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황제가 마음을 놓는 장소
루디가 조금 무섭다.
루디는 벗어나려는 리리샤의 몸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더듬었다.
집무실 안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아무도 루디의 행동을 말리지 못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리리샤의 시녀들만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치고 있었다.
"...."
황제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어떤 행동을 할지라도, 아무도 간섭할 수 없다.
이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가장 커다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절대자.
황제라는 단어가 뜻하는 의미를, 리리샤는 이제야 진실로 알게 된 것 같다.
"루, 무서워."
리리샤가 떨면서 그렇게 말하자, 약간 심술궂은 눈으로 루디가 그녀를 보았다.
그 눈동자 안쪽을 보고, 리리샤는 그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왠지 모르지만 조금 심술궂을 뿐이다. 그것도 일부러.
조금 안심되고 조금 화가 났다.
"루!"
탓하는 것처럼 입술을 삐죽하자, 루디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내가 이전에 말했을 텐데? 딱딱한 코르셋은 하지 말라고."
뭐야, 겨우 그것 때문에 화가 난 거였어?
진짜 안심했다.
주변 사람들도 마음을 놓은 것 같다. 여기저기서 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느슨해져서인지 허리에서 힘이 빠졌다.
주저앉으려는 리리샤를, 루디가 가볍게 팔을 허리에 둘러 잡았다.
"이렇게 얼굴은 하얗게 되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거지? 리리샤, 이런 걸 껴입으면 피도 제대로 안 통해. 정말 건강에 안 좋은 거야."
단순히 루는 자신을 걱정했던 것뿐인 모양이다.
정말, 그런 거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라구.
입이 부루퉁 튀어나왔다.
"하지만 루, 딱딱한 코르셋을 하지 말라고 말한 건 어릴 때였어요. 지금 리리샤는 다 큰 어른이라구. 여자가 코르셋을 하지 않고 드레스를 입는 건 잠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야. 성인 여자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일이에요."
거짓말이 아니다.
코르셋을 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속옷을 입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어떤 여자도 그런 식으로 옷을 입지 않는다. 부끄러운 행동인 거야.
물론 마녀는 코르셋은커녕 옷도 이상한 걸 입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특별한 경우였다. 마녀이기 때문인 거다. 마녀는 원래 이상한 사람들이니까.
보통 여자는 그런 차림으로는 다닐 수 없다.
그렇게 설명하자, 루디는 약간 어려운 표정을 했다. 뭔가 굉장히 어려운 표정이다.
루디가 그렇다면, 이라며 말을 꺼냈다.
***
아직 몸이 더 자라야 하는데, 물론 다 큰 성인에게도 이런 딱딱한 코르셋은 좋지 않지만, 어쨌든 아이한테 이런 걸 입히면 변변한 일이 되지 않는다.
'좋아하는 과자조차 입에 넣지 못할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몸을 조이고 있는 건지.'
루디는 리리샤의 눈을 보고 말했다.
"어릴 때 내 무릎에 앉는 걸 좋아했지? 만일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코르셋을 입으면 차 마시는 시간마다 매번 무릎에 앉혀줄게."
리리샤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입술이 조금 벌어지더니, 침을 꿀꺽 삼키며 다물어졌다. 입술 끄트머리가 살짝 올라간다.
"황후, 어때요, 내 제안이?"
루디가 웃으며 말하자, 리리샤는 대답하는 대신 그의 팔을 살짝 밀었다.
루디가 허리를 놓자, 리리샤가 새침한 표정으로 똑바로 섰다.
톡톡 손가락으로 옷을 털어 차림새를 바로 하더니 살짝 무릎을 굽혔다.
"폐하, 소첩은 급한 일이 생겨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시종장, 미안하지만 나 대신 찻잔을 치워줘요."
"예, 마마."
시종장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리리샤는 몸을 돌렸다.
미끄러지듯 집무실 바닥을 걸어간다.
"황후궁으로 돌아갑시다."
리리샤의 말에 시녀들이 차 수레를 한 번 보았지만 재빨리 그녀의 뒤를 따랐다.
조용히 시녀를 데리고 집무실 문을 통과하자마자, 리리샤가 빠르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빠숑 부인을 불러! 빨리! 다른 일을 모두 제치고 오라고 해요. 내일 아침 일찍 만나야겠어."
"예, 마마!"
"하지만 일정을 잡으려면 최소한 일주일은 필요해요."
"예약 따위, 황후의 권력으로 밀어붙여. 빠숑 부인이 지금 필요하다구."
"네, 마마."
허둥지둥 달려가는 모양이다. 리리샤와 시녀들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시종장이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빠숑 부인은 황후 마마의 재단사입니다."
루디는 한숨을 쉬고 시종장을 보았다.
"최대한 빨리 만들 수 있게 시종장이 손을 좀 쓰게. 나는 황후 몸에 있는 생선뼈 코르셋을 지금 당장이라도 모두 빼앗아 바다에 갖다 버리고 싶어."
"알겠습니다, 폐하."
시종장이 빙긋 웃었다.
차 수레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치우는 건 보지도 못한 것 같은데 언제 어디에서 시종이 나와 가져갔는지 모르겠다.
잠시 소란스러웠던 집무실은 다시 평상시의 분위기로 돌아갔다.
아, 근데 저렇게 황후궁으로 돌아가도 저녁이 되면 만나는 거야.
축승 연회가 있었던 날 리리샤가 한밤에 침실로 쳐들어왔다.
하지만 일이 밀려서 황제궁에는 요새 아침 일찍부터 관리들이 찾아온다. 그런 곳에 리리샤를 재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오지 말라고 한들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시종장이 한 패다.
어쩔 수 없이 그날부터 루디는 황후궁에서 자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상한 건 하지 않는다. 그냥 팔베개만 해주고 조용히 잔다.
아, 그전에 리리샤가 입술에 뽀뽀를 해주는구나.
키스가 아니다. 아이가 아빠에게 하는 것과 똑같은 뽀뽀다.
그게 남녀의 관계라고, 리리샤는 아직도 믿고 있었다.
"...."
몇 번이나 사실을 말해주려고 했다. 노력은 했어.
하지만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리리샤를 보면 자기도 모르게 다른 말을 하게 된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다.
리리샤가 자신이 진짜 어른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주변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다.
후계자가 빨리 생겼으면 좋겠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 모르는 사람은 황제와 황후가 이미 밤을 함께 지낸다고 생각하니까.
진실을 알고 있는 건 루디와 시종, 시녀들뿐이었다.
'이러다 리리샤가 불임이라는 말이 나오면 어쩌려고. 남작 부인도, 시종장도, 원망할 거야.'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
리리샤가 다시 집무실에 온 건 삼 일 뒤였다.
전보다 약간 가슴이 줄어들었다. 허리둘레는 조금 늘어난 것 같다.
무엇보다 뺨이 복숭아처럼 불그스레했다.
예전과 같다. 건강하게 뛰어다니던 어릴 때와 비슷해 보였다. 이전에 봤을 때처럼 하얗게 질려있지 않아 마음이 놓였다.
반면에 차 수레를 끌고 온 시녀들의 얼굴은 핼쑥해져 있었다. 몇 년은 잠을 못 잔 듯 눈이 푹 꺼졌다.
시종장이 살짝 루디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며칠 동안 빠숑 부인이 황후궁 객실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동안 시제품 만드는데 시녀들도 동원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을 겁니다."
시종장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황후 마마가 자신의 권력에 의지해 일을 처리하는 일은 좀처럼 없습니다. 아마 그것이 처음이었을 테지요. 황후라는 자리의 힘을 사용해 빠숑 부인을 붙잡아 두셨어요. 오늘을 굉장히 기다리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압력 주지 마라, 시종장. 그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무릎에 올려주기로 한 약속은 잊지 않았으니까.
루디는 쓰게 웃었다.
시종장이 집무실 안쪽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일하다 지치거나 은밀한 대화가 필요할 때 가끔 사용하는 방이다. 방에는 침대로 사용할 수 있는 소파와 테이블 등이 놓여 있었다.
"오늘은 이쪽 방을 사용하십시오."
시종장의 말에, 시녀들의 피곤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집무실에서 황후가 황제 무릎에 올라탄다고 생각하면 착잡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아 기쁜 것처럼 보였다.
차 수레가 안쪽으로 들어가고, 찻잔 세트가 바쁘게 놓였다.
오늘은 과자뿐 아니라 달콤한 과일 절임도 있다. 양도 조금 많아졌다. 리리샤의 몫까지 있는 것 같다. 좋은 일이다.
두꺼운 천 가방에 싸인 주전자를 수레에서 테이블 위에 옮겨놓고, 시녀들이 무릎을 살짝 굽혔다.
"저희들은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시종장과 시녀들이 나가자, 방에는 루디와 리리샤 둘만 남았다.
리리샤가 차를 잔에 따른 뒤, 반짝반짝 빛나는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 한 번 들어보세요."
다른 의자도 있었지만, 나가기 전 시종장이 구석으로 치워버렸다. 지금 앉을 곳은 소파뿐이었다.
루디가 소파에 앉아 찻잔을 들자, 리리샤가 힐끔 그를 보고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힐끔 보았다.
모른 척 한 모금 마시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묻는다.
"폐하, 맛이 어떠신가요?"
"항상 그렇지만, 정말 맛있어. 리리샤도 조금 마셔보지?"
리리샤는 차 대신 과자를 집어 들더니 한 입 베어 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힐끔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꼭 호기심 많은 다람쥐 같다.
"자, 이리로."
루디가 찻잔을 놓고 무릎을 톡톡 치자, 손에 든 과자를 입에 구겨 넣고 리리샤가 냉큼 올라와 앉았다.
와브작 와브작, 과자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꿀꺽 목으로 넘어가는 움직임도 몸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확실히 뼈는 없다. 천 치고는 약간 딱딱한 것 같지만 천으로 된 코르셋인 것 같았다.
활짝 펴진 드레스 부분에도 딱딱한 것은 없었다. 본래는 이 치마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훌라후프처럼 둥근 형태의 뼈대가 붙어 있지만, 지금 입고 있는 건 천으로 된 것이다.
리리샤가 몸을 움츠리고 후후, 웃더니 루디의 가슴에 가만히 귀를 댔다.
조용히 시간이 흐른다.
너무 가만있는 것 같아 살짝 얼굴을 확인하자 잠이 들어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집무실 문이 살짝 열렸다.
리리샤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시종장이 조용히 문을 닫았다.
'뭐, 나도 며칠 동안은 피곤했고, 잠시 눈을 붙일까.'
리리샤를 안은 채 루디도 눈을 감았다.
***
"황후 마마는 주무십니다. 잠시 황제 폐하를 쉬게 해드립시다."
시종장이 문을 닫고 시녀와 관리들에게 말하자, 다들 싱글싱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시녀들이 기뻐했다. 뭐, 기쁘기도 할 것이다.
황후가 저리도 황제를 좋아하니,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보면 시녀들의 마음이 즐거울 만도 하겠지.
'나 역시 별로 다를 것은 없지만.'
황제에게는 마음 놓을 곳이 한 군데는 필요하다.
그것이 반드시 사람일 필요는 없다. 동물이어도, 취미여도 괜찮다. 그저 황제 자신이 편하게 그 옆에서 마음을 쉴 수 있으면 된다.
전 황제에게는 그것이 시종장인 자신과 보리스였다.
하지만 지금의 황제에게 자신이나 보리스는 그런 존재가 되지 못한다.
마생물은 어쩌면 그런 게 가능할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바로는 아니었다.
현 황제 루디가 제일 자신다워질 수 있는 장소, 마음을 허락하고 편히 민낯을 보여도 되는 곳.
현재 거기에 가장 가까운 것은 어리고 미숙한 황후였다.
시종장은 루디가 잠이 들 무렵을 가늠해 살짝 방문을 열었다.
생각한 대로 황제 역시 잠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머리를 기댄 채 차분한 숨소리를 내고 있다.
깨어 있을 때는 나이보다 성숙해 보이는 루디의 얼굴이 상당히 어려 보였다.
시종장은 얇은 이불을 황제와 황후의 몸에 살며시 걸쳐준 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깨어있을 때처럼 고운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루디와 달리, 리리샤 황후는 입을 약간 벌린 채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불을 걷어차고 자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마마의 침을 닦아 주는 게 나으려나.'
시종장은 잠시 망설였지만, 그렇게 하면 황제가 깰 가능성이 있었다.
황제는 보리스에게 훈련을 받은 탓에 잠귀가 밝다.
지금은 안전한 장소라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근처에 있어도 깨지 않지만, 황후 몸에 손을 대면 일어날 것이다.
시종장은 몸을 돌리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별다를 것도 없는 황후다.
재치나 기량이 뛰어난 것도, 성품이나 출신 가문이 월등히 좋은 것도 아니었다.
외모는 아름답지만, 찾아보면 더 아름다운 여자도 이 세상에는 많다.
제국의 황제쯤 되면 나디아그라나 리리샤만큼 아름다운 여성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굳이 스스로 찾을 필요도 없다. 가만있어도 여러 나라에서 알아서 내민다.
전 황제가 나디아그라를 좋아했던 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예전에 가지지 못했던 첫사랑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외모로만 따지면 서쪽마녀가 더 아름답다. 거기에 요염하고 능력까지 출중하니, 황후로서는 어떨지 몰라도 여성으로는 현 황후보다 나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황제가 원하는 것은 리리샤 황후 한 명이다.
다른 여자가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황실 복도를 뛰어다니는 미숙한 황후를 원한다.
제국의 황제가 그녀 앞에서만 진심으로 웃을 수 있다면, 현재 제국에서 리리샤 황후보다 소중한 보물은 없을 것이다.
'조금 더 많은 것들이 폐하의 마음을 편하게 하면 좋으련만.'
시종장은 우두커니 서서 닫혀있는 문을 보았다.
길게 잠을 자지 못하는 황제로서는 드물게, 작은방에서의 수면은 길었다. 몇 시간이 되어도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
그날 저녁, 카니아의 첩자 중 한 명이 급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첩자는 카니아 국왕의 친필 서신을 지니고 있었다.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자신이 감금되어 있으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라는 사실, 그리고 현명하고 자비로운 제국의 황제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제국은 카니아의 내전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