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발 밑의 적
걸어라, 걸어라, 시체를 넘어라, 걸어라, 걸어라, 적이 보인다. 들어라, 들어라, 창칼을 들어라....
저벅 저벅 발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병사들이 단순한 노래를 반복해 불렀다. 이 몇 년 동안 익숙해진 행진곡이다.
밤이 되면 가사가 약간 바뀌고 노래가 느려졌다.
가사가 고향을 향해 가거나, 집과 아이, 아내가 보인다는 것으로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낮에도 가끔은 바뀐다.
이때는 조금 과격해지는 편이다. '걸어라' 대신 '죽여라'가 들어가는 식이다.
노래를 부르면 행군도 조금쯤 힘이 덜 든다.
병사들이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행군할 때는 스스로 부르게 되었다.
한 부대가 부르면 옆에 있는 병사들도 따라 불러, 결국엔 전체가 함께 떼창을 하게 된다.
부르는 병사들은 즐거워하는데, 왜인지 영주군은 그런 모습까지 섬뜩한 모양이었다. 본대가 행진곡을 부르기 시작하면 반대로 영주군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병사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말을 몰던 루디는 문득 옆에서 따라오는 보좌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봐, 이곳은 왜 이렇게 된 거지? 여러 해 동안 내전을 겪고 있지만 카니아 왕도 주변에서 전투가 있었다는 보고는 없었다. 한데 경작지가 너무 적은 것 같구나."
이 세계에 밀밭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보리를 비롯한 각종 잡곡과 채소도 기른다.
하지만 이곳은 드문드문 비어있는 밭이 너무 많았다. 땅을 쉬게 하기 위한 거라고 보기에는 노는 땅이 너무 많다.
루디의 질문에 보좌관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거듭되는 내전 때문에 종자 구하기가 어려워진 탓입니다. 경작지가 줄어들면서 종자도 줄어들었어요. 게다가 종자 가격이 전체적으로 높아졌습니다. 특히나 요즘은 종자를 금으로 만들었나 싶을 만큼 가격이 비쌉니다. 여러 해 동안 그런 식이다 보니 농사짓지 못하는 곳이 많은 거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점령한 곳에서는 그렇게 종자가 모자라다는 느낌은 없었다.
점령 전에야 주변 밭이 황폐해진 곳이 많았지만 제국군이 들어간 뒤에는 제대로 경작을 하고 있다. 어디에도 종자가 모자라는 분위기는 보이지 않았다.
루디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보좌관이 히죽 웃었다.
"점령한 도시에서는 제국의 종자를 가져와 배급했습니다. 보급 부대에서 종자 운반하느라 고생 꽤나 했지요."
"그랬나."
루디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전에는 일일이 말을 해야 했지만, 지금은 보좌관들이 루디보다 먼저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행동하는 것 같다. 왠지 기뻐졌다.
앞서가던 병사들의 노랫소리가 조금 커졌다.
"이제 서서히 왕도에 도착할 무렵이지요. 지리에 밝은 병사들 중에 눈치챈 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보좌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
비보 궁정백작은 허둥지둥 궁전을 나왔다. 보통 때와 달리 입구에서 약간 떨어진 곳으로 달려간다.
입구에 대기하면서 마차를 불러주는 시종이 깜짝 놀라 그를 보았다.
원래라면 시종이 자신의 마차를 불러 준비할 때까지 잠시 기다리지만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다.
비보를 발견한 마부가 서둘러 마차를 몰아 가까이 다가왔다.
시종이 마차 문을 열어주는 시간까지 아깝다. 비보는 자신의 손으로 문을 열고 마차에 올라탔다.
"저택으로 가자. 서둘러라."
마차 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지팡이로 마부석 쪽의 벽을 두드린다.
"뭘 하는 게야! 서둘러 출발해라!"
비보가 외치자 마부가 서둘러 마차를 몰았다. 마차는 곧바로 왕궁을 빠져나왔다.
왕궁에서 가까운 귀족 거리의 일각에는 그의 저택이 있다. 이미 간단한 짐은 챙겨 두었다.
금화와 약간의 보석, 아직 유효한지 알 수 없는 통행증과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은 옷.
비보 궁정백작은 머리를 벽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마냥 앉아서 적을 기다린 것은 아니다. 제국이 쳐들어오고 몇 년 동안 나름대로는 뭔가 해보려고 했다.
비록 자주 정신이 몽롱하고 기억이 자꾸만 사라졌어도 자신은 제법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왕궁에 몰려와 있는 귀족의 대부분은 별다른 병력을 가지지 않은 자들이다.
비보처럼 작위만 가진 귀족이거나 귀족 가문에 속해있지만 실권은 전혀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반면에 진짜 잡고 싶었던, 나름대로 병사와 소득이 있는 영주들은 점차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버렸다.
2왕자에 붙어 있어 봤자 별다른 이득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피츠 변경백작은 끝까지 왕도 근처에 남아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영지가 위험에 처하자 돌아갔다.
전에는 피츠 변경백작을 그저 옛것만 고집하는 무식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예전에 그렇게 생각했던 자신을 목졸라 죽이고 싶다.
'나는 왜 그렇게 바보였을까. 정말 왜 그랬어.'
피츠 변경백작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욕심을 누르고 적을 맞아 싸우기 위해 마지막까지 힘을 합하고자 했다.
겨우 그의 진심을 알고 비보 역시 눈물을 흘리며 동조했는데, 이번에는 2왕자가 문제였다. 2왕자 자신이 총대장이 되고 싶어 했던 거다.
하지만 그게 가당키나 한 얘기인가. 모두가 피츠 변경백작을 보고 모였는데 생뚱맞게 2왕자가 지휘한다고 하면 좋다고 찬성할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결국 이도 저도 안 된 상태로 질질 끌다 변경백작을 놓쳐 버렸다.
용병을 고용할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돈이 없었다.
물가는 점점 뛰는데 나라 경영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2왕자가 뭔가 손을 댈 때마다 오히려 상황이 나빠졌다.
밀 한 포대에 금화를 내다니, 그게 말이 되는 거냐구.
도시 여기저기에서는 작은 폭동이 일어나고, 그걸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한껏이었다. 외부에 눈 돌릴 틈이 없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자고 허둥지둥하다 보니 어느새 적이 코앞에 와있었다.
비보 궁정백작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방금 전 그 소식을 듣자마자 2왕자에게는 이야기도 하지 않고 왕궁을 뛰쳐나왔다. 이곳에는 희망이 없어. 당장 도망쳐야 한다.
소수만이 알고 있는 얘기지만 제국군에게는 마도병기가 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신식 병기라고 들었다. 성벽에 구멍이 뻥뻥 난다던가.
'그런 괴물이 오면 이 성은 그야말로 단박에 무너져 버릴 거야.'
데보라는 벌써 열흘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아마 누군가에게 정보를 얻은 걸 거다. 그 여자는 자신 말고도 여러 남자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어느새 마차가 멈췄다. 저택에 도착한 모양이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전혀 몰랐다.
바쁘게 마차에서 내리자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반겼다.
"주인님, 오늘은 빠르시군요."
"...."
비보는 빠르게 걸어 저택 안으로 들어가면서 집사에게 눈짓을 했다.
"지난번에 말했던 걸 준비해 주게."
"준비라면, 그."
집사가 슬며시 주변을 살피고 목소리를 낮췄다.
"호위와 평민 마차 말씀이십니까?"
비보가 고개를 끄덕이자 집사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한 시간 정도 걸리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너무 길어. 삼십 분, 아니 이십 분 안에 준비해야 해. 안 그러면 늦는다."
비보가 작은 소리로 말하자, 집사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곧바로 시선을 낮추며 속삭이듯 집사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준비가 조금 모자라게 됩니다."
"어쩔 수 없지. 최대한 서두르게."
"예."
집사가 바쁘게 나가고 비보 궁정백작은 서재로 향했다.
서재 안은 책과 그림으로 꾸며져 있다.
비보는 여러 개의 그림 중 하나를 벽에서 떼어냈다.
그림이 있던 자리에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보석과 금화를 넣어두는 비밀 금고다. 금화와 보석은 여러 개의 벨벳 주머니에 나누어 담겨 있었다.
비보는 서둘러 그걸 꺼내 서재 구석에 놓여 있던 가방에 담았다.
가방 안에는 같은 무게의 금화보다 값어치가 높은 향신료가 두 통 있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통에 담겨 있지만, 적당한 장소에만 갈 수 있으면 비싼 값에 팔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귀중품을 가방에 담고, 준비를 거의 마쳤을 무렵 집사가 들어왔다.
"주인님, 준비가 되었습니다."
집사는 어느새 평민처럼 옷을 입고 있었다.
집사가 곧바로 비보의 옷을 벗기고 자신과 비슷한 옷을 입힌다. 옷은 몸에 딱 맞았다.
"뒤쪽으로 가시지요."
집사가 안내하는 대로 향한다. 그가 가방을 들어주려고 했지만 거절했다. 이 가방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들고 다녀야 한다.
인간은 급박한 상황에 빠지면 자신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존재다. 앞으로는 집사도, 호위도 믿을 수 없다.
저택의 뒤편에 도착하자 아무 무늬도 없는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마차 위에 여러 개의 짐꾸러미가 올라가 있다. 아마 옷과 생필품, 음식 같은 것이리라.
마차 옆에는 두 명의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몸이 건장한 사람들이었다. 비보를 보자 허리를 숙였다. 마부는 없었다.
비보는 허둥지둥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집사가 함께 마차 안으로 들어오고, 호위 두 명은 마부석에 앉았다.
"동쪽 문으로 가자."
제국군은 남쪽에서 다가오고 있다. 북쪽은 폐쇄되었으니 현재 나갈 수 있는 문은 동쪽뿐이었다. 그나마도 제국군이 보일 무렵에는 출입이 불가능할지 모른다.
'국경에서 통행증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뇌물도 약간은 써야 할지 모른다.
'도착할 때까지는 괜찮을는지.'
요즘은 왕도뿐 아니라 다른 도시도 음식값이 엄청나게 비싸졌다고 들었다. 돈이 넉넉할지 잘 모르겠다.
마차는 하인과 상인들이 출입하는 뒷문으로 나갔다.
마차가 귀족 거리를 지나가는데, 어디선가 군중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누군가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의 환호 소리에 섞여 잘 들리지 않지만, 중간중간 처 죽일 놈이라든가, 원흉, 비보 궁정백작, 같은 단어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목소리를 모아 죽이라고 외치고 있다.
오싹해졌다. 지금 이 거리에서 자신이 비보라는 게 밝혀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조금 돌아가는 게 좋겠군."
비보가 집사에게 말 한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외쳤다.
"저 마차는 비보 궁정백작의 것입니다! 우리를 굶주리게 만든 자가 혼자만 도망치고 있어요."
"...!"
어떻게 알았을까. 마차에 가문의 문장이나 신분을 알리는 표시는 전혀 없다. 한데 저 사람은 어떻게 알아차렸지? 설마 얼굴이 보였을까.
"창문을 닫아!"
비보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집사가 약간 열려 있던 커튼을 닫았다. 집사도 약간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비보 백작의 얼굴을 압니다. 저 사람이 틀림없어요! 밖에 제국군이 쳐들어와 있는데 혼자만 도망치다니."
남자의 분개한 소리가 군중의 고함소리에 묻혔다.
문득 그 남자의 목소리가 궁정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음유시인의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닐 것이다. 음유시인이 이런 자리에 있을 리가 없다.
분노한 군중이 이쪽으로 달려온다.
비보는 당황해서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서둘러라!"
마부석에 있는 호위가 당황해서 외쳤다.
"하지만 앞쪽에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냥 밟고 지나가 버려!"
비보가 외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돌을 던졌다.
"컥!"
이마에 돌을 맞았다.
서둘러 마차 안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하지만 처음 한 개였던 돌멩이는 이내 서너 개가 되고, 다시 수십 개가 되었다.
마부석에 앉았던 호위가 사람들에게 끌려 바닥에 나뒹굴었다.
"자네가 나가서 마차를 몰게."
비보가 집사에게 말했지만, 그는 나가는 대신 마차 문을 열고 밖에다 외쳤다.
"비보는 여기에 있다! 이 사람이 비보 백작이다!"
집사가 외치더니 비보를 냅다 잡아당겨 밖으로 밀었다.
비보는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집사가 자신의 가방을 가슴에 안고 마차에서 밖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 보였다.
"이놈!"
서둘러 몸을 일으켰지만, 누군가에게 팔을 잡혔다. 그리고 다리도.
개구리처럼 몸이 납작해졌다.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바닥에 눌렀다. 거친 땅에 뺨이 쓸려 아프다.
성난 사람들의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뒤에서 들려왔다.
"쳐 죽여!"
"내 아이는 일주일 전에 굶어죽었다. 네놈이 죽인 거야!"
"네놈들이 왕궁에서 춤추고 즐기는 동안, 내 아내는 물만 먹었지. 배가 동그랗게 되어 죽어 버렸어! 너희 귀족 놈이 그걸 아느냐!"
사방에서 고함과 욕설이 쏟아진다. 무섭다. 땅에 눌린 머리가 몸과 어긋나 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나, 나도 평민이었다. 마력 소유였기 때문에 왕의 눈에 띈 것뿐, 나도 너희들의 동료였어. 내 어머니, 내 형제들도 계속 배고픈 평민이었다.'
비보는 그렇게 소리쳤지만, 제대로 된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이가 부러져 발음이 엉망이다.
"닥쳐!"
누군가가 커다란 돌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머리에서 번개가 튀는 것 같다. 순식간에 그의 눈앞은 캄캄한 암흑이 되었다.
분명히 기억에 있는 것 같은 목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왔다.
"우리가 헐벗고 굶주린 동안, 귀족 놈들은 저 화려한 궁 안에서 놀고먹으며 즐겁게 웃고 있었던 거야! 내 누이는 왕궁에서 하녀로 일하다 귀족 놈에게 몸을 유린당했다. 내 동생은 눈이 퀭해져서 굶어죽었어. 다 이놈들, 귀족 놈들 때문이다."
서서히 가라앉는 의식 가운데, 남자의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 목소리, 그래, 틀림없다. 그 아름다운 음유시인의 목소리다. 저 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누군가에게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