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정령이 바보
난다 난다 난다 응!
본다 본다 본다 앙!
난다 난다 난다 응!
노래 부르면서 나는 건 즐겁다.
점보는 귀를 펄럭펄럭 연신 움직이면서 넓은 바다 위를 날아다녔다.
[임무를 받은 거야! 점보는 임무 시행? 수앵? 암튼 그거다!]
드래곤이 몸을 투명하게 하고 날다 옆에서 불쑥 말을 걸었다.
[수행.]
[알아! 수행! 그거 말하려고 했던 거였어! 점보도 알고 있었다구!]
[....]
드래곤은 믿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정말이라구. 알고 있었는데 잠깐만 깜빡한 거야.
[점보, 너무 멀리 가고 있구나.]
[응? 벌써 끝이야?]
[아까 끝났다.]
[웅.... 하지만 아직 더 날 수 있는데.]
[주인님의 말을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알고 있어! 여기에서 저기까지만 날아다니는 거다!]
[....]
점보는 조금 시무룩 해졌다.
임무는 좋다. 숨바꼭질하는 것도 좋지만 임무는 주인님에게 도움을 주는 거다. 더 좋아.
그래서 더 하고 싶지만 주인님은 점보가 너무 멀리 나가는 바람에 돌아오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저기까지만 다녀야 한다고 정해줬어.
'걱정할 필요 없는데.'
점보는 주인님이 부르기만 하면 어디든 찾아갈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졌다.
[드래곤아! 조금만 더 가자!]
[....]
[응? 응? 응? 점보는 주인님 도움이 하고 싶어.]
[하아.]
드래곤이 한숨을 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아주 조금만이야.]
[응!]
점보는 서둘러 펄럭펄럭 귀를 움직였다. 드래곤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멀리 멀리 더 멀리 날아가야 한다.
귀에서 바람이 날 정도로 펄럭이자, 기가 막힌 듯 드래곤이 말했다.
[너, 순식간에 여기까지 왔잖아. 너무 멀리 왔어. 돌아가자.]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드래곤은 못 따라온 줄 알았다.
점보가 그렇게 열심히 날았는데도 드래곤이 바로 옆에 있다니, 조금 우울해졌다.
[알았다. 점보는 약속을 지키는 남자야.]
그렇게 말하는 순간이었다. 멀리에서 뭔가가 반짝거렸다.
[응?]
점보의 꼬리가 갑자기 붕붕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부러 돌리는 거 아니야. 그냥 막 돌아가는 거다.
[주인님! 주인님! 왔다!]
너무 흥분해서 마구 소리치자, 옆에서 드래곤의 냉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에서 소리쳐봐야 주인님한테는 안 들려.]
[안다! 안다구! 하지만 기쁘잖아! 임무 수행 만료야!]
[완료겠지.]
잔소리쟁이.
점보는 입을 삐죽거리다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드래곤아, 너는 주인님 없을 때는 주인님이라고 부르면서 왜 주인님 앞에서는 주인님이라고 안 부르니?]
[쯧, 건방지게, 너라니.]
[말 돌리는 거야?]
와아, 점보는 자기가 한 말에 자신이 깜짝 놀랐다. 분위기를 읽었어. 점보도 분위기라는 걸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나, 너무 대단하다!]
귀가 팔딱팔딱 움직인다.
[아!]
점보는 허공에서 춤추듯 다리를 움직이며 빙글 돌았다.
[임무! 임무! 임무를 잊었어!]
배가 나타나면 곧바로 주인님에게 돌아가야 한다. 모습을 보이는 건 좋지 않다. 잘못하면 배를 가지고 돌아가버린다. 아니, 배가 돌아가는 건가? 어쨌든 가버릴 거야. 점보가 무서워서 도망갈지도 모른다.
[집에 가자! 주인님한테 가자! 들키면 안 돼! 도망간다구!]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그만 떠들어라.]
드래곤의 목소리를 바로 옆에서 들으며, 점보는 열심히 다시 귀를 펄럭였다.
주인님한테 칭찬받을 생각을 하니 자꾸만 꼬리가 붕붕 돌아간다.
[씬난다! 씬난다! 너무 씬나!]
[...시끄러.]
[드래곤은 인정이 없구나.]
[그 말투.]
드래곤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점보의 얼굴이 활짝 개었다.
[그래! 엄마 말투야! 엄마가 이렇게 말하잖아. 너무 멋지지! 나도 따라 하기로 했다!]
주인님한테 가면 엄마도 볼 수 있다. 이번에 칭찬받으면 상으로 엄마를 등에 태우고 날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귀가 하늘로 삐죽 올라갔다.
[멋지다!]
서두르자. 서둘러 가서 엄마를 등에 태우자. 너무 기뻐!
***
배의 망루에 올라가 사방을 보던 선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를 본 것 같다.
"...."
바다 위가 아니다. 하늘에 뭔가가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반짝반짝 빛나는...저건 설마 코끼리?
멀어서 자세한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왠지 예전에 본 코끼리 상과 비슷하게 생긴 것 같다.
'아니, 그건 이상하지.'
한순간 새일까 생각했지만 그럴 리 없다고 금세 고개를 저었다.
새는 그렇게 크고 반짝이지 않는다. 거리가 멀기는 했어도 크기를 착각할 리는 없었다. 이래 봬도 철이 들 때부터 바다에서 지내온 거다. 확실하게 새보다 큰 것이었다. 게다가 새는 날개를 그런 식으로 이상하게 펄럭거리지 않는다. 그건 새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하지만 코끼리일 리도 없잖아.'
코끼리는 지상을 걸어 다니는 동물이다. 날아다니지 않는다. 심지어 그가 본 것은 빛으로 된 코끼리였다.
문득 동료들이 웃으며 하던 소리가 떠올랐다.
미개인들은 빛의 정령이라는 걸 믿고 있다고 한다. 신의 사자가 인간을 위해 지상에 내려와 있다던가.
'하지만 그런 게 정말로 있을 리가....'
조금 더 잘 보려고 했지만 반짝이던 것은 금세 사라졌다. 눈이 착각한 것처럼 순식간에 없어져 버렸다.
선원은 잠시 고민했지만 눈의 착각으로 치부해버리기에는 너무 또렷했다. 일단 갑판장에게 보고는 해야 할 것이다.
선원은 훌쩍훌쩍 망루에서 내려왔다.
물건과 줄, 일하는 선원들을 요리조리 피해 갑판을 뛰어간다.
갑판장이 있는 곳에는 와글와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또 무슨 일이람.'
선원은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저렇게 사람이 모여있을 때는 좋은 일이 없다.
가까이 가자 갑판장의 긁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놈은 노예 주제에 식수를 훔쳤다. 식수에 손을 댄 놈이 어떤 벌을 받는지, 선원이었다면 미개한 네놈들도 알고 있겠지."
사람들을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미개인 한 명이 선원들에게 붙들려 있었다. 그 뒤쪽으로는 미개인의 배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한데 모여 있다. 다들 파랗게 질려 있었다.
'멍청한 놈.'
선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
선원 나부랭이가 되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게 음식에 손대지 말라는 것이다.
식량이나 식수에 손을 대는 건 배에서 가장 큰 죄에 속했다. 특히 식수를 건드리면 못으로 두 손을 박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굶겨 죽였다.
선원 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모습을 꼭 한 번은 보게 된다. 그는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갑판장이 옆에 있던 사람에게서 채찍을 받았다.
'이번에는 노예라고 채찍까지 치는 건가.'
선원들이 미개인을 기둥에 단단히 묶었다.
헝겊 쪼가리 같던 상의에 힘을 주자, 이미 너덜너덜하던 옷은 간단하게 찢겼다.
상처투성이의 몸이 햇빛 아래 드러나자, 갑판장이 채찍을 높이 들어 힘껏 내리쳤다.
촤악, 촤악, 소리를 내며 뱀 같은 채찍이 살갗을 치고 다시 올라갔다. 그때마다 피부가 채찍에 찢어져 피가 배어 나왔다.
미개인이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정령이시여, 자비로운 빛의 정령이시여, 제발 이 생명을 구원하소서. 이 생명이 괴물에게 끌려가지 않도록, 부디 신의 나라로 이끌어주십시오."
미개인이 맞는 걸 지켜보던 노예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중얼중얼 기도하기 시작했다.
정령님, 정령님, 이 생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 가련한 생명을 신의 나라로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자비로운 정령님.
정령님, 빛의 정령님.
갑판장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닥쳐!"
노예들의 머리와 어깨 위로 채찍이 떨어졌다.
하지만 노예들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겁먹은 얼굴로 열심히 되뇐다.
'빛의 정령.'
방금 보았던 것이 그게 아닐까.
선원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자들이 믿고 있는 정령을 자신이 목격한 거라면, 정령이 진짜로 존재하는 거라면, 정령은 자신을 섬기는 인간이 이렇게 핍박받는 걸 어찌 생각할까.
갑자기 두려워져서 슬그머니 사방을 둘러보았다.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갑판장은 자신의 위협이 통하지 않자 매우 화가 난 것 같다. 닥치는 대로 노예들을 때리고 짓밟으며 정령을 입에 담는 자는 죽여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겁먹은 노예들이 겨우 잠잠해졌다.
갑판장이 거칠게 숨을 쉬면서 몸을 돌렸다.
식수를 훔쳤던 미개인은 채찍질 끝에 기절한 상태였다.
갑판장이 나무통에 바닷물을 담아 미개인의 몸에 뿌리자, 꿈쩍하고 일어난다. 소금물이 상처에 닿아 아픈지 신음 소리를 흘렸다.
"못을 가져와!"
갑판장의 외침 소리에 한 명이 굵은 못과 망치를 가져왔다.
갑판장이 미개인의 손을 기둥에 놓고 못을 그 위에 놓았다.
선원은 더 이상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한 마디라도 정령에 대해 언급하는 놈은 모조리 이렇게 못을 박겠다고 갑판장이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
선원은 보고하려던 마음을 접고 다시 망루로 향했다.
괜히 그런 말을 꺼냈다 갑판장에게 잘못 보이면 앞으로가 괴롭다. 한편으로는 정령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두렵기도 했다.
'그건 정말로 정령이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어쩌지.
망루에 오른 선원은 두려운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미개인 노예들이 매달리듯 정령을 부르던 모습이 눈꺼풀 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어때, 괜찮을 것 같은가?"
루디의 질문에 마도병기 시험을 책임지고 있는 대장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건 좋은데, 살살하게."
"하하."
대장은 씩씩하게 웃더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제일 위력이 약하니 괜찮습니다. 물론 돛대 한두 개 정도는 부러지겠지만, 큰 손상 없이 적의 대포를 무력화시킬 겁니다."
"...."
돛대는 부러지는 거냐.
루디는 약간 의기소침해져서 시선을 옮겼다.
너른 연무장에서 병사들이 마도병기를 옮기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펑펑 소리를 내며 박격포가 터지고, 다른 쪽에서는 불길이 퍼진 그 자리에 물대포를 쏘았다.
황궁에서 몇 시간 떨어진 곳에 있는 이 연무장은 마도병기를 시험하고 마도병이 훈련을 받는 장소다.
조금 전 대장이 말한 무기는 물대포였다.
박격포로 사용하는 마도구에 주문과 마석만 바꾼 것이다.
'박격포'라는 단어 대신 '물대포'로, 불의 마석 대신 물 마석으로.
단순히 그렇게만 했는데 마도병기에서는 불덩이 대신 물이 쏘아졌다. 다만 출력을 너무 낮추면 아무 효과도 없고, 적당히 높이면 돛이 부러진다. 중간이 어려웠다.
'편리하기는 한데, 역시 이 상태로는 위력이 너무 세군.'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최대한 상황에 맞게 위력을 맞춘 게 이 정도였다.
제국의 배에는 박격포와 물대포가 모두 설치된다.
다만 박격포는 불을 사용하는 무기이기 때문에 배를 탈취할 목적인 이번 전쟁에서는 많이 쓰이지 않을 예정이었다. 잘못하면 배가 모두 불에 타버릴 것이다.
게다가 박격포는 성벽을 부수는 무기다. 포 중에서는 가장 약하다 해도 너무 강했다.
배 근처에 사용하면 어떨까 생각해서 폭뢰도 만들어봤지만, 그것도 바다에서 터뜨려보니 위력이 너무 컸다.
하마터면 아군이 타고 간 배까지 뒤집힐 뻔했다. 다시는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무기라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루디가 한숨을 쉬는데, 병사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멀리에서 점보가 귀를 펄럭이며 날아오고 있었다.
레빈이 그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언제 봐도 신기합니다. 어떻게 귀로 날 수 있는 걸까요?"
'글쎄, 어린이용 만화이기 때문이겠지.'
루디는 속으로 중얼거리고 씁쓸하게 웃었다.
저런 걸 만들어낼 정도였다면 어린 시절 이곳에 왔던 자신은 꽤나 지구가 그리웠던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생각하면 점보가 루디를 저렇게 쫓아다니는 모습도, 어쩌면 그 당시의 자신이 그걸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직 자신만을 따르는 점보가 그때는 필요했었던 건지도 모른다.
루디는 자신을 향해 열심히 날아오는 점보를 가만히 보았다.
점보가 커다란 귀를 펄럭이며 근처까지 날아와 크게 소리쳤다.
[주인님! 점보는 상으로 엄마를 태우고 싶어요!]
그렇게 외친 점보가 힘차게 바닥을 향해 몸을 내리꽂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움푹 파이고, 잠시 뒤 먼지 속에서 폴짝 점보가 튀어나왔다.
꼬리를 헬리콥터처럼 빙빙 돌리면서 점보가 달려온다. 점보의 코가 행사장 앞에서 펄럭이는 바람 인형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
[주인님! 엄마 태우고 나 날아갈 거야! 높이 높이 난다! 엄마랑 같이 하늘로 갈 거야!]
역시 이 녀석을 만든 건 실수였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불쑥 드래곤의 모습이 나타났다.
[배가 나타났다. 점보는 그걸 보고하러 온 거야.]
드래곤의 모습을 보고 병사들의 환호성이 더욱 커진다.
점보는 병사들이 자신을 열렬히 환영하는 듯하자 기뻐진 모양이다. 무엇 때문에 왔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흔들흔들 움직여 병사들 틈에 섞였다.
[헤이헤이 하! 헤이헤이 호!]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점보가 병사들 틈에서 춤을 추었다.
그 모습을 보고, 드래곤이 한숨 쉬는 것처럼 말했다.
[미안하다. 저 녀석이 바보라서.]
루디는 피식 웃었다.
"별말씀을. 만든 건 나일 테니, 누군가가 미안해야 하다면 내가 미안한 거겠지."
[그것도 옳은 말이기는 하군.]
루디와 드래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