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다르구나.
서쪽마녀는 정원에 놓인 의자에 앉아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장미라는 것은 아마 아름다운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지만, 잘 모르겠다.
자신의 시야에 비치는 것은 실제 장미가 아니기 때문에.
까마귀가 보는 세상은 인간과 약간 달라, 종종 왜곡되어 있다.
그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서쪽마녀 역시 당연히 왜곡된 세상을 접했다.
'이상해.'
얼룩덜룩 색이 뒤엉켜 있는 꽃잎 속에는 기괴해 보이는 입이 달려 있다. 장미의 이파리에는 작고 뾰족한 손발이 달려서 건물을 붙잡고 있었다.
장미는 지구에서나 이 세계에서나 그저 식물이다. 이빨과 손발이 달려있을 리 없었다.
시선을 옮기면, 궁전을 타고 올라간 장미 사이사이에 까마귀가 앉아 있다.
까마귀의 숫자는 그 사이 많이 늘어나 있었다. 궁전 앞 정원 앞은 물론 건물까지 새까말 정도였다.
루디의 마력 때문이다.
마도구와 마생물에 가득 담긴 황제의 마력은 황궁 전체에 조금씩 안개처럼 흩어져 있었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까마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본래 그녀가 가지고 있는 까마귀는 루디가 만든 것이다. 죽어가는 새에게 루디가 자신의 마력을 주입하여 살린 뒤 그 몸에 주문을 그려넣었다.
그래서 까마귀의 실제 주인은 서쪽마녀가 아닌 황제였다.
비록 주문에 루디 자신이 아닌 서쪽마녀의 명령을 따르라 적혀 있어도 어디까지나 주인은 그 사람이다.
그 때문에 그의 마력이 가득한 이곳은 까마귀에게 엄마 품처럼 포근하고 기분 좋은 장소였다.
까마귀 모두가 행복하고 기뻐한다.
그들의 힘도 예전에 없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그리고 요구한다.
더, 더, 더, 주인의 마음을 이곳으로.
너무 오랫동안 서로 마음을 교환해온 터라, 어느 것이 진정 자신의 바람이고 어디까지가 까마귀의 소망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서쪽마녀와 까마귀는 그저 한마음이 되어 강하게 바랐다.
그 사람의 마음, 그 사람의 관심, 그 사람의 사랑을 이곳으로...여기에 머물도록....
까마귀가 까악, 하고 울었다.
보고 있는 풍경이 변했다.
서쪽마녀는 자신의 시야에 비치는 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황제와 황후가 머리를 맞댄 채 자고 있다.
까마귀는 창문의 작은 틈새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이 정도 봤으면 됐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허공에서 불쑥 빛나는 새의 모습이 나타나더니 까마귀는 속절없이 바닥으로 추락해버렸다.
건물이 높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방의 풍경이 순식간에 하늘로 바뀌더니 까마귀는 벌렁 바닥에 떨어져 누웠다.
전기 충격이 가해진 것 같다. 움직이지 못한다. 어쩌면 몸의 일부분이 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살아있었다.
잠시는 움직이지 못하겠지만 황제의 마력이 있으면 괜찮다. 마력에 휩싸여 있으면 어느새 몸의 상처는 아물고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죽이려고 하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텐데, 황제의 마생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마생물은 적대적이지는 않다. 마녀와 까마귀를 반기는 것은 아니지만 몰아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서쪽마녀와 까마귀들의 모습을 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황후에게 다가서는 기미가 보이면 분위기가 변했다. 삐죽삐죽한 가시를 내밀듯 예민하게 반응했다.
마생물은 주인의 마음에 민감한 존재다.
그들의 행동을 보면 주인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
황제가 의식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 소녀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마생물의 반응을 보면 아마 그럴 것이다.
가족으로인지 여자로서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사람은 이미 상대를 선택했다.
'나는 또다시 늦었구나.'
심장이 차가운 호수 저 깊은 곳으로 잠기는 것 같다. 끝없는 바닥, 진흙 밑에 가라앉았다.
서쪽마녀는 길게 숨을 쉬었다.
까마귀 몇 마리가 까악, 하고 울며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왔다. 위로하듯 자신의 몸에 깃드는 새를 더듬거려 쓰다듬은 뒤 중얼거렸다.
"괜찮아.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그 사람 곁에 있을 수 있으니."
굳이 소원이 있다면 하룻밤의 정이라도 받고 싶다는 것일까. 조금 더 욕심내는 것이 허락되는 경우엔 그 사람의 아이를 낳아보고 싶다.
'그 사람을 꼭 닮은 아이가 있다면 수많은 밤의 외로움도, 황후와 행복한 모습도 얼마든지 참을 수 있을 텐데.'
중학생 때 이 세계로 왔을 때와는 달리, 지금의 그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 다시 건너왔다. 어쩌면 조금은 변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불쌍히 여겨 조금쯤은 품에 넣어주지 않을까.
할 일 없는 장미궁에서 그런 생각만 계속했다.
한숨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까마귀들이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
그 뒤로 여러 날이 지나갔다. 아직 봄이지만 어느새 한낮은 여름처럼 더워졌다.
황제는 축승 연회 이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대신 까마귀를 통해 황제의 모습을 보았다. 항상 바쁜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황후와는 날마다 만나는 것 같다. 밤에도 함께 있는 것 같은데 낮에도 따로 만났다.
심장 한구석이 쿡쿡 쑤셨다.
황제가 황후와 만나는 시간이 되면 까마귀를 통해 보는 걸 잠시 멈추게 되었다.
그녀를 담당한 사무관이 새로운 소식을 가져왔다.
여름이 되면 황제는 군대를 이끌고 카니아로 간다. 거기에 마녀도 동행하라는 명령이었다. 제국에 온 뒤 가장 기쁜 소식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상황후가 그녀를 다과회에 초대했다는 말을 들었다.
만나고 안 만나고는 그녀가 결정하면 된다고 했다.
상황후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는 사무관이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황후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공식행사에 황제의 파트너로 나왔다고 한다. 내막이야 모르지만 현 황제에게는 나름대로 중요한 사람인 것 같다.
'그렇다면....'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자란다. 조금이라도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서쪽마녀는 사무관의 안내를 받아 상황후가 머무는 궁으로 향했다.
조금 긴장했다. 사람을 대하는 것은 서툴다. 황제와 연관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다. 적어도 나쁜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
보통 사람은 그녀의 까마귀를 두려워한다. 없는 편이 나을 것이다.
자신을 따라오려는 까마귀 떼를 장미궁에 남도록 한 뒤, 항상 같이 다니는 한 마리만을 어깨에 태우고 갔다.
지붕 없는 마차를 타고 한동안 달린 뒤 상황후의 궁에 도착했다.
상황후와 둘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여자들이 여러 명 있었다.
그중에는 황후도 있었다.
서쪽마녀는 곧바로 무릎을 접고 고개를 숙였다.
시조는, 아니 황제는 이 여자를 소중히 여긴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싫어도 좋아도, 그 남자의 소중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황후 마마."
"축승 연회 때 보고 처음이군요. 다시 보게 되어 반가워요."
황후가 조용히 말하며 미소 지었다.
까마귀가 바라보는 황후는 아름답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이 투영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눈이 쭉 찢어지고 코가 비뚤어졌다.
황후는 아름답다고 들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은 잘못된 영상일 것이다.
비뚤어진 건 자신의 마음인가, 아니면 까마귀의 마음인가. 어쩌면 둘 다일 거다.
서쪽마녀의 자리는 상황후의 옆이었다.
반대쪽에는 황후가 앉았다.
모인 사람은 모두 어리고 아름다운 여성뿐이었다.
아마 그럴 것이다. 까마귀가 볼 때는 어떤지 몰라도, 서쪽마녀의 느낌으로는 그랬다.
별 의미 없는 대화가 잠시 이어졌다. 마녀의 약과 저주, 사랑의 묘약 같은 화제가 대부분이었다.
누군가가 저주로 남자의 마음을 훔치는 방법이 있는지 물었다.
그런 것이 있었다면 자신이 가장 먼저 사용했을 것이다. 쓴웃음이 나왔다.
없다고 대답하자, 여자들이 실망했다.
이상한 것은 황후까지 안타까워했다는 점이다. 설마 그녀에게는 마음속에 다른 남자가 있는 걸까. 약간 의아해졌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오간 뒤, 상황후가 말했다.
"서쪽마녀 그대가 황제와 함께 카니아로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부탁하고 싶은 일을 생각했지요."
어째서일까.
지금까지 모습도 보이지 않던 마생물이 찌릿한 공기를 풍기며 이쪽에 주의를 기울였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까마귀한테는 느껴진다.
까마귀가 아는 것은 서쪽마녀에게도 은연중 전해졌다. 피부가 저릿할 정도로 마생물의 기운이 강한 것 같았다.
평범한 인간은 모른다. 마생물을 마지막까지 화나게 만든 뒤 죽음이 닥쳐와야만 겨우 알 것이다. 어쩌면 그나마도 모르고 죽을 수도 있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상황후가 말했다.
"이번 전쟁은 몇 년이나 이어질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아직 어린 황제가 매우 걱정입니다. 여자 손길이 필요한 부분도 있을 텐데, 전쟁터에서 수상한 여자의 시중을 받게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아, 그런 것. 아마 밤의 시중을 말하는 걸 거다.
서쪽마녀는 상황후가 하려는 말을 대강 눈치챘다. 하지만 그런 말을 이런 자리에서 해도 되는 걸까. 황후도, 귀족 아가씨도 있는 자리인데.
귀족 여성은 고상한 대화만을 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다.
오히려 서쪽마녀 자신의 얼굴이 붉어졌다.
상황후가 그런 자신을 보고 웃는 것 같다.
황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대화의 의미를 모르는 것일까 싶을 만큼 조용하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마생물들의 기운은 더욱 나빠졌다.
어쩌면 황후의 기분이 아까부터 안 좋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마생물은 주인의 마음에 영향을 받는다. 진짜 주인은 황제라 해도 그가 황후를 지키라 명령했으면 당연히 그녀의 기분에 민감할 것이다.
마생물 때문에 까마귀도 긴장한 것 같다. 발에 힘이 실렸다. 어깨가 약간 아팠다.
"서쪽마녀 그대가."
상황후가 뭔가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마생물이 소란스러워졌다. 공기의 흐름이 달라진 것 같다.
어깨 위의 까마귀도 날개를 조금 푸드득거리며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던 황후가 벌떡 일어났다.
까마귀가 보고 있는 황후의 인상이 조금 바뀌었다. 웃고 있는 걸까. 피에로의 얼굴에 그러진 것처럼 황후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있었다.
"폐하."
황후의 말과 함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황제였다.
시종 몇 명을 거느리고 황제가 와 있었다.
황후가 몸을 가라앉혀 절을 하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여성들이 일어났다. 당황한 여자들이 서둘러 몸을 숙였다.
서쪽마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보는 황제의 모습이다. 기쁜 마음에 얼굴이 제멋대로 혼자 웃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온 황제는 자신을 보지 않았다.
한 번 힐끗도 않는다. 환하게 웃으며 황제가 황후에게 손을 내밀었다.
"황후."
황제의 부름에 황후가 작은 손을 내밀자, 두 손으로 감싸며 입가에 가져가 키스를 했다. 다른 여자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서글픔이 밀려왔다. 자신의 심장이 가늘게 떨며 울었다.
까마귀의 머리가 약간 처졌다. 서쪽마녀의 마음에 동조한 것 같다.
황제가 황후의 손을 잡은 채 상황후에게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그래요. 황제께서도 평안하셨는지."
"덕분에 무탈하였습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한 것처럼 보였다.
상황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황제, 이번 전쟁은 오래 걸린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황제가 걱정이에요. 그런 전장에서는 시중 들 사람도 변변찮을 겁니다."
상황후의 말이 진행되면서 주변의 마생물이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적의를 드러냈다.
서쪽마녀는 숨을 들이켰다. 마생물 때문에 까마귀가 느끼는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화가 났어.'
상황후는 모르는 걸까. 황제가 화를 내고 있다. 그 마음에 동조한 마생물의 몸에서 미세한 전기가 흘러나와 피부가 저릿저릿 해졌다.
"마침 서쪽마녀가 동행한다고 하여 내 부탁을 하고 있었지요. 황제의 신변을."
상황후가 문득 말을 멈췄다.
황제가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갖다 댄 것 같다.
공기가 저릿저릿한 에너지로 차 있어서 까마귀의 시야가 조금 가려져 있다.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황제가 입을 열었다.
"상황후 마마, 얼마 전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백작가에 들어간 누군가가 교묘하게 계약서에 서명을 틀리게 했다고 하더군요. 계승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상당한 수익이 나오는 영지까지 수여했는데 말입니다."
"...그런 일이...었었습니까."
"상황후께서는 아마 모르실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계약서의 서명을 지금이라도 제대로 고쳐놓는 게 좋을 겁니다. 카니아로 출발하기 전에 관리들이 다시 확인할 예정이니까요."
"...."
황제의 상냥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황후는 이만 데려갑니다. 오늘의 차 시간이 조금 당겨져서요. 그리고, 앞으로 황후는 이 다과회에 참여가 어려울 겁니다. 황후의 살롱이 열리니까요."
"어, 루, 아니 폐하. 황후의 살롱이라니, 누가 주최하는 건가요?"
황후도 몰랐는지 깜짝 놀란 목소리였다.
"물론 황후가 주최하는 거지. 모로즈 공작 부인이 그대를 도와줄 겁니다. 그녀는 이전에 황태자비였기 때문에 친분 있는 부인이 많지요. 황후 그대의 살롱을 열기 위해서 계속 준비를 해주고 있었어요."
상황후가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 자리를 떠나기 전, 황제가 문득 서쪽마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없이 몸을 돌렸다.
아, 그렇구나.
서쪽마녀는 그제야 이 자리가 상황후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경고를 보내는 장소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생물이 적대감을 표출한 건 상황후가 아니라 자신에게였다.
이리저리 까마귀를 보내 황후의 소문을 듣고, 가끔은 혼자 있는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았다는 사실을 황제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알고 있었을 거다.
특별히 해를 끼치기 위해서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황제의 사랑을 받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을 뿐이다.
'위협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서쪽마녀는 힘없이 장미궁으로 돌아갔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계승권을 포기하고 백작가에 들어간 사람이 황후의 둘째 아들이라는 사실을 사무관이 알려주었다.
날이 저물 때까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시조는 그녀에게 이토록 냉정한 처사를 한 적이 없었다. 항상 따뜻했다. 혹시 그녀가 실수하거나 독점욕을 보여도 허허 웃으며 넘어갔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다르구나.'
황제가 너그럽게 봐주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황후다. 그 사실이 서쪽마녀의 심장에 커다란 못을 꽝꽝 박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