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72화 (172/201)

#172 저런 얼굴을 매일 본다면

카니아 왕세자의 죽음 이후, 카니아에서 항전하는 도시는 거의 없어졌다. 대부분 제국에 항복하거나, 국민의 봉기가 일어나 성문이 열렸다.

제국군은 차례차례 항복해오는 카니아의 도시를 접수하면서, 서서히 그레데 왕국을 향해 진군해갔다.

지금은 눈이 많이 내려 한 곳에 진을 치고 머무는 중이다. 벌써 사흘째인데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눈이 쌓인 상태라면 마생물을 이용해서 바닥을 녹이며 진군할 수 있지만, 이렇게 펑펑 눈이 내릴 때는 가만 앉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뭐, 그렇게 급할 것도 없으니까. 그레데 왕국에 발이 달려 도망가지는 못할 것 아닌가.

마생물들이 부지런히 사방을 돌아다니며 바닥에 닿는 눈을 녹였다.

생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봉황과 비둘기, 참새 등의 작은 새를 비롯해 여우나 다람쥐도 있었다.

모두 예전에 만든 마생물이다. 그들이 영원히 주인을 기다리며 살아갈 거라는 사실을 모르던 시절에 만든 아이들.

루디는 병사들과 모닥불 앞에 앉아 마생물이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다른 마생물에 비해 생쥐는 더욱 부지런하다.

병사들이 말을 걸면 귀를 움찔거리고 꼬리를 살랑거리며 반응했지만, 동작을 멈추는 일은 없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이러 저리 움직이면서 쉴 새 없이 눈을 녹였다.

병사들이 손가락으로 마생물들을 가리키며 깔깔 웃었다. 어떤 병사는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엎어져 꺽꺽거리며 웃고 있었다. 흠, 그만 좀 웃어라. 생쥐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잖아.

모닥불 너머로 병사가 루디에게 말했다.

"폐하, 이제 그만 말해주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러다 완전히 갇히겠어요."

"글쎄,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너무 열심이라."

루디의 말에 병사들이 다시 배를 움켜쥐고 웃는다.

루디는 군데군데 생긴 하얀 벽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마생물들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 눈이 닿으면 곧바로 그걸 녹인다. 아까도 말했지만 특히 생쥐들이 열성이었다.

그들 덕분에 진을 친 자리와 병사들이 자주 오가는 길은 말끔하게 땅이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 외의 땅에는 눈이 가득 쌓였다. 마생물이 치우는 곳은 사람들이 있는 곳, 자주 가는 곳, 천막이 쳐진 곳이니까.

한 마디로 지금 제국군은 눈으로 만든 벽에 갇혀 있다. 사방이 하얀 벽이야. 하늘 위에서 보면 아마 하얀 땅에 제국군이 있는 자리만 옴폭 파여 미로가 되어 있을 것이다.

"...."

처음 마생물들이 눈을 녹이기 시작했을 때 그만두게 했어야 했다. 설마 이렇게 심각해질지 몰랐지. 알았으면 반드시 말렸을 텐데 그때는 그저 귀엽고 흐뭇하기만 했던 거야. 스스로 생각하고 일할 수 있는 아이들이 되었구나, 라고. 마생물이 지치지 않는 생물이라는 걸 깜빡 잊었다.

한데 이 와중에도 마생물을 자기 편한 대로 잘 활용하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다른 병사나 보좌관들이 마생물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여 멀찍이서 보고만 있는 가운데, 레빈만은 스스럼없이 자신이 원하는 걸 마생물에게 요구했다. 지금처럼.

하얀 벽 너머에서 레빈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여기를 좀 치워줄래? 오오, 정말 대단하구나, 너희들. 순식간에 녹는걸."

"...."

레빈이 없었다면 하얀 눈의 미로는 더욱 복잡했을 것이다. 레빈이 이쪽저쪽 돌아다니며 길을 뚫어놓은 덕분에 조금 나아졌다. 어쩌면 레빈은 전체적인 동선을 생각해서 일부러 길을 뚫으며 돌아다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녹은 눈 벽 사이로 레빈이 웃으며 걸어왔다.

"폐하의 마생물은 정말 편리하네요."

아닌 것 같다. 타인을 배려한 동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가는 길을 녹인 것뿐인 모양이다.

레빈은 먼지와 진흙으로 지저분해진 옷을 입고 있었다. 황궁에서는 항상 반짝반짝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가 새집처럼 삐죽삐죽하다.

루디는 레빈의 손에 서류 따위를 넣는 가죽 봉투가 들려있는 걸 보고 물었다.

"그건 뭐야?"

"그레데 왕국에서 보낸 편지입니다. 국왕의 친필 서신이래요."

"응? 이렇게 눈이 오는데 그건 또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어?"

루디가 묻자, 레빈이 히죽 웃었다.

"눈 벽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떨어진다고 병사가 말하길래 가봤더니 그레데 사신이었어요. 이 눈밭을 헤매며 우리를 찾았다더군요."

루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천막으로 걸어가면서 손을 내밀자, 레빈이 가죽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 내밀었다.

눈으로 편지를 쭉 훑어내리는데, 레빈이 말했다.

"우리가 자신들에게 향하니까 이제야 급해진 모양입니다. 도착한 사신 말을 들어보니 무리한 강행군 때문에 일행의 1/3은 오는 길에 죽은 모양이더군요. 뭐, 죽었다기보다는 버리고 오는 바람에 죽은 거겠지만."

루디가 편지를 다 읽자, 레빈이 물었다.

"그레데는 항복입니까?"

"읽어봐라."

루디가 서신을 건네자, 레빈이 쭉 읽어내린 뒤 기가 막힌 듯 말했다.

"항복을 해와도 받아 줄까 말까인데, 그냥 사과 편지네요."

"...."

"그레데 국왕은 정신이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그레데에서 온 사자들에게는 답변을 뭐라고 해서 보낼까요? 폐하께서 직접 서신을 쓰시겠습니까?"

"그냥 내쫓아버려."

루디가 씹어뱉듯 말하자 레빈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예, 폐하. 지금 당장 내쫓겠습니다."

그레데 왕국은 카니아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카니아는 제국이 틈을 타 야금야금 집어삼킨 거지만, 그레데는 본인들이 먼저 제국의 땅을 침략해왔다.

'왕의 머리를 잘라서 보내도 모자랄 판에 고작 사과 편지라니, 정말 기가 막히는군.'

루디는 얼굴을 찡그리고 천막에 들어갔다.

잠시 뒤 레빈이 돌아와 그레데 사신을 쫓아냈다고 보고했다.

왕이 나쁜 것이지, 그 사신들에게는 죄가 없다. 뒤늦게 눈발이 조금이라도 약해진 뒤 보낼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아니지.'

루디는 한숨을 쉬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렇게 하면 그레데 왕에게 자신의 불쾌감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만일, 정말 만약의 일이지만 그레데 국왕이 나중에라도 자신과 왕세자의 머리 정도를 자르겠다고 약속한다면 조금 너그럽게 그 나라를 대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그 정도도 하지 않는 경우에는 제국의 체면 때문에라도 그냥은 넘어갈 수 없다는 말이다.

'그 나라에서 한두 명이라도 제대로 생각이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뒤늦게라도 왕의 머리를 보내겠지.'

그렇지 않다면 제국의 온정은 바랄 수 없을 것이다.

눈은 나흘이나 더 내린 뒤에 그쳤다.

부지런한 빛의 생쥐들 덕분에 제국군 진지에는 눈이 한 조각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대신 눈의 벽으로 만든 방과 복도가 수도 없이 생겨났다.

한데 출입구가 없는 거야.

병사들이 다들 왁자지껄 웃는 가운데 루디의 명령이 떨어지고, 빛의 마생물이 한데 모여 전초병처럼 앞장을 섰다.

마생물이 일제히 눈을 녹여 길을 만들자, 제국군이 힘차게 노래를 부르며 진군하기 시작했다.

걸어라, 걸어라, 눈길을 넘어라, 걸어라, 걸어라, 적이 보인다. 들어라, 들어라, 창칼을 들어라....

노랫소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마생물들의 꼬리가 가락에 맞춰 흔들린다. 도톰한 엉덩이가 실룩실룩 움직이자, 그걸 보고 병사들이 더욱 힘차게 노래 불렀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하얗다. 하얀 눈으로 만든 세상, 마치 자신들만 존재하는 동화의 나라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 있으면 정말로 눈의 여왕을 만나는 게 아닐까.

옆에 있던 레빈이 중얼거렸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 같지 않군요."

"그래."

루디는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눈의 벽을 보면서 말했다.

"이곳이 특별히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이면 좋겠지만.... 만일 다른 곳도 이렇다면 지금쯤 백성들의 상황은 절망적일 거다."

아직 제국의 통치는 시작되지도 않았다. 치안도, 식량 사정도 최악인 상태에서 눈까지 내려 고립되면 그 참상은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루디는 생쥐들 중 일부를 불러들였다. 특별히 똑똑하다 싶은 아이들만 골라 명령을 내린다.

"너희들이 이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 있는 곳의 눈을 좀 녹여 줘."

생쥐들이 꼬리를 곧게 펴고 귀를 쫑긋거렸다. 알아들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부탁한다."

루디의 말이 끝나자, 빛의 생쥐들이 쪼르르 달려 눈 속을 파고들었다. 생쥐들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

높은 나뭇가지에 쌓였던 눈이 바람에 날려 조금씩 흩날렸다. 그냥 보면 아름다운 광경일 뿐인데, 자연이란 참으로 잔인하다.

***

에이나의 공주는 오만한 사람이었다.

이래라저래라, 이건 뭐 해서 안 된다, 나는 이게 좋다, 저건 싫다, 이런저런 이기심에 휘둘리는 사람은 모두 기진맥진이 되었다.

광대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지만 어차피 같은 행렬에 속해 있다. 당연히 피해를 받았다. 매우 많이 받았다.

광대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난 며칠 동안은 정말 힘들었다. 저놈의 공주, 길가에 버리고 가고 싶다.

현실을 모르고 자기 고집만 피우는 공주의 성격은 눈이 왔을 때가 절정이었다.

눈이 많이 내리는 동안은 움직일 수 없다. 잘못하면 마차 바퀴가 눈에 빠지거나 미끄러져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걷는 사람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동상에 걸리면 그 부위를 잘라내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에이나의 공주는 한시라도 빨리 제국의 황제를 만나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안 된다고 말려도 듣지 않는다.

처음 에이나에서 출발할 당시만 해도 공주는 얌전하고 순종적인 성격으로 보였다. 아마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교육받았을 것이다.

에이나 왕족의 여성은 대체로 그렇다. 에이나는 여자를 그저 남자의 부속물, 남성을 위한 소품처럼 다룬다.

하지만 조국에서 멀어지자 공주는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오만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아직 제국의 황제는 만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애첩이 된 것처럼 행동했다.

제국의 마도병을 자신의 호위로 곁에 붙이고 싶다고 말하거나, 도시에 들렀을 때 황제에게 서신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자 자신이 직접 쓴 편지를 가져가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자신이 황제를 매료시킬 거라는 사실을 의심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호위 책임자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공주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결국 책임자는 설득을 포기하고 눈길을 가겠다고 결정했다.

미친놈이다. 죽을 거면 혼자 죽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꿀꺽 삼켰다. 괜히 트집 잡힐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동행하는 동안 공주의 성격을 몸소 겪은 터라, 그녀가 얼마나 집요하고 귀찮은 사람인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눈길에 나서지 않아도 된 것은 마도병 덕분이었다. 마도병들은 공주의 행렬이 출발하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째서 가지 않느냐고 호위 책임자가 묻자, 마도병들이 한 말이 걸작이었다.

[어째서 우리가 가야 하나요?]

글쎄, 에이나 왕국에서 공주의 호위로 달랑 50명만 보낸 것은 마도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있으면 호위는 50이 아니라 한두 명만 있어도 충분할 테니까.

하지만 마도병은 자신들과 공주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광대는 그제서야 공주를 대하는 마도병들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공주는 아름다운 여자다. 그냥 아름다운 게 아니라 굉장히 아름다웠다. 저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라면 아무리 손이 닿지 않을 만큼 신분이 높은 공주님이라 해도 넋을 잃고 쳐다볼 것 같은데, 마도병들은 하나같이 평범하게 무반응이었다.

'저놈들도 분명히 알 달린 남자 놈들인데, 설마 마도병은 몽땅 거세된 놈들만 들어가는 곳인가?'

한두 명이야 소 닭 보듯 할 수 있지만, 모두 그런 식인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다.

예쁜 여자한테 라면 조금쯤 약해지는 게 남자 아닌가? 성격이야 좀 지랄맞아도.

광대의 의문은 풀리지 않은 상태로, 그들은 갖은 고생 끝에 간신히 제국군 본대를 따라잡았다.

제국군의 본대를 본 광대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랄까.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보아왔던 군대와는 다르다.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가는 뒤쪽으로는 그보다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의 보급부대가 따르고 있었다. 보급부대의 수레에는 식량과 비품이 가득 담기고 줄지어 가는 병사들은 가락을 맞춰 노래를 불렀다. 장관이다.

제국이 부유한 나라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자나라였던 것 같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건 눈 쌓인 길을 순식간에 녹이면서 앞장서 나아가는 빛의 생물들이었다.

"맙소사."

광대가 중얼거리자 옆에 서 있던 마도병들이 흥, 별것 아닌데요, 하는 얼굴로 웃었다.

그때, 눈길을 여러 번 미끄러지며 달려온 마차에서 공주가 얼굴을 내밀었다. 가만히 제국군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윤기 흐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것이 푸테그린 제국군, 주인님의 군대구나."

남편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건 에이나 왕국에서 흔한 일이다.

'그렇지만 너는 아직 혼인한 게 아니겠지.'

마음속으로 그렇게 한 마디 찔러주며, 광대는 자신들을 발견하고 다가오는 남자를 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굉장히 좋은 말을 타고 있었다.

전쟁에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다 비싼 놈들 뿐이다. 저렇게 삐까뻔쩍한 말을 탄 사람이라면 분명히 신분이 높을 것이다.

한데 이상하기도 하지.

타고 있는 사람이 레빈이었다.

광대의 입이 딱 벌어졌다.

설마, 신입 첩자 나부랭이인 줄 알았더니 신분 높은 사람이었나. 그런 사람이 왜 첩자를 하고 있어.

"오, 형님! 도착했습니까. 늦었네요."

레빈이 마도병들을 보더니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너희도 고생이 심하구나. 수고했다."

마도병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한다.

"레빈님! 얼굴이 왜 그렇게 되셨나요? 모처럼 깨끗했는데 다시 지저분해지셨잖아요."

"저희는 눈 때문에 엄청 고생이었어요."

마도병과 레빈의 교환을 보다, 광대는 문득 옆에 서 있는 마차에 시선을 주었다.

에이나 공주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레빈을 보고 있었다.

'아!'

마도병들이 공주를 보고도 무반응이었던 이유를 안 것 같다.

'아름다운 사람에 익숙한 거구나.'

레빈이 여자로 보이는 것은 아니다. 남자라는 건 보는 순간 알 수 있다. 하지만 레빈은 여자보다 아름다운 남자였다. 이런 남자를 매일 보면, 그래, 공주를 보고도 덤덤할 수 있을 것 같다.

혼자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까마귀에 휩싸인 마차가 병사들 중간에 끼어 지나갔다.

"저것이 서쪽 마녀의?"

광대가 묻자, 레빈이 히죽 웃었다.

"맞습니다."

서쪽마녀의 마차가 바로 그의 앞을 지나가는데, 까마귀들이 까악까악 울기 시작했다.

마차의 창이 열리더니 은발의 미녀가 고개를 내밀었다. 창밖으로 까마귀에게 손을 내민다. 까마귀가 그녀의 팔에 앉자, 서쪽마녀는 새를 데리고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와, 진짜 아름다운.'

광대는 그렇게 요염하면서도 덧없는 분위기를 함께 가지고 있는 여자는 처음 보았다. 마치 은은한 광택까지 몸에 어려 있는 것 같다.

"...."

살짝 에이나 공주의 마차 쪽을 바라보자, 어느새 창문이 닫혀 있었다.

그래, 보고 있기는 좀 힘들었을 것 같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남자한테 져, 다른 여자한테는 상대도 안 돼, 쥐구멍에 숨고 싶을 것 같아.

마도병들은 서쪽마녀를 보고도 그다지 반응이 없었다. 매일 봤기 때문에 이제는 덤덤한 걸까.

'나라면 저 정도 미녀가 옆에 있으면 십 년 동안 매일 봐도 매일 넋을 잃을 것 같은데.'

광대는 공주의 일행과 함께 레빈의 뒤를 따라갔다.

지금부터 공주는 황제를 알현하게 되는 모양이다. 광대 역시 그 자리에 꼽사리 끼는 것 같다.

잠시 제국군이 행군을 멈추고, 서둘러 작은 천막이 설치되었다. 일단은 외국 사신을 대접하는 형태로 공주를 맞는 모양이다.

천막이 완성되었을 무렵, 선두에 있었던 황제가 거대한 흑마를 타고 돌아왔다. 워낙 대규모의 군대다 보니 황제와 후속 부대의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멀리서 점차 다가오는 황제의 얼굴을 보고, 광대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렇군. 저런 얼굴을 매일 본다면 서쪽마녀도, 레빈도, 모두 평범해 보이는 게 당연하다. 에이나의 공주는 상대도 되지 않겠지.

얼마 전까지 가지고 있던 의혹은 완전히 사라졌다.

황제가 원인이었어. 아름답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황제는 지나치게 예쁜 사람이었다. 거룩한 빛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황제를 앞에 두자, 에이나 공주는 불쌍할 만큼 처량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에이나 공주는 사신으로 대접받은 뒤 그대로 호위와 함께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교태로 황제를 녹이기는커녕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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