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마녀 vs 마녀
사방이 까마귀 울음소리로 시끄럽다. 얼핏 봐도 백 마리는 훨씬 넘는 것 같다.
가까이 있는 것만 그러니, 저 멀리 나무 위에서 지켜보는 것과 하늘에 떠 있는 것까지 비교하면 수백, 아니 천 마리도 넘는지 모른다.
데보라는 그렇게 많은 동물을 사역할 수 있는 마녀를 서쪽마녀 외에는 알지 못한다. 물론 자신 역시 할 수 없다. 서쪽마녀가 부리는 까마귀의 수는 비정상을 넘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말 싫은 계집.'
데보라의 입술이 흉하게 비뚤어졌다.
서쪽마녀를 죽이려 했기 때문에 자신을 쫓아온 건지, 아니면 제국의 명령을 받은 건지 몰라도 자신의 운은 여기까지였던 것 같다. 실력 차이가 너무 극명했다.
오래전, 데보라는 서쪽마녀의 영역에 간 적이 있다. 경계에 살짝 들어간 정도일까. 아마 마녀 가까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는 자신의 전성기였다.
두꺼비를 부리는 능력은 최고조에 이르러 있었고 몸에는 마력이 가득했다. 오만이었다. 자신의 능력 정도면 충분히 서쪽마녀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쪽마녀가 유명한 점을 질투했었다.
하지만 상대도 되지 않았다.
서쪽마녀의 까마귀는 자신의 세력권에 다른 마녀의 사역동물이 들어오면 무자비하게 몰아내고 죽여버린다.
데보라의 두꺼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눈앞에서 다 죽어버렸다. 심지어 서쪽마녀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는데. 어쩌면 서쪽마녀는 그 일도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두꺼비가 한 마리 한 마리 죽어가는 동안, 데보라 혼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서쪽마녀는 어떤지 몰라도, 동물을 다시 길들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당시 서쪽마녀의 까마귀 때문에 줄어든 사역동물은 최근에야 간신히 이전의 수를 거의 따라잡았다.
한창때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으니 나이 든 지금은 도망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데보라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서 당해줄 생각은 없다.
데보라는 옷 속에 숨기고 있던 주머니를 꺼냈다.
두꺼운 천으로 만든 주머니 안에는 마력을 몸속에 가둘 때 사용하는 가루가 들어있다.
까마귀처럼 작은 몸집을 가진 동물이라면 이 주머니 하나로 꽤 많은 숫자를 상대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공격해오지 않았다. 까마귀들은 단지 이쪽을 보며 시끄럽게 울어댈 뿐이다.
'뭐지?'
조금 당황했다. 자신을 죽이러 온 것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대체 뭐 때문에 온 거야?
아니, 생각할 겨를이 없다.
데보라는 몸을 돌렸다. 두꺼비를 가까이 불러 곁을 지키게 하고 걸음을 뗀다.
그 순간 까마귀가 날갯짓을 하며 요란하게 울었다. 까악,까악, 소리 때문에 귀가 아프다.
'날 여기 붙잡아 두려는 건가.'
데보라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누군가 여기에 오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웃기지 마. 가만히 앉아서 죽어줄 것 같아?
데보라는 가까이 다가오는 까마귀에게 가루를 던지며 달리기 시작했다.
***
까마귀 몇 마리와 교류가 끊어졌다.
데보라가 뿌리는 가루 때문일 거다.
'저게 나한테 사용했던 건가.'
사무관에게서 데보라가 자신의 마력을 가두었던 마녀라는 사실은 전해 들었다. 약간 화가 나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은 쓰지 않는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제국의 황제가 시조라는 사실은 영원히 모르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이번에 잡히면 어떻게 되는 걸까.'
에이나 왕국으로 보낸다고 들었다. 그 나라에서 마녀 데보라를 원하고 있다고.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만 좋은 일은 아닐 거다.
아주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놓아줄 수는 없다. 겨우 황제의 도움이 된 거야.
서쪽마녀는 도망치려는 데보라의 앞을 막으면서 살짝 한숨을 쉬었다.
***
데보라의 흔적은 중간에 끊겨 있었다.
마녀는 산으로 가면 추적하기가 어렵다.
사역동물을 부리는 마녀도, 그렇지 않은 마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가진 마력을 이용해서 사람의 이목을 혼란시키는 술수를 사용한다. 군데군데 함정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 걸 만나면 사람은 곧장 가던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 자신이 제대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면 엉뚱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 거다.
마녀는 도시에서도 그런 술수를 사용하지만 산에서는 그 교묘함이 더욱 강해진다.
순식간에 정상적인 길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더니 절벽에서 떨어지기 직전인 경우도 있었다.
이번에도 광대는 산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길을 잃었다.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흔적을 잃어버린 뒤였다.
제국에서 보낸 마도병과 까마귀가 없었다면 분명 데보라의 추적은 거기에서 끝이었을 거다.
첩자가 알려준 장소는 광대가 들어갔던 곳과 전혀 다른 산이었다. 마녀도 여자일진대, 어떻게 그토록 멀리 갔는지 모르겠다.
'또다시 놓치는가 싶었는데.'
어쨌든 다행이다.
데보라가 자신이 찾고 있던 마녀인지는 모른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어릴 때 기억은 쉽게 왜곡된다. 어릴 때 두꺼비를 본 것 같은 기분은 들지만 확실치 않았다.
까악, 까악.
그들을 안내하던 까마귀가 하늘을 빙글 돌았다. 그리고 훌쩍 날아간다. 멀리, 한 지점에서 까마귀들이 날고 있다. 수가 많았다. 수십은 훌쩍 넘겨, 어쩌면 수백 마리 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저쪽에 있는 것 같군요."
광대는 까마귀가 있는 방향과 거리를 가늠해본 뒤, 병사들을 보았다.
"한 시간 정도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잡고 있는 밧줄을 놓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앞사람과 한 발자국만 멀어져도 마녀의 함정에 빠집니다. 만일 줄을 붙잡고 있는데도 앞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면 환각에 빠진 거니, 즉시 소리치십시오."
"알았습니다."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그와 에이나 왕국까지 동행하는 병사의 수는 이십 명가량이다. 모두 마도병이라고 했다.
세 명은 중장비 병이라고 하는데, 커다란 상자를 한 개 가지고 있어서 산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광대는 몇 년 전부터 제국의 첩자로 일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마도병을 본 적이 없다. 제국의 전쟁터에는 가까이 가지 않은 채 주로 마녀를 연구하고 추적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혼자 일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정보를 얻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왕족에 접근하기 가장 쉬운 길이라 생각해서 광대 일을 하지만 충분한 돈이 벌리지 않기 때문에 먹고사는 것도 힘들었다.
제국의 뒷받침이 생기자 먹고 살 걱정도 없어졌지만 일도 훨씬 쉬워졌다. 어디를 가도 제국의 첩자가 있고 연결이 만들어진다. 혼자 일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추적이 빨라졌다.
'하지만 저 병사들은 너무 약해 보이는데.'
광대의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제국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마도병이라고 보낸 병사들은 모두 어리고 미숙해 보였다.
모두 이십 대 초반 정도인 것 같다.
서른 쯤 되어 보이는 사람조차 없었다.
허리에 긴 막대기 하나 꽂고 있는 외에는 무기도 변변찮다.
긴 칼이나 창은 든 사람이 아예 없고, 막대기 외에는 작은 칼만 한 개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몸도 가늘다.
우락부락한 거인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광대보다도 몸이 약해 보이는 건 아무래도 문제가 아닐까.
산에는 익숙한지 곧잘 걷지만 저희끼리 장난을 하거나 킬킬대는 모습을 보면 정말 병사가 맞기는 한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마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닌데.'
이 정도라면 레빈이 훨씬 나을 것이다.
겉으로는 실실 웃기만 했어도, 레빈은 제대로 싸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병사들은.
'마녀를 잡을 때 걸리적거리지만 않으면 좋겠네.'
광대는 속으로 중얼거리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마녀의 함정을 한 번 건드렸지만 까마귀가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환각에서 빠져나왔다.
점점 까마귀가 많아진다.
그리고 마침내, 갑자기 확 트인 공간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 분명히 산속이었는데 언제 이동했는지 훌쩍 넓어졌다. 빽빽하게 사방을 메우고 있던 나무가 이 공간에만 없다.
한쪽 구석에 우물이 있는 것이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잠시 뒤에는 그 생각도 사라졌다. 산속에 사는 사람이 만들었던 거겠지, 싶었다.
'데보라는 어디에 있는 거지?'
하늘 위를 올려다보면 까마귀가 이곳을 중심을 돌고 있다. 분명히 이곳이 목적지인 것 같은데 데보라가 보이지 않는다.
그때 뭔가가 강하게 그의 몸에 부딪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데보라가 이곳으로 달려와 박치기하듯 부딪친 뒤, 그 반동으로 넘어져 있었다.
"!"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맙소사, 이건 환각이다.
황급히 사방을 둘러보자 병사들의 모습은 모두 제대로 보였다. 밧줄도 붙잡고 있다.
어디에도 부자연스러운 것은 없었다.
아니, 한 가지 있구나.
광대의 시선이 우물을 향했다.
우물 속에서 까마귀가 튀어나온다.
한 마리, 두 마리, 열 마리, 백 마리, 수도 없이 솟구쳐 오르며 까마귀들이 까악, 까악,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너른 공간이 사라졌다.
광대는 지금까지 걸어온 것과 비슷한, 빽빽하게 나무가 들어찬 곳에 서 있었다.
데보라가 사방을 둘러보더니 중얼거렸다.
"맙소사, 도망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이곳에서 맴돌고 있었던 건가."
마녀인 데보라조차 환각에 걸려 있었던 모양이다. 직접 오지도 않고 이런 함정을 만들어내다니, 서쪽마녀는 대체 뭐야. 광대는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팔을 문질러댔다.
태평한 것은 마도병들이다.
그들은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데보라를 둘러쌌다.
데보라는 지쳐서 더 이상은 도망치거나 싸울 기력도 없는 것 같다. 광대와 부딪쳐 쓰러진 채로 숨을 헐떡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문득 시선을 돌리자, 커다란 두꺼비 몇 마리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모두 벌렁 배를 뒤집은 채 죽어 있다. 자연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 배가 갈기갈기 찢어져 내장이 흘러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마도병이 데보라를 밧줄로 묶는다.
가만히 보니, 그 밧줄에 마법문자가 적혀 있는 것 같다.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 그려져 있었다.
광대가 유심히 보는 것을 깨닫고, 마도병 한 명이 싱글싱글 웃었다.
"우리 폐하가 적어주신 거예요. 이게 있으면 마녀도 힘을 쓰지 못한다고 합니다."
뭐야, 그런 게 가능하다고?
광대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자 마도병이 뻐기듯이 가슴을 내밀었다.
"우리 폐하는 마도 병기도 만드는 분이거든요. 이런 것쯤은 쉬운 일이죠."
"...."
"정말이거든요."
"아니, 압니다. 나도 소문은 여러가지로 듣고 있었기 때문에."
마도병의 말이 사실인지는 앞으로 두고 보면 금방 알 일이다.
광대는 어색하게 웃은 뒤, 마녀 데보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습니다. 잠시만요."
마도병이 약간 비켜주자, 광대는 마녀의 치맛자락을 훌렁 넘겨 무릎 뒤쪽을 보았다.
거기에는 손톱만큼 커다란 점이 하나 있었다.
다리를 움켜진 손에 힘이 담겼다. 데보라가 아픈 듯 몸을 비튼다. 광대는 이를 꽉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찾았다, 이 망할 할망구!"
드디어 어머니를 찾았다.
광대의 눈이 대번 험악해졌다.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당신, 자기가 낳은 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고 있나? 응? 생각은 해본 적 있어? 그 아이가 어떤 고통을 겪고 있을지 알고는 있었느냐구!"
데보라의 멱살을 붙잡고 소리치자, 마녀가 놀란 얼굴로 그를 보더니 중얼거렸다.
"설마, 이든?"
"그래, 망할! 이든이다. 당신의 아들. 당신이 에이나 왕국에 버리고 간 아들이야."
"...."
"말도 안 나오나 보지? 뭐, 상관없어. 하지만 이것만은 똑똑히 알아둬라. 당신의 딸은 마력소유를 낳는 도구로 살다 죽었다."
광대는 뒤틀린 얼굴로 웃었다.
"그 애는 말이야, 매년 쉬지도 못한 채 아이를 낳고, 태어난 아이가 마력소유가 아니면 죽을 만큼 맞았어. 그 아이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알려줄까? 배만 둥글게 나와서 온 몸이 멍으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새끼 낳는 씨종자로 살았다. 마력소유를 낳는 도구로 살다 동생이 죽은 뒤 간신히 도망쳤다. 그 이후, 그는 자신들을 낳고 그 나라에 버려둔 어머니를 찾아 헤맸다.
"당신이 우리들을 낳은 것으로, 에이나에서는 마녀를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마력소유를 늘리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걸 알았지. 마녀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광대는 데보라의 귓가에 바짝 얼굴을 댔다.
"당신도 내 동생이랑 똑같이 될 거야. 당신이 만든 약은 당신에게도 효과적이지. 에이나는 그걸 알고 여러 해 동안 그 약을 구매해왔다. 당신이 판매한 약의 상당 부분은 에이나 사람이 뒤에서 사간 거야."
데보라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어떻게든 힘을 쓰려고 하는 것 같지만 마력의 흐름이 멈춘 것 같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사역동물조차 오지 않는다. 어쩌면 서쪽마녀의 까마귀가 모두 죽여버린 뒤인지도 모른다.
하하, 웃으며 광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시다."
광대가 말하자, 마도병들이 데보라를 끌고 움직였다.
산 밑에는 데보라를 태울 마차가 있다.
광대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데보라의 약을 그녀의 입에 강제로 털어 넣었다.
한 번에 마력을 가둘 수는 없다. 여러 날 먹여야만 할 것이다. 그 부분이 약간 걱정됐지만, 마도병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며 마차의 문 안쪽을 보여주었다.
"이 안에 가두면 마력을 쓸 수 없게 될 거예요. 이것도 우리 폐하께서 적어주신 겁니다."
"...."
제국의 황제가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보통 사람이 상상도 못할 빛의 생물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도 듣고 있었다.
그중 일부분은 진실일 것이다. 마도병기가 실제로 전쟁에 사용되고 있으니까 다른 소문과 달리 신빙성은 높다.
하지만 광대는 첩자들이 어떤 식으로 진실에 가짜를 섞어 소문을 만드는지 바로 옆에서 보아온 사람이다. 황제의 소문 중 상당 부분은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밧줄과 마차에 마녀를 억제할 수 있는 마법 주문을 적어 넣을 수 있다는 건 너무 심한 과장이 아닐까.
가슴을 내밀며 황제를 자랑스러워하는 마도병에게 그런 말은 하지 못한 채, 광대는 어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