도 할 땐 하는 아이야. 점보도 리리샤 앞에서는 항상 조심해 주는 걸 알 수 있다.
리리샤가 창가의 점보에게 어느 정도 가까이 가자 타이라가 살짝 손을 앞으로 내밀어 길을 막았다.
"마마, 여기까지예요. 조금 더 가까이 가면 코에 닿는 거리입니다."
"그렇게까지 경계하지 않아도 돼."
"아니요, 저 점보라는 아이는 요주의 마생물입니다. 믿을 수 없어요. 지난번에는 마마를 들어 올렸잖아요."
임신 전의 일이다. 루디가 전쟁에 나가 있을 때.
그때는 리리샤도 약간 놀랐다. 점보가 갑자기 코로 리리샤의 허리를 감더니 번쩍 들어 올렸던 거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고, 몇 명의 시녀는 기절을 했다. 사방이 혼란스럽자 점보는 잠시 경직된 듯 멈췄다가, 불쑥 나타난 드래곤에게 리리샤를 빼앗겼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때 점보는 리리샤를 태우고 하늘로 날아갈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그 당시를 생각했는지 타이라의 얼굴색이 약간 하얘졌다.
리리샤는 킥킥 웃으며 걸음을 멈췄다.
점보는 믿지만 역시 지금 허리를 붙잡히면 곤란하다. 이전과 달리 지금은 배에 아기가 있으니까.
리리샤가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서자 안타까운 모양이다. 점보의 코끝이 벌름벌름하며 허공을 더듬어 리리샤를 향해 뻗었다.
리리샤는 손을 뻗어 살짝 그 코를 만지며 말했다.
"점보, 이번에 루와 함께 바다에 나간다고 들었어. 루가 위험해지지 않도록 지켜줄래? 바다는 육지하고 달라서 정말 걱정이야."
뭔가 말하는 것처럼 점보가 입을 움직였다. 갑자기 코가 쑥 위로 올라가더니 창문 위쪽의 벽을 쳤다. 쿵, 소리가 나더니 벽에 금이 가버렸다.
"앗! 바로 몇 달 전에 보수한 창문이 또!"
타이라가 비명처럼 외친다.
하지만 점보의 코는 멈추지 않았다. 뭔가를 힘차게 외치는 것처럼 한 번 더 강하게 삐죽 솟아올랐다.
어머, 구멍이 났네.
리리샤가 자기도 모르게 웃는데, 불쑥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는 거야."
루디다.
고개를 돌리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루디가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점보의 코가 더욱 힘차게 움직인다. 창문이 뭉개지기 시작했다.
"얼음!"
루디가 이상한 말을 하자, 갑자기 점보의 몸이 굳더니 창문에서 떨어져 나갔다.
창문 밖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난다.
"리리샤, 점보에게 너무 가까이 가서는 안 돼. 저 녀석은 자신이 힘이 세다는 걸 자주 잊어버리니까."
다른 때는 얼른 루디에게 다가갔지만 오늘은 창문 밖이 궁금해서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대체 점보는 어떻게 된 거야?
루디가 가까이 다가와 이마에 키스를 하고, 싱긋 웃었다.
"점보가 궁금해? 어떻게 됐는지?"
고개를 끄덕이자, 루디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창가로 데려갔다.
"어."
리리샤의 눈이 동그래졌다. 점보는 마치 한 겨울 얼어붙어 죽은 생쥐처럼 네 다리를 허공으로 올린 채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숨을 쉬기는커녕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는다.
"주, 죽었어?"
리리샤가 묻자, 루디가 귓가에 속삭였다.
"땡이라고 말해봐."
응? 땡? 그게 뭐야?
리리샤는 어리둥절했지만 루디가 웃고 있는 걸 보면 점보가 죽은 건 아닌 모양이다.
리리샤는 작은 소리로 "땡"이라고 중얼거렸다.
갑자기 점보의 코가 꿈틀하더니 입이 벌어졌다. 파아! 소리가 들리지는 않지만 입 모양 만으로도 그렇게 숨이 터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멈췄던 숨이 다시 쉬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전까지 뻣뻣하던 다리가 허우적거리며 움직이더니 점보가 벌떡 일어섰다.
점보가 루디에게 뭔가 말하는 것처럼 입을 움직였다.
신기하다. 어떻게 죽었다가 살아나는 거지?
"얼음!"
리리샤가 말하자, 점보가 아까와 달리 고개를 갸웃하더니 동그란 눈으로 리리샤를 보았다.
그리고 알았다는 표정으로 코를 번쩍 들었다. 점보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재미있다. 조금 전까지 죽을 만큼 걱정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리리샤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
[주인님! 나 임무 받았다! 엄마한테 임무 받았어! 주인님을 지키는 거야. 엄마가 걱정이래요! 그래서 상으로 아기 태우기로 했어! 아기 태어나면 쪼끄만 주인님이랑 하늘을 날아다닐 거야! 신나겠지!]
점보가 얼굴을 창문에 밀어 넣은 채 코를 흔들며 소리쳤다.
"...."
아니, 그건 아니겠지. 리리샤가 그렇게 말했을 리도 없지만, 그 이전에 점보 너와 리리샤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흥분한 점보한테 루디의 마음속 말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점보가 움직일 때마다 창문이 조금씩 부서졌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완전히 벽이 뻥 뚫릴 것 같다.
점보 때문에 건물 보수에 들어가는 비용이 커지는 중이라고, 시종장이 한숨을 쉬며 말한 적이 있다.
확실히, 매번 이런 식으로 건물을 부수면 돈이 꽤 들어갈 거다.
몇 번은 점보가 건물을 뚫어놓기 전에 드래곤이 끌고 갔는데, 요즘에는 어째서인지 드래곤의 반응이 조금 느려졌다.
하지만 너무 점보를 나무랄 생각도 들지 않았다.
리리샤의 임신을 알고 난 뒤, 점보는 벌써 여러 번이나 황궁에 들렀다.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를 찾아 황궁 건물의 창마다 얼굴을 디밀며 돌아다닌다.
그때마다 아직 아기가 태어나려면 멀었다고 말해주지만, 점보는 며칠 뒤에 와서 또다시 아기를 찾았다.
아기 태어나는 게 너무 기다려지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는 모양이다.
"점보, 건물을 너무 부수면 시종장이 울 거다."
[울어? 왜?]
점보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갑자기 쭉 밖으로 끌려나갔다.
[꾸엑!]
점보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대신 그 자리에 드래곤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리고 왜인지 가만히 리리샤를 보았다.
드래곤은 루디 이외의 사람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다. 그것은 리리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거의 없어서인지, 리리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드래곤을 보았다.
파충류 특유의 눈동자가 한동안 리리샤를 가만히 보다가 루디를 향했다.
[오래전 주인님의 첫아이가 태어날 때는 고생이 심했다. 부인의 몸은 주인님과 달라서 마력이 없었어. 그 때문에 마력이 강한 아기를 품은 모체가 매우 힘들었다. 잘못하면 아이를 낳기 전에 죽을 수도 있다고, 주인님이 말했었지.]
가슴이 섬뜩해졌다. 루디는 자기도 모르게 리리샤의 얼굴을 보았다. 단순한 입덧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더 심각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루?"
드래곤의 말이 들리지 않는 리리샤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만일 마력이 강한 태아 때문에 리리샤가 위험하다면....
루디의 눈썹이 꿈틀했다.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말라. 주인님의 부인은 그때 무사히 아이를 낳았다.]
드래곤이 급히 말하더니 머리를 무너진 창문 안으로 약간 넣었다.
드래곤의 몸 뒤에서 점보가 자기도 들어가고 싶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드래곤은 그 소리를 무시하고 커다란 몸을 약간 앞으로 구부렸다. 드래곤이 구역질을 하는 것처럼 입을 꾸역꾸역 벌렸다. 그러더니 입에서 주먹만한 구슬을 하나 토해냈다.
무지갯빛으로 반짝거린다. 사방으로 오색찬란한 빛이 퍼져나갔다.
[이것은 여의주다. 이걸 부인에게 먹이면 마력이 없는 부인의 몸을 보호해 줄 거야.]
드래곤이 두꺼운 발톱으로 구슬을 움켜쥐고 창문 안으로 쑥 내밀었다. 드래곤의 손은 곧바로 리랴샤 앞으로 뻗어 있었다.
드래곤이 눈을 부드럽게 하고 웃는다.
[이후에는 아이를 열 낳아도, 스물 낳아도 아무 문제 없지.]
리리샤가 받아도 되는지 묻는 것처럼 루디를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리리샤가 두 손을 내밀었다.
구슬은 리리샤의 손에 닿자 갑자기 빛을 반짝반짝 내면서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앗!"
리리샤가 깜짝 놀라 손을 쳐다보았다. 마치 환상처럼 손바닥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나도 알 낳고 싶어! 나도 엄마한테 알 선물하고 싶은데. 너무해! 어째서 주인님은 나한테는 여의주 만들지 못하게 했지? 나도 알 낳고 싶은데.]
드래곤 너머에서 점보가 이리저리 날며 외쳤다.
드래곤이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코끼리는 여의주를 만들지 못해. 그건 상식이겠지. 점보 너는 주인님이 말한 걸 잊었느냐.]
아니, 코끼리 뿐 아니라 드래곤도 여의주는 못 만들어. 그건 동양의 용이 만들어내는 거다. 드래곤이 아니라.
이 세상의 마생물은 왠지 뒤죽박죽이다.
***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드래곤이 자신에게 빛나는 구슬을 준 뒤, 아주 잠깐 무서웠던 루디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구슬이 어떤 건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루디의 마음을 가볍게 해준 거다.
왠지 그녀의 마음도 두둥실 가벼워진 것 같다.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삐죽 새어 나왔다. 기뻐진다. 뱃속이 따뜻해지면서 몸이 조금 노곤해졌다. 구름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리리샤의 기분이 변해가는 걸 알았는지 루디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돌리더니 가만히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 기쁘다. 너무 기뻐. 루의 얼굴이다.
리리샤는 두 팔을 루디의 목에 걸었다.
루디의 얼굴이 너무 맛있어 보인다.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충동적으로 리리샤는 루디의 목을 두 손으로 꽉 끌어내렸다. 영문도 모르면서 루디가 미소를 띠고 고개를 밑으로 내렸다.
'맛있어 보여.'
리리샤가 얼굴을 붙이자 루디가 살짝 입술에 키스를 한다. 입술이 살짝 닿았을 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리리샤는 루디의 입을 덥석 물었다.
"꺄아!"
"마마!"
"도대체 무엇을!"
시녀들의 비명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다.
하지만 리리샤의 기분은 여전히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루디가 눈을 크게 뜨고 리리샤를 보았다.
"좋아. 너무 좋아해. 루, 정말 좋아."
눈이 가물가물하다. 루디의 모습이 둘이 되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네. 너무 좋다.
리리샤는 해쭉 웃고 다시 입을 벌렸다. 루디의 턱을 오물오물 깨물고 그 뒤에는 말랑한 볼을 혀로 핥아 맛을 본 뒤에 이를 내밀어 살짝 물었다.
루디는 가만히 서서 리리샤가 하는 대로 놔두었다. 아, 정말 좋다. 맛있어.
"좋아해요, 루.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 하늘만큼 땅만큼 별만큼 좋아해."
홍알홍알 목소리가 허공으로 퍼지다 사라졌다. 구름 속으로 목소리가 들어가 버리는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앞이 하얀 구름투성이가 되었다. 구름이 모두 루디의 얼굴이다. 아, 정말 좋구나. 매우 좋다.
"루, 내 거. 내 거야."
중얼중얼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루는 내 건데, 왜 저 여자가 자기 거라고 하지? 리리샤는 루를 끌어안고 그 여자한테 말했다.
"루는 내 거야."
또다시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루는 리리샤 건데, 왜 자꾸만 자기 거라고 하는 거야. 조금 화가 났다.
***
[미안. 여의주를 먹으면 잠시 저렇게 된다. 술을 먹은 것 같은 상태가 돼. 사람을 먹으려고 한 건 조금 의외였지만. 이번 부인은 굉장히 야생적이구나.]
드래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루디는 무너지는 것처럼 잠에 떨어진 리리샤의 몸을 안아 들었다.
리리샤에게 물린 입술이 약간 아프다. 찝찔한 피맛이 느껴졌다.
'정말, 리리샤는....'
루디는 목구멍에서 터지는 웃음을 억지로 누르면서 리리샤를 침대에 뉘었다.
황후가 황제를 물다니, 라며 시녀들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바닥에 엎드려 용서를 빌 것 같다.
"괜찮아. 별일 아니다."
루디는 시녀들을 안심시키고 리리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입덧으로 음식을 제대로 못 먹은 리리샤의 얼굴이 핼쑥하다.
"...."
만일 자신을 무는 것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다면 얼마든지 물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