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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56화 (156/201)

#156 카니아 왕의 애첩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하던 기온이 슬슬 더운 바람을 품기 시작했다. 어느새 여름이 코앞이다.

제국은 전쟁 준비로 한창이었다.

지난 전쟁에서 사용하던 물건 중에서 상태가 나빠진 것은 다른 제품으로 대체하고, 수리가 가능한 건 관련 업자에게 맡겨 놓았다.

마차와 천막 수리부터 군마의 말굽 확인과 교체까지 다양하다.

병사들의 훈련도 강도를 높였다.

특히 마도병기를 사용할 수 있는 병사를 늘리는데 주력했다.

앞으로의 전쟁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칼과 창으로 찌르고 베는 게 아니라, 지구처럼 레이저 총과 불을 기초로 하는 박격포가 주가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국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여전히 칼과 창을 쓴다. 그 때문에 제국군 앞을 가로막는 군대는 한동안 없을 것이다.

제국에서는 전공을 따지는 방법도 달라진다.

이번 전쟁부터는 개개인이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 보다는 부대 별로 전공을 세우고 거기에 따른 보상을 받게 될 예정이었다.

관련 부서에서 그 기준을 마련하고 있다.

마도병기는 대량으로 구입해서 루디가 주문을 추가하고 있다.

예술적인 관점에서 마도구에 접근하는 코레아 가문들과 달리, 남작부인의 남편이 운영하는 공방은 마도구를 단순한 도구로 다룬다.

덕분에 물건을 만들어내는 속도가 빨랐다.

세렌 남작의 공방이 아니었다면 제국군이 마도병기를 그토록 빨리 손에 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렌 남작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남작 부인은 공방 장인들의 건강관리에까지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이다. 남작 부인에게는 이래저래 고개를 들 수 없다.

연무장에서 훈련하는 병사들을 한 번 둘러본 뒤, 루디는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책상에 앉자마자 시종장이 사각형의 은쟁반에 서신을 몇 통 담아 가지고 왔다. 히죽 웃으며 편지를 내려놓는다.

"또 참전 신청이 올라왔습니다. 곤란한 일이군요. 전쟁에 참가하겠다는 가문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루디는 시종장이 내민 편지를 하나하나 개봉해 본 뒤 한숨을 쉬었다.

"이들은 한참 먼 지방에 있는 가문이 아닌가. 그런 곳에서는 여기까지 병사들을 이끌고 오는 데만도 한참 걸릴 거야. 참전할 생각이었으면 조금 더 일찍 신청하던가. 정말 곤란한 사람들이군."

여름이 되면 다시 그레데와의 전쟁에 나설 거라는 사실은 대부분의 귀족들도 알고 있는 일이다.

그레데를 침공하는 일은 디코콰리아의 전쟁을 끝내기 전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루디는 징집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앞으로는 지금까지의 전쟁과는 양상이 다르다. 마도병기를 보유하고 있는 제국은 이제 병사의 수가 이전처럼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참전하겠다는 가문은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추장스럽기만 할 확률이 컸다.

그래서 이렇게 신청이 많이 와도 전혀 달갑지 않았다. 골치만 아프다.

시종장이 빙그레 웃었다.

"뒤늦게 위기감을 느낀 것이겠지요. 늦게 참전 신청한 가문들을 보면 하나같이 지난 전쟁에 인질을 내지 않은 곳뿐입니다. 그 때문에 마도병기에 대한 정보가 늦은 겁니다."

뒤늦게 서신을 보내는 자들은 규모가 작은 가문, 혹은 몇 해 동안 작물의 수확이 좋지 않아 인질역이었던 자제들의 참가를 면제해 준 가문이 대부분이다.

루디는 편지를 책상 귀퉁이에 있는 상자에 넣었다.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자들은 후속 부대에 넣도록 해. 나중에 보급부대가 출발할 때 함께 오도록 하면 되겠지. 하지만 자신들이 먹을 것과 사용할 물건은 확실하게 챙겨 오라는 편지를 작성해 줘. 그 정도의 준비도 없는 자는 참전을 금지한다고 하게."

참전하겠다는 가문들은 대부분 약탈을 염두에 둔 자들이다.

제국의 본대와 함께 이동하면 위험부담 거의 없이 약탈품을 획득할 수 있다.

그것을 노린 거다.

게다가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영지를 받을 수 있다는 계산도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겠다는 것인데, 심한 경우에는 가는 길목에서까지 약탈로 모든 걸 충당하려는 가문도 있을 수 있다.

루디는 그건 안 된다고 미리 못을 박으라고 말한 거다.

이번 전쟁에서 약탈을 금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자신들도 뭔가 부담해야 한다. 안 그래도 필요 없는 놈들을 억지로 받아주는 건데, 모든 걸 공짜로 먹겠다는 심보까지 용서해 줄 생각은 없었다.

모두 거절해버리면 차라리 편하겠지만, 정치라는 게 그렇게 쉽게 가지도 않는 법이다.

어차피 몇 개 나라를 더 지배하게 되면 그걸 다스릴 사람도 필요하다.

제국은 만성적인 관리 부족이니 여러 가문에게 땅덩어리를 나눠주고 세수를 받아 챙기는 게 더 속이 편할 수도 있다.

시종장이 편지가 든 상자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즉시 초안을 만들어두겠습니다."

관리가 각 가문에 보내는 편지의 초안을 작성하면 루디는 그걸 확인하고 서명만 하면 된다.

요즘은 여기저기 보내야 할 편지와 서류가 많아서, 황제의 서류작성을 전담하는 관리가 매일 밤을 새워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상자함 가득 들어있는 편지의 수만큼 작성할 것이 추가된다고 생각하면 조금 안 됐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황제도 거기에 지지 않을 만큼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 어쩔 수 없는 거야.

루디는 눈을 감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피곤해서 눈이 가물가물해졌다.

시종장이 따듯한 물수건을 가져와 눈에 얹었다. 희미하게 꽃향기가 났다.

"황후 마마가 말리신 꽃잎으로 향유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걸 한 방울 첨가했어요."

시종장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귓가에 울렸다.

"그래, 리리샤가."

"폐하께서 너무 피곤하신 게 아니냐며 걱정하고 계시더군요. 살롱에서 다른 부인들에게 향유 만드는 방법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피로를 푸는 데 효과적인 거라고 하더군요."

"요즘 살롱에 열심이더니 그런 걸 배우고 있었나."

루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리리샤는 요즘 살롱에서 부인들과 만나느라 매우 바쁘다.

상황후가 대리하던 황후의 공무도 시작했다.

그 첫 번째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바느질 도구나 원단을 제공하는 자선사업을 한다고 들었다.

황후가 하는 일은 황제와 조금 달라서, 대부분 같은 살롱의 부인들과 협력해서, 혹은 함께 하는 것이다.

자선 사업을 하는 게 가장 흔하고, 때로는 전쟁이나 나라가 혼란한 시기에 함께 기도를 하거나 어린 소녀에게 교양과 바느질을 가르치는 일도 있었다.

때로는 가난한 예술가를 후원하기도 한다.

이럴 때는 특히 살롱이 중요했다.

예술가는 대부분 남성이다. 잘못하면 후원이 불륜으로 발전하거나, 아무 관계도 아닌데 이상한 소문이 나는 경우도 있다.

살롱에 속해 있으면 그런 불미스러운 일을 나이 든 부인들이 방지하고 감시하는 역할도 해준다.

그녀들의 날개 아래에 있으면 황후도, 젊은 귀부인들도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평판 좋은 부인을 어느 살롱에서 가장 많이 끌어들이는가 하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모로즈 공작부인은 황후를 위해 그런 부인들을 뒤에서 교섭해왔다. 귀부인들은 남자들처럼 힘이 강한 사람에게 굴복하는 형태가 아니라서 상당히 오래 걸렸다.

"리리샤는, 황후는 잘 하고 있는가?"

루디가 묻자, 시종장이 눈에 덮은 물수건을 다른 걸로 바꾸면서 대답했다.

"예, 폐하. 매우 잘 해나가고 계십니다. 부인들 사이에서의 평판도 최고라고 하더군요. 살롱의 부인들이 여러모로 잘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이제 마음을 놓고 나갈 수 있겠어."

이번 전쟁은 그레데는 물론이고 카니아와 그곳을 침공한 두 나라에까지 이어질 것이다.

상당히 오랫동안 나가있게 된다.

그 기간 동안 리리샤에게 든든한 아군이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놓였다.

여자들의 세계만큼은 루디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부분이니까.

"계약서는 제대로 수정되었다고 합니다."

2황자가 황위 계승권을 포기한다는 각서 얘기다.

루디는 쓴웃음을 지었다.

상황후는 어디에서 그런 걸 구했는지, 2황자가 계약서에 사인할 때 글자 일부가 사라지는 잉크를 사용하게 했다.

분명히 처음에는 제대로 서명이 되어 있었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서명의 뒷부분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상황후께서는 이번 일이 폐하의 온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종장이 한숨처럼 말했다.

"글쎄, 지금은 모를지라도 나중에는 아시겠지. 그다지 미련한 성품은 아니라고 들었으니."

아마 상황후는 훗날 루디가 전쟁에서 죽거나 후계자를 만들지 못할 때를 대비해 계약서를 조작했을 것이다.

어쩌면 나중에 모국의 병사를 끌어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상황제가 죽음을 앞두고 당부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모른 체 했을 것이다. 그대로 놔둔 채 일이 더욱 커진 뒤 터트리는 것이 효과적이다.

상황제는 아내의 성품을 정말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상황까지 가기 전에 미리 발견하고 멈춰 달라고 부탁을 한 걸 보면, 상황제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시종장, 나중에 상황후께 그 일을 말해 줘. 상황제께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걱정하고 부탁했었다는 거. 그러면 다시는 뭔가 벌일 생각은 하지 않겠지."

"...."

상황제 일을 떠올렸는지, 잠시 동안 시종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중에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 시종장의 목소리는 약간 잠겨 있었다.

루디는 몸을 일으키면서 모르는 척 화제를 옮겼다.

"카니아의 사정은 좀 알아봤나?"

"예, 첩자들의 보고를 받아 취합하다 재미있는 일을 발견했습니다. 그 나라에도 마녀가 있는 것 같더군요."

"찾을 때는 그렇게 안 보이더니 어디에서 그렇게 쏟아져 나오는 거야?"

마녀가 한 마리 발견하면 그 뒤에 수십수백 마리가 있다는 바퀴벌레도 아니고, 갑자기 왜 이렇게 여기저기에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시종장이 유쾌하게 웃는다.

"카니아에 있는 마녀는 왕의 애첩인 것 같습니다. 왕은 모르고 있는 것 같더군요. 저희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그레데에서 서쪽마녀의 약을 구한 루트를 파고 들어가다 보니 뜻밖에 카니아 왕의 애첩이 나왔어요."

어떤 마녀인지는 아직 모른다.

첩자들이 조사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 마녀는 마력을 차단할 수 있는 건가.'

약을 이용하는 것 같으니 모르는 사이에 루디가 당한다는 일은 없을 거다. 그의 몸에는 해독 주문이 적혀 있다. 약 종류라고 하면 아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서쪽마녀에게는 물어봤나?"

루디의 물음에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예, 하지만 마녀도 서로 아는 경우가 거의 없다더군요. 그저 소문으로만 아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합니다. 마녀는 아무래도 폐쇄적인 사람이 많으니까요."

게다가 서쪽마녀가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마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렇게 마녀가 두 명이나 한꺼번에 튀어나오는 경우가 특수한 케이스다.

'한데 마녀가 왜 왕의 애첩을 하고 있는 거지?'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봄이 끝나가는 시기가 되자, 제국군은 카니아로 출발했다.

수확을 앞둔 밀이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다.

수많은 병사들이 그 옆을 지나갔다.

제국의 주요 가문이 거의 참가한 대규모의 군대가 행군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밭에서 일하던 농민과 도시와 도시를 이동하는 행상, 여행객들이 군대를 향해 손을 흔들고, 때로는 아이들이 병사들 뒤를 따라 뛰었다.

전쟁이 코앞이라는데 평화로운 광경이다.

루디는 그런 백성의 모습을 보면서 나라 안은 결코 전쟁터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재차 다짐했다.

이겨도 져도 전쟁터가 되는 땅은 피에 물들고 피폐해진다.

가장 최악의 군주는 악정을 펼치는 황제도, 사치하는 황제도 아닌, 제 나라를 전쟁터로 만드는 황제라던 상황제의 말이 가슴속에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밤이 되면 수많은 천막이 땅을 뒤엎을 듯 세워지고, 곳곳에 횃불과 불 마도구가 켜졌다.

식사를 마친 병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는 시간이 되자,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명이 따라 부르고, 다시 한 명이 그 노래에 목소리를 합쳤다.

수확할 때 농민이 부르는 노래가 병사들 사이에서 울려 퍼졌다.

제국의 본대에서 울려 퍼진 노래는 밤공기를 타고 멀리 떨어진 장소에 자리한 영주군 진지까지 들렸다.

영주군에는 농민 출신의 병사들이 많다.

수확기의 노래는 영주군에서도 이내 조금씩 울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몇 명으로 시작한 노래는 이내 전체로 퍼졌다.

달빛이 머무는 밀밭에 병사들의 노래가 울리자, 고개 숙인 밀이 합창하듯 바람에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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