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기억은 몸에 남는 것
레빈은 자신의 주군이 상당히 너그럽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매우 냉정했다.
사람은 흑백으로 갈라지지 않는다. 회색이다.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그의 주군인 루디도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한 가지 면이 두드러지기 마련이었다.
탐욕스럽거나 너무 착하거나 악하거나, 어쨌든 한 가지 성질이 두드러진다. 두 가지 면을 동시에 비슷한 양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특히 착하면서 비정냉정한 면을 동시에 동일한 양으로 가진 사람을, 적어도 레빈은 본 적이 없다.
자신의 주군은 선한 측면이지만, 참으로 이상하게 너그럽고 비정한 부분이 동일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정한 결정은 싹둑싹둑 잘 내리는데 항상 괴로워한다.
그렇다면 조금 너그럽게 결정하고 슬쩍 지나가면 될 것을, 주군은 그렇게도 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울면서 비정해진다. 이상한 사람이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약간은 이상했지.'
아이면서 어른 같고, 용감한 것 같은데 겁이 많다. 비겁한 면도 교활한 면도 있는가 싶으면, 한편으로는 바보처럼 순진했다.
하지만 거기에 이런 면도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레빈은 토할 것 같은 심정으로, 식사하는 두 명을 바라보았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토할 것 같다.
자신의 주군이 분명한 남자가, 말할 때마다 설탕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수십 가지의 음식을 한 가지씩 부인의 입에 넣고 있었다.
'정말 폐하가 맞는 걸까.'
이렇게 부인을 애지중지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 못 했다.
본래 리리샤 님을 많이 아끼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는 그저 '어릴 때부터 돌본 여자아이를 많이 귀여워하는' 정도로 그쳤다.
이렇게 입에서 설탕이 줄줄 흐를 정도로 구질구질 달콤하지는 않았다.
'남자라는 것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여성이 있으면 이렇게나 변하는 걸까.'
레빈은 달콤한 미소를 짓는 루디를 보고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아마 폐하가 이상한 걸 거야.'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종장도 묘한 표정을 한 채 지켜보고 있다. 흐뭇해하는 것은 황후 밑에 있는 시녀들 정도였다.
문득 타이라에게 눈이 갔다. 그녀는 어떤 심정으로 이 장면을 보는 걸까.
"...."
기뻐하는 것 같다. 웃고 있었다. 여자는 부드럽고 따뜻하고 굉장히 좋지만 역시 그 머릿속은 이해할 수 없다.
남자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있을 때 빼앗으려고 하지 이렇게 지켜보고 기뻐하지 않는다.
우욱.
갑자기 구역질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자 황후가 몸을 구부리고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입덧이라고 한다.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폐하가 말해주었다.
황제는 황후의 등을 쓰다듬으며 방금 가까이했던 음식을 치우게 하고 조금 전에 한 조각 먹었던 과일을 가져오게 했다.
아, 그렇지. 지금은 황제 폐하가 황후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음식을 한 가지씩만 가져와 냄새나 맛이 괜찮은지 일일이 반응을 살핀다.
어째서 황제가 그런 걸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정말로 있는 걸까.
만일 그렇다 해도 시녀들에게 맡겨두면 될 일이다. 바쁜 시간을 쪼개가며 황제가 직접 하지 않아도 된다.
루디는 식사와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이곳으로 오는 동안에도 문답으로 정무를 보면서까지 황후와의 시간을 만들어냈다.
언뜻 [아내가 임신했을 때 잘못하면 평생 원망받는다]고 말하는 걸 들었지만, 이 세상 어느 여자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그것도 황제에게.
애초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황제가 직접 확인하는 것과 임신했을 때의 남편 잘못이 어떻게 연결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폐하는 정말로 가끔 이상하시다니까.'
그나저나 이 괴상한 자리는 언제 끝나는 걸까. 레빈은 멍하니 황제와 황후의 모습을 보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
임신을 한 뒤로 갑자기 식욕이 뚝 떨어졌다. 뭔가를 먹으려고 하면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그런데도 배는 고픈 게 고역이다.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는 부인들은 모두가 원래 그런 거라고 말했다. 아기와 함께 따라오는 거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저 겪는 수밖에 없다고.
임신하면 그대로 배가 불러 아이를 낳는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보면 불편하고 힘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심지어 아이를 가졌으니 황제와 함께 잠자리에 드는 건 삼가해야 한다는 말도 들었다.
원래 임신하면 방을 함께 쓰지 않는다고 한다.
훌륭한 부인은 임신하는 경우 남편에게 다른 여자를 권하거나 혹은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도 미소를 보이는 거라던가.
웃기지 마!
리리샤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리리샤."
루디가 진정하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쓸었다.
리리샤는 몸의 힘을 약간 풀고 루디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살갗에서 풍겨오는 냄새를 가득 맡는다.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이 냄새가 없으면 하루 종일 구역질을 하다 몇 번은 토한다.
남편과 방을 분리하거나 다른 여자를 권하거나, 그랬다가는 죽고 말 거다.
마음이 괴롭다던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계속 구역질만 하다 못 먹어서 죽어버린다.
이상한 일이지만, 루디의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뭔가 먹을 수 있었다.
물론 루디가 있을 때도 먹지 못하는 음식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의 냄새가 없으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팍 줄어버렸다. 이상한 체질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못 먹겠어요."
고개를 젓자, 루디가 세 번째로 먹었던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 리리샤가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이다.
"그러면 이거 한 입만 먹고 끝내지."
시종이 내미는 작은 그릇을 받아, 루디가 수저로 한 숟갈 떠서 내밀었다.
문득 아주 어릴 때 기억이 떠올랐다. 몇 살 때인지는 잘 모른다. 그저 아주 어릴 때였다. 그때도 이렇게 루디가 뭔가를 떠먹여주고 있었다.
'아!'
정확하게 어째서 그렇다고는 모르겠다. 하지만 리리샤는 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왜 루디의 냄새를 맡으면 뭔가 먹을 수 있는지. 어째서 그가 없으면 그토록 불안하고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지.
분명히 어렸을 때의 그 기억 때문일 거다.
루디의 몸에서 나오는 냄새는 안심하는 향기다.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배고픈 자신에게 뭔가를 먹여주고 안아준다.
크면서 그 기억은 조금씩 희미해졌지만, 어쩌면 임신 때문에 불안해서 기억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리리샤, 왜?"
루디가 걱정스러운 듯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울고 있었던 것 같다. 요즘엔 몸과 마음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울고 싶은게 아닌데 갑자기 눈물이 나오고, 공연히 화가 나기도 했다.
루디는 임신 때문에 마음이 불안정한 거라고 말하지만, 남자인 그가 어떻게 그런 걸 아는 걸까.
살롱 부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남편이라는 사람들은 여자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던데, 역시 루디는 대단하다. 어릴 때부터 루디는 계속해서 그녀의 영웅이다.
리리샤는 해쭉 웃고 숟가락에 입을 가까이 댔다. 합, 하고 덥썩 물자 루디가 잘했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좋아. 이 손 좋아.'
역시 안심한다.
킁킁 코를 울리며 루디의 품에 파고 드는데, 미안하다는 듯이 시종장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뒤에 알현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리리샤는 살며시 몸을 당겼다.
루디는 "마지막으로 한 입만 더"라고 말하며 리리샤에게 음식을 먹인 뒤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가는구나.'
공연히 서럽다.
리리샤는 자신의 표정이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생긋 웃었다.
"리리샤, 잠시 뒤에 다시 보지."
"네, 폐하."
루디가 빙긋 웃더니 몸을 굽혀 리리샤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아가도 잠시 뒤에 보자꾸나."
"...."
얼굴이 빨개졌다. 왜 그 말이 그토록 부끄러운 건지 모르겠다. 루디가 뱃속 아기에게 뭔가 말을 걸 때마다 굉장히 부끄러워졌다.
루디는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시종장과 레빈이 방을 나가기도 전에 가지고 있던 서류를 확인하며 뭔가 루디에게 말을 걸었다.
저렇게 걷는 시간에도 일해야 할 정도로 바쁜데 매번 자신에게 와준다.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가, 네 아빠는 정말 다정한 사람이야. 황제 같지 않아. 정말 좋지?
"...."
아, 기분이 이상하다. 왠지....
루디의 모습이 문을 막 빠져나가자마자, 우웩, 먹은 걸 다 토해내버렸다.
옆에 대기하고 있던 타이라가 재빨리 통을 내밀어 받았지만, 조금 바닥에 흘렀다.
"아깝네요. 지난번에는 완벽하게 받았는데."
타이라가 중얼거리며 등을 쓸어주었다.
리리샤는 통을 붙잡고 잠시동안 웩웩거리다 헐떡이면서 말했다.
"루한테는 말하지 마. 자기가 나간 뒤에 내가 다 토해내는 거."
"저는 말하지 않지만요."
타이라가 힐끔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남작 부인을 보았다.
"며칠만 더 이런 식으로 토하면 분명히 남작 부인이 일러바칠 거예요."
"...."
하지만 루디에게 걱정끼치고 싶지 않다. 루디는 아직 리리샤가 자신의 냄새에 안심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것도 모르면서 매일 시간을 쪼개 와주는 거야. 정말 다정한 사람이다.
물론 그런 상황이라는 건 타이라도 모르지만.
타이라가 물수건으로 리리샤의 입을 닦아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째서 폐하 앞에서는 잘 드시는데 이렇게 혼자 떨어지기만 하면 토하는 걸까요? 다른 여자들에게도 알아봤지만 마마 같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어요."
"...."
그건 그 여자들을 남편이 기르지 않아서 그래.
리리샤는 속으로 중얼거린 뒤 한숨을 쉬었다.
이제 그만 좀 토하고 싶다. 고기 먹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또 구역질이 치밀었다. 아, 정말 죽겠다.
***
복도를 걸어가면서도 시종장의 보고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시종장이 안건을 꺼낼 때마다 레빈이 옆에서 서류를 꺼내 거기에 맞는 숫자와 자세한 내용을 보충했다.
루디는 시종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건은 그렇게 처리하게."
"알겠습니다. 다음은 마도병기를 개발하는 일입니다."
"잘 되어가고 있나?"
"예. 하지만 시험을 담당했던 대장에 따르면 너무 강해서 이번 해전에서는 사용할 수 없지 않을까 하더군요."
"흠."
루디가 얼굴을 찌푸리자, 곁에서 레빈이 서류를 확인하며 말했다.
"배에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배를 한 대 이상 순식간에 완파할 거라고 합니다. 그 무기를 사용하면 사방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땅이 움푹 파진답니다. 배를 빼앗는 게 목적이라면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더군요."
레빈이 히죽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 무기를 사용하느니 정령을 이용하는 게 훨씬 피해가 적을 거랍니다."
대장이 말했다는 정령은 점보다. 점보는 그 사이 몇 번이나 이쪽에 와서 리리샤를 만나려고 시도하다 드래곤에게 끌려갔다.
그 때문에 지금은 황궁에 있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점보를 알고 있었다.
당연히 점보가 땅에 점프하는 것도 안다. 그 피해가 상당히 크다는 것도.
"그렇게 강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저쪽이 군함에 대포를 가져오기 때문에, 루디도 마도병기에 [함포]라고 적었을 뿐이다. 설마 한방에 배를 완파시킬 정도의 위력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레빈이 왠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함포라고 명명하신 마도병기는 그 몇 배를 넘는 위력을 보였다는 보고가 올라와 있습니다."
"...방금 그게 함포 아니었나?"
"아닙니다. 방금 말씀드린 건 대포에요."
"...."
비슷한 크기에, 단지 마석의 숫자와 이름만 다른데, 설마 그렇게 위력에서 차이가 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대포나 함포나 결국은 다 포 아닌가.
시종장이 눈을 약간 내리고 웃으며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배에 고정할 수 있는 박격포를 만들고 있습니다. 아직 모든 배에 설치된 건 아니지만 세렌 남작의 공방에서 거의 대부분 작업을 멈추고 여기에 매달리고 있으니 금세 완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아무래도 다른 무기는 사용하지 못하겠군."
"무기가 너무 뛰어나서 사용할 수 없다니, 정말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레빈이 한숨을 쉬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얼굴로 말한다. 아무래도 웃는 거에 가까운 것 같다.
루디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뭐, 어쩔 수 없나.'
어차피 이 시대의 해전은 배에서 시작해서 결국에는 백병전으로 끝난다.
처음에는 배와 배를 부딪치다가, 결국엔 서로 배를 맞댄 뒤에 상대편의 선박에 올라가 창칼로 싸우는 거다.
아루바소의 전투 방식도 많이 틀리지는 않을 거다.
첩자들이 모아온 보고서를 보고 확신한 일이지만, 확실히 적의 함대에 설치된 대포는 쇠구슬을 사용하는 것이다.
보고서에 의하면 대포가 상대편의 배에 구멍을 뚫고 나간다는 말이 있었다.
대포를 쏜다고 해서 배가 맞으면 즉시 침몰하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해전 경험이 많은 함장들을 모아 의견을 들어본 뒤, 결국엔 아루바소도 마지막에는 배를 붙여 적의 배로 넘어가 싸우는 형태일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생물을 이용하면 순식간에 적을 섬멸할 수 있겠지만.'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들이 쉽게 인간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는 싫다. 나중에 자신이 죽고 없으면 반드시 그걸 이용하는 사람이 생긴다.
루디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모처럼 만든 무기가 모두 창고 안에 처박히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