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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83화 (183/201)

#183 언젠가 당신이 나를 돌아봐 줄 때까지

[점보, 보고를 해야지. 뭣 때문에 이곳에 온 건지 잊어버렸나?]

드래곤이 말하자, 병사들 사이에서 춤추던 점보의 귀가 번쩍 하늘로 올라갔다.

[아!]

점보가 어수선하게 귀와 꼬리를 흔들면서 루디에게 달려왔다.

뒤뚱뒤뚱 달리다 바닥에 닿은 귀를 밟는다. 역시나랄까, 앞으로 고꾸라졌다.

점보는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아, 이런. 또 밟았다. 마음이 급하면 더 심하게 귀를 밟는 것 같다.

"힘내세요, 정령님!"

"점보님, 괜찮아요! 천천히! 천천히 달려요!"

곁에 있던 병사들이 응원하자, 점보가 힘차게 귀를 허공으로 떠올렸다.

[응! 점보는 울지 않아!]

병사들에게야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테지만, 분위기로 알았던 것 같다. 병사들이 웃으면서 주먹을 치켜들었다.

"좋아, 힘내요!"

"정령님!"

점보가 루디의 앞으로 오자, 언제 꺼냈는지 레빈이 작은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쳐놓고 있었다.

[주인님! 나 배 발견했다. 칭찬해 주세요!]

점보가 커다란 머리를 루디의 몸에 꾹꾹 밀었다. 자신의 힘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을 또 잊어버린 모양이다.

루디는 뒤쪽으로 조금 밀리면서 점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잘했어."

여러 번 쓰다듬어주자 겨우 만족했는지 점보가 머리를 들었다.

"점보, 어디에서 배를 발견했는지 말해주겠니? 내가 다니라고 했던 곳의 어디쯤이야? 몇 개의 부표를 지나갔어?"

루디는 레빈이 펼친 지도의 바다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에는 여러 개의 점이 그려져 있다. 루디가 만들어 띄우게 한 부표 표시다.

바다에는 육지와 달리 이정표가 될 만한 지형이 없다. 부표가 이 시대에도 존재하는지 물어봤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루디는 예전 기억을 더듬어서 양가죽으로 퉁퉁한 공기주머니를 만들게 했다.

양의 배를 가르지 않고 통째로 둔 채 목 부분으로 내장을 제거한 뒤 방수 가공을 한다. 그 뒤에 다리 부분으로 공기를 불어 넣어 사용하는 것이다.

자세한 부분은 잘 모르기 때문에 대강 이렇게 해보라고 가죽 장인에게 맡겨 두었더니 생각보다 훨씬 훌륭한 공기주머니가 만들어졌다.

거기에 닻을 매달아 바다에 설치하면, 제국 최초의 부표 완성이다.

점보에게는 마지막 부표가 끝나는 지점까지 오가며 확인하라고 명령해두었다.

하지만 루디의 질문에 점보가 어, 하는 표정을 짓더니 슬그머니 고개를 내렸다.

[주인님, 미안. 점보 바보라서 모르겠다.]

"...."

[부표는 잊어버렸어.]

"...."

점보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점보, 대단하다! 그것보다 훨씬 멀리까지 갔어. 엄청 멀리 갔다.]

"...."

이봐, 그러면 놈들이 어디까지 왔는지 전혀 알 수 없잖아.

하지만 점보는 자신이 멀리 갔던 것이 굉장히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바다가 엄청나게 넓어! 주인님도 데려가 줄까? 내가 태워 줘? 점보는 옛날에 주인님 태우고 날아본 적 있는데, 또 태워줄까? 그것도 잊어버렸어? 응? 그때 주인님 굉장히 좋아했는데. 또 태우고 싶다.]

그렇게 말하던 점보가 갑자기 귀를 반짝 세우더니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그리고 외친다.

[주인님! 나 상 주세요! 상 받고 싶어! 엄마 태우고 날아가고 싶다. 엄마가 굉장히 좋아할 거야. 전에 엄마가 그랬다. 점보 타고 날아보고 싶다고.]

리리샤라면 할 법한 소리다. 하지만 지금 상 받을 처지는 아닌 것 같다. 결국엔 정말 알아와야 할 건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드래곤이 옆에서 한숨을 쉬더니 커다란 손톱으로 지도 한 부분을 찍었다.

[이곳이다. 놈들은 여기에 와 있었어.]

드래곤은 부표가 놓인 길이를 기준으로 거리를 가늠한 것 같다. 하지만 드래곤이 짚은 지점은 부표와는 멀어도 너무 먼 망망대해였다.

레빈이 킥킥거리고 웃었다.

"저는 바다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만, 이 거리라면 아직 한 달 가까이 걸리지 않을까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바다에 대해서는 레빈이나 루디 자신이나 아는 게 별로 없다. 하지만 확실히, 놈들이 있다는 곳은 제국이 있는 대륙에서 상당히 멀어 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바다 한가운데다.

점보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물었다.

[주인님, 상은 언제 주세요?]

"...."

[아! 엄마한테 말해줘야지. 엄마 태우러 갔다 올게요!]

점보의 머릿속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상을 준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점보가 훌쩍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얼음!"

루디가 나지막하게 말하자, 점보의 몸이 경직되더니 아래로 뚝 떨어졌다.

루디는 돌 인형처럼 다리를 허공에 든 채 바닥에 가만히 누워 있는 점보에게 다가갔다.

허리를 굽혀 점보를 내려다보고 살짝 한숨을 쉰다. 이 아이가 나쁜 게 아니다. 바보로 만들어준 자신의 잘못일 거다.

"점보, 리리샤는 지금 아기를 가졌어. 네 등에는 탈 수 없는 거야. 물론 아기가 없어도 타게 하지는 않겠지만."

점보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다른 때는 눈도 움직이지 않지만, 이번에는 정말 놀란 모양이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루디의 명령을 지킨다. 뭐, 이 정도면 귀여운 녀석이라고 할 수 있나.

루디가 땡, 이라고 말하자 점보가 벌떡 일어나더니 크게 외쳤다.

[드래곤아! 들었어? 엄마가 쪼끄만 주인님 낳는대. 주인님하고 꼭 닮은 쪼끄만 아기 생긴다! 쪼끄만 주인님은 금방 주인님만큼 커지잖아. 지금 가지 않으면 다 커버릴 거야!]

흥분했는지 귀가 펄럭이면서 몸이 저절로 조금 떠올랐다가 다시 바닥에 닿았다.

아니, 아기라는 게 그렇게 금방 자라지 않는다. 게다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어.

문득 드래곤을 바라보자, 왜인지 그도 눈을 동그랗게 하고 굳어 있었다.

점보가 춤을 추며 루디의 주위를 돌았다. 코를 높이 들어 퐁퐁 빛을 뿜으면서 말했다.

[주인님! 엄마랑 합체했어? 언제 한 거야? 나도 불러주지. 이제 엄마한테도 주인님 냄새나나? 와! 멋지다! 신난다!]

"...."

누가 그런 거 가르쳤냐.

문득 드래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님이 합체를....]

아니, 누가 그런 말을 가르쳤는지, 루디가 생각하는데 점보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 점보는 기뻐! 전에처럼 주인님 냄새가 아가한테 잔뜩 묻어 있을 거야! 그 아가가 합체하면 또 주인님 냄새가 난다! 그리고 또 아기한테 냄새가 나! 그러면 점보는 외롭지 않아. 주인님 냄새나는걸! 와하하! 정말 좋다!]

점보가 코를 루디의 몸에 슬슬 문질렀다.

[주인님, 아가 많이 낳아 주세요. 그러면 주인님 냄새가 많이 많이 날 거야. 지금은 주인님 아가들한테 냄새가 거의 없잖아. 점보는 많이 슬펐어요. 냄새가 조금 밖에 안 나니까.]

아, 그렇구나.

루디는 점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마생물들은 코레아 왕족의 몸에서 나는 희미한 시조의 마력을 여전히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걸로 외로움을 달랬던 거겠지.

'미안해.'

루디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데, 드래곤이 말했다.

[괜찮다. 적은 마력이라도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우리에게는 그 냄새와 기억이 있으면 충분해.]

그래. 그건 알았는데, 대체 합체라는 말은 누가 가르쳤냐.

점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주인님, 그것도 까먹었어? 주인님이 가르쳐줬잖아.]

"...."

대체 과거의 나는 이 순진한 아이들한테 무슨 짓을 했던 걸까.

루디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

본래는 적이 들어오는 방향을 확인한 뒤 그 근처에 있는 배를 모아 상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적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굳이 배를 나누어 기다리고 있을 필요가 없다.

루디는 제국에 흩어져 있는 군함을 한곳에 모아 먼 해상에 나가 싸우기로 결정했다.

이미 전쟁 준비를 하고 있던 제국의 군함은 마지막 점검을 하고, 식량과 각종 물자가 여러 날에 걸쳐 배에 실렸다. 다수의 마도병기도 배에 옮겨졌다.

준비가 끝난 배는 차례차례 황도에서 북쪽으로 올라간 곳에 자리한 항구로 집결했다.

점보는 적의 숫자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드래곤은 기억하고 있었다.

적의 배는 모두 26대, 드래곤에 따르면 그중 전열이 2줄인 배는 3척이었다. 포문은 최소한 60문 이상인 것 같다.

해군 사령관에 따르면 이 대륙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신형 군함이라고 했다.

상대의 배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지 모른다. 루디는 느긋한 편이었지만 시종들과 해군은 모두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시종장의 걱정이 크다.

시종장은 벌써 여러 번 루디에게 이번 해전에서는 육지에 머무는 것이 좋겠다고 권해왔다.

"황제가 안전한 곳에 머물러서야 병사들의 사기가 오르겠나."

루디가 웃으면서 말하자, 시종장의 이마에 주름이 깊이 패었다.

"폐하, 이런 말씀은 참으로 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제국은 예전부터 해군이 그다지 강하지 않습니다. 이 대륙에서조차 그런 형편인데, 상대는 해상에서 유명세를 떨치는 자들입니다. 부디 이번 해전에는 육지에 머물러 주십시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전투에서 멀리 떨어진 배에 머물러 주심이...."

루디는 시종장의 얼굴을 보았다.

이 사람도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늙었다. 눈꼬리에는 주름이 부챗살처럼 늘어져 있고 입가에도 깊은 팔자 선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루디를 염려한다.

처음에는 황제 자리를 위해 루디에게 신경을 쓴다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었다.

지금은 온전히 루디를 걱정한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사람의 관계라는 건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시간이 가면서 점점 바뀌어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다.

루디는 빙그레 미소를 보였다.

"괜찮아. 그대들도 알지만 내게는 마생물이 있다. 여차하면 그들을 이용해서 어떤 난관도 헤쳐 나갈 수 있어. 게다가 점보가 있잖아. 그 녀석,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업고 하늘로 날아갈 거다."

"...."

시종장의 얼굴에는 여전히 걱정이 가득했지만,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부디 몸을 소중히 해주십시오."

"그래, 걱정 마라."

언뜻 시종장의 시선이 창문 밖을 향했다.

밖에서는 점보가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맑은 하늘에서 꼬리를 붕붕 돌리며 나는 꼬마 코끼리를 보고, 시종장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시종장과의 대화가 끝나는 것을 기다려, 레빈이 다가왔다.

"폐하, 서쪽마녀가 사무관을 통해 알현을 신청했습니다."

"드문 일이네."

루디의 말에 레빈이 히죽 웃는다.

"사무관의 말에 따르면 며칠 전부터 서쪽마녀가 굉장히 초조해 한다더군요."

"왜?"

"그건 직접 들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들어오게 할까요? 이미 본궁에 와 있습니다."

"그래."

루디는 그렇게 말한 뒤 잠시 생각하고 시종들을 약간 떨어지게 했다.

시종들이 모습은 보이지만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 지점으로 조용히 물러섰다.

서쪽마녀는 집무실 근처에 있었던 모양이다. 레빈이 나가자마자 금세 들어왔다.

"서쪽마녀가 폐하를 뵙습니다."

몸을 깊숙이 숙여 절을 한다.

은빛 머리가 등 뒤로 길게 늘어져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고개를 들라. 조금 말랐구나."

"...."

루디는 약간 놀랐다. 이전에 보았을 때보다 많이 수척해졌다. 얼굴은 더욱 하얗게 되었고 허리는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루디를 앞에 두자, 서쪽마녀의 눈에서 지금이라도 당장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습기가 차올랐다.

그걸 모른 채 하고, 루디가 조용히 물었다.

"제대로 먹지 않는 게 아닌가?"

"...그게."

"몸을 소중히 하라."

서쪽마녀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예, 폐하. 죄송합니다."

"그래, 할 말이 있다고 들었다."

서쪽마녀가 몸을 바로 세웠다. 어깨 위에 앉은 까마귀의 목도 꼿꼿해졌다.

"폐하, 이번 해전에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저는 반드시 도움이 될 거예요. 제발, 폐하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역시 그 일이었나.

루디는 살짝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쪽마녀에게 손을 내밀자, 약간 머뭇거리더니 그의 손을 잡는다.

루디는 서쪽마녀를 에스코트하여 집무실 한쪽에 있는 소파에 앉힌 뒤, 자신도 맞은편에 앉았다.

"이번 해전은 위험해. 바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잘못해서 배가 파괴되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그렇다면 더욱 제가 필요할 거예요. 저는 까마귀를 이용해 사람을 옮길 수 있습니다. 폐하께 반드시 도움이 될 거예요."

루디는 서쪽마녀가 두 손을 꽉 잡고 애써 미소 짓는 것을 보고 목소리를 약간 낮춰 한국어로 말했다.

"오현아 씨."

"...."

루디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서쪽마녀가 움찔 몸을 굳혔다.

"언젠가 한 번은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나를 대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응할 수 없어요."

"...내가 싫은가요."

"싫고 좋고를 떠나, 나는 리리샤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 옆에 있어도 나는 아마 평생 현아씨가 갖고 싶은 걸 주지 못할 겁니다."

"...."

서쪽마녀는 두 손을 꽉 잡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투명한 눈물이 끊임없이 흐른다.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싫은 것이 아니다. 좋으냐 싫으냐, 라고 묻는다면 아마 좋아하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 되기에는 약간 모자랐다.

이미 가슴속에 누군가가 들어와 있는 상태라 공간이 없다. 그리고 아마 평생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그걸 알면서도 계속 이런 상태로 두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을까.

게다가 서쪽마녀가 자신을 좋아하는 건 아마도 행복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 처음 본 것을 어미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처음으로 따뜻함을 맛본 것이 시조였기 때문에 감정이 착각하고 있는 거다.

조금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그녀는 행복해질 수 있다. 이 세상 누구도 한 가지 감정을 영원히 가지고 살 수 없다. 언젠가는 변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지금이 아마 그걸 시도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일 거다.

루디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차분히 말한 뒤, 서쪽마녀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계속해서 눈물이 볼을 타고 떨어졌다. 영원히 이대로 우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시간이 흐른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 감정은 내 것이에요. 다른 누가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사랑이라고 아는데, 그게 아니라고, 왜 그렇게 말하나요."

뚝뚝 손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서쪽마녀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아니라고 말해도, 나는 이번 생을 다해 사랑하고, 다시 백 년, 천 년이 흐른 뒤에도 당신을 사랑해요. 그걸 알고 있어요. 당신이 봐주지 않는다고 단념할 수 있다면 그게 사랑인가요. 당신이 안 된다고 해서 다른 사람과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게 사랑인가요. 나는 그런 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반드시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당신을 찾아내 다시 사랑할 거예요."

"...."

서쪽마녀가 보이지 않는 눈을 들어 루디를 향했다.

"언젠가 당신이 나를 돌아봐 줄 때까지, 나는 절대로 멈추지 않을 거예요. 언젠가 내 영혼이 더 이상 환생하지 않게 되면 그때야 이 사랑이 끝난다는걸, 당신도 먼 미래에는 알게 될 거야."

서쪽마녀가 여전히 펑펑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가 한국어에서 다시 제국어로 바꾸어 말했다.

"폐하를 성가시게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폐하가 머무는 공간 한구석에 조용히 살아갈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해요. 그러니 제발 저의 행복을 위한다는 말로 저를 멀리하지 말아 주세요."

머리를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 같다.

루디는 아무 소리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서쪽마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쁘게 절을 하고 물러갔다. 걷는 걸음마다 물웅덩이가 생길 것처럼 울고 있었다.

레빈이 들어와서 물었다.

"폐하, 대체 뭐라고 하셨길래 서쪽마녀가 저렇게 우나요?"

"...내가 못 할 말을 했다. 마음에 상처를 준 것 같아."

"...."

레빈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중얼거렸다.

"정말 폐하는 죄 많은 남자군요."

부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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