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최강의 결합
꿀렁꿀렁, 시간은 정말 잘도 흘러간다. 찬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겨울이 되었다.
리리샤는 루디가 없는 황궁에서 홀로 16살이 되었다.
새해가 되던 날, 루디가 보내준 편지 속에 동봉되어 있던 작은 종이를 폈다. 루디가 '새해가 되면 제리에게 마력을 넣어 달라고 부탁해'라고 적어 두었던 것이다.
종이에는 알아보지 못할 문자가 마잉크로 적혀 있었다.
생쥐 제리가 루디에게서 받은 마력을 흘려 넣자, 방안이 온통 반짝반짝 빛나는 무지개와 꽃잎으로 가득해졌다.
그리고 신데렐라와 백설 공주, 일곱 난쟁이, 백한 마리의 강아지들, 동아줄을 타고 올라가는 남매의 모습, 떡을 지고 언덕을 오르는 어머니와 호랑이....
루디가 어릴 때부터 이야기해 준 동화 속 이야기가 모두 그 자리에서 펼쳐졌다. 너무 아름답고, 너무 외로운 새해였다.
그런 화려한 동화 속 주인공들이 없어도 그저 루 한 명만 있어주면 되는데....
그렇게 전하고 싶었지만 너무 아름답고 행복한 새해가 되었다는 답장을 썼다.
전쟁 때문에 새해 연회는 열리지 않았다.
대신 리리샤는 살롱 부인들과 소소한 자리를 마련하여 새해를 축하하고, 고아를 돌보는 신전 여러 곳에 기부를 했다.
기부금은 리리샤에게 나오는 황후의 개인 자금에서 사용했다.
황제와 황후에게는 매년 상당한 금액의 예산이 배정된다.
의상과 보석에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은 물론 여러 항목으로 세분화되어 예산이 정해지는데, 그중에는 개인적인 용도로 쓸 수 있는 돈도 있었다.
리리샤가 사용한 것은 그런 개인자금으로, 황후의 용돈 같은 개념이다. 기부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식적인 자금도 있지만, 이번에는 리리샤 개인의 사념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굳이 개인자금을 사용했다.
이 세상 남녀가 어떤 행위를 통해 아이를 낳는지 알게 된 이후, 리리샤는 한동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뭔가 먹으려고 하면 자신과 루디가 알몸으로 누워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생리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신과 루디가 그런 식으로 어우러지는 건 정말 상상할 수도, 상상하기도 싫다.
밥을 못 먹어 자꾸만 말라 가자, 남작 부인은 시종장에게 무리를 말해 리리샤를 황궁 밖에 있는 신전으로 데려갔다. 오갈 데 없는 임산부나 고아를 데려와 돌보는 신전이었다.
그곳에서 리리샤는 갓 태어난 아기를 처음 보았다.
아기 엄마는 신전에서 보호를 받는 여자였는데 어떤 사정이 있어 그곳에 온 것인지는 듣지 못했다.
그토록 괴상한 남녀의 행동으로 태어났다는데, 아기는 어째서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걸까. 더럽지 않다. 보송보송 깨끗하고 사랑스러웠다.
그 뒤에야 겨우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남녀 관계가 그 뒤에는 숭고하게 보였는가 하면, 그건 절대로 아니다. 여전히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밥이 다시 맛있어졌다. 정말,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남작 부인은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뭐가 달라진 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 이후, 리리샤는 자신의 개인 자금에서 해마다 그런 일을 하는 신전에 기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루디가 자신과 매일 한 침대에서 자면서도 남녀 간의 행위을 하지 않은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자신이 루디를 만났을 때는 걷지도 못하는 아기였다. 분명히 루도 이런 심정이 되었기 때문에 리리샤를 안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기는 아기일 뿐, 부인이나 남편이 될 수 없다, 아마도. 자신은 반드시 그럴 거다. 루디가 아기인 모습을 자신이 보았다면 분명히 그런 관계가 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그건 또 그것대로 싫다.
남녀의 관계를 하는 건 상상조차 싫은데, 루디가 다른 여자랑 그런 걸 한다고 하면 엄청나게 분노가 일어나고, 자신과 안 한다고 하면 그건 그것대로 화가 났다.
아, 정말, 다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루는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잖아. 자신을 아기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점점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디를 봐서 이 가슴이 아기라는 거야!
마음이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굉장히 바쁘게 움직였다.
'하아, 정말 내 마음인데 어째서 내가 이렇게 모르겠는 건지.'
리리샤는 한숨을 쉬었다.
옆에 있던 타이라가 킥킥거리고 웃는다. 타이라는 리리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아는 것 같다. 어쩌면 머릿속 생각이 다 보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정말 화가 나는 건, 타이라는 초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이미 남녀가 그런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살았던 초원에서는 천막에서 부모와 자식이 모두 함께 자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한다.
타이라도 아는 걸 자신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생각하니 다시 화가 났다.
"웃지 마, 타이라. 알면 가르쳐 줬어야지, 정말."
"그러면 재미가 없잖아요, 마마. 그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거죠."
"...."
심술꾸러기다. 악마다.
리리샤가 흘겨보자, 타이라가 새침한 얼굴로 물었다.
"마마, 따뜻한 차를 한 잔 더 드릴까요? 잔이 차가워진 것 같습니다."
"됐어."
리리샤는 입술을 삐죽 내민 뒤, 타이라를 정면으로 보았다.
"그건 그렇고, 우리는 더 중요한 문제를 의논해야 해. 이제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어."
"무슨 문제요?"
타이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약간 긴장된다. 리리샤는 후, 하고 숨을 내쉰 뒤 타이라의 눈을 보았다. 계속 존재하지 않는 척 미뤄왔던 일을 이제는 얘기해야 할 것이다.
"타이라, 그대의 나이도 이제 열일곱이야. 이제 슬슬 혼인 상대를 결정해야지."
리리샤보다 한 살 많은 타이라는 지금이 딱 결혼 적령기다. 지금 시기를 놓치면 노처녀가 되어 버린다. 현재도 사실은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제국의 여성은 보통 열여섯에서 열여덟 살 사이에 혼인한다. 스물을 넘기면 그때부터는 혼기를 놓친 노처녀 취급이다. 당연히 그 나이에는 좋은 혼처도 생기지 않았다.
여자의 결혼 적령기는 굉장히 짧아서, 손에 닿으면 사라져 버리는 눈송이 같다. 서두르지 않으면 어느새 사방이 문제 있는 남자나 후처 자리라는 벽으로 둘러싸여 버린다.
"타이라, 루의 후궁이 되지 않을래? 아니, 되어줬으면 좋겠어요, 타이라."
리리샤는 타이라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주변의 시녀는 남작 부인이 이미 모두 물린 상태다. 방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이 일은 아직 루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남작 부인과 시종장에게는 이미 이야기를 통해 둔 거야. 타이라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돼."
"...."
타이라는 굉장히 놀란 모양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리리샤를 보았다.
"나, 임신할 수 없다고 착각하고 있었을 때부터 계속 생각했어. 타이라라면 괜찮다고."
싫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사실은 싫다. 아무리 타이라라도 루를 나누는 것은 정말로 싫었다. 하지만 그녀라면 참을 수 있을 것이다. 슬프거나 질투할지는 몰라도 분명 넘어갈 수 있다.
타이라는 가만히 리리샤를 보더니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마마,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아요."
"응?"
"제가 황제 폐하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건 마마가 폐하를 사랑하시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타이라가 눈을 약간 비키고 말했다.
"저는 얼굴을 따지는 사람인 것 같아요."
"응?"
"폐하의 얼굴이 좋아요. 아름다우니까요. 보고 있으면 황홀하고 기분이 둥둥 뜨거든요."
"...."
"하지만 마마처럼 그 사람 한 명만이 너무 좋아, 그런 건 아니에요. 사실 마마께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결혼할 사람은 있습니다."
"에엑?"
리리샤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돼. 누구? 있을 수도 없는 일이야. 그런 사람은 본 적 없어. 타이라가 가까이 접한 남자라고 해봐야 시종장과 레빈 뿐이잖아. 거짓말하지 마, 타이라. 내 마음을 생각해서 거짓말하는 거지?"
"...."
타이라는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약간 비틀었다.
"타이라?"
"...레빈이에요."
"뭐가?"
"결혼할 사람이요."
"...."
"...."
방금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리리샤가 멍한 얼굴로 타이라를 쳐다보자,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레빈은 얼굴이 참 예쁜 거죠."
"...진짜야?"
"...네."
"...."
잠시 뒤, 타이라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찻잔의 물을 버리고 새 차를 따랐다.
"따뜻한 차를 한 잔 드세요, 마마. 겨울이라 몸이 쉽게 차가워지십니다."
어떻게 레빈과 그런 사이가 된 건지 물었지만 타이라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교묘하게 말을 피하더니 다른 시녀와 교대할 시간이라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레빈과 타이라라고?'
이상하다. 한 번도 두 사람이 연인 같은 관계를 보인 적은 없었는데 언제 결혼 약속까지 한 걸까.
리리샤는 편지지를 꺼냈다. 서둘러 루디에게 이 일에 대해 알려두어야 한다.
'만일, 이건 정말로 만약이지만, 타이라가 진짜로 레빈의 외모에 혹한 거라면 당장 못을 박아야 해. 최소한 루의 인정은 필요할 거야.'
타이라는 이 나라에 혈족이 없다. 후원자도 없었다. 가문의 힘이 없는 타이라가 의지할 사람은 루와 리리샤뿐이다.
반면에 레빈은 가문의 격은 조금 낮아도 외모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황제의 가장 친밀한 시종이었다.
그에게 접근해서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가문은 많다.
결혼 적령기를 훨씬 넘겼는데도 왜 결혼하지 않는지 몰라도, 어라, 응?
'설마 타이라 때문이었어? 설마 타이라가 결혼할 수 있는 나이까지 기다리느라 이십 중반을 훌쩍 넘기고도 아직 혼자였던 거야?'
맙소사, 그런 거였다면 정말 서둘러 루디에게 알려야 할 것이다. 황제가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인정한다면, 결혼 약속이 단순한 말뿐이더라도 쉽게 뒤바뀌지 않는다.
하룻밤이라도 좋으니 레빈과 연인 관계가 되고 싶다는 유부녀와 나이 든 귀부인이 많다고 들었다.
레빈이 다른 시녀나 귀부인과 염문을 뿌린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지만 얼마든지 다른 여자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었다.
살롱의 부인들과 친해지면서 들은 이야기인데, 여자들이 남자를 얽어매는 데는 수많은 기교가 있다고 한다.
특히 남자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어 살짝 옷차림을 흐트러뜨리는 함정을 사용하는 여자가 많다고 들었다. 그런 모습을 제3자에게 일부러 목격시키는 것이다.
가문의 격이 높을수록 명예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상위 귀족 남성의 경우 그런 상황에 걸리면 백이면 구십구는 어쩔 수 없이 혼인하게 된다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여자 쪽 가문에서 작정하고 그런 함정을 파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레빈은 시골 귀족 출신이라 그런지 순진한 면이 있다. 그런 함정에 빠지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당해버릴 거다.
레빈을 생각하자 살짝 한숨이 나왔다.
레빈의 웃는 얼굴이 얼마나 해맑은지, 가끔은 이런 황궁에서 잘해나갈 수 있는 건지 걱정이 될 정도다.
'타이라가 야무지니까 둘이 결혼하면 의외로 잘 맞을지 몰라.'
왠지 즐거워졌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황제의 가장 친한 시종과, 황후가 자매처럼 생각하는 시녀의 결혼이라니 환상적이지 않아?
언젠가 리리샤가 루디의 아이를 낳으면 타이라의 자녀와 혼인하게 될지도 모른다. 정말 만약의 이야기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다.
'꺄아!'
자기도 모르게 뒹굴, 양탄자 위를 굴렀다. 한동안 그렇게 뒹굴다, 리리샤는 허둥지둥 일어나 다시 펜을 들었다.
[루, 우리의 아이와 타이라의 아이가 남녀라면, 그래서 좋은 사이가 되어 혼인한다면 정말 좋겠어요. 분명히 행복한 아이들이 될 거야.]
그렇게 쓰다 보니,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점점 진짜로 그렇게 되는 미래가 머릿속에서 사실로 굳어지는 것 같았다.
***
타이라는 황후의 방을 나온 뒤, 후미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끔 울적할 때 찾아가는 장소가 있다. 서두르자. 눈물이 나올 것 같다. 타이라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몇몇 시녀와 마주치자 빙긋 웃어 보였다. 의미 없는 잡담 몇 마디를 하고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그리고 한참 뒤, 타이라는 황후궁의 복도를 지나 사람이 거의 없는 장소에 도착했다.
이곳은 현재 사용하지 않는 구역이다. 정기적으로 청소와 관리는 하지만 그뿐이었다.
타이라는 그중 한 곳의 문을 열었다.
너른 방, 대부분의 가구에는 값비싼 가구를 보호하기 위해 하얀 천이 씌워져 있다. 다른 방과 거의 똑같다.
다른 점은 한쪽 구석에 천이 걸리지 않은 소파가 한 채 있다는 것뿐이었다.
타이라는 그곳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 울어도 돼. 마음껏 소리 내 울어도 아무도 듣지 못한다.
어린 시절 구석에서 혼자 울고 있을 때, 남작 부인이 이곳을 가르쳐주었다. 울고 싶으면 이곳에 오면 된다고, 아무도 보지 못할 거라고.
그날 이후 이 한적한 장소는 타이라의 슬픔 저장고다. 이곳에 와서 실컷 울어 슬픔을 버린 뒤에 황후궁으로 돌아갔다.
타이라의 입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처럼 큰 소리로 통곡한다.
사랑한다. 그분을 사랑한다. 어릴 때부터 사랑해왔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타이라에게는 황후도 소중했다.
후궁이 되라는 황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함께 황제를 모시자는 말은 달콤한 독을 바르고 귓가에서 올렸다. 황후 마마 본인이 그렇게 말하잖아, 그렇게 해. 마음속의 악마가 그렇게 유혹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타이라는 알고 있었다.
리리샤의 마음속 깊은 곳이 비명을 지른다. 아무에게도 소중한 사람을 주고 싶지 않다고 울고 있었다.
어렸을 때 한 번, 타이라는 리리샤를 죽일 뻔했다. 타이라가 핀으로 찌르는 바람에 말이 난동을 부렸던 것이다.
그때는 그 일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몰랐다. 그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 무섭기만 했다. 나중에 조금 나이를 먹은 뒤에야 당장 목이 잘리지 않았던 게 기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어쩌면, 황제나 시종 중 누군가는 타이라의 잘못 때문에 말이 날뛰었다는 사실을 알지 모른다는 것도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때의 말은 특별히 황후를 위해 조련된 것이다. 웬만한 일에는 쉽게 놀라지 않도록 훈련되어 있었을 거다. 그런 말이 타이라가 접근하자마자 난동을 부렸으니, 그래, 아마 알았을 거다. 다만 황제가 아이에게 너그러운 성품이었던 게 천운이었다.
그 자리에서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은 리리샤 뿐인지도 모른다.
리리샤는 한 번도, 단 한 번도 타이라를 의심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 일을 들출지도 모른다고 겁먹고 있던 어린 타이라를 굳게 믿고 있었다. 타이라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지금도 리리샤는 믿고 있다.
'나는 그녀를 다시는 위험에 빠뜨리지 않아. 절대로 슬프게 하지 않아.'
리리샤 본인이 모르는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춰진 슬픔이라도, 타이라는 절대로 모른 척 이용해먹지 않는다.
한 번 죽었던 목숨은 황제가 구해주었다.
하지만 그 이후 타이라를 지킨 건 리리샤다.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미안하다고 펑펑 함께 울던 리리샤가 곁에 없었다면, 아마 타이라는 벌써 예전에 낯선 나라, 낯선 황궁에서 마음이 부러져버렸을 거다.
리리샤 덕분에 힘낼 수 있었다. 그녀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리리샤가 믿어주었기 때문에 착한 아이로 살 수 있었다.
남작 부인의 눈을 피해, 황제가 없는 날은 둘이 함께 잠을 자곤 했다. 지금에야 실제로는 피하지 못했다는 걸 알지만, 어릴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매 같은 사이가 아니라, 피가 섞이지 않았을 뿐인 친자매로 자랐다.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할 수 없다. 자신의 마음이 조각조각 나버린다 해도 절대로 할 수 없어.
왕왕, 울고 있는데, 누군가의 손이 어깨를 감쌌다.
보지 않았지만 누군지 알고 있다. 이곳에 오는 사람은 타이라를 제외하면 한 명뿐이다.
"잘 했어요, 타이라. 장하구나. 과연, 내가 가르친 최고의 아이, 장한 딸이다."
남작 부인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등을 토닥였다.
타이라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더욱 소리 높여 울었다.
레빈이 결혼을 제안한 것은 타이라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나는 황제를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하는 일도 지저분한 것이 많죠. 황제 폐하도, 황후 마마도, 그대도 모르는 종류의 천한 일을 하기도 해요. 보통의 여자는 견뎌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운을 뗀 레빈은 평소와 달리 조금 무서워 보였다.
[하지만 당신은 황제를 사랑하니 내가 무슨 일을 해도 상처받지 않을 테지요. 어때요, 나와 혼인하는 것이? 어차피 당신도 언젠가는 혼인을 해야 합니다. 폐하 아닌 누군가와 살을 섞으며 살아가야 하죠. 그걸 견뎌내는 것보다 내 아내가 되어 동지로 사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두 번 생각할 필요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스무 살이 되면, 타이라는 레빈의 아내가 된다. 그리고 계속 황후의 시녀로 살아갈 것이다. 조금은 슬프고, 많이 행복한 시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