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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66화 (166/201)

#166 각자의 행복

카니아 왕도를 점령하는 데는 몇 시간 걸리지 않았다.

병사의 수는 다른 도시보다 많았지만 군율은 형편없었던 것 같다. 훈련도 거의 하지 않았는지 제국군을 맞아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도 제국군의 모습을 보자마자 꽁무니 빠져라 도망치기 바빴다.

루디는 깨끗하게 잘린 2왕자의 머리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것은 성문에 걸어라. 비보 궁정백작의 목도 찾아서 함께 두도록 해."

"예, 폐하!"

근처에 있던 대장 한 명이 2왕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한 손으로 머리를 잡고 건물 밖으로 나간다.

"아, 잠깐!"

루디는 얼굴을 약간 찌푸렸지만, 곧바로 표정을 감췄다.

"왕자의 몸은 왕궁 밖에 버려두어라. 백성들에게 줘."

"알겠습니다."

대장은 특별히 꺼리는 모습 없이 부하를 불러 왕자의 몸을 밖으로 내갔다.

옆에 있던 레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폐하는 가끔 이상하십니다."

"뭐가?"

"백성들한테는 그렇게 다정하시면서 귀족이나 왕족한테는 오히려 보통보다 훨씬 냉정하시니까요."

레빈이 어깨를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평민한테 하는 걸 보면 사람 목을 베기는커녕 때리는 것도 못하실 것 같거든요."

루디의 목이 약간 비틀어졌다.

아니, 그건 아니지. 너랑 나랑 같이 훈련받았잖아. 사람 목 베는 정도는 항상 하던 거 아니냐.

보리스는 전투할 때마다 루디와 레빈을 일반 병사 사이에 두었다. 당연히 사람이 죽고 죽이는 한가운데서 지냈다.

처음에야 사람을 죽인 뒤에 토하거나 밥을 못 먹었지만, 세상만사 모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나중에는 시체가 가득한 들판에서도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전장에서 사람의 목을 베는 게 즐거울 리는 없어도 이제 와서 그런 행동에 저항은 없다. 그야말로 뭘 새삼스럽게라는 느낌이다.

하지만 레빈은 그런 걸 말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다음에 중얼거린 말을 듣고 알았다.

"왕족의 몸을 평민한테 주다니,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적어도 저는 본 적이 없어요."

왕족이나 평민이나, 루디가 볼 때는 별다를 것이 없다. 똑같이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다. 누가 더 특별하고 고귀하다는 인식은 없었다.

하지만 레빈 입장에서는 다른 모양이다.

아마도 왕은 신이 내리는 존재라는, 이 세상에 뿌리내리고 있는 믿음 때문일 거다.

루디는 바쁘게 움직이는 병사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대로라면 백성의 분노가 제대로 사그라들지 않은 채 끝나게 될 거야. 통치에 방해가 된다. 분노는 완전히 발산할 필요가 있어."

루디의 말에 레빈이 히죽 웃었다.

"정말 폐하는 가끔 이상하세요. 마음이 약한 건지 강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

가끔은 루디 자신도 스스로를 잘 모르겠다. 지구의 상식과 이 세상에서 익힌 감각이 뒤죽박죽되어서 어느새 이중인격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왕궁 안에서 몰려다니며 한참 날뛰던 주민들이 이제 슬슬 정신을 차리는 모양이다.

카니아 병사와 구분하지 못하고 제국군 병사에게 덤비려던 군중은 더 이상 없다.

오히려 제국군 병사들을 보고 도망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루디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불쑥 레빈에게 물었다.

"타이라에게 청혼했다고 들었어."

"예."

"그녀를 사랑하는 거야?"

"...."

당연히 금방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 없다. 이상해서 고개를 돌리자 레빈이 조용히 웃고 있었다.

"왜?"

"폐하, 타이라는 말이죠, 여자라기보다는 동생 같아요. 워낙 그 아이가 어릴 때부터 봐 왔으니까요."

그건 루디도 마찬가지다. 약간은 그런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레빈에게서 원했던 답은 그런 게 아니다.

루디가 얼굴을 찌푸리자, 레빈이 말을 이었다.

"제가 폐하를 처음 만났을 때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여동생이 있었어요. 나이가 많이 떨어져 있는 막내죠."

동생을 떠올렸는지 레빈의 눈이 가늘어졌다.

"타이라는 그 막내랑 나이가 비슷해요. 여자로 사랑하느냐 하면 그건 좀 다르지만, 저는 타이라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

"타이라는 저랑 혼인하면 괜찮아요. 아마 이 세상에서 저보다 그녀를 더 행복하게 만들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제 곁에 있으면 그녀는 포기할 필요가 없거든요. 영원히 마음속에 원하는 걸 간직하고 살 수 있어요."

"...."

"뭐, 죽을 때까지 자식은 바랄 수 없을 테지만 여자의 행복이 그것만은 아니니까요. 양자를 받거나 첩을 들여서 낳게 하면 되죠. 제가 그렇게 해도 타이라는 상처받지 않습니다."

거기까지 들으면 루디도 그 속에 들어있는 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타이라가 어릴 때 자신에게 희미한 연정을 품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라면서 그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색도 없었지만 워낙 리리샤와 사이가 좋았으니까.

"미안하다."

루디가 말하자, 레빈이 히죽 웃었다.

"저한테도 이득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녀가 아니라면 제 일을 이해하고 곁에 있어줄 여자는 정말 드물거든요."

레빈이 쾌활하게 웃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전 정말 인기가 많습니다. 누가 아내가 되든 아마 절실하게 저를 사랑하게 될 거예요. 질투하고 괴로워하겠지요. 하지만 그녀는...."

레빈이 작게 미소 지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동반자가 될 겁니다. 이해도 일치하지만 성격도 제법 잘 맞아요."

루디는 시선을 돌려 왕궁 건물 앞을 보았다.

아름답게 조성된 나무가 길게 뻗어있는 길 너머로 마차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서쪽마녀가 탄 마차다.

어째서일까.

그의 주변에는 점점 불행한 여자들만 모이는 것 같다.

자신이 여자를 불행하게 만드는 건지, 아니면 그런 운명을 타고 난 여자가 우연히 곁으로 오는 건지 모르겠다.

가라앉은 루디의 마음을 아는지 레빈이 중얼거렸다.

"사람마다 행복은 다 다른 겁니다. 폐하가 볼 때는 어떨지 몰라도 타이라는 행복해져요. 이게 가장 좋은 길입니다. 그녀는 황후마마도 폐하 못지않게 소중히 생각하니까요."

"...."

마차가 가까이 오자, 루디는 건물의 계단을 내려갔다.

서쪽마녀에게 붙여둔 사무관이 마차 문을 연다.

서쪽마녀가 평소처럼 어깨에 까마귀를 얹고 몸을 내밀었다. 약간 느린 동작으로 상체를 조금 기울인다.

루디는 그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수줍은 듯 서쪽마녀가 미소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이 몇 년의 전쟁 동안, 루디는 그녀를 조금 더 잘 알게 되었다.

소심한 여자다.

행복했던 적이 없어서인지 언제 불행이 닥쳐올까 두려워하며 벌벌 떨면서 산다.

루디와는 달리, 서쪽마녀는 지구에서조차 좋은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녀의 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간이 시조와 함께 했던 몇 년이라고 들었을 때는 루디의 마음도 약간 먹먹해졌다.

루디는 서쪽마녀가 리리샤를 적대시하거나 해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럴 염려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서쪽마녀는 그런 일을 할 만큼 강한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

삶에 지쳐서인지, 그녀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싶어 한다.

계속해서 시조를 소환하려고 노력한 것도, 따지고 보면 사랑보다는 기대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알면 루디도 예전처럼 매정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레빈의 시선을 느끼고, 루디는 한숨을 쉬었다.

병사들 중에는 마녀가 사랑의 묘약을 사용하거나 뭔가 이상한 술수를 사용하여 황제를 유혹하고 매료시킨 게 아닌가 의심하는 자가 있는 모양이다.

걱정이 되었는지 보좌관 중에서도 은근히 그를 떠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아니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루디는 그렇지 않다. 서쪽마녀를 사랑한다는 기분은 없었다.

'하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함께 오래 있으면 가면 쓴 모습만 보이기가 어려워진다. 본 모습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서쪽마녀처럼 실제로는 서툰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서쪽마녀는 루디와 있을 때 요염하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만 그게 가짜라는 사실은 초반에 이미 들통났다.

'하아.'

이전 삶에서 자신이 그녀를 딸처럼 손녀처럼 대했다고 하던데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

그녀는 선하기보다는 약한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는 뭐랄까, 그저 어린아이 같은 거다. 오갈 데가 없어 주운 사람 눈치 보는, 길 잃어버린 강아지 같다.

버려진 개마냥 살짝살짝 그의 눈치를 살피며, 까마귀에게 등 떠밀리듯이, 서쪽마녀는 루디에게 아주 조금씩만 접했다.

의붓 엄마한테 사랑받으려고 노력하는 신데렐라 같은 느낌이다.

루디는 자신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걷는 서쪽마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몸은 괜찮은가? 며칠 전에는 감기 기운이 있다고 들었다."

"예, 폐하. 괜찮습니다. 조금 미열이 있었던 것뿐이에요."

서쪽마녀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루디는 쓴웃음을 지었다.

레빈이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 때문에 얼굴이 뚫릴 것 같다.

"레빈, 데보라라는 마녀는 아직 못 찾았는가?"

"예, 폐하. 그녀가 사라진 걸 알자마자 광대가 추적에 나섰습니다만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마녀를 찾으면 각 지역에 있는 첩자에게 알리기로 약속되어 있다. 하지만 아직 소식 받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마녀는 한 번 숨으면 찾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니까요."

레빈의 말에 루디가 히죽 웃었다.

"뭐, 그렇다고는 들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마녀가 있으니 말이야. 어떤가, 그대가 찾아낼 수 있겠나?"

루디가 묻자 서쪽마녀가 차분한 표정을 만들었다.

"물론입니다, 폐하. 이미 며칠 전부터 추적하고 있어요. 흔적은 발견했습니다."

레빈을 의식한 듯 서쪽마녀가 요염하게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앞으로 서너 시간, 아니 한 시간 정도면 행방을 확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는군."

루디는 말하며 왕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 위에 올린 서쪽마녀의 손가락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모처럼 루디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기쁜 모양이다.

하지만 그 요염하려는 모습, 모르는 사람이 보면 괜찮을지 몰라도 본질을 아는 사람의 눈에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 그만뒀으면 좋겠다.

***

꺼거거거거거걱 꺼거거거거거걱.

딱딱 끊어지는 짧은 소리로 두꺼비가 운다.

눈을 껌벅이면서 천천히 몸을 돌려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꺼거거거거걱 소리를 내며 울었다.

여기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 아마 며칠은 걸어야 할 곳에 마력소유가 있다.

두꺼비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야 겨우 멀리 있는 두꺼비의 신호를 받은 것이다.

다행이다.

데보라는 길게 숨을 쉬었다.

산이나 외딴 마을에 숨어지내는 마녀가 많지만 데보라는 그런 유형이 아니다.

약초나 동물의 신체 일부를 약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마녀와 달리, 동물을 사역하는 자는 엄청난 마력을 필요로 했다.

데보라에게 그런 마력은 없다.

대신 그녀는 마력소유와 몸을 접하고 그걸 빼내 힘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마력소유의 소재지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마력이 떨어지면 바로 다음 마력소유를 찾아 나서야 한다.

데보라의 두꺼비가 하는 일은 주로 그것이다. 마력소유를 찾아 주인에게 알리는 것.

각 지역에 퍼져 있는 두꺼비는 인간 중에 마력소유가 있으면 마킹을 해놓는다. 그리고 데보라가 가까이 가면 알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면 그녀와 두꺼비는 소통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어떤 지역에 마력 소유가 있는지, 데보라는 잘 모른다. 그 근처까지 가야만 알 수 있었다.

다행인 건 두꺼비끼리는 다소 먼 거리라도 서로의 뜻을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데보라가 주로 사용하는 건 이 방법이었다.

한동안은 그나마도 잘 되지 않았다. 신호를 보내주는 두꺼비가 왕도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탓이었다.

'하지만 이제 됐어. 마력소유를 찾았다.'

데보라는 두꺼비가 말하는 방향을 보았다.

그곳으로 가려면 산을 나가야 한다.

'추적자가 있을지 모르는데.'

데보라는 한숨을 쉬었다.

두꺼비가 엉금엉금 기어와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두꺼비의 행동이 며칠 전보다 꿈뜬 것 같다.

'역시....'

데보라의 얼굴이 흐려졌다.

국왕과 함께 있을 때는 몸이 가뿐했다.

카니아 국왕이 엄청난 마력소유는 아니었지만 요즘에는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가급적 오래도록 그와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껴 먹어도 끝은 오게 마련이다. 국왕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마력이 모자라게 되었다.

그걸 보충하려고 유혹한 사람이 비보 궁정백작이다.

비보는 마력을 지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궁정백작이라는 자리를 꿰찬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어느 정도는 마력도 가지고 있었지만 역시 왕족에 미치지는 못했다. 벌써 힘이 모자라다.

'이대로라면 두꺼비를 사역하는데 무리가 올 거야. 어쩌지.'

데보라는 아픈 다리를 조금 움직였다.

마력도 마력이지만 너무 오래 걸었다. 산에 들어온 이후 쉴 새 없이 걷느라 몸이 약간 지쳐 있었다. 이제 슬슬 쉬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일단은 정령의 산으로 갈까.'

인간이 가진 마력과는 조금 다르지만 정령이 머물렀다는 산에는 때로 마력소유보다 많은 힘이 잠자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한동안 정령의 산에 머물면서 힘을 보충하고 두꺼비 수를 줄이면 다음 마력소유를 찾아낼 때까지는 괜찮을지 모른다.

'게다가 지금 간다 해도 마력소유가 그 자리에 계속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제국의 침략 때문에 마력소유가 이동할 가능성도 크다.

데보라는 한숨을 쉬고 방향을 바꿨다. 이곳에서 정령의 산은 그리 멀지 않다.

그렇게 결정하고 조금 걷는데, 갑자기 두꺼비가 펄떡 뛰었다. 홱 몸을 돌려서 끔벅끔벅 허공을 노려본다.

"!"

뭔가 온다.

데보라는 당황해서 몸을 낮췄다.

그녀의 능력은 주로 인간의 몸에 있는 마력을 가두거나 빼앗는 것이다.

그 외에는 두꺼비를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누군가의 물리적인 공격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만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주변에는 그녀의 두꺼비가 네 마리 있었다.

데보라가 나무 뒤에 몸을 숨기자, 두꺼비 한 마리가 그녀를 지키기 위해 가까이 다가왔다.

두꺼비들이 잔뜩 긴장한 채 높은 나무 사이의 허공을 노려보았다.

잠시 기다린 뒤, 멀리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까악, 까악.

까마귀다.

'서쪽마녀, 그 계집의 것이다.'

데보라의 눈동자에 분노의 불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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