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적이 너무 바보인 것도 힘들다
펑, 펑, 박격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부서진다. 여러 대의 박격포가 집중적으로 성문 주변을 두드리자, 결국 도시의 입구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성문 주변을 두르고 있던 성벽도 마찬가지다. 높게 치솟아 있던 돌벽은 뿌리만 남긴 채 허물어져 돌무더기가 되었다.
제국군의 마도 병기를 앞에 두고, 카니아가 자랑하는 무적의 요새 도시는 싱거울 정도로 쉽게 무너졌다. 저항은 격렬했지만, 마음 만으로는 무기를 상대하지 못하는 법이다.
"영주군은 앞으로!"
루디가 신호를 보내자, 깃발을 들고 있던 병사가 빨간 기를 흔들었다.
공격하라는 신호다.
이번 요새 도시의 공격군으로 편성되어 있던 영주군이 요란한 함성을 지르며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마도 부대는 영주군을 지원하라! 아군을 죽게 하지 마."
루디가 외치자, 마도 부대에서 몇 개 조가 앞으로 달려갔다.
저격병들이다.
그들은 영주군과 섞이지 않았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영주군 외곽에서 말을 몰았다.
저격병의 임무는 백병전이 아니다. 적의 지휘병을 처리하는 것이다. 벌써 여러 번 되풀이해 온 일이다 보니 영주군도, 저격병도 서로 간의 위치를 침범하지 않으면서 적당한 간격을 두고 전투를 벌였다.
루디는 흑마의 흥분을 다스리며 언덕 위에서 전황을 지켜보았다.
카니아의 국경을 넘은지 벌써 여러 달이 지났다. 무덥던 여름이 지나가고 어느새 가을이다. 하지만 제국군은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진군했다.
이번 전쟁은 디코콰리아 때와는 다르다. 디코콰리아를 점령하고 있었던 카니아 왕국군은, 그곳에서 밀려나도 돌아갈 곳이 있었다. 자신들의 본국으로 가면 삶의 터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들은 승산 없는 전투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었다.
변변한 싸움도 없이 디코콰리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압도적인 실력 차이 외에도 적에게 그런 느슨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곳 카니아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쫓겨나면 갈 곳이 없다. 바로 이 땅이 그들의 고향이고, 뿌리내리며 살아가는 터전이었다.
게다가 타국의 적에게 점령당하는 건 내전과는 양상이 다르다. 처자는 유린당하고 노예로 팔려가는 사람도 생긴다. 다시는 가족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카니아의 영주와 병사도 결사적이 되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 결국엔 이긴다 해도 쓸데없는 희생을 감수할 우려가 있었다. 루디는 서둘러 진군하며 무리하는 것보다는 차근차근 시간을 들여 적을 몰아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우선 대군을 이용해 도시를 포위하고 물자의 유입을 막는다. 그렇게 손발을 묶어 불안감을 조성한 뒤에는 박격포를 성 안에 쏘거나 마녀의 까마귀를 이용해 겁을 주었다.
안 그래도 카니아는 식량 사정이 좋지 않다. 외부의 유입을 차단하면 빠른 시간 안에 먹을 것이 없어져 버린다. 성 안의 식량이 부족한 상태에서 압도적인 무력 차이를 과시하면, 적은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그렇게 되면 빠른 속도로 성벽과 문을 파괴해 쳐들어간다.
처음부터 성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보다 시간은 걸리지만 아군의 희생은 상당히 적어졌다.
이번 전투도 마찬가지다. 군대가 주둔하는 도시다 보니 저항은 심했지만 함락은 순식간이었다.
둥둥둥둥, 도시 안 먼 곳에서 요란한 함성 소리에 섞여 북 소리가 들렸다. 제국이 승리했음을 알리는 북이다.
루디는 도시 안으로 후속 부대를 들여보냈다. 도시를 점령한 뒤에는 후속 부대가 들어가 곳곳을 확인하면서 숨어있는 병사들을 색출한다.
루디는 승패가 완전히 결정된 뒤에야 겨우 무장을 풀었다.
전투가 끝나면 그다음 순서는 뻔하다.
이번 도시를 점령한 영주군과 후속 부대가 승리의 함성을 지르고, 도시 안에서는 약탈이 시작되었다. 성 안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루디는 몸을 움츠렸다.
앞으로 며칠 동안, 이 도시 안에서는 계속해서 비명소리가 울릴 것이다.
일단 점령한 도시의 경우, 더 이상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 그런 일은 금지했다. 하지만 어떤 도시도 함락 뒤의 참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 세계에서 약탈은 범죄가 아니다. 단순히 승리한 자의 권리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 이 도시에는 그 권리를 행사하려는 병사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나는 아마 죽으면 지옥에 떨어질 거야.'
루디는 속으로 중얼거린 뒤, 상인들이 천막을 치고 있는 외곽으로 향했다.
제국군 뒤를 쫓아다니는 상인의 무리는, 그들이 데리고 있는 창관의 여자들까지 합하면 수천 명에 이른다. 근래에 형성된 전쟁상인 무리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여기저기에서 하인과 노예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손님 맞을 채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루디의 모습을 발견하자, 모두 일손을 멈추고 허둥지둥 바닥에 엎드렸다.
여기에 있는 상인들은 모두 제국에서 일정 금액의 돈을 내고 허가를 받은 자들이다.
서커스 단의 것처럼 둥근 형태의 천막에는 그것을 증명하는 표가 붙어 있었다.
표가 없는 상인은 이곳에 천막을 치고 장사할 수 없다. 만에 하나 가짜 표를 붙이고 병사를 손님으로 받은 일이 들통나면 사형이다. 처벌이 엄격하다 보니 웬만해서는 가짜 표가 나돌지 않았다.
천막을 여러 개 지나자 금세 목표로 삼았던 곳이 보였다.
식품을 파는 천막이다. 그곳에서는 밀가루와 육포 등의 물건을 팔고 있었다.
루디는 도시를 점령할 때마다 상인에게서 밀가루를 구입한다. 구매한 밀가루는 제국군에 협력적인 주민들에게 지급되었다. 특히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여성의 경우에는 두 번 세 번 와서 타가는 경우에도 약간씩 눈을 감아주고 있다.
악어의 눈물이라고 할까. 그야말로 자기만족인 처사지만, 식량난이 너무 심하다 보니 약간의 밀가루를 지급하는 것으로도 점령한 도시의 반발은 상당히 적어졌다.
그런 걸 노리고 한 일은 아니었는데, 워낙 카니아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루디로서는 오히려 씁쓸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밀가루 등의 식량을 지급하는 것이 너무 온정적인 처사가 아닌가 하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효과가 크게 나오자 지금은 그런 불평이 나오지 않는다. 영주군에서는 이런 것도 모두 황제의 계략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
식료품 천막 안쪽에서 상인과 보급 부대의 대장 한 명이 걸어 나왔다. 마침 물건을 구매하고 있었던 것 같다.
상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보급 부대 대장이 루디를 발견하고 반갑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폐하, 오셨습니까."
상인도 황송한 듯 곧바로 허리를 깊숙이 숙인다.
루디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하인들이 부지런히 천막 앞에 가져다 놓는 물건을 보았다. 밀가루 포대가 수레마다 가득 담겨 있었다.
"모자라는 일이 없도록 넉넉하게 구매하도록 해."
루디의 말에 보급 부대 대장이 싱긋 웃었다.
"예, 폐하, 너무 걱정 마십시오. 특히 아이 가진 여자들에게 제대로 배부되도록 신경 쓰고 있습니다."
영주군과 달리, 함께 다니던 병사들에게는 루디의 마음을 모두 들킨 모양이다. 왠지 조금 쑥스러워서 루디는 고개를 약간 돌렸다.
"...."
보급 부대 대장은 이 상인 말고 다른 상인에게도 물건을 구매하러 돌아다녔다.
제국에서도 보급품은 오지만,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건 대부분 따라다니는 상인들을 통해 매입한다. 다소 가격은 비싸지지만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싼값이다. 게다가 돈을 내고 표를 사는 상인들에게 혜택을 돌려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루디는 잠시 상인들의 천막 사이를 돌아다니며 안면이 익은 자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술을 판매하는 천막으로 들어갔다.
"폐하, 어서 오십시오. 마침 좋은 술이 들어왔습니다. 폐하께서도 드실만한 제품이라 헌상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지요."
상인이 호들갑을 떨며 루디를 반겼다.
루디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매번 보는 거지만, 어쩌면 이렇게 능청스러운지 모르겠다.
이 천막은 염탐꾼들의 연락소로 사용되는 곳이다. 실제로 술을 팔고는 있지만 이곳의 상인이 진짜 하는 일은 염탐꾼들의 연락을 루디와 보좌관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자, 이쪽입니다요."
상인이 루디와 뒤따르는 보좌관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천막 여기저기에 있는 하인들이 바깥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들의 신호를 보고, 상인이 루디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새로운 소식은 있는가?"
루디가 묻자, 상인이 히죽 웃었다.
"예, 폐하. 각지에서 전황에 대한 정보가 도착해 있습니다. 요크 왕국은 눈치가 빠르더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국과 전쟁도 불사할 것 같더니만, 제국군이 가까이 온다는 걸 알자마자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크 왕국은 카니아와의 국경 지역을 조금씩 약탈하다 안쪽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상태라고 듣고 있었다. 하지만 제국이 접근함에 따라 재빨리 작전을 변경한 모양이다.
"그냥 물러가는 게 아닙니다. 요크 놈들은 아직 약탈하지 않은 지역을 골라서 빙 돌아가고 있어요. 제법 두둑한 노잣돈을 버는 거지요. 영악한 놈들입니다."
누가 지휘관인지 모르지만 정말 얄미운 짓이다. 루디는 쓰게 웃었다.
"에이나는 어떤가?"
"그쪽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군대를 몰고 왔기 때문에 아직 물러갈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제국에 맞설 건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염탐꾼들의 정보에 따르면 잠시 진군을 멈추고 작전회의 중인 것 같은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요."
에이나 왕국은 요크와는 달리 상당한 군사를 이끌고 국경을 넘었다. 약탈로 상당 부분을 충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쪽에도 허가받은 상인들이 따라붙어 가고 있다. 쉽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뭐, 그쪽은 됐고, 카니아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연합할 기미는 보이나?"
"카니아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한심하기만 합니다. 지금까지 나라가 성립한 게 신기할 정도예요."
상인이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카니아는 이제야 겨우 제국군의 침입에 대비해 서로 연합하려고 시도하는 모양이다.
가장 활발하게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제국군과 거의 반대 방향에서 움직이고 있는 피츠 변경백이었다.
하지만 쉽게 의견이 모이지 않는 것 같다.
우선 왕도를 차지하고 있는 2왕자와 비보 궁정백작이 변경백에게 협력적이지 못하다. 비보 궁적백작과의 불화가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왕세자는 피츠 변경백과는 사이가 괜찮지만, 2왕자와 앙숙이다. 당연히 2왕자파와 힘을 합치는 건 꺼렸다.
그렇게 조금씩 맞물리지 않는 톱니를 가진 세 개의 그룹이 삐걱거리며 싸우자, 가장 세력이 약한 일부 귀족들 파는 어디에도 붙지 못하는 상태로 어영부영하고 있었다.
루디는 혀를 찼다.
"한심한 일이군."
그들이 한 곳에 모여줘야 일이 편하다. 그 시간을 주기 위해서 더욱 천천히 진군하고 있는데, 적이 너무 오합지졸이다.
'정 안되면 병력을 쪼개는 수밖에 없나.'
루디가 생각에 잠겨있는데, 상인이 목소리를 약간 낮춰 말을 이었다.
"일이 잘 진척되지 않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피츠 변경백 손에 있던 카니아 국왕이 얼마 전에 죽은 것 같습니다. 아직 감추고는 있는데, 국왕의 숙소로 보이는 곳에 들어가던 음식이 줄었다고 하더군요. 특히, 호화로운 음식은 더 이상 그 숙소로 들어가지 않는 걸로 보입니다."
"안 그래도 힘든 변경백의 입장이 더 약해지겠군."
"그렇습니다."
누군가 머리가 있다면 제일 먼저 피츠 변경백과 손을 잡았을 것이다. 지금 카니아의 네 파벌 중에서 가장 군사력이 강한 건 변경백이니까.
하지만 카니아는 중앙 궁정에 출입하는 자들을 더 우대하고 높게 쳐주는 풍조가 있었다.
영지도 없는 궁정백작이 국왕의 총애를 믿고 변경백보다 더한 권력을 휘두르는 나라다. 국왕까지 손에 없다면 피츠 변경백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확률이 컸다.
뭐, 어쩔 수 없다. 애초에 그들 중에 누군가가 똑똑하고 능력이 있었다면 이렇게 제국이 쳐들어갈 기회를 만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루디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적이 너무 무능해도 일이 어려워진다.
"왕도의 사정은 어떤가?"
"식량 사정은 아직까지 괜찮습니다만, 물가가 끝을 모르고 오르는 중입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빵 한 조각에 은화를 내는 지경이 되었어요. 앞으로도 더 오를 것 같으니, 그쪽은 살아있는 지옥이 될 겁니다."
상인이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건 레빈님이 보내는 겁니다. 레빈님은 순조롭게 궁정에서 자리를 잡으셨다고 하더군요. 그분은 정말 음유시인이 적성에 맞는 것 같습니다. 염탐꾼들이 몇 달 동안 힘들게 알아낼 정보를 그분은 하룻밤 만에 얻어내신다고 다들 혀를 내두르고 있어요."
"...."
왠지 그쪽은 듣고 싶지 않아졌다.
루디는 레빈의 편지를 펼쳐 쭉 읽어내려갔다. 편지에는 2왕자와 비보 궁정백작이 거느린 병사의 수와 왕도의 병력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지 등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정말, 어떻게 이런 걸 알아낸 건지.'
해맑게 웃던 소년 시절의 레빈을 떠올리고, 루디는 작게 머리를 흔들었다. 보리스가 순진한 청년을 완전히 망쳐놓은 것 같다.
"레빈에게는 조심하라고 전해주게. 마녀에 대해서도 너무 깊이 파고들어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도록 주의를 좀 줘."
"예, 알겠습니다. 염탐꾼에게 그리 전하도록 하지요."
루디는 몇 가지 더 이야기를 들은 뒤 천막을 나왔다. 어느새 훌쩍 시간이 지나갔다. 이제 조금 있으면 해가 저문다.
주변 천막은 대부분 입구를 돌돌 말아 손님이 들어오기 편하게 되어 있었다. 입구에 있는 횃불대에도 하나 둘 횃불이 꽂히기 시작했다.
여자들이 모여 있는 천막에서 이른 손님을 부르는 목소리가 울린다.
루디는 그 소리들을 뒤로하고 걸었다. 이런 밤에는 유난히 리리샤가 그리워진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눈을 보고 있으면 자신의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카니아와의 전쟁이 끝나면 그레데가 있다. 전쟁을 끝내도 영주들의 포상으로 영지를 나누고 뒤처리를 하다 보면 앞으로 몇 년간은 제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돌아가서 만나게 되면 리리샤도 성인인가.'
빽빽 우는 아기였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다음에 볼 때는 성인 여성이다.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