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70화 (170/201)

#170 전쟁터의 아이들

두근두근 터질 것 같던 심장이, 말이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 망나니처럼 날뛰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이길 수 있어. 나는 이긴다.'

상대는 이제 갓 스물이 된 애송이 황제다.

마력 소유라는 이유로 주변 사람이 오냐오냐하며 곱게 길러 온 온실 속의 화초다.

이런 전쟁터에 나오면서 갑옷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는 허세 가득한 인간에게 자신이 질 리 없다.

유능한 관리와 장수들이 도와주는 전쟁과 달리, 개인의 전투는 오로지 그 자신의 능력에만 달려있는 것. 오랫동안 전장과 시합으로 단련된 자신이 질 리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왕세자는 요란하게 고함을 내질렀다.

"와라, 애송이야!"

제국의 황제가 말고삐를 흔들었다. 아름다운 흑발을 날리면서 황제가 마주 달려온다.

그 순간, 황제의 몸을 감고 있던 공기가 변했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느긋하던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묵직하고 날카로운 창, 아니, 숨 막힐듯한 어둠 같다.

주위의 공기가 모두 묵직한 물로 변해 왕세자를 향해 밀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뭐, 뭐야.'

압박감에 한순간 숨을 쉴 수 없었다.

***

개인 간 전투에 광선검을 꺼내는 것은 매너 위반일 것이다. 루디는 엑스칼리버를 원본 그대로 든 채 왕세자를 향해 달려갔다.

갑옷으로 몸을 감싼 왕세자와 가까워지자, 어깨 전체를 이용해 크게 검을 휘둘렀다. 두드리는 것처럼 왕세자를 향해 칼을 내리친다.

머리 한 올 차이만큼 늦게, 왕세자가 밑에서 검을 쳐올렸다.

반응이 꽤 빠르다. 확실히 전투 경험은 많은 사람인 모양이다.

하지만 갑옷을 입은 만큼 왕세자는 동작이 느렸다. 홀가분한 루디의 움직임을 도저히 따라올 수 없다.

가까이 다가선 두 마리의 말이 흥분했는지 푸드득거린다. 주인의 흥분이 그대로 말에게도 전해진 것 같다. 코를 벌렁거리며 저희들끼리 신경전을 벌였다.

"애송이가!"

무거운 공기를 벗기는 것처럼 왕세자가 소리쳤다.

이번에는 왕세자의 검이 어깨를 향해 날아왔다. 방패로 상대의 칼을 막으면서 확 밀친다.

루디도 검을 두드려 넣으면서, 왕세자와의 간격이 호흡을 느낄 정도로 바짝 붙었다. 검과 방패로 레슬링을 하는 것 같다.

말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신경을 타고 올라와 머릿속을 울렸다.

하핫, 왠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압축된 카페인을 마신 것 같다.

마른 소리로 웃으면서 루디는 방패 든 팔을 단단히 접어 어깨와 함께 밀었다. 동시에 연이어 검으로 왕세자의 갑옷을 두드렸다.

깡깡, 소리와 함께 왕세자의 몸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한번 칼로 내리치자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갑옷 때문에 균형을 잡지 못했던 것 같다.

루디는 훌쩍 말에서 뛰어내리며 그대로 칼을 아래로 그었다.

왕세자가 몸을 굴려 피한다. 칼은 들고 있지만 방패는 떨어질 때 놓친 것 같다.

루디는 왕세자가 피하는 방향을 향해 다시 검을 내리쳤다.

왕세자가 황급히 막았지만 힘에 밀렸다. 루디의 칼이 왕세자의 어깨를 긁으면서 갑옷이 약간 패였다.

루디가 검을 옆으로 힘껏 치자, 왕세자의 칼이 옆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루디는 왕세자가 주춤한 틈에 훌쩍 그 위에 올라탔다. 방패 전체로 상대의 투구를 누른다.

당황한 왕세자가 그를 밀쳐내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루디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루디는 단순히 힘으로 누르고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의 몸은 의외로 강하고 또 어이없을 만큼 허술해서, 어떤 부분을 누르고 있기만 해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보리스한테 훈련받으며 죽을 만큼 깊이 알게 된 거다. 몸으로 당해가며 루디가 익힌 기술은 왕세자가 제아무리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버둥대도 절대 풀리지 않는다.

보리스는 멋스러운 것은 하나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가 가르친 건 오직 실전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하고 상대를 죽이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우아한 검법부터 먼저 배웠을 왕세자는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루디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루디는 왕세자의 몸에 올라탄 채 말했다.

"단신으로 제국에 맞선 용기에 답해, 그대 아내와 아이의 안전은 내가 보장하지. 안심하고 죽어도 좋다."

아내와 아이의 훗날이 역시 걱정되었던 걸까. 루디의 몸 아래서 안간힘을 쓰던 왕세자의 힘이 약간 빠진 것 같다.

루디는 방패를 거둔 뒤, 검을 거꾸로 들어 왕세자의 목을 향해 힘껏 내렸다.

단단한 갑옷을 칼이 뚫고 들어간다. 가죽 장갑을 낀 손에 단단한 것이 부서지는 감촉이 전해졌다.

한 번에 죽여야 한다. 안 그러면 고통을 겪는다. 루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뚝, 뭔가가 부러졌다.

검은 왕세자의 목뼈를 끊으며 더욱 깊이 박혔다. 왕세자의 갑옷이 축 늘어져 저항이 완전히 없어졌다.

루디가 일어서자, 사방에서 환호성이 올랐다.

"와아아아!"

"폐하 만세! 제국의 황제 만세!"

"푸테그린 만세!"

제국군을 향해 칼을 번쩍 들자,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힐끔 성을 올려다보자, 성벽 위에 있던 몇 사람의 그림자가 후다닥 안쪽으로 사라졌다. 옷차림이 훌륭한 걸 보면 아마 이 성의 주인이었을 것이다.

성주가 사라진 것과 거의 동시에, 성에 달려 있는 쪽문이 조금 열렸다.

팔자수염을 단 남자가 쫓기듯이 쪽문에서 밀려나왔다. 쪽문은 남자만 밖으로 내쫓은 뒤 다시 닫혔다.

수염 남자는 시종인 듯하다. 깨끗한 행동거지와 옷차림이 그렇게 보였다. 어쩌면 사라졌다는 시종장일지도 모른다.

수염 남자는 자신을 내쫓은 성안 사람에게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직 쓰러진 왕세자의 주검만을 보았다. 소리 없이 조용히, 수염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국군 쪽에서 보좌관이 루디의 곁으로 달려왔다.

루디는 카니아 시종장에게서 시선을 떼고 자신의 보좌관을 보았다.

"왕세자의 몸은 정중하게 취급해라. 제대로 장사 지내 줘. 저자가 시종장이라면 그에게 카니아 풍습을 듣고 그대로 해주게."

"예, 폐하."

레빈이 가까이 와 있다.

루디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을 이었다.

"왕세자의 아내와 아이는 온전히 보호한다. 그 외 성주와 귀족은 남자는 몰살, 여자는 병사들에게 주어라. 설마 이 사람의 주검을 성에서 수습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최소한 겉치레로라도 한 마디 할 줄 알았다. 살려둘 가치가 없는 놈들이야."

레빈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루디는 음울하게 어깨를 움츠리고 명령을 내렸다.

"박격포를 준비해라. 오늘 안으로 성을 점령한다."

"예, 폐하."

레빈의 예쁜 얼굴에 시종의 가면을 쓴 미소가 걸렸다.

대장들에게 루디의 지시를 전달하면서 레빈이 한 마디 덧붙이는 게 들렸다.

"아이들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알고 있겠지만 폐하가 슬퍼하십니다."

대장들이 저마다 대답한다.

"물론입니다."

"함께 전장을 누빈 게 몇 년인데 모르겠습니까."

그는 좋은 부하를 가졌다.

카니아의 왕세자에게도 저런 부하들이 있었다면, 제국은 아마 이곳에 발을 디딜 수 없었을 것이다.

루디는 무릎을 꿇고 왕세자의 투구를 벗기는 카니아 시종장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하염없이 흐르는 카니아 시종장의 눈물이 뚝뚝 왕세자 주검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잠시 뒤, 거대한 불덩어리가 난공불락이라는 성을 향해 날아갔다.

***

쾅, 쾅, 소리를 내며 성이 뒤흔들렸다.

왕세자비는 아이들을 몸으로 덮듯이 꼭 끌어안았다.

가장 위의 아이는 올해 열 살인 공주다. 그 밑으로 세 명의 아이가 더 있었다. 첫째와 둘째는 어릴 때 죽고 남은 아이들은 이 네 명뿐이다.

건물이 흔들리면서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성이 무너져 내릴 것 같다. 아이들이 겁에 질려 울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리 오렴."

왕세자비는 아이들을 더욱 꽉 안았다.

그녀도 무섭다. 성이 함락되면 여자는 예외 없이 적병에게 몸을 유린당한다. 왕족이든 평민이든 아무 상관없다.

아아, 신이시여.

왕세자비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아이들에게 두려워할 것 없다고 계속 속삭였다. 하지만 자신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문득 신경이 문으로 향했다. 누군가가 문고리를 달각거리고 있었다.

"...조용히. 제발 조용히 해다오. 울지 마."

왕세자비는 제일 어린 아들의 입을 막았다.

방문은 잠그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입구는 모두 가구로 막아두었다.

남편이 나가면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성이 함락되면 가장 먼저 자신과 아이들을 해치는 건 백작과 그 부하들, 혹은 남편의 부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왕족의 피를 잇는 아이는 죽이는 것이 가장 쉬운 처리 방법이요. 살려둬봤자 반란의 불씨만 되니 혼란한 틈을 타 아예 죽여버리는 거지. 특히 정통 후계자의 자식은 예외 없이 처형합니다. 그러니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우리 아이들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거요. 단지 제국의 황제는 아이들에게 동정적이라는 정보가 있으니 거기에 희망을 걸어봅시다.]

만일 시종장이 돌아오지 않고 제국의 병사들이 이곳에 닥쳐오면, 그것은 황제가 카니아 왕족의 씨를 남기지 않고 죽이기로 결정했다는 뜻이다.

그런 경우에는 아이들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 남편과 그렇게 약속했다.

적어도 치욕스러운 죽음은 겪지 않도록 독을 준비해두었다. 남편이 항상 지니고 있던 것을 그녀에게 주고 나간 것이다.

왕세자비는 뚫어지게 문을 보았다.

문이 다시 달그락거린다.

'지금 문을 열려고 하는 건 누구지? 시종장인가? 아니면 적병? 아니면.'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는데, 문 너머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문이 열리지 않는 거지? 왕세자비 마마, 서둘러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문을 열어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가 다른 때보다도 정중하게 말하고 있다. 요즘에는 마마라고 말하는 대신 예전처럼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남편이 없을 때는 말투도 다소 난폭했다. 집안에 보탬이 되지 않는, 전혀 쓸모없는 딸이라는 식이었다.

남편의 말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맴돌았다.

[가장 먼저 그대와 아이들을 해치려고 할 사람은 바로 백작이오. 절대로 그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그대와 아이들을 적에게 넘기고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 할 거요.]

정말일까. 정말로 아버지가 적에게 자신과 손주들을 팔아넘길까.

지금은 그녀를 홀대하고 있지만, 왕세자비였던 시절에는 다정한 아버지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헤매고 있는데 열 살 공주가 물었다.

"어머님, 할아버님이 밖에 계시는데 문을 열지 않나요? 이대로 있으면 죽을 거예요. 할아버님과 함께 도망가요, 네?"

겁먹은 딸의 얼굴을 보고, 왕세자비는 정신을 차렸다.

이 성에서 도망갈 길은 없다. 적이 올라오는 길은 하나다. 동시에 내려갈 수 있는 길도 하나뿐이었다.

이 성에도 비밀 통로는 있을지 모르지만 적이 성 밖에 몰려올 때까지도 아버지는 입구가 어디인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만일 정말로 그녀와 아이들을 구할 생각이었다면 미리 통로를 알렸을 것이다.

만일 비밀통로가 없다면, 그야말로 아버지는 도망갈 곳이 없는 성에서 함께 가자고 그녀를 부르는 셈이다.

"공주, 이리로."

왕세자비는 허리를 세웠다. 아이들을 안은 상태에서 공주를 끌어안는다.

"두려운 건 알아요. 하지만 아버님이 당부하셨어요. 시종장 외에는 절대로 문을 열어줘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할아버님이."

공주가 울상을 지으며 문을 바라보았다. 백작은 조금 전까지 조용히 열려고 하던 것과 달리 지금은 쾅쾅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왕세자비는 어린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그 소리가 덜 들리도록 팔로 아이들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조금만 참아요, 조금만. 견디기 힘들어지면 어머니가."

목이 메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시종장이 맛있는 음료를 준비해 주고 갔어요. 조금 있다가 함께 마십시다. 기분이 좋아지는 음료니까 무서운 마음이 사라질 거야."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덟 살이 된 공주가 훌쩍훌쩍 울면서 말했다.

"어머님, 지금 먹으면 안 되나요? 너무 무서운데, 빨리 무서운 게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왕세자비는 힐끔 테이블 위에 놓인 음료수 잔을 바라보고 대답했다.

"조금만 있다가. 할아버님이 가시면 그때 먹는 게 좋겠어요.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공주들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은 조금 더 문을 두드렸지만 갑자기 소리가 멈췄다.

왕세자비는 귀를 기울였다. 왜 갑자기 소리가 멈춘 걸까. 아버지는 왜 문 두드리는 걸 멈춘 거지?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멀리서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건물을 두드리던 요란한 소리가 사라졌다. 대신 두꺼운 문 너머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맙소사."

왕세자비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허리에서 힘이 빠져 몸이 흐물흐물해졌다.

적이 성안에 들어왔다.

끝이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

아아, 잔인한 신이시여. 이 아이들을 모두 버리십니까.

왕세자비는 멍하니 앉아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모두, 테이블로 가세요. 할아버님이 떠났으니 기분이 좋아지는 음료를 먹읍."

왕세자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아이가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 쪼르르 테이블로 달려갔다.

아이가 작은 손으로 컵을 잡는 모습을 멍하니 본다.

다른 아이들이 뒤질세라 테이블에 달려가 손에 컵을 들었다.

눈물이 쏟아지면서 아이들의 모습이 점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마지막 가는 길 정도는 또렷하게 보고 싶은데,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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