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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67화 (167/201)

#167 죄 많은 남자

카니아 왕궁은 제국의 병사들로 가득하다.

조금 전까지 몰려다니며 귀족을 죽이던 군중은 어느새 모두 주위에서 사라졌다.

제국군을 보고 도망간 건지 아니면 병사들이 내보낸 건지는 알 수 없다.

까마귀들이 둘러봤지만 더 이상 궁 안에는 없는 것 같다.

왕궁 복도에는 여기저기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서쪽마녀는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까마귀를 통해 보는 핏자국은 검고 기괴해 보였다. 비릿한 냄새 때문에 토할 것 같다. 여러 번 거듭해 겪는 일이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시체는 병사들이 치우고 있었다.

어디를 가도 제국의 병사들은 부지런하다. 제국병 상당수가 노예병인데도 누군가 시킨 뒤에야 마지못해 일하는 법이 없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서 일했다.

'나도 좀 더 노력해야지.'

지금까지처럼 흘러가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 어쩌면 그래왔기 때문에 시조의 마음에 남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서쪽마녀에게는 황후에게서 사랑을 빼앗겠다거나 황제와 더 깊숙한 관계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약간만 그 사람의 마음에 흔적을 남기면 된다. 아주 조금, 다음 생에서 그녀를 기억해 줄 정도면 돼.

서쪽마녀는 사무관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황제가 에스코트해 준 것은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때까지였다. 그는 곧바로 제국군 대장들과 함께 커다란 홀로 가버렸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그 사람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동했지만 조금, 아니, 상당히 많이 기쁘다.

카니아에 온 뒤로 황제와의 거리가 많이 줄어들었다. 황제 스스로 에스코트를 하다니, 이전이라면 생각도 못 할 일이다.

'그는 변하지 않았어.'

다소 냉정하고 낯설게 되었지만, 그것은 자신이 그 사람의 원 밖에 서있기 때문이다.

황제는 예전에도, 지금도, 자신의 주변에 원을 그리고 있다. 그 안에 들어간 사람에게는 한없이 다정하지만 밖에 서 있는 자에게는 냉정하다.

"...."

예전에는 서쪽마녀도 그 원 안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원 밖, 어쩌면 가장자리에서 가까운 자리 정도가 아닐까.

'다시 그 안에 들어가고 싶어.'

지금 바라는 것은 단지 그것뿐이다.

하지만 노력의 방향을 모르겠다.

어떻게 노력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이전의 자신은 시조에게 구해졌을 때부터 그 원 안에 들어가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시조의 부인이 자신을 다정하게 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쪽마녀에게는 시조의 부인도 소중했다. 시조를 조금 더 바라고 있었지만 자신을 손녀처럼 대해주는 부인의 곁에 있으면 따뜻한 봄바람에 휩싸여 있는 기분이었다.

'아.'

그렇구나.

문득 서쪽마녀는 어떻게 하면 황제의 원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건지 깨달았다. 오히려 왜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다. 답은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황후의 마음속에 들어가면 돼.'

그녀가 마음으로 허락해 주는 곳까지, 아마 황제도 너그러워진다.

서쪽마녀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외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시조의 부인과 달리 리리샤 황후는 자신보다 어리고 아름답다. 그래서 약간은 질투하고 있었는지도.

어쩌면 오래전, 서쪽마녀는 시조의 부인이 늙고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에 우월감을 느낀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인이 죽은 뒤에는 자신이 시조의 진짜 아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자신이 그녀보다 아름다우니까. 뭐야, 나는 너무 추한 사람이 아닌가.

두서없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쪽마녀는 어깨를 약간 늘어뜨렸다.

자신이 고매한 사람이라 자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토록 천박한 사고를 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사무관은 서쪽마녀를 작은방으로 안내했다. 황제가 부하들과 함께 있는 큰 홀 옆에 있는 방이다.

홀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까마귀 몇 마리가 황제 곁에 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거리가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 웃었다.'

황제가 부하들을 보고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달콤한 사탕 같아. 이럴 때는 약간 어려 보였다. 다 큰 청년인데, 어딘지 모르게 소년 같다.

까마귀로 황제를 엿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황제는 그런 일을 싫어해. 그가 싫어하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서쪽마녀는 그저 불쑥 나타나는 황제의 얼굴을 볼 뿐이다.

까마귀가 보내는 영상은 때로 자신이 마음대로 차단할 수 없다. 불청객처럼 불쑥 나타난다.

그리고 까마귀가 황제를 바라볼 때는 대부분 그런 경우였다. 자신의 주인을 앞에 두고, 까마귀는 스스로의 감정을 어찌할 줄 모르며 기뻐했다.

까마귀가 보는 황제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아마 실제보다도 훨씬 화려한 게 아닐까. 까마귀의 시선으로 황제를 보면 마치 그의 존재 자체가 햇님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것 같다.

좋다. 아름답다. 마음이 콩콩 뛰고 웃는 것 같다. 언제까지고 마냥 보고 있으면 좋겠다.

멍하니 앉아 황제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영상이 바뀌었다.

높은 산이다.

주변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은 나무로 가득하고, 허공으로 우뚝 솟은 가장 높은 나무에는 새 둥지가 있었다.

시선이 밑으로 급작스럽게 이동했다.

처음에는 한 마리였던 까마귀의 영상이 다시 연이어 바뀌었다.

두 번째 까마귀가 보내주는 영상은 땅에 가깝다. 군데군데 커다란 돌이 있고 밑부분에는 이끼가 나있었다.

그리고 두꺼비가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까마귀의 시점이 또 바뀌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자꾸 바뀐다.

그리고 전체적인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무 뒤에 여자가 숨어 있다. 약간 둥근 얼굴에 가느다란 목을 가진 여자였다.

두꺼비 한 마리가 그녀의 옆에서 몸을 잔뜩 부풀리고 있었다. 마력으로 몸을 불리고 있기 때문에 보통 두꺼비 보다 훨씬 크다.

서쪽마녀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찾았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순간, 까마귀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까악, 울었다.

까마귀 만으로는 위치를 알아낼 수 없다.

마녀 데보라가 있는 산속에서 까마귀 여러 마리가 합창하듯 울어대자, 다른 곳을 날고 있던 까마귀가 그곳으로 향했다.

서쪽마녀의 머리카락을 물려서 보낸 까마귀다.

까마귀가 날아가는 허공이 시야에 들어왔다.

서쪽마녀의 감각이 저릿저릿해진다.

까마귀가 물고 있던 머리카락이 슬슬 길어졌다. 은빛의 머리카락은 타래에서 풀려나오는 실처럼 끝없이 길이를 늘여, 나무를 지나 바닥으로 바닥으로 내려갔다.

머리카락에 닿는 나무의 감촉이 카니아 왕궁 안에 있는 서쪽마녀에게도 또렷하게 느껴졌다.

서쪽마녀의 머리카락이 은은하게 빛나며 백색으로 변해갔다.

"...."

까마귀가 물고 있는 머리카락이 바닥에 닿았다. 돌과 모래, 축축한 흙의 감각이 그대로 들어온다.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까악, 까악, 까마귀가 운다. 왕궁에 있는 아이들도, 저 먼 산속에 있는 아이들도 동시에 울기 시작했다.

"후훗."

서쪽마녀는 작게 웃었다.

황제의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멍청하게 성 안에 까마귀를 날리는 것밖에 하지 못했던 그녀가 이제야 겨우 황제의 일을 도울 수 있다.

서쪽마녀는 옆에 대기하고 있던 사무관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마녀 데보라를 찾았습니다."

***

사방에서 까마귀가 깍깍거리고 운다.

레빈은 자기도 모르게 황제 옆으로 한발 다가섰다.

그는 언제라도 칼을 뺄 수 있게 준비하면서 루디 주변에 있는 까마귀를 곁눈질로 보았다.

"괜찮아."

황제가 히죽 웃었다.

주변에 있는 시종 보좌관과 대장들도 침착하다.

아니, 왜 그렇게 느긋한가. 그러다 황제의 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레빈의 마음이 자극을 받아 약간 튀었다.

루디가 어깨를 약간 움츠리며 말했다.

"가끔 저러는 거야. 갑자기 울어댄다."

"그렇다면 더욱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레빈의 말에, 이번에는 루디가 소리 내어 웃었다. 시종 보좌관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 짓는다.

"다들 처음에는 그대처럼 반응하지. 하지만 금세 다른 사람들처럼 된다. 두고 봐, 레빈. 자네도 며칠 지나면 무덤덤해질 테니."

"...."

농담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글쎄, 레빈 자신이 그렇게 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보리스의 교육을 받은 자신이라면 아무리 태평한 상황에서도 절대 경계를 풀지 않는다.

몇 명이 마녀에 대해서 농담처럼 이것저것 이야기하는 와중에, 홀의 커다란 입구로 사무관이 마녀를 데리고 왔다.

"폐하, 서쪽마녀가 데보라를 찾았습니다."

사무관이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레빈은 가만히 루디가 마녀를 향해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번에도 황제는 스스로 서쪽마녀에게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했다.

우아한 동작으로 몸을 돌려 마녀를 데려오는 루디를 보면서, 레빈은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홀리거나 미약에 당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루디는 그렇게 보기에는 의식이 너무 명료하다.

서쪽마녀를 저런 식으로 대하는 것도 아마 정치적인 면이 클 것이다. 마녀라는 존재가 주는 강렬한 인상을 이용해서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것뿐이다.

루디는 종종 감상적이 되기는 하지만, 동시에 매우 계산적인 면이 있었다. 단순한 호감 만으로 저런 행동을 할 리 없다.

'알기는 하지만.'

잠시 안 본 사이에 너무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여자에게 다소 냉정한 면이 있는 루디 치고는, 그래, 너무 가깝다.

타이라에게조차 루디는 시녀 이상의 존재로는 접하지 않았는데, 마녀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저런 식일까.

레빈이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

레빈은 약간 수줍은 듯 루디에게 말하는 서쪽마녀의 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그녀는 데보라의 위치를 손가락으로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하고 있었다.

지명도 모르는 것 같다. 그저 어떻게 생긴 도시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다거나, 이렇게 생긴 산이고, 무슨 나무가 있고, 하늘에서 본 산의 모습과 마을은 이렇다, 라고 까마귀가 본 그대로를 말했다.

하지만 비슷한 지역을 대며 거기냐고 묻는 질문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곳은 아닙니다, 비슷하지만 달라요.

그녀의 대답은 까마귀가 보는 영상을 그대로 말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뭔가 다른 술수로 위치를 알고 있는 거다.

소름이 끼쳤다.

광대에게 듣고 있던 마녀들과는 너무 다르다.

광대가 말한 마녀는 그저 인간보다 약간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서쪽마녀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어쩌면 그녀는 마녀가 아닌 뭔가일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녀라고 부르고 있을 뿐인지도.

"...."

서쪽마녀의 과거나 정체는 여전히 모르는 부분이 많다.

마녀는 대부분 혼자 지낸다. 제자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을 정도로 타인을 꺼린다고 들었다.

어떤 마녀가 제자를 받아도 그 한 번으로 끝날 확률이 크다는 말이다.

하지만 서쪽마녀는 천년 이상 계속해서 그 이름을 계승한 마녀가 나타났다.

특징도 매번 똑같다.

능력을 사용할 때는 백발이 되고, 까마귀를 사역한다.

마녀는 여러 술수를 사용하여 보통 사람보다 오래 산다고 하지만, 그래봤자 백 년이다.

백 년 정도 지나면 오랫동안 유지한 미모가 갑자기 늙어버린다고 한다.

하지만 서쪽마녀가 늙었다거나, 제자인 어린 소녀와 함께 나타난 적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어린 소녀가 서쪽마녀의 특징을 계승했다는 이야기는 드물게 내려오지만, 항상 혼자였다.

광대에게 물어보니, 마녀가 정말 마녀로서 기능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십 년 넘게 능력을 익힐 필요가 있다고 했다.

십 년이라는 기간도 천 년에 한 번 나타날 정도로 능력이 출중한 천재나 가능한 일일뿐, 보통은 수십 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마녀도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천년에 한 번 나타날 정도로 드문 천재가 백여 년에 한 번씩 매번 나타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역시 서쪽마녀는 너무 수상하다.

레빈은 소녀처럼 뺨을 붉히며 황제를 올려다보는 마녀를 가만히 보았다.

눈도 보이지 않으면서, 그녀는 마치 눈이 부신 듯한 표정으로 황제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서쪽마녀를 담당하고 있는 사무관과 이쪽 지리에 밝은 시종이 이야기를 종합해, 지도의 한 지점을 확정했다.

"마녀는 이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레빈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첩자는 시종과 보리스 밑에서 일한다.

황제를 보좌하기 위해 이 전쟁에 나온 시종들 역시 모두 첩자와 연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람만 시종장이 골라 보낸 거다.

황제의 일과 신변에 아무 불편함이 없도록, 사적인 면과 공적인 면을 모두 돌볼 수 있는 시종들이 와 있었다.

루디는 지도를 확인한 뒤 서쪽마녀를 보았다.

"그대가 이쪽에 있으면서도 데보라를 상대할 수 있을까?"

"물론이에요. 폐하가 원하신다면 그녀를 이쪽으로 데려올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필요 없어. 계속 행방을 쫓으면서 잡을 수 있게 도와주면 돼."

루디가 시종 보좌관을 향해 말했다.

"좋아, 그렇게 진행하지. 마녀를 잡아서 에이나 왕국에 보내 주게. 그리고, 흠, 그때 마도병도 같이 보내. 변경백 하나 가지고 너무 질질 끄는 것 같아. 빨리 전쟁을 끝내고 내년에는 집으로 돌아가야지."

"알겠습니다, 폐하."

시종 보좌관이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루디가 서쪽마녀에게 잘했다고 한 마디 하자, 마녀가 수줍은 소녀처럼 고개를 숙이며 뺨을 붉혔다.

'...저건 뭐야.'

레빈이 여자를 보는 눈은 상당히 정확해졌다고 생각한다. 한데 아무리 봐도 서쪽마녀의 표정은 자신이 여자를 유혹했을 때 상대가 보이는 반응처럼 보였다.

레빈이 힐끔 시종을 쳐다보고 눈으로 어찌된 일인지 묻자 못 말린다는 듯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설마, 폐하는 의도하지도 않은 상태로 서쪽마녀를 함락한 겁니까. 마녀는 단순히 사랑에 빠진 것뿐인가요.

"...죄 많은 남자."

문득 중얼거리자, 루디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역시 서쪽마녀는 수상한 점이 많다. 뒤를 조금 더 캐보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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