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전쟁 포로로 잡힌 사람의 마지막은 둘 중 하나다. 인수할 돈과 일족이 있는 사람은 몸값을 낸 뒤 풀려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처형당한다.
변경백은 자신이 처형당하는 쪽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현실에 반발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도 적을 포로로 잡으면 똑같은 일을 했을 것이다.
다만 에이나 왕국에서 그토록 모멸적인 취급을 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상위 귀족인 그를 하층민을 가두는 감옥에 평민과 함께 넣고, 음식은 하루 한 끼 말라비틀어진 빵과 묽은 수프뿐이었다. 배설을 위한 항아리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감옥의 간수는 틈이 나면 그를 모욕했다. 간수의 기분이 나쁠 때는 채찍으로 맞았고, 피로 범벅이 된 상처는 곪아 고름이 나왔다.
원한이 없는 에이나에서조차 그런 대접이다. 제국에서는 어떤 취급을 받을지, 담담하던 변경백조차 약간 두려워졌다.
제국의 황제는 카니아 때문에 망한 디코콰리아 출신이었다. 당연히 조국을 멸망시킨 카니아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변경백은 눈을 감았다.
십 수 년 전, 와토린구 공작을 질질 끌고 다니며 모욕을 주고 처형한 사람은 자신이다.
현 제국의 황제는 그 사람의 아들.
보통 방법으로는 죽이지 않을 거다. 온갖 고문 끝에 죽게 될지, 아니면 가장 모멸적인 방법으로 죽일지.
'아, 그런가. 그걸 알기 때문에 에이나에서는 일부러 나를 그렇게 대했던 건가. 제국에게 아부하기 위해서.'
자조적인 웃음이 흘렀다.
'후후, 결국 인간은 뿌린 대로 거두는구나.'
원한이 원한을 낳고 다시 원한을 불러온다. 그 동그라미 안에서 빙글빙글 돌다 결국엔 모두 무너지고 죽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제국군 본대에 도착한 뒤부터 그의 대접은 조금 이상했다.
변경백은 지금까지 타고 있던 에이나의 수레에서 다른 마차로 옮겨졌다. 죄인을 호송하는 창살 마차이기는 했지만, 잠자리로 사용할 짚과 배설을 위한 요강이 들어 있었다.
식사는 하루 두 번, 육포를 무르게 익혀 국물을 낸 스튜와 빵이 기본으로 나왔고, 가끔은 고기도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아침 이른 시간에는 수프가 주어졌다.
본래 변경백이 입고 있던 것은 갑옷 밑에 입는 셔츠와 바지뿐이었다. 그나마도 피로 젖고 찢어진 데다 하의는 대소변으로 젖어 지저분했다. 돈이 되는 갑옷은 에이나에서 빼앗겼다.
하지만 제국군에 인수된 이후, 그는 따뜻한 물로 몸을 헹구고 소박한 옷으로 갈아 입혀졌다.
때리거나 고문을 하기는커녕, 군의관이 그의 상처를 보고 약초를 붙여 주었다.
그의 수레에는 두꺼운 천막 천이 붙여져 있어서, 밤에는 완전히 닫아 바람을 막았다.
이상하다. 가슴에 차가운 서리가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에이나 왕국에서 그토록 험한 대접을 받아도 두렵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정체불명의 대접이 무서워 흠칫흠칫 놀라게 된다. 대체 제국은 무슨 짓을 하고 싶은 걸까.
변경백이 탄 마차는 제국군이 행군하는 말미에 끼어 여러 날을 함께 이동했다.
디코콰리아의 병사들이었다면 카니아 귀족인 그에게 증오의 눈빛을 보냈겠지만, 이들은 제국군이다. 변경백에게 특별히 개인적인 감정을 부딪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담담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를 감시하는 병사에게 물어보았다. 대체 왜 이렇게 정중한 대접을 하는지 아느냐고.
병사의 대답은 간단했다.
[폐하께서 귀족 포로로 대우하라고 하셨기 때문이에요. 저는 그렇게 들었습니다.]
모르겠다. 왜 원수인 자신을 그렇게 대접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며칠이 지난 뒤, 어느 정도 지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그를 찾아왔다.
아름다운 미모의 남자는 다음 도시에 도착하면 그가 처형당할 거라고 말했다.
"단지 그것뿐인가?"
변경백의 질문에 아름다운 남자가 물었다.
"뭔가 다른 게 있습니까?"
그제서야 어쩌면 이들은 황제의 생부를 죽인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경백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남자를 보았다.
"처형당하기 전에 황제 폐하를 뵐 수 있겠는가?"
"글쎄요. 왜 그런 요청을 하는 겁니까?"
변경백은 허리를 세우며 가슴을 폈다.
"긴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네. 내 말을 듣지 않고 처형한다면 아마 황제께서는 후회할 걸세."
남자는 어깨를 움츠리고 말했다.
"뭐, 폐하께 말씀은 드려보겠습니다. 확답은 할 수 없어요."
"그걸로 충분하네."
아름다운 남자는 변경백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알게 되면 깜짝 놀라고 분노하게 될 것이다.
제국의 병사들이 자국의 황제를 사랑하는 건 요 며칠 마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충분히 알게 되었다. 병사들에게 이렇게 사랑받는 군주도 드물다. 변경백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사랑하는 황제의 생부를 자신이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 덤덤하게 바라보던 변경백을 향해 돌을 던지고 침을 뱉을까.
'나는 왜 굳이 그 사실을 황제에게 알리려고 하는 거지?'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부모의 원수를 정중하게 대접하는 황제가 왠지 불쌍해졌다.
자신이 죽고 나서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나이 어린 황제는 어떻게 할까? 자기 자신을 굉장히 증오하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에이나 왕국에서 받았던 모욕이 생각보다 크게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반대의 정중한 대접을 받자 감사함을 느낀 걸지도.
'나도 늙었구나.'
와토린구 공작은 뛰어난 전사였다. 칼을 한 번 들면 난폭하기가 야수와 같았다. 그 사람에게 가족이 죽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변경백도 그자의 칼에 이제 막 전쟁터에 나선 어린 자식을 빼앗겼다. 한데 원수의 핏줄에게 동정하고 감사하다니, 분명히 늙어서 그런 거다.
그 뒤, 도시에 도착할 때까지 황제는 만날 수 없었다. 어쩌면 살려달라고 애원할 거라고 생각해서 무시한 걸지도 모른다.
'뭐,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변경백은 도시에 도착하자 광장이 보이는 탑에 갇혔다.
상당히 큰 도시였다. 젊을 무렵 이 도시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제법 활발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우중충한 분위기가 도시 전체를 감고 있었다.
사람들은 깡마르고 눈에는 살기가 떠있다.
변경백의 마차가 지나갈 때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는 시선은 마치 적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탑에 갇힌 날부터 광장에는 처형대가 설치되었다. 남자들이 작은 무대처럼 평평한 단을 만든다. 한쪽에는 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단 위에는 목을 놓는 오목한 나무토막이 놓였다.
뚝딱뚝딱, 멀어서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망치를 치고 못을 박는 모습을 보면 머릿속에서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저기에서 나는 죽는 건가, 하는 실감이 들었다.
내일이 처형날이라고 감시병이 말한 날에는 다른 때보다 다소 화려한 음식이 저녁으로 제공되었다.
묵묵히 그걸 다 먹은 뒤, 갑자기 문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일까 생각하는데 문이 열리고, 이전에 보았던 아름다운 남자가 들어왔다.
얼마 전 감시병에게 들었는데, 이름이 레빈이라고 했다.
레빈의 뒤를 이어 병사가 여러 명 들어와 양쪽에 섰다.
"황제 폐하가 그대를 만나주신다고 합니다."
레빈의 말이 끝나기 전에, 온몸에서 고귀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제국의 황제였다.
변경백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니아 궁중 예법에 따른, 최상급의 절을 해 보였다. 이 뒤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귀족으로 죽을 수 있게 해준 데 대한 나름의 감사 표시다.
하지만 그다지 잘할 수 없었다. 몸이 약간 비틀거렸다.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지만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도 할 수 없는 초라한 모습의 자신을 기억한 채 죽고 싶지 않다. 그 마음이 몸의 불편함을 간신히 이겼다.
"고개를 들어도 좋다."
황제의 말에 몸을 바로 했다.
황제에게는 와토린구 공작의 모습이 조금 남아 있었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황제가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변경백은 무너질 것 같은 허리에 힘을 주면서 대답했다.
"예, 제국의 황제시여. 아직 모르시는 듯하여 무리하게 뵙기를 청했습니다."
잠시 호흡을 골랐다.
"나는 예전 와토린구 공작령에서 당신의 부친을 처형한 원수입니다."
당장 고함소리가 터져 나올지, 아니면 칼이 먼저일지 모른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보기 흉하게 놀라는 모습이 되지 않도록, 변경백은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황제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의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래서?"
"예?"
"할 말은 그것뿐인가?"
"...그, 그렇습니다."
황제는 변함없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대가 어떤 일을 했는지, 나와 어떤 관계인지는 잘 알고 있다. 설마 제국이 그 정도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렇다면...어째서 이런 대접을...어째서 내게 관대히 대하십니까?"
"관대?"
아주 조금 황제의 얼굴에 감정이 담겼다. 원한이나 증오가 아니라, 단지 한심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대에게는 이게 관대한 대접으로 보이는가?"
"아닙니까?"
황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마가 조금 찌푸려졌다. 그렇게 해도 그림처럼 아름다운 사람이다.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하면서, 변경백은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선,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아 말해두지. 나는 이 자리에 와토린구 공작의 아들로 선 것이 아니다. 나는 제국의 황제로 이 나라에 왔고, 그 신분으로 그대를 만나는 것이다."
"...."
"그대는 훌륭한 전사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뿐이지. 내가 알기로 그대가 진정한 변경백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는 외국과 경계를 접한 상태에서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자잘한 전쟁을 치르면서 영지를 지키고 나아가 나라를 지켰다.
자신이 없었다면 이 나라는 예전에 외적의 거듭된 침략으로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자신이라는 거대한 벽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침략을 자제했다.
영민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밤낮없이 노력했기 때문에 아무 탈 없이 농지를 일구고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갈 수 있었다.
변경백의 생각을 빤히 알고 있는지, 황제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마치 아이에게 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대는 전쟁에서 이기는 것만 생각하고 그 이면에서 고통받는 이는 생각하지 않았어. 그대 영지에서는 이런저런 명목으로 계속해서 세금을 거둬들였다. 창문을 달면 창문세를 받아 가고, 수염을 자르려면 수염세를 내라고 강요하고, 가장이 죽으면 사망세로 그 집에서 가장 좋은 가축을 빼앗아갔다. 인두세의 비율은 카니아에서도 가장 높은 편에 속했지."
황제의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두 필요한 일이었다. 돈이 없으면 군대를 유지할 수 없다. 모자라는 병력을 노예로 충당한다 해도, 그 노예를 사는 것조차 돈이 필요한 것이다.
"전쟁만을 일삼는 영주는 통치자가 아니다. 그저 영민의 피를 빨아먹으며 사는 해충일 뿐이지. 만일 그대에게 아주 작은 영주의 마음이라도 남아있었다면, 제국을 대적하는 게 아니라 영민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을 내밀고 항복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째서 내게 이런 대접을 하십니까."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하다. 황제의 말이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 자신을 그토록 형편없는 영주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고문하고 거칠게 다루는 것이 맞지 않은가.
"영민에게 살아갈 힘을 주기 위해서다. 때로는 분노도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지. 그대가 초라하게 되어 비참한 모습으로 처형당하면, 이 나라의 힘없는 백성은 귀족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비참하다고 생각할 거야. 그들의 분노는 갈 곳이 없게 된다. 다들 똑같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처지에 빠졌다고 여길 테니까."
"...."
"하지만 자신들이 그토록 힘들고 괴로운데 귀족은 마지막까지 때깔 좋은 얼굴로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하면, 그대가 평민의 처지라면 어떨 것 같은가? 이전에 자신이 카니아 국민이었다는 사실은 잊고 제국의 백성이 되고 싶지 않을까? 이 세상 누구도 자신을 핍박하고 괴롭힌 자보다는 너그럽게 포용하는 군주를 따르고 싶어하는 법이다."
그래서 겉으로 상처가 보이지 않도록 치료하고, 얼굴에 혈기가 돌아오도록 제대로 된 음식을 먹였던 건가.
오늘 지급된 옷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급 원단으로 만든, 귀족의 것이다. 마지막이라는 걸 고려해서 품위를 지키도록 배려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달랐다. 모두 제국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서였을 뿐이다.
꽉 쥔 주먹이 아프다. 손톱이 손가락을 파고들었다.
이 방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황제가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웃고 있는데 웃는 얼굴이 아니다. 마치 얼어붙은 호수 같았다.
"정말, 당신은 끝까지 이기적인 귀족이로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볼 틈도 없이 황제가 몸을 돌렸다.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황제의 뒤를 레빈과 병사들이 따랐다.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힌 방에 혼자 남아, 변경백은 식사를 갖다 준 감시병에게서 들은 말을 떠올렸다.
도끼로 처형당하는지 묻는 그에게 감시병은 담담하게 검을 사용하게 된다고 대답했다.
도끼로 처형하는 건 귀족에게 모욕이다.
검으로 죽을 수 있다면 나름 명예로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황제에게 느낀 감사한 마음은 반까지는 아니라도 1/3 정도는 거기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평민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였구나. 황제에게는 귀족이기 때문에 그런 대접을 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
뒤늦게 제국의 황제가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자의 머릿속은 조금 이상하다. 정상적인 귀족의 사고방식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두렵다.
변경백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높은 탑의 방에서 보이는 처형대가 처음으로 끔찍하게 느껴졌다.
다음 날, 정오가 되자 변경백은 깨끗한 신발을 신고 처형대로 향했다.
그는 동상 때문에 발가락을 잘라낸 상태였다. 상처가 아물지 않아 걷는 게 다소 힘들다. 신발은 그런 상태를 고려해서 특별히 만들어진 것 같았다. 바닥이 약간 폭신하고 발가락 부분에 여유가 있어 걷기가 조금 쉬워졌다.
'이것도 평민들이 볼 때 멀쩡하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한 걸까.'
처형대로 가는 길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자신을 쳐다보는 평민의 시선이 살기를 띠고 있었다. 제국군이 아닌, 같은 나라의 귀족인 자신에게 부어지는 시선이다.
'이렇게 증오를 받고 있었나.'
처형대 위로 올라가는데, 어디에선가 작은 돌이 날아왔다. 이마를 맞고 몸이 휘청거렸다. 병사가 지탱해 주지 않았다면 넘어졌을 것이다.
병사들은 돌을 던진 사람을 잡거나 막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를 처형대 위에 세웠다.
병사들이 가만있자, 다시 돌이 한 개 날아왔다.
병사들은 변경백에게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서 있었다.
다시 돌이 날아온다.
그리고 다시.
누군가가 소리쳤다.
"나는 네놈이 다스리던 변경백에서 도망쳐 나왔다! 세금을 내지 못해 가축을 빼앗기고, 나중에는 딸과 아들을 노예로 빼앗겼지. 네놈 때문에 나는 내 자식들을 평생 보지 못해! 어디에 있는지, 살아있는지조차 모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사방에서 돌이 날아왔다.
검으로 처형된다고 들었지만, 변경백은 그제서야 알았다. 실제로는 평민에게 죽는다. 그리고 평민의 분노가 절정에 달하면, 자신의 목숨이 거의 남지 않으면, 아마 그때 처형인이 검으로 그를 내리칠 것이다.
하하. 뭐야. 황제로 이 자리에 서 있느니 뭐니 말은 멋있게 하면서, 사실은 단순하게 복수하고 싶었던 것 아닌가. 그래서 이런 식으로 죽이는 거겠지.
갈 곳 없는 분노가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올랐다. 그놈! 황제 그 어린놈! 말만 번드르르하게 포장하던 그놈이!
거기까지 생각하던 변경백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전장에서 화려하게 날뛰던 자신이 고작 작은 돌멩이를 피하기 위해서 볼품없게 머리를 손으로 쥐어싸고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최악의 죽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루디는 조금 전까지 변경백이 있던 방에서 처형대를 내려다보았다.
변경백은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처형대 위에 쓰러져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은 움직이지 않는데도 백성의 돌팔매질은 멈추지 않았다.
변경백은 끝까지 귀족 다운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위해서 세상이 돌고 있다는 식이다. 모든 사정을 자신에게 편리하도록, 자신이 특별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쪽의 의도를 다각적으로 헤아리기보다는 귀족이라 대우하는 거라고 단정한 것이다.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보면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는 일이었는데.
"폐하, 오늘은 날이 춥습니다."
레빈이 두툼한 외투를 그의 어깨에 걸었다.
평소에는 말이 많은 레빈이지만,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곁에 서 있을 뿐이다.
병사들이 돌팔매질을 멈춘다. 처형을 돕는 남자들이 움직이지 않는 변경백의 머리를 옴폭하게 파인 나무토막 위에 얹었다.
처형인의 칼이 허공을 가르고 변경백 목에 닿았다.
변경백의 머리가 놓여있던 바구니에 톡 들어가자, 지켜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요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이 죽는 장면이 기쁜 것일 리가 없는데.'
가만히 창을 내려다보는 루디의 뒤에서, 레빈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폐하는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
레빈의 말이 면죄부가 될 리는 없다. 루디는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토록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거다. 죄가 아닐 리 없었다.
하지만 되풀이해서 똑같은 말을 들려주는 레빈의 목소리는 심하게 그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머니의 자장가 소리를 듣는 것 같다.
"...고마워."
루디는 그렇게 한 마디한 채, 한참 동안이나 처형대를 내려다보았다.
이 세상에서, 언젠가 전쟁이 사라지게 되는 날은 올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