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데보라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비보 궁정백작은 의자에 앉은 채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두 손으로 머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죽을 것처럼 아프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이토록 일이 크게 번질 줄 알았다면, 아무리 그녀가 아름답고 매혹적이라도 유혹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그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처음 그녀의 유혹에 응해 궁전 일각에서 어우러졌던 그날이 문제였다.
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궁정백작이 주군의 애첩에 손을 대다니, 잠깐 동안 미쳤던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달각,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어두운 방에 흐릿한 빛이 스며들었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설탕 녹인 물을 뿌린 듯 달콤한 목소리가 끈적하게 귓가에서 울렸다. 교태가 잔뜩 묻어 있다.
자기도 모르게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다리 사이가 순식간에 열을 가졌다.
안 돼, 안 돼. 항상 이런 식으로 이성을 놓는 바람에 일이 이지경이 된 거다.
비보 궁정백작은 자신의 다리 사이로 뻗어오는 여자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여자는 자유로운 엄지손가락을 위로 올려 손등을 어루만졌다. 보드랍다. 피부를 타고 짜릿함이 흘렀다. 뇌가 번갯불에 구운 것처럼 뜨거워진다.
아니, 아니, 이렇게 흘러가면 안 된다. 그런 식으로 여자의 유혹에 지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된 거야.
여기저기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데서나 동물처럼 어우러지다 국왕한테 들킨 거잖아.
아, 그렇지. 국왕, 왕의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비보 궁정백작은 다른 손으로 여자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여전히 그의 다리 사이는 열이 어려있지만, 애써 의식을 되돌렸다. 뇌야, 제발 차가워져라. 지금은 망둥이처럼 뛸 때가 아니다. 이야기를 할 때다.
"기다려, 데보라. 국왕이 사라졌다. 어제저녁에 저택에서 불이 났는데 그때 없어졌어. 아무래도 피츠 변경백 짓인 것 같아."
"어머, 그래?"
데보라가 후후 웃으며 풍만한 몸을 그의 등에 붙였다.
부드럽다. 그녀가 항상 두르고 있는 향기가 콧속으로 들어오자 약간 멍해졌다. 자기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안고 싶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이 자리에서 무너뜨리고 싶...
아니, 안 된다고! 생각하라고! 이렇게 흘러가다가는 정말 죽는다고!
비보 궁정백작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손에 힘을 주자 머리카락 몇 가닥이 뜯겨 나왔다. 아픔 덕분에 머리가 조금 맑아진 것 같다.
"데보라, 국왕이 사라지기 전에 누군가가 침입했던 것 같아. 방구석에서 낯선 종이와 잉크를 발견했어. 누군가에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냈는지도 몰라. 그게 변경백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데보라는 한 번 더 그의 허벅지에 손을 댔지만, 못하게 하자 겨우 포기해 준 모양이다.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눕더니 느릿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가 아니야. 어쩌면 누군가가 감금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들통났는지 몰라."
"그러니까, 그래서 뭐냐구."
"뭐?"
"그 저택의 소유자는 2왕자잖아? 당신이나 내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라. 당신, 걱정이 지나쳐요."
"그런가?"
"그래, 안심해도 돼. 우리는 안전해요. 우리가 감금하고 있었던 것도, 우리가 만나고 있다는 사실도, 아는 사람은 없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이상하게 데보라가 말하면 다 그렇게 될 것 같다.
조금 안심하자 몸에서 힘이 약간 빠졌다. 축 늘어진다.
머리가 조금 몽롱하다.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래, 저택은 2왕자 소유고, 누군가가 감금한 거라고 알려져도....
아니 아니 아니, 기다려 봐.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 저택에 있는 하인은 자신이 부리는 사람이 아닌가.
게다가 데보라는 국왕을 감금할 때도 그 이후에도 지시만 할 뿐 일절 관여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직접 그 자리에 있었던 경우가 많았다.
국왕의 정신이 이상해져서 사람을 알아보거나 제대로 과거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는 해도, 어쩌면 문득 자신과 관련된 일을 말할지도 모른다.
완전히 안심해도 되는 것은 데보라뿐이다.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
비보 궁정백은 벌떡 일어났다.
데보라와 함께 있으면 이상해진다. 머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뭔가 이상해. 지금까지 그런 걸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자기, 왜 그래?"
데보라가 달콤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눈동자가 반짝 빛난다. 둘 사이에 있는 약간의 공간을 건너, 데보라의 달콤한 향기가 풍겨왔다.
"...데보라."
자기도 모르게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아아, 저 하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다. 잘록한 허리에 손을 얹고 붉은 입술을 빨면....
비보 궁정백은 깜짝 놀라 손을 보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묶인 것처럼 손이 앞으로 내밀어져 있었다. 데보라를 잡으려고 했던 것 같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나는 국왕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봐야겠어. 나중에 다시 오지."
비보 궁정백은 허둥지둥 몸을 돌리고 방에서 나왔다.
뒷머리가 당기는 것 같다. 조금만 방심하면 질질 끌려서 방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안 돼, 절대로 안 된다. 멀어지자. 저 여자에게서 멀어지자. 그녀는 위험해.
빠르게 걷는데, 콧속으로 익숙한 냄새가 들어왔다. 몸에 달콤한 그녀의 향기가 묻어 있다. 툭툭 몸을 털자 허공으로 향이 퍼지면서 다시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녀에게 돌아갈까.'
몸이 저절로 반대로 돌았다. 눈앞이 온통 그녀의 얼굴과 몸으로 가득해졌다.
아아, 나의 여신, 내 생명, 내 사랑.
그 뒤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데보라와 소파에서 알몸으로 뒹굴고 있었다.
아까 복도를 걷고 있었을 때는 분명 밤이었는데, 어느새 방에는 햇살이 들어오고 있다.
설마, 밤새도록 이러고 있었던 걸까.
몸속이 텅 빈 것처럼 허하다. 데보라의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허리도 무릎도 아프다.
풀썩 데보라 위에 엎어졌다.
데보라의 하얀 피부에 붉은 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코피가 난 것 같다.
"자기, 나는 아직 부족해요?"
데보라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체 뭐야, 나는 왜 이렇게 됐어?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저 기분이 좋다. 아, 정말 좋다.
"데보라, 데보라."
헛소리처럼 중얼거리자 그녀가 킥킥 웃었다.
몸속에서 뭔가가 쭉쭉 빨려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느 순간, 비보 궁정백은 정신을 잃었다.
의식이 암흑 속에 떨어지기 직전, 여러 해 전에 국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비보, 나는 가끔 두렵다. 그녀와 밤을 지내면 영혼과 생기가 모두 빠져나가는 것 같아.]
***
제국군은 순조롭게 행군하여 디코콰리아에 접어들었다.
카니아로 가는 길 중에서 가장 안전하고 빠른 행로는 디코콰리아의 남단을 지나는 것이다.
디코콰리아는 여전히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길가에 흩어져있던 시체는 어느새 모두 치워지고 밭에는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제국은 초여름에 추수하는 가을밀 재배하는 지역이 많지만, 이 세계에는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추수하는 밀 종자도 있다.
디코콰리아는 전쟁 때문에 가을밀 재배에 실패한 지역이 많다. 밭이 망가지거나 제때 파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지역은 기후가 맞는 경우 봄밀 종자를 구해 재배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사방이 잔디처럼 보일 뿐이지만 가을이 되면 이곳도 황금빛의 밀밭이 될 것이다.
디코콰리아의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시종장과 보리스의 부하들이 보내는 보고서가 도착해 있었다.
주로 카니아의 상황에 대한 것이다.
현재 카니아의 국왕은 피츠 변경백의 손에 있다고 한다.
보고서를 읽어보면 상황이 조금 복잡한 것 같다.
현재 카니아 왕국은 네 개의 파벌로 나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왕세자다. 왕을 일찍 퇴위시키고 자신이 왕이 되려고 나섰다고 한다.
두 번째는 2왕자인데, 최근 몇 년 동안 국왕의 총신이었던 비보 궁정백작과 한편이 되어 왕위를 노리고 있다.
세 번째는 국왕의 모습이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으면서 뭔가 의심을 품은 피츠 변경백작과 일부 귀족이다.
그들은 국왕이 암살되었다고 의심하고 병사를 일으킨 것 모양이었다.
하지만 충정에서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왕을 메고 실권을 잡으려는 속셈인 것으로 보였다.
피츠 변경백작은 비보 궁정백작과 사이가 매우 나쁘기 때문에 위기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고 보고서에 적혀 있었다.
네 번째는 변경백에 붙지 않은 일부 귀족들의 연합이다. 그들은 왕족을 한 명 내세워 왕위 탈취를 노렸다.
카니아에 쳐들어온 두 개의 나라는 실제로 전쟁을 벌일 작정을 하고 쳐들어온 에이나 왕국과, 국경지역을 슬금슬금 약탈하다 보니 어쩌다 카니아 변경에 발을 디디게 된 요크 왕국이다.
여러 개의 세력이 몇 년째 싸우면서 카니아의 밭은 망가지고, 징집으로 인해 일할 사람은 적어졌다. 당연히 식량이 모자라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다.
상황이 그 지경인데도 왕도에서는 여전히 무도회와 사냥 대회가 열리고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망조가 들었다.
루디는 보고서를 모두 읽은 뒤 마차에 고정되어 있는 책상에 놓았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달리 황제 전용의 마차가 행렬에 포함되어 있다. 상당히 커서, 마차 안에 침대와 테이블은 물론이요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작은 접대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루디는 자신의 앞에 앉은 레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데 레빈, 왜 그대가 그런 차림을 하고 있는 거야?"
레빈은 평민이 입는 것 같은 옷에 하프를 들고, 허리에는 뭔가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그가 들고 온 배낭에서 철 소리가 나는 걸 보면 냄비도 들어있는 것 같다.
레빈이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음유시인이에요. 전쟁터에서 의심받지 않고 다니기에는 음유시인이 딱이지요."
"아니, 그러니까 왜 그런 차림으로 다니느냐고."
"시종장의 명령입니다. 저는 지금부터 카니아의 왕도로 갈 거예요. 카니아 왕궁에서는 현재 피에로와 음유시인이 대목이라고 합니다. 다들 거기로 몰려가고 있어요. 저도 소개장을 들고 궁전에 들어갑니다."
"그러다 가짜라고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걱정스러운 마음에 루디가 얼굴을 찌푸리자, 레빈이 히죽 웃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폐하. 저는 실제로 음유시인입니다. 꽤 유명해요. 들어보셨나 모르겠는데, 노래하는 황금 카나리아가 바로 접니다."
"...."
진짜냐.
루디가 바라보자, 레빈이 어깨를 약간 떨구었다.
"황금 카나리아는 역시 이상하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리스 님이 밀어붙였어요. 그게 좋다고. 그분은 좋은 스승이고 좋은 전사지만, 작명 센스는 완전 구려요."
"레빈, 진짜 노래할 수 있는 거야?"
루디가 묻자 레빈이 어깨를 움찔했다.
"그럭저럭요. 아주 훌륭하지는 않은데 들어줄 만 한 정도예요."
"그런데 음유시인 같은 걸 해도 돼?"
"폐하가 잘 모르셔서 그러는데, 음유시인이라는 건 노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꿈을 판매하는 사람이죠."
들어보니, 레빈은 아름다운 용모를 이용해서 여성들과 사귀고 정보를 얻는다고 한다.
몰랐다. 저절로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런 일을 하게 하다니, 보리스와 시종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괜찮아?"
루디가 묻자, 레빈이 싱글싱글 웃었다.
"괜찮아요."
진심으로 괜찮은 걸까. 그런 걱정이 얼굴에 여전히 나타나 있었던 모양이다. 레빈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음유시인을 하기 전까지는 잘 몰랐는데요, 사실 저는 상당히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통통한 여자는 부드러워서 좋고, 마른 여자는 가녀려서 좋아요. 나이 든 여자는 푸근해서 좋고."
"그만. 됐어."
루디는 한숨을 쉬었다.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레빈이 그 일을 납득하고 있는 거면 됐어.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을 싫어하는 거면 얘기해 줘. 그대가 그런 일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루디가 말하자, 레빈이 히죽 웃었다.
"정말 괜찮아요, 폐하. 그리고 카니아 왕은 어쩌면 폐하가 도착할 무렵에는 죽고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카니아의 왕은 왕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감금되어 있었다.
제국의 첩자는 카니아 왕과 접촉해서 편지는 받아냈지만, 추가 조치는 하지 않았다.
첩자의 보고에 따르면 카니아 왕은 치매에 가까운 상태였던 것 같다. 말도, 행동도, 기억도 오락가락했다.
그 상태의 왕을 구출해 내는 것도 어렵지만, 애초에 그럴 의도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레빈이 상큼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카니아 왕이 살아있는 것보다는 죽는 게 오히려 제국에는 도움이 되니까요. 그가 도와달라고 했던 친필 편지가 있으면 사망했을 때 다른 자들을 추궁할 수 있는 근거가 생깁니다. 피츠 변경백 손에 있을 때 죽어주는 게 최선이죠."
레빈의 말은 맞다
만일 건강이 안 좋은 카니아 왕을 제국에서 데리고 있다가 덜컥 죽기라도 하면 이쪽에서 살해했다는 누명을 쓸 수도 있다.
카니아 왕은 단순히 제국이 내전에 참견할 구실일 뿐이니, 다른 사람의 품에 있을 때 죽어주는 것이 제국에게는 오히려 사정이 좋다.
하지만 레빈은 언제부터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사람이 된 걸까. 어릴 때의 심약하던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레빈은 몇 가지 카니아에 대한 보고를 한 뒤 마차에서 나갔다.
깊은 밤이다. 레빈의 뒷모습은 금세 어둠 속에 묻혔다.
완전히 혼자 다니는 것은 아닌지, 어둠 속에서 한 명이 레빈을 맞이하는 모습이 보였다.
외모는 평범했지만 비슷한 차림이다. 어쩌면 저 사람은 피에로를 하는 자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모습이 안 보이더니 저런 일을 하고 있었구나.'
레빈은 루디와 함께 황궁에 있게 된 이후부터 시종장과 보리스가 기른 거나 다름없다.
'그 두 사람, 어쩌면 누군가를 기르는 데에는 최악인 성격일지도....'
갑자기 제국의 황궁에 두고 온 리리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작 부인에게 맡길 수 있어 정말로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리샤가 여자아이라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