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제국의 황제 vs 망국의 왕세자
'카니아 왕도가 적의 손에 떨어졌다.'
왕세자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들고 있던 편지가 뭉개졌다.
2왕자, 동생의 시체는 목이 잘린 채 평민 손에 넘어가 칼에 찔리고 발에 짓밟혔다고 적혀 있었다. 머리는 아직도 성문에 걸려있다고 한다.
그 일은 순식간에 카니아 전국으로 퍼져, 제국군이 왕도를 떠난 뒤 여러 도시에서 백성의 봉기가 일어났다.
카니아 왕족은 태생부터 신이 보살피는 존재라는 믿음이 백성의 마음 안에서 깨지고 있는 거다.
서신을 보낸 사람은 이전부터 고용하고 있던 정보상이다. 그는 소문이 자연적으로 퍼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소식이 너무 빨리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과 괴이한 소문이 함께 도는 것 때문이었다.
[카니아 왕족은 신을 속인 핏줄의 흔적이다. 그것을 벌하기 위해 제국의 황제가 신의 사자로 왔다.]
대체 누가 저런 얼토당토않은 소문을 만들어낸 것일까.
하지만 제국의 황제가 코레아 왕족 출신이라는 것과 빛의 마생물을 데리고 다니는 게 그 소문을 진짜처럼 보이게 했다.
빛의 생물은 신이 보낸 심부름꾼, 대지의 정령이라는 믿음이 디코콰리아와 카니아에서는 유난히 강하다. 누군가가 그걸 부추기고 있었다.
'제국의 황제는 무섭구나.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이 나라를 집어삼키고 있으니.'
왕세자는 한탄하며 눈을 감았다.
편지 말미에는 이것이 마지막 소식이라고 적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정보가 끊긴다.
하지만 정보상을 탓할 수는 없었다.
왕세자는 벌써 이 년이나 제대로 된 지불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보상은 오랫동안 일했던 의리를 지켜, 적은 돈으로도 꾸준히 정보를 보내주었다. 감사할 뿐이다.
"전하."
한쪽에 가만히 앉아있던 왕세자비가 걱정스러운 듯 그를 불렀다.
"나쁜 소식입니까?"
"아니,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요. 바깥 상황을 알려주는 정보상의 편지일 뿐이니."
왕세자는 참담함을 감추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왕세자비는 그의 말에 안심한 듯 살짝 숨을 쉬었다.
아내는 고위 백작가의 장녀다. 마력소유가 많이 태어나는 집안이라 아버지가 이곳과 혼사를 맺었다.
아버지 왕은 많이 기대하고 있었지만 태어난 아이들은 적은 마력만을 가지고 있었다. 있어도 없는 듯한 보잘것없는 마력이었다.
왕가에 시집가서 마력소유를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내는 많이 시달려왔다. 항상 위축되고 두려워한다. 결국 그녀의 친정에 의탁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조차 아내는 기를 펴지 못했다. 이번에는 몰락한 남편 때문이다. 이래저래 불쌍한 여자다.
"전하, 마마, 요기할 것을 조금 가져왔습니다."
시종장이 약간 떨어진 테이블에 쟁반을 내렸다. 와인과 약간의 고기 요리가 담겨있다.
"고맙네, 시종장."
"...."
시종장이 조용히 고개를 내리고 한발 뒤로 물러섰다.
점심때 백작과 언쟁하느라 제대로 식사하지 못했다. 시종장이 챙겨주지 않았다면 저녁까지 상당히 곤란했을 것이다.
왕궁에 있을 때는 물건 놓는 용도로도 사용하지 않던 작은 테이블에 두 사람이 앉는다.
테이블 가장자리에는 어린 소녀가 좋아할 법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작은방, 작은 테이블, 시종장 한 명뿐인 하인.
이곳은 아내가 왕가로 시집오기 전에 사용하던 방이라고 들었다.
장식이나 가구도 왕궁에 비하면 한참 질이 떨어지고, 여성이 사용하던 것들이라 왕세자에게는 다소 난감한 물건이 많다.
하지만 교체나 보충은 전혀 없었다.
겉으로는 웃으며 환대하고 있지만 자신이 얼마나 홀대받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한 입 들어간 고기에 목이 멨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모든 것은 아버지가 점점 이상하게 변해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현명한 왕이라거나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왕이었다. 나라를 위해 마력소유인 와토린구 공작의 후계자를 선택할지, 암염 지역을 선택할지 고민할 정도로는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한데 어느 날인가부터 갑자기 하루 종일 애첩의 방에서 나오지 않거나, 어제 한 말을 똑같이 오늘 하기 시작했다. 조짐은 이전부터 있었다. 다만 왕이라는 존재 앞에서 아무도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왕세자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우물우물 고기를 씹었다.
제국의 황제는 한발 한발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 마치 바닷물에 카니아라는 나라 전체가 잠기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잔잔하게 흘러들어오지만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아내의 아버지인 백작은 수비에 전념하자고 말하고 있다.
이곳의 성은 견고하기로 유명하다. 산 중턱에 지은 성이라, 대군이 한꺼번에 몰려올 수 없다. 주도로 사용하는 길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산길이다. 말이 오가기 어려워 기마병이 올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보병도 대열을 짜고 공격할 수 없다.
거기에다 제국도 먹고살아야 하는 인간의 집단이다. 주변이 온통 나무와 돌멩이 뿐인 산속에서는 음식을 조달하기도 힘들어 오래 머물지 못한다. 수비에 전념하며 버티고 있으면 언젠가는 제국군도 물러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백작은 그렇게 주장했다.
그의 말이 일부분은 옳을지 모른다.
쳐들어오는 게 제국군이 아니라면, 그들이 마도병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왕세자도 거기에 동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보상이 전해주는 소식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정보가 옳다면 예전에는 난공불락이었던 이 성도 순식간에 파괴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느니, 산과 좁은 길목의 이점을 살려 싸우는 것이 낫다. 제국의 황제는 항상 최전선, 제일 앞에서 싸운다. 운이 좋다면 황제의 목을 벨 가능성도 있었다.
왕세자는 그렇게 주장했지만, 그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세자의 부하도, 백작의 수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왕세자는 그들이 모두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비를 선택한 게 아니라, 수비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항복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곳에는 왕세자라는 제물이 있다. 자신을 사로잡아 협상하면 목숨은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방금 정보상에게 받은 편지로 알게 되었다. 백작은 이미 자신을 넘길 테니 가문을 존속시켜달라는 서신을 제국의 황제에게 보낸 적이 있었다. 단칼에 거부되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을 뿐이다.
"후후."
문득 웃음이 나왔다.
왕세자비가 고개를 갸웃하고 그를 보았다.
"전하, 무엇이 우스운가요?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 그대와 이렇게 앉아 있는 게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왕제자비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약혼했던 시기에는 곧잘 이렇게 있었지요."
"그렇게 오래 되었나. 나는 한 몇 년 전쯤이라고 생각했는데."
"...."
왕세자는 테이블 위에서 아내의 손을 잡았다.
"미안하오."
"...."
아내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르고, 걸어오는 길마다 도시를 함락하던 제국군이 드디어 백작령의 경계에 도착했다.
'드디어 왔구나.'
왕세자는 높은 성, 창문을 통해 먼 하늘을 보았다.
성벽 근처에서 까마귀 몇 마리가 빙빙 하늘을 돌고 있다.
저것이 서쪽마녀의 까마귀인지, 아니면 먹을 걸 찾아 성을 찾아온 새인지는 모르겠다. 제국군은 아직 멀리 있으니 전자일 수도, 후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상관없을 것이다. 어차피 이 성은 함락당하고 말 테니까.
이 성에 있는 여자는 아내를 비롯해 모두 유린당하고, 카니아 왕의 핏줄을 잇는 어린 자식들은 죽을 것이다.
'미안하다.'
힘없는 남편이라, 바보 같은 아버지라, 가족을 유린당한다. 가슴속에서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낙엽이 모두 떨어지고 밤이 되면 살얼음이 어는, 이제 막 겨울이 시작되려는 어느 날의 일이었다.
***
"이 산은 춥군요. 와토린구에 있을 때도 징글징글했는데 어째서 성이라는 걸 산에다 짓는 건가요. 아, 정말, 거시기 다 얼어붙겠네."
레빈이 투덜거린다.
성안에 있을 때와 달리, 병사들과 함께 있을 때의 레빈은 말도 지저분해지고 행동도 다소 난폭해졌다.
이런 모습, 제국 황궁에서 귀부인들에게 보여주면 다들 기절하지 않을까. 여자들이 가면을 쓴다지만, 레빈만큼 두툼한 철가면은 아닐 거다.
루디가 쓴웃음을 지으며 앞을 보았다.
왕세자가 머물고 있는 성은 와토린구의 절벽에 있는 성보다는 못해도 상당히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시기도 겨울에 접어드는 계절이라 상당히 춥다. 이곳은 위치 때문에 더욱 추운 듯하다.
성까지 올라가는 길은 군데군데 좁아져서, 어떤 곳은 마차 한 대가 넉넉하게 지나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 길 외에는 나무가 무성한 숲을 뚫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루디는 말위에서 느긋하게 흔들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다른 곳에서와 달리 여기에서는 습격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벌써 성에 다 와 가는데 아무도 덤비지 않는군."
왕세자는 용맹한 사람이라고 들었다. 디코콰리아 전쟁에도 참전했다던가. 마창 시합에서도 여러 번 우승했다고 하니 실제로 강한 사람일 거다. 그래서 조금쯤 기대했다.
"폐하, 습격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레빈이 기막히다는 듯이 루디를 보았다.
"마녀의 까마귀가 천 마리나 하늘에서 빙빙 돌고 있는 데다 폐하의 마생물은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적이 오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척후병까지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데, 눈이 제대로 박혀 있는 놈이면 습격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뭐, 그렇기는 하지. 다만 어차피 구석까지 몰린 왕세자라면 마지막에 한 번 덤벼오지는 않을까 생각했던 것뿐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걸 빌미 삼아 왕세자비와 아이 정도는 구해줄 수 있을 텐데.'
이 세상에서 용맹함은 칭송의 대상이다. 마지막 왕세자가 용감하게 제국에 맞서다 죽었다면 그 기상을 높이 사서 다소의 온정을 내릴 수 있다.
천천히 말을 몰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척후병이 달려왔다.
"적의 성문 앞에 말 탄 장수가 있습니다."
"장수? 병사들이 있는 게 아니라?"
"예, 폐하. 성문은 닫혀있고, 나와있는 건 한 명뿐입니다."
어쩌면 그 사람이 왕세자가 아닐까.
루디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걸렸다.
근처에 있던 대장 한 명이 척후병에게 물었다.
"함정은 아닌지 주변은 살펴봤나?"
"물론입니다. 하지만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대장은 영 미심쩍은 모양이다.
"함정은 없어도 뭔가 술수를 부린 건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대장은 병사들을 이끌고 자신이 직접 성문 앞으로 달려갔다.
루디가 성문 앞에 도착했을 때에는 앞서 달려간 대장 외에도 여러 병사들이 성문을 둥글게 포위하고 있었다.
성문 앞에는 남자가 말을 타고 혼자 서 있었다. 전신 갑옷을 입고 있다. 투구는 열려 있지만 생김새가 어떤지는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보좌관이 남자의 갑옷과 방패를 확인한 뒤 작은 소리로 말했다.
"카니아의 왕세자입니다."
루디는 병사들을 헤치고 흑마를 몰아 앞으로 나갔다.
루디의 모습을 확인한 남자가 푸드득거리는 말을 진정시킨다. 그리고 크게 자신의 이름을 외쳤다.
루디 자신의 이전 이름도 그렇지만 귀족이나 왕족의 이름은 다들 길고 어렵다. 평상시에 쓰기는커녕 본인도 제대로 외우지 못할 것 같은 이름을 왜 그토록 길게 짓는 건지 모르겠다.
왕세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힌 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전사로써 제국의 황제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그대가 진정한 남자요 전사라면 이 결투를 맞아 그것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루디는 작게 웃었다.
"카니아의 왕세자가 머리를 썼구나."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결투를 신청하면 체면 때문에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일대일 결투라면 제아무리 병사를 많이 몰고 왔어도 소용없다.
이기면 요행이요, 왕세자가 결투에서 진다 해도 어차피 죽을 목숨 조금 일찍 죽는 것뿐이다.
만일 루디가 결투 신청을 무시하더라도 왕세자에게 불이익은 없다. 제국의 황제만 약간의 오물을 뒤집어쓰게 될 뿐이다.
"저 남자, 마음에 들었다."
루디가 중얼거리자, 레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런 헛소리에 응하십니까? 폐하가 일개 귀족이라면 모를까, 황제로서는 무시할 개소리라고 생각하는데요."
"뭐, 그렇지. 하지만 지금까지 너무 심심했어."
루디의 말에 레빈이 어깨를 움찔했다.
"폐하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압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보나마나 아이가 불쌍하셨던 거지요."
레빈이 히죽 웃으며 한발 뒤로 말을 물렸다.
루디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앞으로 몰았다.
"나는 제국의 황제이며 모레노 공작인 루디 콘스탄틴 리리에 사루바니다. 그대의 신청을 받자."
어느새 말에서 내린 레빈이 루디의 칼을 두 손으로 받들고 다가왔다. 시종처럼 공손히 내민다. 아, 시종처럼이 아니라 시종이구나.
루디가 칼을 받아들자, 맞은편에 있던 왕세자가 투구를 닫았다.
뒤늦게 레빈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폐하, 지금이라도 제대로 투구와 갑옷을 갖출까요?"
"됐다."
정식 마창 시합이라면 모를까. 겉멋 들린 대화가 왔다 가기는 했지만 이건 실전이다.
왕족으로 교육받으며 자라난 카니아 왕세자와 달리, 루디는 일반 병사들 틈에서 치고받으며 훈련받았다. 저렇게 두껍고 투박한 갑옷 따위를 제대로 입고 싸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른 쪽에서 보좌관이 방패를 내밀었다.
루디는 방패를 들고 정면을 보았다.
왕세자가 고함을 지르며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