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80화 (180/201)

#180 맙소사, 아이라니

바람이 바뀌었다.

"돛을 펼쳐라! 바람을 놓치지 마!"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선원들이 움직인다.

돛이 바람을 안고 팽팽해지면서 거대한 배가 바다 위를 미끄러졌다.

대런 스튜어트는 심술궂은 마녀처럼 회색빛이 된 구름을 보았다. 한동안 맑던 날씨가 조금씩 거칠어진다. 공기에 습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

'오늘은 거친 밤이 되겠군.'

철이 들 무렵부터 물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지만 여전히 바다는 두렵다.

게다가 지금처럼 새로운 항로를 더듬어 갈 때는 긴장감도 더했다.

'푸테그린 제국이라고 했던가.'

제국이라.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총과 대포가 있는 세상에서 여전히 활과 칼을 사용하는 미개한 대륙, 그곳에서 가장 크고 강한 나라가 푸테그린 제국이라고 한다.

'자신들이 가장 위대하다고 착각하는 우물 속의 개구리.'

자신들이 살고 있는 대륙이 가장 크고 위대한 곳인 줄 안다.

그들이 타고 있는 배는 상당히 큰 범선이었지만, 아루바소에서 볼 때는 상당한 구형이었다. 기술력이 형편없는 것이다. 그런 기술력을 가지고도 먼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배를 건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 나라의 부는 기술과는 정반대였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 모양이다. 식량의 풍부함은 물론 금은도 엄청나다고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나라에는 신비한 보물도 있다고 들었다. 마도구니 코레아니, 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다른 나라에서는 목구멍에서 손이 나올 정도로 원하는, 귀한 것들인 모양이다.

들어보면 보물이라기보다는 그저 미신인 듯한 느낌이지만 그들은 진짜로 뭔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한두 명이 아니라 그 배에 타고 있던 전원이 그랬다.

'미개한 놈들이야.'

찜찜한 기분을 털어버리려는 듯, 대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의 지나친 믿음에, 진짜로 뭔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 한구석에서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이 이상한 환상의 동물을 만들어내고 물과 불이 마음대로 나오는 기구가 있다니, 말도 안 된다. 미친놈들의 헛소리일 뿐이다.

대런은 바쁘게 돌아다니는 선원들의 모습을 본 뒤, 시선을 바다로 옮겼다.

그가 탄 군함 옆과 뒤쪽으로 거대한 군함이 여러 대 따라오고 있었다.

'이런 첨단과학의 시대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지.'

그래, 그렇다.

대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총 21척의 군함과 5척의 상선으로 이루어진 그의 함대에는 거의 4천 명에 달하는 군인이 있다.

함선은 모두 대포로 무장되어 있고 총기도 있었다.

무엇보다 대런이 타고 있는 이 군함은 세계 최초로 개발된 신형으로, 2열의 포열을 가지고 있다. 아루바소의 과학과 기술이 이 배 한 대에 집약되어 있었다.

혹여 진짜로 푸테그린 제국에 그런 이상한 것들이 있다고 해도 절대 지지 않는다. 질래야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정말, 자신은 뭘 우려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 걱정이로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부하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함장님, 뭐가 걱정이십니까. 출발부터 지금까지 항해는 순조롭고, 푸테그린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이 정도로 신이 돕는 듯 매끄러운 항해는 처음입니다."

대런은 힐끔 부하를 보았다.

"그 대륙은 미개인이 사는 곳이다. 배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우리 배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는 것만으로도 알겠지. 하지만 그들은 이 전함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알아보지조차 못할지 몰라. 위협이 제대로 통하지 않을 거야."

부하가 깜짝 놀라더니,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정말,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그는 우스개라고 생각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대런은 진심이었다.

위협도 그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나 통하는 것이다. 지능이 너무 낮거나 아는 게 없으면 위협이 되지 않는다.

총을 모르는 사람에게 총기를 들이대봐야, 죽기 전에는 그게 단순한 막대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법 아닌가.

"뭐, 그래봐야 대포를 몇 발 쏴주면 금세 이 전함의 위력을 알게 될 테지만."

하지만 대포알도 무한이 있는 건 아니다. 아낄 수 있는 상황이라면 최대한 아껴써야 한다.

이 대륙을 노리는 건 그들만은 아니었다. 다만 아루바소가 가장 빨랐을 뿐이다. 언제 적을 만날지 모른다.

재수가 없으면 푸테그린 제국을 상대하는 동안 다른 나라가 올 수도 있는 일이다.

대런이 생각에 잠겨있는데, 노예를 감독하는 부하 한 명이 갑판 위로 올라왔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무슨 일이냐."

"노예를 여러 명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더 이상은 움직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는 걸 보면 어딘가 부상당한 것 같다. 놔둬도 자연적으로 치료가 안 된다면 버리는 수밖에 없다.

"몇 명이나 못 쓰게 되었는데?"

"열 한 명입니다."

생각보다 많다.

대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어쩔 수 없지. 처리하고 그 자리는 대륙의 선원으로 메꿔라."

"알겠습니다."

미개한 대륙의 배에 있던 선원 중 기술이 있는 자는 가급적 살려서 써먹을 생각이었다.

식사도 먹을 만한 걸로 배급하고 있고, 일도 가려서 시켰다. 너무 육체를 소모하는 일은 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노예가 줄어들면 어쩔 수 없다. 그들도 투입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아마 상당수가 힘든 노동 때문에 죽어버릴 것이다.

"아깝게 됐군. 지금까지 놈들에게 사용한 식량을 낭비하게 됐어."

대런은 바쁘게 갑판 아래로 내려가는 부하를 보며 중얼거렸다.

배에 실을 수 있는 식량의 양은 한정되어 있다.

항해 도중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귀중한 식량을 소비하는 노예를 많이 데리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딱 필요한 숫자에 약간의 여유분만을 갖추고 있다. 그런 만큼 노예가 많이 죽으면 곤란해진다.

"쯧쯧."

한심한 상황에 자기도 모르게 혀를 세게 찼다.

노예가 먹지 않고도 여러 날 살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 역시 먹어야 움직일 수 있다.

잠시 뒤, 제대로 걷지 못하는 노예들이 쇠사슬에 끌려 올라왔다.

선원들이 노예의 사슬을 푼 뒤 배의 옆에 서게 했다. 노예들이 버둥거리며 도망치려고 한다.

하지만 선원들은 요령있게 그들을 다루며 난간에 기대놓은 뒤 번쩍 다리를 들었다.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노예들이 바다에 떨어졌다.

굳이 손과 칼을 더럽히며 죽일 필요도 없다. 망망대해에서 붙잡을 나무 조각 하나 없이 떨어지면 그들은 몇 분 내에 물 속으로 깊이 삼켜질 테니까.

허우적거릴 힘조차 없이 그대로 가라앉는 노예들의 모습을 보면서 선원들이 깔깔 웃었다.

대런은 다시 하늘을 살폈다. 아까보다 구름이 더 어두운 색으로 변했다. 바람도 강해져 있었다.

"갑판 위를 정리해 둬."

"예, 함장님."

비바람을 대비해서 선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묶어서 고정시킬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밧줄로 묶고, 젖어서는 안될 물건은 치운다.

바람이 너무 강해지면 돛도 펼칠 수 없다. 적당해야 바람을 타고 갈 수 있다.

대런은 선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다, 자신이 이마를 계속 찡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하게 불길한 느낌이 든다.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어 마음이 술렁였다.

***

제국의 첩자들은 매우 유능하지만, 바다 건너 다른 대륙의 정보까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제국의 배가 바다를 건너 가기 전에 조사한 정보에는 아루바소에 대한 것이 거의 없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루바소는 제국의 교역국인 페리에서도 멀리 떨어진 대륙에 있는 나라다.

아루바소의 주 활약 무대도 페리 뒤쪽으로 있는 해역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제국의 배는 그들과 부딪칠 일이 없었다. 기껏해야 페리에서 얼굴을 힐끗 보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이 이쪽으로 올 가능성이 있다면 그렇게 둘 수도 없다.

제국의 첩자들은 바다 건너 대륙에 간 적이 있는 사람들을 수소문해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정보를 얻기가 그다지 쉽지는 않군요."

레빈이 몇 장 되지 않는 종이를 추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뭐, 어쩔 수 없지. 바다를 건너가서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니."

루디는 레빈이 건네준 종이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히죽 웃었다.

"그래도 겨우 석 달인데, 용케 이만큼이나 모았군."

레빈이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제국이니까요. 다른 나라와 비슷하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폐하."

보고서를 읽어가던 루디의 시선이 멈췄다. 배의 옆구리에 2열의 구멍이 나란히 서 있다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그게 대포가 놓인 자리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만, 소문을 종합해보면 그런 것 같아요."

레빈의 표정이 약간 심각하다.

"이야기를 정리하다 보면 대포라는 건 아무래도 폐하가 만드신 박격포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괜찮을까요? 그들에게는 화승총이라는 것도 있더군요. 작은 대포 같습니다."

"작은 대포라."

모르는 사람에게는 총이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 뭐, 총알이나 대포알이나, 뭔가가 나간다는 의미에서는 비슷하지만.

"괜찮아. 저격총과 박격포가 훨씬 뛰어난 무기다."

"폐하는 저들의 무기를 보신 적이 있나요?"

레빈이 탐구하는 얼굴로 루디를 보았다.

루디는 히죽 웃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실제로 본 적은 없어. 하지만 보고서를 읽어보면 대강 알겠지."

"...."

레빈은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금세 그 표정은 없어졌다. 시종장이 뛰어들어왔기 때문이다.

루디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항상 침착한 시종장이 저렇게 뛰어올 정도라면 보통 일이 아니다. 드디어 아루바소에서 쳐들어온 건가 싶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온 시종장은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폐하, 감축드립니다."

시종장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지금 황후 마마께 가 주십시오.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설마."

시종장이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결론은 한 가지뿐이다.

루디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왠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리리샤와 밤을 지낸 이후 벌써 세 달이 넘었다. 시기적으로 보면 임신하는 것도 무리는 없었다.

그래, 소식이 올 수도 있지. 하지만 말이다. 너무 어리지 않은가.

지금의 관계가 달라졌다고 해서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루디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아기 때의 리리샤도 남아있었다.

그래서인지 리리샤가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굉장히 낯설다. 자신에게 아이가 생긴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시종장이 자꾸 나오는 웃음을 누르려는 것처럼 손으로 입을 가렸다.

"폐하, 황후 마마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루디가 중얼거리듯 말하고 한 발자국 걸었을 때였다. 복도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마마! 마마! 뛰시면 안 됩니다."

"오, 마마."

"안 돼요!"

"제발!"

비명 같은 여자들의 목소리와 함께 방으로 뛰어들어온 것은 리리샤였다.

"루! 나 아기가!"

루디는 한달음에 리리샤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몸을 안았다. 달리던 리리샤가 루디의 팔에 갇혀 걸음을 멈추었다.

"리리샤! 임신한 몸으로 뛰어서는 안 되겠지."

루디가 엄한 표정으로 말하며 얼굴을 내려다보자, 리리샤의 반짝거리던 표정이 순식간에 죽었다. 풀 죽은 듯 고개를 떨구더니, 작은 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기뻤어. 빨리 루에게 알려주려고 했던 건데."

"리리샤, 마음은 알지만."

거기까지 말한 뒤, 루디는 입을 다물었다. 리리샤의 눈에 습기가 차올라 속눈썹이 젖는다. 순서가 틀렸다. 가장 먼저 전해야 할 것은 이런 말이 아니었다.

루디는 가볍게 이마를 콩 부딪쳤다.

"리리샤."

"...."

어느새 주위에 있던 시종과 시녀들이 모두 밖으로 나갔다.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루디는 리리샤의 몸을 두 팔로 안았다. 조심조심, 깨지기 쉬운 계란을 만지는 것처럼 손이 조심스럽다.

"리리샤, 감사합니다."

"...."

몸을 약간 떼어 오른손을 그녀의 배 위에 가만히 놓는다. 손등이 리리샤의 배에 닿았다.

"여기에 우리 아이가 있는 거지."

"응."

"화내서 미안."

"...."

"단지 걱정했을 뿐이야."

"알아, 아는데."

"미안, 리리샤. 내가 잘못했어."

"...."

사과를 받아들이겠다는 듯, 리리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디는 리리샤의 손을 끌어 푹신한 소파에 앉혔다. 리리샤는 의자에 앉더니 자신의 손을 배에 얹었다. 그 위에 루디도 손을 겹친다. 잠시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움직이지 않네."

리리샤가 약간 실망한 듯 중얼거렸다. 설마, 리리샤는 아기가 생기자마자 움직인다고 믿었던 것은 아니겠지.

루디는 웃음을 감추면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조심스럽게 리리샤의 배에 귀를 대고 잠시 숨을 멈췄다.

"루, 뭔가 들려?"

"...아니."

루디가 얼굴을 올리자, 리리샤가 동그란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어버렸다.

"우리 바보 같아."

리리샤의 말에 루디도 동감이었다.

루디는 리리샤의 발에 신겨 있는 것이 여전히 뒤가 터진 힐인 것을 보고 훌렁 그것을 벗겼다.

"루?"

깜짝 놀라는 리리샤를 그대로 안아 올린다. 리리샤를 안은 채 황후궁으로 가면서 뒤따르는 남작 부인에게 말했다.

"황후의 신발을 모두 바꿔주게. 납작해서 굽이라고는 전혀 없는 걸로 바꿔. 더 이상은 천으로 된 코르셋도 입어서는 안 되네. 임부용의 부드러운 옷을 주문해 줘. 그 옷이 완성될 때까지는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일이 있더라도 절대 그 빡빡하게 몸에 붙는 옷은 입지 않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남작 부인이 조용히 대답했다.

리리샤의 입이 툭 튀어나왔지만 이것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

아이라니.

맙소사, 아이라니.

뒤늦게 그 말이 실감을 가지고 가슴속에 울렸다.

그는 앞으로 아빠가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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